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말(明末)의 학자. 천주교와 서양 과학에 관한 서적 의 저술, 번역, 편찬, 감수자. 서광계(徐光啓) · 양정균(楊廷筠)과 함께 중국 천주교의 삼대 기둥으로 불린다. 절강성(浙江省) 인화[仁和, 현 항주(杭州)〕인. 세례명은 레오. 자(字)는 진지 (振之), 아존(我存), 양암(涼庵) 호(號)는 양암거사(涼庵居士) , 양암일민(涼庵逸民) 또는 존원기수(存園寄叟) . 1598년(만력 26) 진사로, 관직은 남경 공부원외랑(南京工部員外郞), 공부랑중(工部郞中)을 거쳐 1613년 남경태복시소경(南京大僕寺少卿)에 이르렀고, 일찍부터 천문 · 지리 · 군사 · 수리(水利) · 음악 · 수학 · 화학· 철학 · 종교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예수회 선교사에 의해 전래된 서양 학문을 배우고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어서, 천주교 입교 전에 이미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세계 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를 6폭 병풍으로 중각(1602)하며 발문을 지었다. 이 시기에 남경 공부(工部)의 관리로서 해시계를 비롯한 천문, 역법 기기를 솔선 제조하며 일부 낙후된 중국 과학을 서학(西學)으로 보완하겠다는 의지를 세운 듯하다.
1604년 서광계가 북경으로 오면서 그와 함께 리치가 사망하는 1610년까지 리치에게서 서양의 여러 학술을 배우고 익혔다. 동시에 이지조는 리치의 조력자로서 당시 간행된 많은 한역 서학서의 발문, 해제, 번역, 저술을 맡았다. 예컨대 1607년에 간행된 《천주실의》(天主實義)와 1608년 간행의 《기인십편》(畸人十篇) 등에 서문을 지었고, 내접원(內接圓)과 외접원(外接圓) 이론을 다른 (환용교의)(圜容義)(1608) 1권은 리치의 구술을 이지조가 정리하여 한문으로 서술한 것이었다. 그는 리치의 권유로 1610년 2월, 첩실을 두었기 때문에 미루었던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는데, 세례명 레오[良)는 당시 선교사들의 기록문에서 레옹 박사(Doctor Leon)로 자주 언급되었다. 1611년 부친상을 당하여 낙향하여 트리고(N.Trigault, 金尼閣), 카타네오(L. Cattaneo, 郭居靜) 신부와 종명인(鍾鳴仁) 수사를 초청, 항주에 개교하였다. 또한 독실한 불교도이던 양정균을 이해 6월에 개종시켰다. 1613년 남경 태복시소경에 임명되자 조정에 역법뿐 아니라 수리(水利) · 수학 · 측량 · 음악 · 의학 등에 유용한 서학서의 번역과, 판토하(D.Pantoja, 龐迪我), 통고바르디(N. Longobardi, 龍華民), 우르시스(S. Ursis, 熊三拔), 디아즈(E. Diaz, 陽瑪諾) 등 선교사를 활용하여 서학을 전면적으로 수용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14년에는 그가 번역한 클라비우스(C. Clavius)의 실용 산술 소개서 《동문산지》(同文算指) 11권이 출간되었다.
1616년 중국 최초의 공식 박해인 남경교난(南京敎難)이 발발하자 이지조는 공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양정균과 더불어 교회와 선교사, 교인들 보호에 전력을 기울여 당시 항주는 교난의 피해가 가장 적었다. 1616년 누르하치가 만주에서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1618년 요동(遼東) 지방을 점령하자, 명 조정에는 위기감이 팽배하였다. 이에 이지조는 하남도 감찰어사(河南道道察御使)로 임명되어 통주(通州)에서 연병을 관장하던 서광계의 부탁으로 1619년 양정균의 문인 장도(張燾)와 함께 마카오에 가서 서양대포 4문과 총을 구입하였다. 또한 1621년 감독군수광록시소경 겸 관공부도수청리사사(監督軍需光祿寺少卿樂管工部都水清吏司事)에 임명되자 마카오의 포르투갈 병사를 초치하고 자력으로 총포를 제조하는 등 북경 방어에 진력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622년 제2차 남경교난이 일어나자 이지조는 다시 사직한 후 자신의 정원을 존원(存園)이라 이름짓고 이곳에서 주로 저술과 번역에 전념하였다. 1623년에는 리치의 세계 지도에 의거한 지리 해설서로 판토하가 저술한 《직방외기》(職方外紀) 5권의 서문을 쓰고, 1625년에는 서안에서 경교비가 출토되자 경교와 천주교와의 동일성을 밝히는 논고 (독경교비서후〉(讀景敎碑書後)를 발표하였다. 이 글은 디아즈가 1644년 간행한 (당경교비송정전》(唐景敎頌正詮)에 실려 있다. 1626년에는 항주 자택내에 작은 성당과 선교사의 주거 한 채를 짓고 11월 1일 제성첨례일(諸聖瞻禮日)에 축성하였다.
1629년 9월, 흠천감(欽天監)에서 다시 일식을 잘못 추정하자, 서광계의 건의에 따라 서양식의 도입을 통한 역법 개정을 목적으로 북경 선무문(宣武門) 안에 역국(曆局)이 개설되었다. 이지조는 통고바르디, 테렌츠(J.Terrenz, 鄧玉函) 등과 더불어 서광계를 독령(督領)으로 천문 측정, 역법 기기와 달력 제조, 서양 역법 관련서 번역 등 수력 사업에 참여하였는데, 그 성과가 집대성된 것이 1631년부터 1634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황제에게 진정된 《승정역서》(崇禎曆書) 136권이다. 이 작업이 한창 진행되던 1630년 11월 1일(양력) 이지조는 병환으로 타계하였다. 이에 선교사와 신도들은 모두 애통해 하였고 로마의 예수회 총장은 모든 선교사들에게 이지조를 위한 미사 한 대씩을 봉헌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지조는 많은 서학서를 편찬, 번역, 공역하였다. 그 가운데 서거 한 해 전 1629년에 편찬 간행한 《천학초함》(天學初函) 52권은 당시 예수회 선교사와 봉교 사대부들의 주요 저술과 번역서를 모은 방대하고 완벽한 학술총로 이편(理編)과 기편(器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편에는 《서학범》(西學凡) · 《당경교비부〉(唐景敎碑附) ·<기인십편> · 《교우편》(交友篇) · 《이십오언》(二十五言) · <천주실의> · 《변학유독》(辯學遺牘) · 《칠극》(七克) · 《영언여작》(靈言蠡勻) · 《직방외기》 등 10종의 대표적 종교서가, 기편에는 《태서수법》(泰西水法) · 《혼개통헌도설)(渾蓋通憲圖說) · 《기하원본》(幾何原本) · 표 도설》(表度說) · (천문략》(天問略) · 《간평의》(簡平儀) ·<동문산지> · <환용교의> · <측량법의>>(測法義) · 《측량이동》(測量異同) · 《구고의》(勾義) 등 11종의 과학 한역 서학서가 망라되어 있어 오늘날까지 동양 천주교회사와 동서 교섭사상에 차지하는 가치와 의의는 대단히 크다. 주요 번역서로는 1628년 출간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서 《환유전》(寰有銓) 6권과 서거 후 1631년에 출간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서적인 《명리탐》(名理探)》 10권을 들 수 있다.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된 이지조의 저술로는 공자(孔子) 제례(祭禮)의 역사를 제기(祭器) 도판과 함께 서술한 《반궁예악소》(叛宮禮樂疏) 10권과 1607년 간행된 천구(天球)의 평사(平射) 도법에 관한 논문인 《혼개통헌도설》 2권이 있는데, 그중《빈궁예악소》는 (사고전서총목제요)(四호출總總目提要)에서 극찬을 받았다. 이지조는 명말의 봉교 사대부로서 서양의 종교와 학술을 적극 수용하여, 중국에 천주교가 뿌리내리게 하는 초석이 되는 한편 서양 문물로써 낙후되고 미비한 중국의 일부분을 개조하려고 한 실학자이다. (- 서광계 ; 《숭정역서》 ; 《천학초함》)
※ 참고문헌 阮元, 《疇人傳》 32卷, 李之藻 方豪, 《中國天主教史人物傳》 第一冊, 香港, 公教真理學會, 1967/ 李之藻, 《天學初函》, 臺灣, 學生書局,1965/ A.W. Hummel, ed. Eminent Chinese of the Ch'ingPeriod, Washington, 1943. 〔張貞蘭〕
이지조 李之藻(1565~1630)
글자 크기
9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