순교자. 세례명은 요한. 李如眞으로 표기한 곳도 있다. 양반 출신으로 1790년대 초에 사촌 신태보(申太甫, 베드로)와 함께 입교하였는데, 당시 그는 서울에서 140리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태보와 함께 그를 만나 보기를 간절히 원하여 140리나 떨어진 서울을 7~8번이나 내왕하였으나 매번 허사였다. 그는 주문모 신부를 만나 볼 좋은 기회를 더 쉽게 잡기 위하여 가족을 버리고 서울에 와서 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를 만나지 못하고 낙심한 가운데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05년 조(趙)숙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하지만 다행히 신태보가 관헌을 매수하여 곧 석방되었다. 옥에서 놓여 나오기 전에 그는 조숙을 용서하고 순교할 용기도 그의 마음속에 불어넣어 주었다.
오래지 않아 그는 교우들을 위하여 중요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신태보 · 홍낙민(洪樂敏, 루가)의 아들 홍우송 ·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 · 한 토마스 · 권기인(요한) · 권노방 등과 더불어 신유박해로 폐허가 된 교회 재건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은 북경교구와의 연락을 회복하고 선교사를 다시 영입하기 위한 문제들을 논의한 뒤, 이해(1811)에 북경 주교와 교황에게 편지를 보낼 준비를 갖추었다. 이때 이여진은 북경 주교와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달하는 밀사의 역할을 자진해서 맡았다. 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신자와 함께 사신 행차를 따라 북경에 도착하여 당시 북경교구 총대리였던 리베이로-누네스(J. Ribeiro-Nunes) 신부에게 두 통의 편지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청국 정부의 박해가 전국적으로 계속되고 있었고, 또한 유럽의 교회도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므로 북경 교회는 선교사를 보내 줄 처지가 못 되었다. 그는 귀국할 때 묵주, 성패(聖牌), 상본(像本) 그 밖에 여러 가지 성물(聖物)을 가져와 여비를 제공한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비싼 값을 받고 팔아 여비를 마련하느라 졌던 빚을 갚기도 하였다.
이렇게 1811년 북경 내왕이 별 성과 없이 끝났지만 신자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동지사(冬至使) 사행 때 다시 한번 북경에 성직자 파견 요청서를 전달하고자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리하여 1813년 말에 그는 다시 밀사로 북경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북경 교회의 처지가 여전히 곤란했으므로 신부를 보내 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번 북경 여행에서 돌아온 뒤부터 그의 교회 활동도 더 이상 두드러지지가 않았다. 1815년 그는 3개월 동안 차례로 어머니, 아내, 동생, 계수, 조카를 잃는 시련을 겪었으며, 그도 1830년 경기도 양지(陽智) 땅 은이(용인군 내사면 남곡리)에서 고요히 세상을 마쳤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에 가슴에 세 개의 구멍이 생길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하는데, 과연 임종시에 이미 구멍이 한 개가 생기고 죽은 후에 또 생겨 모두 다섯 개의 구멍이 생겼다고 한 다. (→ 성직자 영입 운동 ; 신태보)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下, p. 157/ 《右捕磨鰧錄》 병인 7월 29일 ; 7월 30일 ; 8월 2일/ 《치명일기》 15번/ 柳洪烈, 《高宗治下 西學受難의 研究》, 을유문화사, 1962, p. 180. 〔孫淑景〕
이여진 李―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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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