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막달레나. 동정녀(童貞女).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 성녀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의 딸이며, 성녀 이정희(李貞喜, 바르바라)의 언니이고, 성녀 이매임(李梅任, 데레사)의 조카이다. 경기도 봉천(奉天, 현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의 양반 가정에서 태어났다. 20세에 과부가 되어 친정 집으로 돌아온 고모 이매임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입교했다. 그러나 외교인인 아버지가 천주교를 몹시 미워하였기 때문에 기도와 수계를 몰래 하였다. 시집갈 나이가 되자 아버지가 어떤 외교인 청년과 정혼하였으나 그녀는 이미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결심을 하였 기 때문에 그 혼인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러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이영희는 자기 옷에 피를 묻히고 찢어서 나무 덤불 속에 흩어 놓은 뒤 서울로 도망갔다. 이 것을 본 아버지는 그녀가 호랑이에게 물려 간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가 별로 걱정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녀가 살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다시는 혼인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하고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고모 허계임 집에서 살게 하였다. 뒤에 언니 이정희도 결혼한 지 2년 만에 남편이 죽고, 또 그 집에서는 수계 생활을 계속하기가 어렵게 되자 친정으로 돌아와 고모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그러나 그
녀는 동네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계속 고모 집에서 사는 것이 불편하였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와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다 유 파치피코(중국 이름 余恒德) 신부의 도움으로 학도리골에 작은 집을 하나 마련하여 살게 되었다. 그러자 언니 이정희도 서울로 올라와 그녀와 함께 살았다. 이때 조카 이 바르바라도 같이 살았다. 그들은 함께 실 장사를 해서 겨우 연명했다. 이와 같이 그녀가 마련한 서울집에는 봉천에 사는 어머니와 고모가 해마다 판공 성사를 받기 위해 올라왔다가 여러 날 묵고 가곤 하였다.
1839년 3월 말에도 그녀의 어머니와 고모는 판공 성사를 받기 위해 올라왔다가 그녀가 살고 있는 집에 들렀다. 그곳에는 동정(童貞)을 지키며 사는 김 루치아와 과부인 김성임(金成任, 마르타)도 와 있었다. 이들 일곱 여인들은 모여서 순교에 대한 이야기만 하였다. 그때 기해박해가 일어나 사방에서 크게 위세를 떨치자, 이 일곱 여인들은 순교하고 싶은 의욕이 불꽃같이 치솟아 자수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때 마침 한 사람이 와서 소식을 전하기를 "남(南) 다미아노(明赫)의 온 집안이 체포되었고, 포졸들이 아직도 그 집을 파괴하고 있다" 고 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일곱 여인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1839 년 4월 11일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 포졸들한테로 가서 묵주를 내보이며 자수하였다. 그리하여 결박당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포도대장이 순교하고자 하는 이들 일곱 여인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부드러운 말로 달래기도 하고 누차 무서운 형벌을 가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헛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모두 형조로 이송하였다. 형조에 가서도 이들 일곱 여인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이영희는 1839년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31세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이매임 ; 이정희 ; 허계임)
※ 참고문헌 《기해일기》/ 《달레 교회사》 中, pp. 396~400,426~427/ 《기해병오순교자증언록》 1, 48b~50b/ 林忠信 · 崔奭祐 역주, 《崔良業神父書翰集》,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pp. 315~321/ 《承政院日記》 憲宗 己亥 6월 10일. 〔孫淑景〕
이영희 李榮喜(1809~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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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실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한 이영희 막달레나(탁희성 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