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李貞喜(1799~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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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병을 부려 혼인을 피한 성녀 이정희 바르바라(탁회성 작) .

꾀병을 부려 혼인을 피한 성녀 이정희 바르바라(탁회성 작) .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바르바라. 기해박해(己亥迫害) 때의 순교자. 성녀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의 딸이며, 성녀 이영희(李榮喜, 막달레나)의 언니이고, 성녀 이매임(李梅任, 데레사)의 조카이다. 경기도 봉천(奉天, 현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의 양반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20세에 과부가 되어 친정 집으로 돌아온 고모 이매임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입교하였다. 그러나 외교인인 아버지가 천주교를 몹시 미워하였기 때문에 기도와 수계를 몰래 하였다. 시집갈 나이가 되자 아버지가 어떤 외교인 청년과 정혼하였으나 그 혼인은 신앙 생활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리가 아프다는 꾀병을 부리며 3년 동안을 자리에 누워 있었다. 이에 정혼한 남자는 실망하여 파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어떤 교우가 그녀의 꾀병을 알고 그녀를 배필로 삼겠다고 나서서 그와 혼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 생활 2년 만에 남편이 죽고, 또 그 집에서는 수계 생활을 계속하기가 어려워 친정으로 돌아와 고모 집에서 동생과 함께 살았다. 동정을 지키며 살고 있던 동생이 동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서울로 올라와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다가 유 파치피코(余恒德) 신부의 도움으로 학도리골에 작은 집을 하나 마련하게 되자 그녀도 서울로 올라와 함께 살게 되었다. 이때 조카 이 바르바라도 같이 살았으며, 그들은 함께 실 장사를 해서 겨우 연명하였다. 이와 같이 그녀가 합류하여 살게 된 동생 집에는 봉천에 사는 어머니와 고모가 해마다 판공 성사를 받기 위해 올라왔다가 여러 날 묵고 가곤 하였다.
1839년 3월 말에도 그녀의 어머니와 고모는 판공 성사를 받기 위해 올라왔다가 그녀가 살고 있는 집에 들렀다. 그곳에는 동정(童貞)을 지키며 사는 김 루치아와 과부인 김성임(金成任, 마르타)도 와 있었다. 이들 일곱 여인들은 모여서 순교에 대한 이야기만 하였다. 그때 기해박해가 일어나 사방에서 크게 위세를 떨치자, 이 일곱 여인들은 순교하고 싶은 의욕이 불꽃같이 치솟아 자수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때 마침 한 사람이 와서 소식을 전하기를 "남(南) 다미아노(明赫)의 온 집안이 체포되었고, 포졸들이 아직도 그 집을 파괴하고 있다" 고 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일곱 여인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1839년 4월 11일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 포졸들한테로 가서 묵주를 내보이며 자수하였다. 그리하여 결박당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포도대장이 순교하고자 하는 이들 일곱 여인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부드러운 말로 달래기도 하고누차 무서운 형벌을 가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헛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모두 형조로 이송하였다. 형조에 가서도 이들 일곱 여인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이정희는 1839년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40여 세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이매임 ; 이영희 ; 허계임)
※ 참고문헌  《기해일기》/ 《달레 교회사》 中, pp. 396~400, 426~427/ 《기해병 오순교자증언록》 1, 48b~50b/ 林忠信 · 崔奭祐 역주,《崔良業神父書翰集》,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pp. 315~321/ 《承政院日記》 憲宗 己亥 6월 10일. 〔孫淑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