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영〕Egypt

I . 문자와 지리 · II . 역 사 · Ⅲ . 종교와 건축 · IV . 성서에서의 이집트

글자 크기
9
1 / 7

아프리카 북동쪽에 위치한 국가. 공식 명칭은 '이집트아랍 공화국' (Arab Repulic of Egypt)이며, 수도는 카이로(Cairo)이다. 정치 제도는 강력한 행정부에 의해 좌우되며 단원제 의회가 있고, 공용어는 아랍어이다. 공인 종교는 이슬람이며, 국민의 약 4/5가 이슬람 수니파에 속한다. 동쪽으로는 이스라엘과 아카바 만 · 홍해와 접해 있고, 남쪽은 수단, 서쪽은 리비아, 북쪽은 지중해와 접해있다. 면적은 997,739k㎡이며, 인구는 67,230,000명이다(2001).
지정학적으로 이집트는 광야에 둘러싸여 외부와는 고립되었고, 오직 나일 강이라는 단일 교통로로 통일되었기에 고대 이집트 3000년 역사를 통하여 단일 민족과 문화의 동질성을 보전하였다. 이집트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1769~1821) 군대의 이집트 점령에서 비롯됐다. 이집트 원정에 동행했던 175명의 학술 탐사단이 모든 지역을 자세히 답사하고 프랑스에 돌아와 《이집트 묘사》(Descrption de l'Égyte)를 출판함으로써 고대 이집트 문명을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I . 문자와 지리
〔상형 문자〕 상형 문자는 기원전 3200년부터 서기 394년까지 3,600여 년 동안 사용되었던 고대 이집트의 공식 문자였다. 이집트의 상형 문자는 일부 지식층의 지식과 권력의 보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집트 왕조 시대에 모두 850여 개의 그림들로 구성된 이 문자는 그 기능에 따라 소리 글자(phonogram)와 그림의 모양으로 의미를 전달해 주는 뜻 글자(logogram), 그리고 단어의 맨 뒤에 붙어서 단어 전체의 이미지를 정해 주는 결정 글자(determinative) 등으로 구분된다. 상형 문자의 문장은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그리고 위에서 밑으로 읽을 수 있는데 읽는 방향은 각각 사람이나 동물의 머리가 향하는 쪽에서부터 시작된다. 소리 글자는 일종의 알파벳 역할을 하는 23개의 한 소리 글자(uniconsonantal sign)와 100여 개의 두 소리 글자(biconsonantal sign) , 그리고 50여 개의 세 소리 글자(triconsonantal sign)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본적인 다섯 개 모음인 아, 에, 이, 오, 우 중에서 '에' 만 없기 때문에 자음과 자음 사이에 모음이 없는 경우 오늘날 대부분 '에' 를 넣어서 읽는 것으로 통일시켰다. 서기 394년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이후 잊혀졌던 상형 문자의 비밀은 1822년 프랑스의 샹폴리옹(J.F. Cham-pollion)이 로제타 석비의 프톨레메우스와 오벨리스크의 클레오파트라 철자들의 비교 연구를 통해서 비로소 풀렸다.
〔지리적 배경〕 고대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 때문에 가능했다. 이집트 문명이 나일 강에 의해 형성됐다는 '나일강의 선물' 이라는 표현은 기원전 6세기 헤카타이오스(Hecataios)가 처음으로 언급했다. 이집트는 북부 아프리카의 거대한 광야에 자리잡고 있어서 본래는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중부 아프리카 고원 지대에서 북쪽의 지중해로 흐르는 나일 강 때문에 그 강변을 따라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나일 강은 고대 이집트어로는 '이아테루' 라고 불렸지만, 기원전 8세기 그리스 사람들에 의해 '네일로스' (Νεῖλος)로 알려지면서 오늘날 나일 강의 어원이 되었다. 나일 강은 전체 길이가6,700km에 달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긴 강이다. 나일 강의 물은 7월 초부터 서서히 불어나서 8월 중순 최고 수위에 달했다가 그 후 줄어들기 시작하여 11월 말부터 갈수기에 이르며 1~2월에는 최저 수위에 도달한다. 나일강은 이 지역의 유일한 수원지이자, 해마다 여름철 범람기(7~10월)에 새로운 흙을 실어다 주고, 나아가 유일한 교통로로써 이집트 전역을 통일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또한 나일 강은 지중해로 흘러 내려오면서 해변에 거대한 삼각주를 형성하였는데, 이 넓은 농경지에서 일찍부터 농경 및 목축이 가능하게 됐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케멧트' , 즉 '검은 땅' 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나일 강의 범람으로 형성된 비옥한 충적토를 의미했다. 케멧트는 '붉은 땅' 을 의미하는 '데쉬렛트' 와는 대조를 이루는데, 데쉬렛트는 이집트의 광야가 주로 누런 색과 갈색을 띤 풍화된 석회암 지대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오늘날 아랍어로 이집트를 '미세르' 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같은 셈 어족에 속하는 성서 히브리어의 '미체르' (מִצְר)에서 유래됐다. 히브리어로 이집트는 '미츠라임' (מִצְרַיִם)이다. 이는 '두개의 미체르' , 즉 '두 개의 이집트' 를 의미하며, 북쪽의 하 이집트와 남쪽의 상 이집트를 지칭하는 것이다. 고왕국 시대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수도인 멤피스를 그곳의 신전 이름을 따라 '훗트-카-프타' (Hut-ka-Ptah) , 즉 '프타의 영혼의 신전' 이라고 불렀다. 신왕국 시대에는 멤피스를 '히-카-프타' (Hi-ka-Ptah)로 불렀고, 기원전 14세기의 외교 문서인 《아마르나 문서》에서는 멤피스가 아카드어로 '히-쿠-우프-타' (Hi-ku-up-ta)로 기록돼 있다. 기원전 8세기경 이집트가 그리스 세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리스어로 '아이귀프토스'(Αἴγυπτος)로발음됐고, 라틴어로 '에집투스' (Aegyptus), 즉 이집트(Egypt)로 발전되었다.
이집트는 예로부터 나일 강 유역을 따라 전체 국토를 양분했는데, 상부 이집트가 나일 강 상류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하부 이집트는 지중해 쪽의 삼각주 지방을 일컫는다. 이 두 지역의 경계는 현재 카이로 남쪽 20km 지점의 멤피스이며, 두 지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고왕국 시대부터 멤피스는 이집트의 정치적 · 종교적 수도로 발전됐다. 전통적으로 상 이집트는 22개 그리고 하 이집트는 20개의 '노모스' 라 불리는 주(州)로 구분되어 있으며, 멤피스는 하 이집트의 첫 번째 주에 속한다. 기원전 3,100년경 남쪽의 상 이집트 세력이 북쪽의 하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역사상 최초의 통일 이집트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후 이집트의 모든 왕들은 자신이 두 이집트의 통합 왕이라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여러 가지 상징물을 이용하여 왕권을 표기했다.
II . 역 사
〔고대사〕 이집트의 전통적인 30왕조 체계는 기원전 3 세기에 헬리오폴리스의 사제였던 마네토(Manetho)의 《이집트사》(Aegyptica)에서 유래된 것이다. 마네토 이전 시대에 이집트에서는 왕들의 이름이 신전 벽이나 파피루스에 일종의 연대기로 기록되었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왕 명단은 팔레르모 석비, 카르나크(Karnak) 신전의 왕 명단, 아비도스 왕 명단, 사카라 왕 명단, 그리고 튜린 파피루스 등이 있다.
초기 왕조 시대 : 제1 왕조(기원전 3100~2890)와 제2 왕조(기원전 2890~2686) 시대를 포함하는 이 시대는, 기원전 3100년경 남쪽의 상 이집트 출신인 나르메르(Nar-mer)가 북쪽 삼각주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는 당시 상하 이집트의 어떤 세력에도 속하지 않고 둘 사이의 경계 지점인 멤피스에 신전과 궁전을 건축하고, 통일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이후 이집트의 모든 파라오들은 자신이 '상하 이집트를 통일한 자' 라는 위업을 자신들의 왕명에 항상 새기는 관습을 갖게 되었다. 이집트의 첫 번째 수도인 멤피스는 나일 강이 범람한 후 물이 빠져서 새로 생겨난 땅에 건설되었고, 이 도시의 수호신 프타는 말씀으로 만물을 만든 창조주로 숭배되었다.
고왕국 시대 : 제3 왕조(기원전 2686~2613)와 제4 왕조(기원전 2613~2498)와 제5 왕조(기원전 2494~2345) 및 제6 왕조(기원전 2345~2181)까지를 일컫는 이 시대는, '피라미드의 시대' 로 불릴 만큼 이집트 역사상 무덤 건축이 가장 웅장하게 진행된 시기였다. 제3 왕조의 조세르(Djoser, 기원전2667~2648)는 건축가 임호텝(Imhotep)의 도움으로 사카라(Saqara)에 기존의 마스타바(Mastaba)의 상부 구조를 몇 개 더 올린 계단식 피라미드를 처음으로 건설했다. 제1~2 왕조 시기에 궁전 바닥이나 무덤의 매장실 등이 돌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건물 건체가 석재로 만들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제3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후니(Huni, 기원전 2637~2613)는 마이둠(Maydum)에 계단식 피라미드를 건설한 후 역사상 처음으로 계단 부분을 덮개석(casing stone)으로 마무리하여 소위 '참 피라미드' 의 건설을 시도했다.
제4 왕조의 첫 파라오인 스네프루(Snefu, 기원전 2613~2589)는 다슈르(Dahshur)에 두 개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각각 굴절 피라미드(Bent Pyramid)와 붉은 피라미드(RedPyramid)로 불리는 이 피라미드는 피라미드 건설의 시행착오 과정을 보여 준다. 그의 아들 쿠푸(Khufu, 기원전2589~2566)는 아버지의 시행 착오를 거울 삼아 51˚ 50'각도로 피라미드를 기자에 건설하면서 피라미드의 전성기를 이룩했다. 이 시대에 이집트는 본토를 벗어나 남쪽의 누비아(Nubia), 북서쪽의 리비아(Libya), 그리고 북동쪽의 팔레스티나 지역까지 진출하여 그 지방의 토산물을 수입하였다.
제1 중간기 : 제7~8 왕조 시대(기원전 2181~2125) 제9~10 왕조 시대(기원전 2160~2025)와 제11 왕조 전반기(기원전 2125~2055)를 포함하는 이 시기에 이집트 왕정 역사의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고왕국 시대는 제5 왕조 이후부터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제6 왕조 말기에 두 왕국의 통일 체제가 붕괴되었다. 이집트 왕 명단에 의하면, 제7~8 왕조 시대의 56년은 수많은 왕들이 1~2년 정도만 통치하는 등 정치적 불안정의 시기였다. 이러한 문명의 붕괴 현상은 이 지역의 기후 변동으로 인한 기근을 첫 번째 원인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이집트인들의 기록을 통해서도 "나일 강이 말라서 사람들이 맨발로 건너갈 수 있게 되었을 때" 이집트의 영토는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소규모 세력의 군주들에 의해 분할 · 통치되는 과도기를 맞았다. 이집트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북쪽의 삼각주 지역에는 시나이 반도에서 흘러 들어온 유목민들이나 서쪽의 리비아인들이 조금씩 이주하여 정착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제9~10 왕조 시대에는 파윰 근처 헤라클레오폴리스의 왕들이 이집트의 중심 세력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중왕국 시대 : 제11 왕조 후반(기원전 2055~1985)부터 제12 왕조(기원전 1985~1795) 제13 왕조(기원전 1795~1650)와 제14 왕조(기원전 1750~1650)로 이어지는 중왕국 시대를 연 인물은 테베의 소규모 왕이었던 멘투호테프 2세(기원전 2055~2004)였다. 그는 이집트 전체의 파라오로 등극하여 51년을 통치하면서 중왕국 시대의 초석을 놓았다. 그의 아들 멘투호테프 3세(기원전 2004~1992)는 오늘날의 동부 아프리카 소말리아로 여겨지는 푼트(Punt)에 대규모 무역 원정단을 파견하는 등 이집트의 부흥을 이룩하였다.
기원전 1985년경 멘투호테프 4세(기원전 1992~1985)치하에서 상 이집트의 총리로 지냈던 아메넴헤트 1세(기원전 1985~1955)가 제12 왕조를 건설하면서 이집트는 고왕국 시대의 명성에 버금가는 강대국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상하 이집트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아메넴헤트 1세는 수도를 테베에서 북쪽의 엘 리쉬트(El-Lishit)로 옮겼고, 누비아 지역으로 진출하여 제3 급류 지역에까지 요새를 설치하는 등 이집트의 남쪽 영토를 확장시켰다. 기원전 1800년경부터 기후 변동과 왕궁 내부의 쿠데타로 이집트 왕정이 일대 혼란에 빠졌다. 특히 팔레스티나 지역의 가나안 민족들이 하 이집트의 삼각주 지대로 이주해 오면서, 인구 팽창으로 인한 식량 부족으로 통치권이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제2 중간기 : 제15 왕조(기원전 1650~1550)와 같은 시기(기원전 1650~1550)에 함께 존재했던 제16 왕조와 제17 왕조 시기를 묶은 제2 중간기는 기원전 1650년경 가나안 민족의 일부가 삼각주의 아바리스(텔 엘-다바)에 요새를 건설함으로 시작되었다. 이집트의 새 주인공으로 등장한 이들을 이집트인들은 '헤카우 하숫트' , 즉 '외국의 통치자들' 로 불렀고, 후에 그리스어로 '힉소스' 민족으로 불렸다. 힉소스의 중심지는 남부 팔레스티나 지중해변의 샤룩헨이었으며, 하 이집트 지역을 장악한 다음 남쪽의 상 이집트 영토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록을 남기지 않아서 힉소스 민족의 통치 내용은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왕들의 도장을 통해서 5명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무덤 양식, 청동제 무기, 특히 토기류가 동시대 남부 팔레스티나의 것과 거의 동일함이 확인되었다. 제15 왕조는 상 이집트 제17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카모세(기원전 1555~1550)의 활약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신왕국 시대 : 제18 왕조(기원전 1550~1295)의 첫 왕 아모세(기원전 1550~1525)는 힉소스 민족을 완전히 이집트의 영토 밖으로 몰아냄으로써 제19 왕조(기원전 1295~1186)와 제20 왕조(기원전 1186~1069)로 이어지는 신왕국 시대를 열었다. 이 시대는 이집트의 고대사에서 역사상 가장 번창했던 시기로 그 영토를 북쪽으로 확장하고 팔레스티나를 식민지로 통치하던 전성기였다. 아모세는 힉소스를 완전히 몰아낸 후 계속 북진하여 시리아 지역까지 장악했다. 투트모세 1세(기원전1504~1492)와 3세(기원전 1479~1425)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관문인 유프라테스 강까지 진출하여 자신의 전승비를 강변에 세웠다.
제19 왕조와 제20 왕조는 '라므세스 왕조' 로 불린다. 이집트 고대의 3000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파라오로 꼽히는 라므세스 2세(기원전 1279~1213)는 당시 히타이트 제국의 남진 정책에 대항하여 시리아의 카데시에서 전투를 벌였고, 결국 세계 최초로 두 세력 사이에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오늘날 이집트에서 볼 수 있는 대형 유적들은 대부분 라므세스 2세에 의해 건설된 것이 많다.
제3 중간기 : 제21 왕조(기원전 1069~945) · 제22 왕조(기원전 945~715) · 제23 왕조(기원전 818~715) · 제24 왕조(기원전 727~715) 시기가 제3 중간기로 분류된다. 제21 왕조의 왕들은 나일 강 삼각주의 타니스를 수도로 정했다. 그로 인해 수도가 북쪽에 치우쳤기에 남쪽 테베의 사제들은 별도의 집권 체제를 가졌으며, 이집트는 분열된 상태로 유지됐다. 이집트는 제22 왕조 세송크 3세(Sheshonk, 기원전 825~773) 시대인 기원전 815년경부터 약화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시대에 제22~24 왕조가 동시에 각각 다른 지역에서 통치하는 과도기로 접어들었다.
후시대 : 제25 왕조(기원전 747~656)와 제26 왕조(기원전 664~525)가 지배하던 이 시대를 후시대라고 한다. 기원전 671년 신아시리아 제국의 에사르하돈(기원전680~669)이 멤피스를 점령함으로써 이집트는 역사상 처음으로 메소포타미아 세력에게 조공을 바치는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기원전 610년부터 제26 왕조의 네코 2세(기원전 610~595)는 바빌로니아를 상대로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으로 군사 원정을 감행했다. 하지만, 기원전 605년 바빌로니아에게 참패한 후 군대를 철수하고, 이집트 상업을 발달시키고 해군을 증강하였으며 나일 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시대 :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의 캄비세스(기원전 525~522)가 이집트를 침공함으로써 독자적인 이집트 왕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따라서 제27 왕조(기원전525~404) · 제28 왕조(기원전 404~399) · 제29 왕조(기원전 399~380) · 제30 왕조(기원전 380~332)까지 약 200년 동안 페르시아의 왕들이 이집트의 파라오를 대신했다.
그리스 시대 : 기원전 332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기원전 356~323)가 멤피스를 점령함으로써 그리스 시대가 시작됐다. 이때 지중해변에 건설된 알렉산드리아가 이집트 문명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마케도니아 왕조(기원전 332~305)와 프톨레메우스 왕조(기원전 305~30)로 대변되는 그리스 시대는 기원전 30년 마지막 통치자인 클레오파트라 7세 여왕의 죽음으로 끝났다. 하지만, 이때부터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당시 최대 규모였던 도서관 덕분이었다. 프톨레메우스 1세(기원전 305~282)는 자기 아들의 교육을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스트라톤(Straton)을 아테네에서 초빙했다. 이때부터 효율적인 교육을 위한 도서관이 건립됐고, 왕명에 의해 "지구상의 모든 민족들의 책들"을 수집 · 보관하려는 대규모 계획이 추진됐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소장 도서는 모두 50여만 권으로 추정된다. 바로 이때에 구약성서도 프톨레메우스 왕조의 후원하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됐다.
〔로마 시대〕 로마 제국은 기원전 30~395년까지 이집트를 지배하였다. 이 시대에 이집트는 황제의 개인 재산인 지역이었으며, 제국의 한 지방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였다. 로마 제국의 가혹한 통치는 이집트를 제도적으로 피폐화시켰고, 이집트는 황제의 중요한 식량 창고 역할을 하였을 뿐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많은 이집트인들이 신자가 되도록 만들었다. 역사가인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 Caesa-riensis, 260/265?~339)의 《교회사》(Ⅱ. 16)에 의하면, 네로 황제 시대(54~68)에 예수의 제자인 마르코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됐다고 한다. 또한, 사도 바오로의 측인이었던 아폴로도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이었다(사도 18, 24). 당시 이집트의 중심 도시는 알렉산드리아였으며, 이곳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그리스도교 개종자가 처음으로 나왔다. 그렇기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는 이집트의 모든 주교들과 관구장들에 우선하는 으뜸 주교로 여겨졌다.
이 시기에 이집트의 그리스도교는 콥트 교회(CopticChurch)라 불리게 되었다. 콥트는 아랍어로 이집트인을 의미하는 '알-굽트' (al-gubt)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서기150년경 콥트어로 기록된 요한 복음서의 단편이 이집트 남부 지방에서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마르코의 선교 이후 100년이 되지 않아서 그리스도교가 이집트 전역으로 전파된 것으로 여겨진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발전은 알렉산드리아라는 대규모 국제적 도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로마 시대에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다음가는 도시였고 학문적 · 종교적 중심지였다. 200년경 알렉산드리아는 글레멘스(Clemens Alexandrianus, 150~215), 오리제네스(Origenes, 185~253) 등의 학자들과 함께 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가 있었고, 이를 기초로 한 신학 학파가 형성되었다. 물론 박해 시대에 이집트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많은 순교자들이 배출되었다. 하지만, 313년 콘스탄틴 대제(306~337)의 관용령 이후 교회의 공식적인 활동이 가능해졌다. 320년경 파코미오(Pachomius, 290~346)는 테베에 최초의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325년 제1차 니체아 공의회는 알렉산드리아를 로마 다음의 교구로 서열을 지정하였다. 이집트는 3~4세기에 사막의 은수자 공동체에 의해 수도 생활이 발전되었다.
〔동로마 제국 시대〕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379~395) 이후 이집트는 동로마 제국의 일부분이 되었고, 행정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관할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에 콥트 교회가 자리를 잡았다. 칼체돈 공의회(451)는 알렉산드리아를 총주교좌(Patriar-chatus)로 규정하고 이곳의 교구장을 총주교(Patriarcha)라 칭하였다. 이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총주교는 100개 이상의 교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의회 직후 총주교는 대부분의 신자들을 이끌고 그리스도 단성설(mono-physitismus)을 따르는 콥트 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칼체돈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는 소수의 신자들은 멜키트 가톨릭(Melchite Catholic) 교회라 불리게 되었다. 그로 인해 457년 이후 두 계통의 총주교가 양립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527~565) 때 이집트에 남아 있던 마지막 이교도 신전이 폐쇄되었다. 이집트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통치는 헤라클리우스 황제(610~641) 시기에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640년에 펠루시움(Pelusium)과 바빌론(Babylon)에 있던 동로마 제국의 수비대가 아랍인들의 공격을 받았고, 약 3년에 걸친 전쟁 끝에 642년 이집트에서 완전히 철수하였기 때문이다.
〔중세 시기〕 642년 무슬림인 아랍인의 군대 진영이 고대 멤피스의 북쪽에 설치되었다. 이 진영으로 인해 현대 카이로의 남쪽에 있는 고(古)카이로가 발전하였다. 670년에 북아프리카까지 점령한 아랍 무슬림들은 콥트 교회는 용인하였다. 그러나 가톨릭인 멜키트 교회는 동로마 제국 황제에게 충성한다는 이유로 박해하였다. 그로 인해 신자의 수가 격감하였다. 9세기에 이집트의 체계적인 아랍화가 시작되었고, 아랍인과 콥트인들 사이에 인종적인 융합이 이루어졌다. 점차적으로 콥트인의 대다수가 이슬람을 받아들였고, 그들 모두는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당시 이집트는 우마이야(Umayyad) 칼리프 왕조(661~750)와 아바스(Abbasid) 칼리프 왕조(749~1258)의 일부였다. 969년에 파티마 칼리프 왕조의 중심이 되었으며, 상당히 독립적인 지위를 갖고 있었다. 교회가 동서로 분열되던 1054년에 알렉산드리아의 멜키트 총주교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의 입장을 지지하였고, 이후 동방 교회가 되었다. 1171년에 이집트는 아바스 왕조의 지배로 귀속되었다. 제5차 십자군 전쟁(1217~1221) 때에 예루살렘 왕국(1099~1187)의 왕인 브리엔(Brienne)의 요한은 이집트에서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1218년 5월 다미에타(Damietta)에 상륙하여 1년 이상 그곳을 포위하였다. 이듬해 11월 그곳을 점령한 십자군이 독일 십자군의 도움으로 1221년 7월 알 만수라(al-Mansurah)를 점령하려고 할 때, 이집트의 술탄은 예루살렘 반환을 약속하며 다미에타와 교환하자는 평화 협정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이 제의를 거절하였다. 십자군은 카이로 공격을 계속하였으나 무슬림들의 반격과 홍수 때문에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하였다. 그리고 카이로에서 패배하여 무슬림들에게 다미에타를 넘겨주고 포로 신세를 면하였다. 십자군은 1219년에 알렉산드리아에 라틴 총주교좌를 세웠다. 그러나 십자군이 철수하면서 라틴 총주교좌도 없어졌다. 그동안 멜키트 총주교는 콘스탄티노플로 피난 가야 했다.
아바스 칼리프 왕조가 무너지고 맘루크들이 득세한 것은 1258년의 일이었다. 그들이 이집트에 세운 왕조는 1517년까지 지속되었고, 이집트를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때는 이집트의 아랍화가 거의 완성된 상태였다. 피렌체 공의회(1439~1445)에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의 총주교들이 대표들을 보내어 잠시 동안 로마 교회와의 일치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1517년 오스만 제국의 터키인들이 이집트를 점령한 후, 알렉산드리아의 멜키트 교회와 교황청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근대와 현대〕 1517년 오스만 제국에 점령된 이집트는 이스탄불(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다스리는 속주가 되었다. 맘루크 왕조 말기에 시작된 경제의 쇠퇴는 계속 되었고, 그와 함께 이집트의 문명도 쇠퇴했다. 지역 행정은 24명의 귀족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들의 방침은 파샤(Pasa)의 통치 이념과 일치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정치는 타성에 젖었다.
1798년 7월 1일부터 시작된 프랑스군의 점령 시기는 불과 몇 년에 불과하였으나 이집트를 유럽과 밀접하게 만들었고, 새로운 사상과 과거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시작되게 하였다. 프랑스군이 떠난 뒤 이집트는 1805년부터 무하마드 알리(1769~1849)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는 오스만 제국을 명목상의 종주국으로 하는 왕조와 제국을 일으켰다. 1838년 안티오키아의 멜키트 가톨릭 총주교가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의 총주교좌 명의를 겸하고 이 모든 지역에 있는 멜키트 가톨릭 신자들을 관할하게되었다. 그의 후계자인 이스마일 파샤(1863~1879)는 수에즈 운하를 완성하였지만, 막대한 외채를 누적시키는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1882년 영국이 이집트를 점령하는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결국 영국은 1882년 내란의 와중에 있는 이집트를 점령하였다. 1895년에 콥트 가톨릭 총주교좌가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졌다.
이집트는 1914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1919년 영국은 이집트에 좀더 많은 독립성을 부여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 결과 1922년 명목상의 독립을 얻고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초대 왕으로 푸아드 1세(Fu'ad I 1922~1936)가 등극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파루크 1세(FaroukI 1936~1952)는 집권 기간 동안 끊임없이 정적들의 도전을 받았으며, 군부의 이탈로 하야하였다. 1952년에 발생한 쿠데타에 참여하였던 나세르(1918~1970)가 총리(1954~1956)를 역임한 뒤 대통령(1956~1970)이 되었다. 그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비록 단명했지만 시리아 및 예멘과 아랍 연합 공화국(1958~1961)을 세웠었다. 그리고 아스완 하이 댐을 건설하였다. 1956, 1967년에 이스라엘과 두 차례 전쟁을 하였으나, 결국 패전하였다. 그의 후계자인 사다트(1918~1981)는 나세르의 사회주의적인 정책 일부를 환원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이스라엘과의 1973년 전쟁에서 패한 후 중동 평화 회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에 의해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1981년 10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무바라크(1928~ )가 대통령직을 계승하여 중동 평화 협상을 주도적으로 계속 추진하였으며, 1982년에는 1967년 전쟁으로 잃었던 시나이 반도에 대한 영유권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1953년의 쿠데타 이후 계엄령이 아직도 해제되지 않았고, 1997년 계엄을 더 연장하고 재판없이 구금이 가능하며 군사 재판권이 민간인에게까지 확대되는 대통령령이 국회에서 승인되었다.
현재 이집트에서는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콥트 교회 신자들이 테러 공격의 목표가 되고 있다. 그래서 2000년 2월 카이로와 시나이 산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종교간의 대화를 촉구하였다. 현재 소수의 가톨릭 신자들이 신중하게 때로는 서로에게 의혹을 갖고 대화에 임하고 있다. 2001년 현재 이집트에는 콥트와멜키트 신자들을 위한 각각의 총주교좌가 알렉산드리아에 설립되어 있다. 그래서 총주교좌 2, 교구 10, 대목구1, 동방 대목구 1, 본당 217개에 총주교 1, 추기경 1, 대주교 2, 주교 12, 신부 467(교구 소속 207, 수도회 소속 260), 수사 45, 수녀 1,360명이 있다. 신자는 전체 인구수의 0.33%인 225,000명이다.
Ⅲ . 종교와 건축
〔이집트의 종교〕 고대 이집트의 신관, 즉 신들에 관한 관점은 자연신 단계, 도시 수호신 단계, 계보신 단계, 국신(國神) 단계, 그리고 유일신(唯一神) 단계로 발전됐다. 이집트 최초의 신들은 대부분 자연 현상인 태양신 라(Ra)를 비롯해서 송골매의 신 호루스(Horus), 하늘의 신누트(Nut), 땅의 신 겝(Geb) 등이었다. 헬리오폴리스의 구신계(九神系)는 창조의 신 아툼(Atum)을 원조로 하여 네 쌍의 신들을 포함하며, 고왕국 시대인 제3~5 왕조 시대에 주로 숭배되었다. 아툼은 각각 공기와 습기를 상징하는 슈(Shu)와 테프누트(Tefnut)를 낳았고, 이들은 땅과 하늘을 상징하는 겝과 누트를 탄생시켰다. 하늘의 여신 누트와 땅의 신 겝이 오시리스(Osiris), 이시스(Isis),세트(Seth), 네프티스(Nephthys) 등 네 명의 자녀를 낳았다. 헤르무폴리스의 팔신계(八神系)는 남신들은 개구리류, 그리고 여신들은 뱀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멤피스에는 소위 '멤피스의 신학' 이라 불리는 기원전 710년경의 샤바코 석비의 기록을 통하여 프타를 중심으로 하는 멤피스의 신 계보를 확인할 수 있다. 멤피스의 수호신 프타(Ptah)는 혀(말씀)로 눈(Nun), 아툼, 나우네트(Naunet)등의 신을 창조했다. 나아가 아툼은 슈와 테프누트를 창조하였다. 멤피스 신학 자체가 비교적 후기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헬리오폴리스의 구신계와 헤르무폴리스의 팔신계를 합쳐 놓은 듯한 신들의 계보를 구성하고 있다.
기원전 1550년 신왕국 시대가 시작되면서 당시 수도인 테베의 수호신 아몬(Amon)이 일종의 국신으로서 이집트 최고의 신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아몬은 이집트의 전통적인 태양신 라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아몬-라의 개념으로 발전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치적 이념의 아몬교에 심한 반발을 느껴 나타난 종교가 세계 최초의 유일신론적 종교 개혁의 결과로 알려진 아텐교이다. 제18 왕조의 아켄아텐(Akhenaten, 기원전 1356~1340)은 아멘호테프(아문의 사랑하는 자) 4세로서 테베에서 5년 간 통치한 후 자신의 이름을 아켄아텐(아텐에게 봉사하는 자)으로 바꾼 후 수도를 아켓아텐(Akehetaten, 아텐의 지평)으로 옮겨서 12년을 더 통치했다. 아켄아텐의 종교 개혁은 그가 17년밖에 통치하지 못했고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느라 국고를 탕진했으며 군사적 원정을 지속하지 못해서 경제적 위기를 가져오는 등 결국 실패로 끝났다.
〔장례 의식〕 이집트의 가장 특징적인 장례 의식인 미라(mirra) 제조는 오시리스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오시리스는 헬리오폴리스의 구신계에서 마지막 세대로 등장하며 땅의 신 겝과와 하늘의 신 누트 사이의 첫째 아들이었고, 그의 부인은 이시스였다. 오시리스의 동생 세트는 형수인 이시스를 사랑하여 오시리스를 죽일 음모를 꾸몄고, 관 속에 그를 넣어 나일 강에 빠뜨렸다. 이시스는 온갖 모험 끝에 오시리스의 관을 찾아왔지만, 세트는 관을 쪼개서 오시리스의 시신을 열네 조각으로 나누어 온 이집트에 분산시켰다. 이시스는 오시리스의 시신 조각들을 찾아내어 천으로 싸서 미라의 모습으로 만들어 환생시켰고, 부활한 오시리스는 지하 세계의 왕으로 군림했다. 오시리스의 아들 호루스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삼촌 세트와 결투를 벌여 그를 죽임으로써 오시리스 신화는 막을 내린다.
오시리스 신화의 부활 사상에 기초한 고대 이집트인들의 미라 제작은 고대 이집트의 단편적인 문서들과 특히 기원전 5세기 헤로도토스의 기록을 통하여 구체적인 과정들이 알려졌다. 먼저 이부(ibw), 즉 '정결의 장소' 라 불리는 천막에서 시신을 천연 탄산소다(natron)로 씻은 다음, '아름다움의 집' 이라는 의미의 페르 네페르(pernefer) 천막에서 본격적인 미라 작업이 진행된다. 시신에서 뇌와 내장들을 제거한 다음 간, 허파, 위장, 창자 등은 특별히 제작된 네 개의 카노푸스 단지에 담아서 미라와 함께 보존한다. 내장 중에서 심장을 시신으로부터 제거하지 않는 이유는 이곳에 인간의 모든 정신이 담겼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시신은 70일 간 천연 탄산소다에 덮어 두어서 수분을 완전히 제거한 다음 아마포로 전신을 감싼다.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 미라는 이집트의 초기 왕조 시대(기원전 2920~2575)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고왕국 시대(기원전 2575~2134)인 제4 왕조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신에서 내장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고, 탄산소다를 내장들을 보존하는 데 사용하였다. 중왕국 시대(기원전 2040~1650)부터는 시신 자체를 보존하는 데 탄산소다를 사용하였고, 시신이 마르게 되면 아마포로 감싸고, 향수와 송진을 그 위에 부었다. 신왕국 시대(기원전 1550~1070)에 들어와 미라 제작 기술이 절정을 이루었으며, 지금까지 발견된 왕들의 미라가 대부분 이 시대의 것이라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이집트의 역사가 발달하여 장례 의식, 특히 미라 제작이 왕족 및 귀족들에게만 국한되던 것이 일반인들에게 퍼져 나가면서 소위 '내세관의 대중화' 가 이루어졌다. 즉 누구든지 죽은 다음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미라로 만들고 내세 여행에 필요한 장례 문서 및 부장품들을 갖추기만 하면, 그 당사자의 영혼은 신들과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신앙이 확산된 것이다. 또한 미라 제작 기술과 전문인들의 양성으로 누구든지 죽은 후에 저승에서의 영생이 가능하게 되었다. 장례 문서들의 발전을 통해 볼 때 고왕국 시대의 피라미드 문서가 파라오들을 비롯하여 피라미드에 안치될 수 있었던 왕족들의 영생을 위한 것이 었지만, 중왕국 시대에 들어와서는 나무로 만든 관 내부에 주술문을 기록하였다. 또한 죽은 자의 부활과 영생이 보장될 수 있는 등 왕족들만이 가질 수 있었던 내세관이 중산층에까지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아가 신왕국 시대에는 왕족들에게는 무덤 벽화와 기록을 통하여 내세로의 안내가 이루어졌다면 파피루스에 기록된 죽은 자의 책을 통하여 일반인들도 영생을 얻는 계기가 이루어졌다.
〔피라미드 건축〕 이집트 문명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피라미드는 고왕국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써 정사각형의 밑변에 같은 크기의 네 개의 삼각형 옆면이 한 꼭지점에서 만나는 석재 구조물이다. 피라미드는 본래 고대 이집트어로는 '메르' (mer)라 불리며, 그리스 사람들이 자신들의 빵 모양과 닮았다고 해서 그리스어로 '밀빵'(wheat cake)을 의미하는 '퓌라미스' (Πυραμίς)라고 불렀다. 오늘날의 피라미드는 그리스어 '퓌라미스' 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고왕국 시대(기원전 2686~2181)부터 제2 중간기(기원전 1650~1550)까지 약 1100여 년 동안 유행했던 고대 이집트의 무덤 양식 중 하나이다. 피라미드는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와 함께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피라미드는 파라오가 왕위에 즉위하면서부터 공사가 시작되기 때문에 피라미드의 규모는 그 주인공의 통치 기간과 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피라미드의 직접적인 기원은 마스타바라 불리는 무덤의 상부 구조가 여러 겹 층층이 쌓아 올려진 사카라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카라 남쪽 마이둠(Maydum)의 소위 '무너진 피라미드' 는 제3 왕조의 마지막 왕 후니(Huni) 때에는 계단 피라미드였는데, 제4 왕조 스네프루가 이것을 참 피라미드로 변형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피라미드는 설계 잘못과 부실 시공으로 무너졌다. 제4 왕조의 첫 왕 스네프루는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도중 붕괴의 위험을 느껴 좀 더 완만한 경사로 각도를 수정했기 때문에 굴절 피라미드가 탄생됐다. 그가 세운 또 하나의 붉은 피라미드는 기자 피라미드의 전신으로써 비록 각도는 완만하지만 처음으로 완전한 형태의 피라미드가 탄생되었다. 피라미드는 기자의 것들을 비롯하여 이집트에서 모두 열네 군데에서 약 70개 정도가 확인되었다.
피라미드의 네 변은 각각 동서남북의 네 방위와 일치되도록 건설되었다. 피라미드는 무덤 자체뿐만 아니라 장례 건축으로써 넓은 의미의 피라미드 단지(complex)로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중심적인 피라미드 외에도 나일강변 또는 운하변에 위치한 계곡 신전(valley temple), 피라미드 동쪽으로 건설된 장례 신전(mortuary temple) 그리고 이들을 이어 주는 둑길 또는 뱃길(causeway)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피라미드의 의미는 누구든지 장엄하게 건설한 왕의 무덤을 쉽게 바라보면서 죽어서 신적인 존재가 된 파라오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피라미드의 독특한 모양은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태양신 라의 빛이 한 정점인 피라미드의 꼭지로 내려와 정확하게 동서남북으로 향한 피라미드의 네 개의 경사면을 따라 사방으로 퍼진다는 해석이 가장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두 번째로는 이집트에서의 창조와 관련된 '원시 언덕' (primeval mound)의 상징으로써 피라미드를 건설했다는 주장이다. 즉 나일강이 범람한후 물이 빠지기 시작하여 드러나는 언덕에서 새로운 식물이 싹을 틔우듯이 태양신이 바로 이 언덕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초기의 계단식 피라미드의 경우 처럼 죽은 파라오가 한 계단씩 밤하늘을 향하여 올라간 후 밤새도록 지지 않는 주극성(circum polar stars)의 별자리가 되었다는 신화와도 관계가 있다.
〔신전 건축〕 고대 이집트의 신전은 일반인들이 모이는 예배 장소라기보다는 그곳에 모셔진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 및 제의 활동을 위한 공간인 동시에 신의 집이라는 건축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신전에는 왕족, 사제들, 그리고 관리 등의 계층만이 참여하여 신들에게 제사와 제의 행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최초의 신전은 직사각형의 울타리 안에 신의 현존을 상징하는 깃발을 꽂고 제물을 봉헌하는 건물이 자리 잡은 단순한 형태였다. 이집트 최초의 석조 건축물로 손꼽히는 제3 왕조 조세르 왕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거대한 신전 울타리 한복판의 기념비 겸 무덤으로 건설됐다. 이집트를 대표하는 유적지로써 신전은 신들에게 봉헌된 일반 신전과 파라오에게 봉헌된 장례 신전으로 구분된다. 장례 신전의 발전은 무덤의 발전과 반비례한다. 즉 고왕국 시대에 거대한 규모의 피라미드 동쪽에 위치한 장례 신전의 크기는 작은 편이었다. 나일 강변에나 운하로 연결된 지점의 계곡 신전도 그 기능상 장례 신전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신왕국 시대에 무덤은 지하로 들어가 지상에서 사라진 반면 장례 신전은 나일 강변에 거대한 규모로 건설됐다. 이 시대의 장례 신전은 단순히 제의적 목적뿐만 아니라 일종의 왕궁으로써 여러 부속 건물과 창고도 갖춰져 있었다.
IV . 성서에서의 이집트
〔성서의 유적〕 이스라엘은 그 지정학적 위치상 주변의 강대국인 이집트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이집트는 고왕국 시대(기원전 2625~2130)부터 시나이 반도의 터키옥 광산을 개발했으며, 선박 건조용 목재를 확보하기 위해서 레바논의 비블로스와 해상 무역을 하는 등 일찍부터가나안 지역에 진출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비록 메소포타미아(갈대아 우르)나 시리아(하란) 출신이지만, 그의 여정 중에는 이집트가 포함돼 있다. 나아가 요셉의 후예들이 400여 년 동안 노예로 지내다가 출애급하여 가나 안에서 열두 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했기때문에, 이집트를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지로 볼 수도 있다.
이집트 중에서도 나일 삼각주의 북동쪽 지역인 고센 땅이 이스라엘 민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프랑스에 의해 주도되었던 이집트에 관한 연구는 19세기 말 이곳에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인식한 영국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이미 밝혀진 나일 강변을 따라 늘어선 고대 이집트의 유적지들과는 달리 곡창 지대였던 하 이집트의 유적들은 수많은 나일 강의 지류들의 영향으로 이미 오래전에 물속에 잠기거나 아니면 주변에 형성된 촌락의 건축 자재로 모든 돌들이 뜯겨 나가서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삼각주 지역에는 고고학자들의 눈길을 끌 만한 유적지는 거의 없는 상황에서 1882년 런던에서 결성된 영국의 '이집트 탐사 학회' (Egypt ExploraitonSociety)는 첫 사업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4백 년 동안 거주했다는 고센 땅의 옛 도시들을 찾아내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주된 활동은 출애굽기에서 묘사하는 4백년 동안 히브리 민족의 이집트 체류의 지리적 배경인 고센 땅의 고대 도시들을 고고학적으로 발굴하는 것이었다.
영국의 이집트 탐사 재단이 최초로 찾고자 하는 도시는 삼각주 지역 중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였던 라므세스였다. 마침 이스마일리야 운하변에 위치한 텔 엘-마스쿠타에서 발견된 붉은 화강암으로 조각된 석상에는 모두 세 인물이 조각되어 있는데 한가운데에 라므세스 2세의 명각(銘刻)이 새겨져 있어서 이 유적지를 라므세스로 여겼다. 라므세스 도시는 이스라엘 민족이 건설했던 국고성일 뿐만 아니라(출애 1, 11) 고대 이집트 기록에서 자주등장하는 제19 왕조와 제20 왕조의 하 이집트 수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하지만 발굴 결과 이곳이 라므세스가 아니라 "비돔"(Pithom)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이유는 이곳에서 출토된 기원전 600년경 기록된 한 석비에 새겨진 "체쿠에 있는 페르-아툼"이라는 구절 때문이었다. 만일 텔 엘-마스쿠타가 비돔이라면 라므세스 2세 시대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라므세스와 비교할 수 없다. 출애급의 두 도시인 비돔과 라므세스와 관련하여 고센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의 첫 번째 목적지였던 수꼿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수꼿" (סֻכּוֹת)은 히브리어로 '천막' 이라는 뜻을 지닌 수카(סֻכָּה)의 복수형으로써 유목민들의 천막촌을 의미한다. 수꼿이 출애급 이야기에서 출발지인 람세스를 떠난 후 첫 번째 도착한 지역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출애 12, 37) 19세기의 성서학자들은 이집트의 나일 강 삼각주 지방 중에서도 되도록 가나안과 가까이 있는 북서쪽의 고센 땅에서 그 위치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1875년 부룩쉬(H. Brugsch)는 이집트 지명과 히브리어 지명의 유사성을 통해서 이집트 고대 기록에서 등장하는 "체쿠"가 출애굽기의 수꼿으로 볼 수 있다고 처음으로 주장했다. 만일 이집트의 체쿠가 성서의 수꼿이라면, 수꼿은 고대 이집트 기록에서는 항상 비돔과 같이 등장하기 때문에 비돔과의 관계 속에서 그 지리적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비돔과 함께 출애급의 출발지로 여겨지는 도시 라므세스는 기원전 1300년경 세티 1세에 의해 처음으로 건설됐고, 라므세스 2세의 왕궁으로 확대 발전된다. 이 도시의 공식 명칭은 '페르-라메수-메리-이멘" , 즉 '아몬의 사랑하는 라므세스의 저택'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라므세스에 위치한 신전들 중에서도 아스타르테 여신은 원래 가나안 민족의 신으로서 아마도 기원전 1650년경 힉소스 민족이 이 지역에서 세력 확장을 하면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배들이 쉴 새 없이 라므세스 도시에 정박해 있거나 출항한다는 기록을 통해서 왕궁 근처에 연못이나 내륙 호수가 일종의 항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오늘날에도 라므세스 도시의 유적지인 칸티르 근처에는 파쿠스 하천, 사마나 운하, 칸티르 수로, 아마르 수로 등 크고 작은 하천과 수로들이 얽혀 있어서 사방으로 엮어진 운하와 수로 교통이 발달했던 라므세스 시대의 주변 지리적 여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고대 이집트어로 이우누, 또한 구약성서의 히브리어와 콥트어(Coptic)로는 온(On)이라 불렸던 헬리오폴리스는 하 이집트 제13주의 수도로서 오늘날 카이로 북동부 지역의 엘 마타리야 마을에 위치한 텔 히슨(Tell Hisn)이다. 이곳에는 제3 왕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던 흔적이 있으며, 적어도 제5 왕조 시대부터는 태양신 라, 라아툼 등을 위한 신전이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 신전은 50만 ㎡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였다. 신왕국 시대의 아멘호테프 3세(기원전 1390~1352), 세티 1세(기원전 1294~1279), 라므세스 2세, 메르넵타(기원전 1213~1203) 등이 건설한 신전의 흔적이 단편적인 유물들로 밝혀졌다. 이 도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곳에는 20미터 높이의 센우스레트 1세(Senusret I, 기원전 1965~1920)의 오벨리스크만이 남아 있다.
아바리스는 기원전 1900년경 중왕국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으며, 기원전 17세기에는 남부 팔레스티나 출신의 힉소스들이 수도로 건설하여 제15왕조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늘날의 텔 에-다바는 1966년부터 오스트리아 발굴단의 비탁(Manfred Bietak) 교수에 의해 발굴되기 시작하여 신전, 왕궁들의 유적과 묘지들을 발견하였다. 특별히 무덤에서 나온 토기들과 무덤의 축조 양식 등은 팔레스티나의 것과 거의 유사하기 때문에 제15 왕조 힉소스는 가나안 남부 지방의 사람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오늘날 이곳의 발굴 현장들은 다시 흙속에 파묻혀서 찾아보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타니스는 하 이집트 제19주의 수도로서 주로 후기 시대(기원전 747~332)에 번성했었다. 타니스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은 마리에트(1860~1880), , 페트리(1883~1886) , 몽테(1921~1951) 등에 의해 차례로 진행되었다. 이곳의 발굴을 통해 고왕국, 중왕국 시대, 그리고 제19 왕조의 라므세스 2세의 유물들이 발견되었지만, 대부분 건축 자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다른 지방에서 운반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원래 타니스에 건설된 최초의 건물은 제21 왕조의 프수세네스 1세(Psusenes I, 기원전 1039~991)가 건설한 아몬 신전과 이를 중심으로 가로 430m, 세로 370m나 되는 거대한 규모의 울타리였다. 타니스 요새의 남서쪽 지역에는 무트(Mut), 콘수(Khonsu) 신들을 위한 신전이 건립되었고, 이 신전에서는 가나안 사람들의 여신 아슈타르테를 숭배하였다. 이 신전은 기원전 3세기 말 프톨레메우스 4세(기원전 222~205)에 의해 재건되었다. 1939년 몽테는 이곳에서 프수세네스 1세, 아메네모페(기원전 993~984), 오소르콘 2세(기원전 874~850), 셰송크 3세(기원전 825~773) 등의 무덤을 발굴하였다. 타니스의 무덤 유물들을 통하여 제3 중간기(기원전1069~747) 왕들의 명단과 당시의 물질 문명의 척도를 잘 알게 되었다. 오늘날 이 지역은 일종의 거대한 야외 박물관을 방불하게 할 정도로 수많은 석재 조각들이 널려져있다.
레온토폴리스(Leontopolis)는 아랍어 '텔 엘-야후디야'로 '유대인들의 언덕' 이라는 뜻이며, 헬리오폴리스가 수도인 하 이집트 제13주에 속한 도시였다. 오늘날 이곳에 남아 있는 유적은 가로 515m, 세로 490m에 달하는 거대한 요새이다. 이 요새의 축조 방식은 이집트에서는 매우 생소한 것이어서 기원전 17세기 힉소스들이 군사적 요새로 건설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성서에 언급된 이집트〕 성서와 이집트의 관계를 시대적으로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이스라엘 역사의 초기부터 이집트에 대해 언급되어 있지만, 그때가 정확히 이집트의 어떤 시기인지 밝히는 것은 보다 많은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일시적으로 이집트를 방문한 이야기(창세 12, 10-20)에 대해서는 그 역사성이 의문시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가 기원전 20~19세기 중근동의 삶을 반영하고 있기에 일방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또한, 야곱과 그의 후손들의 이집트 거주(창세 39, 1 ; 출애 14, 31)가 과연 언제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한 확실한 의견은 없다. 이집트 탈출부터 솔로몬 치세 제4년(기원전 958)까지를 480년이라고 성서는 언급한다(1열왕 6, 1). 이 기록이 맞다면, 이집트 탈출은 기원전 1458년에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이 추정은 이집트 역사에 관한 고문헌과 고고학적 발굴 자료와 상충된다. 라므세스 2세의 치적을 기록한 이집트 문헌에 따르면, 하비루들이 도시 요새들을 건설하기 위해 벽돌 나르는 일에 강제로 징집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식량을 저장하는 성읍 비돔과 라므세스를 짓는 데 동원되었다는 성서의 증언(출애 1, 8-14 ; 5, 6-19)과 비슷하다. 또한, 라므세스 2세의 후계자인 메르넵타(Merneptah, 기원전 1213~1203)가 세운 승전비에 가나안을 징벌할 때 그가 무찌른 민족들 중에 이스라엘이 포함되어 있다. 이 승전비가 기원전 1234년 경에 세워진 것으로 학자들은 여기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은 이보다 더 앞서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집트 탈출의 연대를 라므세스 2세의 통치 때인 기원전 13세기 초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산 기간이 430년(출애 12, 40)이 맞다고 한다면, 이집트에서 거주하게 된 시기는 기원전 1800년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후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었을 때 팔레스티나를 침략하였다. 성서에서는 "시삭"(1열왕 11,40)이라고 언급된 세송크 1세가 르호보암(기원전933~916)의 통치 제5년에 유대 왕국을 침략해서 성전에 있는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가져갔다고 전해 준다(1열왕14, 25-26). 사실 세송크 1세가 남긴 문헌에 따르면, 그가 정복한 유대 왕국의 지역으로 라피아, 아얄론, 벳-아낫, 아둠밈, 벳-호론, 기브온, 므기또, 수넴, 라빠, 마하나임 등이 열거된다. 또한, 그는 므기또에 이에 대한 승전비를 남겼다.
성서에 "느고" 라고 언급된 언급된 네코 2세는 아시리아의 임금을 돕기 위해 유대 왕국으로 쳐 들어온다(2열왕23, 29 ; 2역대 35, 20). 당시에 아시리아 임금은 주요 성읍인 니느웨와 아쑤르를 기원전 614년과 612년에 바빌론 사람들과 메대 사람들에게 이미 빼앗긴 상태였다. 요시아(기원전 640~609)는 기원전 609년 군대를 이끌고 므기또에서 이집트의 군대와 싸우다 전사하였다. 그 후 4년 간(기원전 609~605) 이집트가 팔레스티나와 시리아를 장악하였다. 네코 2세는 아시리아 동맹군과 함께 하란을 탈환하려다 바빌로니아에게 패했지만, 이집트의 국경을 시리아까지 넓히는 소득을 얻었다. 유대인들은 요시야의 후계자로 그의 아들 여호아하즈(기원전609) 임금으로 세우지만, 네코 2세는 그를 폐위시키고 이집트로 압송하였다(2열왕 23, 31-34 ; 2역대 36, 2-4). 그리고 그의 형 여호야킴(기원전 609~598)을 임금으로 세웠다. 그는 이집트의 종속국 군주 구실을 충실하게 행하면서 책임 있는 통치보다는 자신의 지위를 강화시키는 데 더 골몰하였다(2열왕 23, 35 ; 2역대 36, 3-4 ; 예레 22, 13-19). 기원전 605년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이 가르그미스에서 이집트를 대파하고 남부 시리아의 하맛까지 이집트 군대를 추격해 내려왔다. 그로 인해 이집트의 네코 2세는 군대를 본국으로 후퇴시켜야 했다(2열왕 24, 7).
〔예레미야의 이집트 체류〕 기원전 587년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다가 라마에서 느부사라단을 만나 석방되었다(예레 40, 1). 그 후 그는 미스바에서 유다를 통치하고 있던 바빌로니아의 꼭두각시 총독 게달리아와 함께 지냈다. 유다의 군대 장관이었던 이스마엘은 암몬 왕 바알리스의 사주를 받아 게달리아를 암살하고(예레 41, 2) 미스바를 파괴한 후 포로들을 잡아 암몬으로 데려가고자 했다. 하지만 이에 반발하는 요하난 일파는 기브온에서 이스마엘 세력과 전투를 벌여서 포로들을 석방시켰고, 이스마엘은 부하들과 함께 암몬으로 도망갔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바빌로니아에 대항했던 이스마엘을 물리친 요하난 일파가 바빌로니아 세력을 피해서 이집트로 피난 갔다는 것이다(예레 41, 16-18).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조언을 구하였고 예레미야는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예레 42, 8-22). 하지만 요하난과 아자리야 등은 예레미야와 나머지 유대인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간다. 예레미야는 삼각주 지역의 다흐반헤스에 거주하면서 예언 활동을 계속했다(예레 43, 8).
다흐반헤스는 오늘날의 텔 에-데페나(Tell ed-Defenna)이며, 이집트어로는 '타헷트 엔트 파 엔헤시' 로서 '파- 엔하시에 있는 요새'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페트리가 발굴할 당시 이곳은 현지인들에 의해 '카세르 빈트 엘-야후디야' (Qaser bintel-Yahudiyah) , 즉 '유대 여인의 요새'라는 의미로 예레미야와의 연관성을 희미하게나마 전해 주고 있다. 다흐반헤스는 칸타라 서쪽 8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1887년 페트리에 의해 처음으로 발굴되었다. 그 결과 제26 왕조의 창시자인 프삼티크 1세(Psamtik I,기원전 664~610) 시대의 요새를 발견하였고, 함께 출토된 많은 양의 그리스 토기류와 유물을 통하여 그리스 용병들이 이곳에 주둔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다흐반헤스에서 는 네코 2세, 프삼티크 2세(기원전 595~589), 아프리에스(기원전 589~570) 시대의 주거 흔적도 밝혀졌다. 기원전 600년경 카노푸스 지류에 접 한 나우크라티스(Naukratis)가 새로 건설되면서 다흐반헤스의 중요성이 사라졌다. 하지만 계속해서 페르시아 시대, 그리스-로마시대의 주거 흔적이 나타난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시대에 아랍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다프나이(Daphnae) , 엘레판티네(Elephantine), 그리고 메로에(Meroe) 등에 요새를 건설했다고 증언하였다. (→ 라므세스 2세 ; 멤피스 ; 수꼿 ; 아마르나 ; 알렉산드리아 ;유대 왕국 ; 이스라엘)
※ 참고문헌  C. Aldred, The Egyptians, London, Thames and Hudson,1961(신복순 역, 《이집트 문명과 예술》, 대원사, 1996)/ J. Bains · J.Malek, Atlas of Ancient Egypt, Oxford, Phaidon, 1980/ P.A. Clayton,Chronicle of the Pharaohs : The Reign-by-Reign Record ofthe Rulers and Dynasties of Ancient Egypt, London, Thames and Hudson, 1994/ M. Collier · B. Manly, How to Read Egyptian Hierogyphs, London, British Meseum, 1998/ I.E.S. Edwards, The Pyramids of Egypt, Harmondworth, Penguin Books, 19471 A. Gardiner, Egypt ofthe Pharaohs, Oxford, Oxford Univ. Press, 1961/ N. Grimal, Histoire de I'Egypte ancienne, Paris, Fayard, 1988/ G. Hart, Egyptian Myths, London, British Museum Press, 1990(이용균 . 천경효 역 , 《이 집 트 신화》, 범 우사, 1999)/ Herodotus, The Histories, Harmondsworth, Penguin Books, 1981(박광순 역, 《헤로도토스 역사》, 범우사, 1987)/ S. Ikram · A. Dodson, The Mummy in Ancient Egypt : Equipping the Dead for Eternity, London, Thames and Hudson, 1998/ M. Lehner, The Complete Pyramids, London, Thames and Hudson, 1997/ S. Quirke, Ancient Egyptian Religion, London, British Meseum, 1992/ D.B. Redford, Egypt, Canaan, and Israel in Ancient Times, Princeton, Princeton Univ. Press, 1992/ D.B. Redford ed., The Oxford Encyclopedia of Ancient Egypt, 3vols., Oxford, Oxford Univ. Press, 2000/ R.H. Wilkinson, The Complete Temples of Ancient Egypt, London, Thames and Hudson, 2000. 〔金 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