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의 李在誼(1785~1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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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세례명은 토마스. 본관은 평창(平昌). 강원도 정선 출신.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 신자였던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의 손자이며, 이택규(李宅逵)의 아들. 이승훈의 세 아들(宅逵 · 國逵 · 身逵) 가운데 아버지 이택규와 작은아버지 이신규가 천주교를 신봉하여 그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믿었다. 정하상(丁夏祥, 바오로)과 반년 정도 같이 지내면서 교리를 배워 제2대 조선 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
다. 그 후 주교의 복사(服事)로 일하면서 전교 활동을 도왔다.
1839년(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 때에는 홍주로 피신하여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앵베르 주교가 체포되자 이후의 서울 상황을 살피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포교들에게 발각되어 위험에 처하였다. 이때 함께 상경한 최(崔) 베드로를 볼모로 두고 신부들이 숨은 곳을 알아보고 오겠다며 포교들을 안심시킨 후 도주하였다. 이후 박해가 점차 누그러지자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샤스탕 신부의 복사) 등과 함께 교회 재건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순교자들의 행적도 수집하여 이후 《기해일기》를 편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부제가 입국할 때는 의주(義州) 변문(邊門)까지 가서 그를 영접하여 서울로 무사히 인도해 오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그리고 다시 김 부제가 중국 상해로 출발할 때 그의 권유로 현석문 · 최형(崔炯, 베드로) 등과 동행하여 다 함께 김대건 부제의 사제 서품식에 입회한 후 상해에 3개월 정도 머물며 교리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1845년(헌종 11) 제3대 조선교구장이 된 페레올(Ferréol, 高) 주교가 귀국할 때 다시 조선에 돌아왔으며, 이때 그를 도와 전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1846년(헌종 12) 병오박해(丙午迫害)로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이 사건의 연루자로서 그도 역시 체포되었다. 그때 그는 배교를 서약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그런데 1868년(고종 5) 4월 3일(음력 5월 25일)에 외국인 주교와 김대건 신부를 국내로 인도해 왔다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되어 5월 28일에 '모반부도죄' (謀叛不道罪)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했다.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병오박해 ; 서소문 밖 ; 이신규)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中 · 下/ 《右捕盜廳謄錄》/ 《推案及鞫案》. 〔孫淑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