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요한. 본관은 전주(全州). 1914년 12월 26일 충남 부여군 외산면(外山面)에 있는 속칭 거칠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1930년 소신학교(동성상업학교을조)에 입학하여 1935년에 졸업하였고 이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진학하여 1941년 6월 24일 종현(鍾峴, 현 명동) 성당에서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의 주례로 사제 서품을 받고, 경기도 안성 본당의 보좌로 부임하였다. 이완성 신부는 1942년에 서울 교구에서 일본에 파견하는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유학 중징용으로 끌려갔다가 8 · 15 광복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즉시 충남 천안(天安) 본당 3대 주임으로 1개월 간 사목하고 1946년 4월부터는 서울 계성여자중학교(啓星女子中學校) 교사로 봉직하였다. 그 해 10월 서울교구에서 〈경향신문〉을 창간하자 신문사 편집부로 옮겨 《가톨릭青年》의 편집도 맡았으며, 《가톨릭 青年》에 몇 편의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47년 9월 경기도 양평(楊平) 본당으로 부임하였으나 이듬해 2월 신병으로 휴양하게 되었고, 신학교에 나가 몇 차례 교회사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건강을 회복한 이완성 신부는 이듬해 8월에 경기도
남곡리(南谷里, 현 양지) 본당 3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벌터에서 지금의 위치(배마실)로 본당을 옮기고, 지금의 성당 자리에 있던 일본인 소유였던 두부 공장과 가옥 및 대지를 매입하여 두부 공장 내부를 성당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이완성 신부는 한국 전쟁 중이던 1951년 9월에 서울 사직동(社稷洞, 현 세종로) 본당 2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사목 활동을 하였다. 당시 사직동 본당은 임시 성당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는데, 새 성당을 신축할 목적으로 간신히 자금을 마련하여 필운동(弼雲洞) 278의 4호의 대지 416평을 매수하였다. 땅 주인과 계약을 끝낸 이튿날 밤인 1954년 9월 7일 과로로 뇌일혈을 일으켜 41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세종로 성당과 명동 성당에서 차례로 장례 미사를 거행하였으며 용산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 참고문헌 徐相堯, 〈이완성 신부〉, 《교회와 역사》 8호(1976.6), 한국교회사연구소. 〔金志煥〕
이완성 李完成(1914~1954)
글자 크기
9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