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丙寅迫害) 때의 순교자. 세례명은 안토니오. 연풍(延豊)에서 태어났다. 수십 년 전에 상경하여 소공동(小公洞)에 거처하였으며 30세에 입교하였다. 이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 다블뤼(Daveluy, 安敦伊)주교 · 칼래(Calais, 姜) 신부 등을 만나 성사를 보았으며, 얼마간 다블뤼 주교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또 홍봉주(洪鳳周, 토마스), 김계호(金季浩, 토마스) 등과도 교류하며 교회 일에 참여하였는데, 1866년 초에는 이들과 함께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에게 건의하기도 하였다. 방아책이란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영불(英佛)의 힘을 빌리고, 이들로 하여금 러시아를 견제하자는 것이었다. 대원군은 처음 이 제안을 거절했으나, 홍봉주가 남종삼(南鍾三, 요한)과 협의하여 다시 방아책을 건의했을 때는 긍정적인 답변을 하였다. 이에 이유일은 1866년 1월 25일 내포에서 활동하던 다블뤼 주교를 서울로 모셔 왔으나, 대원군이 1866년 2월 23일 베르뇌 주교를 체포하는 등 박해를 일으키면서 이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유일은 강원도 강릉 계촌(季村)으로 피신했다가, 1868년 6월에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신문을 받은 뒤, 50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 병인박해)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下/ 《左捕盜廳謄錄》. 〔孫淑景〕
이유일 李惟-(1819~1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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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