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교회 신자.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의 사도. 일명단원. 세례명은 루도비코 곤자가. 1759년 예산군 신암면 여사울(餘村, 新宗里)에서 양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신분에 대해서는 상천(常賤), 혹은 관교(官校)라고 기록한 문헌도 있다. 이존창은 1776년부터 이총억(李寵億)을 따라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1784년 한국에 천주교가 도입되어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자, 곧바로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을 통해 입교하였다.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운 그는 1786년에 가성직자단(假聖職者團)의 신부로 임명되었고, 그 뒤 고향으로 돌아와 열심히 전교 활동을 수행했다. 이존창은 짧은 기간에 가족과 친척, 친구들을 개종시켰으며 그의 학식과 덕망을 듣고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그 결과 내포 지방은 초기 천주교 회의 못자리가 될 수 있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이존창도 공주 감영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배교하고 석방되었는데, 여사울로 돌아온 후에는 다시 교리를 실천하며 사도로서의 의무를 다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는 고향에서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고, 또 그의 형이 천주교 신앙을 금했기 때문에, 그 해 12월 30일 고향을 떠나 홍산(鴻山)으로 이주하였고, 얼마 뒤 금산(錦山)을 거쳐 고산(高山)에 정착하였다.
한편 1795년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자, 이존창은 동료들과 의논하여 신부를 전라도로 모셔와 성사를 받았다. 그러나 을묘박해의 여파로 체포된 그는 공주 감영에 있다가 풀려 났고, 얼마 뒤 다시 체포되어 천안에서 연금 생활을 하였다. 또 1798년에는 정사 박해로 말미암아 옥중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면회 온 김유산(金有山, 토마스)을 설득하여 1789년에 북경에 밀사로 파견하였고, 1799년에는 돈 50냥을 내어
황심(黃沁, 토마스)을 북경 밀사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옥중에서 여러 차례 혹형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다가 1799년 배교한 뒤 천안의 관교(官校)로 차정되었고, 1801년 신유박해로 체포된 뒤에도 배교하였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천주교 신자임을 자백한 그는, 결국 사형 판결을 받고 공주로 이송되어 1801년 4월 9일 참수되었다. 그의 딸 멜라니아는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의 조모이며,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李聖禮, 마리아)는 이존창의 사촌 누이인 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이다.
※ 참고문헌 《邪學懲義》/ 《闢衛編》/ 《推案及鞫案》/ 《純祖實錄》/李在璣, 《訥菴記略》/ 黃嗣永, 〈帛書〉/ 《달레 교회사》上. 〔河聲來〕
이존창 李存昌(1759~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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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탁희성 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