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강원도 이천군(伊川郡) 이천읍(伊川邑) 소재. 1883년 4월에 설립되었다. 처음 설립될 당시에는 이천 섭골(현 강원도 이천군 山內面 龍浦里)에 있었으나 뒤에 보다 넓은 지역인 염산리(廉山里, 현 강원도 이천군 산내면 松亭里)로 이전하였고, 1908년에는 다시 망답(望沓, 현 강원도 이천군 이천읍 開下里)으로 이전 하였으며, 뒤에 또다시 이천읍내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1945년 광복 후 38도선의 설치로 침묵의 본당이 되고 말았다.
강원도 이천은 황해도 신계 지방과 접해 있는 험준한 산악 지대이다. 이 때문에 병인박해 때 많은 교우들이 피난처를 구해 이곳으로 들어왔다. 이 험준한 산속에서 그들은 신앙의 위협을 받지 않고 신자 생활을 순순하게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1876년에 처음으로 모여서 성사를 받았다. 이렇게 험준한 산중에서 시작된 신앙 활동은 점차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이처럼 복음 전파의 중심지 구실을 한 이천에 본당이 처음 설립된 것은 1884년 4월이었다. 드게트(Deguette, 崔東鎮) 신부가 같은 해 4월부터 이천의 섭골(섭가지)에 거주하면서 강원도 동북 지역과 함경도 지역의 사목을 담당함에 따라 이천 본당(섭가지 본당)이 설립되었다. 드게트 신부가 1884년 후반부터 강원도 남부와 충청북도 지역을 담당함에 따라 푸아넬(Poisnel, 朴道行) 신부가 이천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일대와 함경도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4년 후반부터는 푸아넬 신부가 이천 본당의 주임을 맡았다. 이 무렵 이천 지역의 섭골을 중심으로 산재해 있는 12개의 작은 마을들은 신입 교우들을 교회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 경쟁이라도 하듯 열성을 내고 있었다. 푸아넬 신부는 머지않아 이 산촌 구석구석마다 천주교 촌란이 들어서고, 천주교회가 이곳에서 급성장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처럼 기대에 부푼 푸아넬 신부가 1885년 후반에 경기도로 전임됨에 따라 그의 사목 지역은 다시 드게트 신부에게 위임되었다. 이리하여 드게트 신부는 다시 이천 본당의 주임을 맡게 되었다.
드게트 신부가 1887년 7월 무렵에 원산 본당 주임으로 부임함에 따라 쿠데르(Coudere, 具瑪瑟) 신부가 이천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쿠데르 신부는 이천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일대와 함경도와 평안도까지 합해서 28개의 공소를 관할하였다. 본당이 설정된 이래 그 인근 지역에서 교세의 발전이 현저하게 이루어졌는데, 이와 같이 교세가 크게 확대됨에 따라 쿠데르 신부는 좁은 골짜기에 위치해 있는 섭골에서 상당히 넓은 골짜기에 위치해 있는 염산리로 본당을 이전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簾山本堂). 이렇게 본당의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던 쿠데르 신부는 1892년 4월 27일 서울에 올라갔다가 열병을 앓아 5월 15일 선종하였다. 이에 따라 황해도와 평안도의 사목을 담당하고 있던 로(Rault, 盧若望) 신부가 이천 본당을 잠시 돌보게 되었다.
뒤테르트르(Dutertre, 姜良) 신부가 1892년 5월에 쿠데르 신부의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뒤테르트르 신부는 1893년 겨울에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였다. 신자들은 엄동 설한에 눈 속을 헤치며 성당 건축에 필요한 나무들을 베어 운반하였다. 이렇게 목재가 다 준비되자 목수와 석공들을 고용하여 성당을 짓기 시작하였다. 성당은 다음해 8월 15일 완공되어 여기서 첫 미사를 드릴 수 있었다. 이처럼 성당 건축 공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동학도들이 부근에 속출하였다. 뒤테르트르 신부는 동학도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유럽식 장비를 갖춘 6명의 포수들을 보내 관군을 지원했다. 이들은 관군이 동학군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입교자수가 매우 증가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계속되는 교세 확장과 예비 신자들의 격증으로 1896년에는 포내(浦內)본당을 분할시켰다. 그로 인해 담당 사목 지역이 줄어들게 되자, 뒤테르트르 신부는 여가를 이용해서 《신입 교우들을 위한 강론집》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또한 뒤테르트르 신부는 두 차례의 교안(敎案) 사건에 휘말려 많은 곤경을 겪기도 하였다. 즉, 1900년 11월에 이천군 귀당(龜塘)에 사는 김순식(金淳植) · 김응섭(金應燮) 등이 성당을 파괴하고 뒤테르트르 신부를 폭행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또 1901년 원주에서는 뒤테르트르 신부가 강원도 관찰부(觀察府)에 함부로 들어가서 관에 압력을 가했다는 오해를 받은 사건이 일어났다. 1901년 11월 26일에는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사목 방문하여 290여 명의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본당 발전을 위해 헌신하던 뒤테르트르 신부는 공소 순방 중에 성홍열(또는 홍역)에 감염되어 1904년 3월 11일 평강 근처의 거릿말에서 선종하여 그곳에서 멀지 않은 자치봉 언덕에 안장되었다.
루케트(Rouquette, 盧大有) 신부가 1904년 봄에 뒤테르트르 신부의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루케트 신부는 마을 전체가 외교인들로 이루어진 지역을 복음화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1908년 마을 주민의 대부분이 외교인으로 구성된 망답으로 본당을 이전하였다(望沓本堂) . 루케트 신부는 그곳에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는 등 매우 적극적으로 사목하였다. 신자들의 교육을 위해 평강 구역에 신식 학교도 두 개나 세웠다. 그중 한 학교에서 선생이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의병들이 알고, 책을 압수한 후 이를 계속하면 집 전체를 불사르겠다고 위협하여 그 선생은 공포에 질려 달아나고 말았다. 1913년 11월에는 뮈텔 주교가 사목 방문하여 134명의 신자들에게 견진성사를 주었다. 이렇게 적극적인 전교 활동을 펼치던 루케트 신부는 1914년 폐병이 악화되어 본당 주임을 사임한 뒤 12월 25일 선종하였다.
김윤근(金允根, 요셉) 신부가 1915년 6월에 루케트 신부의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김윤근 신부는 성당이 좁아 신자들이 많은 불편을 겪게 되자 1919년 봄에 아름다운 한옥 성당 28칸과 사제관 20칸을 신축하여 신자들의 편의를 도모함과 더불어 청년회 · 애련회 · 루르드회 · 소년 조배회 등 많은 신심 단체를 조직하여 본당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22년 당시 망답 본당의 공소는 20개, 교우는 1,591명에 달했고, 공소마다 경당이 있었다. 뮈텔 주교는 1922년 9월에 사목 방문하여 루르드의 성모에게 봉헌된 새 성당을 축성하였으며, 226명의 신자들에게 견진성사를 주었다. 김윤근 신부의 후임으로 1923년 9월에 피숑(Pichon, 宋世興) 신부가 부임하여 1927년 8월까지 사목을 담당하였으며, 피숑 신부의 후임으로는 정원진(鄭元鎭, 루가) 신부 등 여러 신부들이 이어졌다.
산간 벽지에 있는 작은 본당이었지만 청년회의 활동이 특별히 주목을 받아 그 활동 내용이 누차 《경향잡지》에 소개되었다. 즉, 1934년에 청년회 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 중병에 걸려 농사일을 돌보지 못하게 되자 회원들이 주일 오후에 파공 면제를 얻어 농사일을 대신 해주었고, 또한 청년회의 기본금을 마련하고자 논 5백 평을 소작지로 얻어 공동 경작하여 그 수확의 일부를 고아원과 용산 신학교에 기금으로 내고 그 나머지를 청년회의 기본금으로 적립하였다. 아울러 1935년에는 인근의 죽음을 앞둔 어린아이와 부녀자에게 대세를 준 후 사망하자 관을 준비하여 장례를 치러 줌으로써 인근의 외교인들을 감동하게 하였고, 또한 금주 · 단연으로 기금을 만들어 대신학교와 고아원에 기부하였으며, 큰 풍금을 사서 본당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1936년 11월 16일에는 라리보(Laribeau, 元亨根) 주교가 사목 방문하여 210여 명의 신자들에게 견진성사를 주었는데, 1937년 당시 본당의 신자수는 1,220명이었다. 수년 전에 본당을 읍 밖 망답에서 읍내로 이전하여성당, 사제관 등을 신축하였으며, 1939년 4월 25일에는 춘천교구가 설정됨에 따라 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945년 광복 후 38도선의 설치로 침묵의 본당이 되고 말았다. (→ 김윤근 ; 뒤테르트르 ; 루케트 ; 춘천교구 ; 포내 본당)
※ 참고문헌 《서울 教區年報》 I . Ⅱ, 한국교회사연구소,1984 · 1987/ 《뮈텔 주교 일기》 3, 한국교회사연구소, 1993, pp. 101~104/ 《뮈텔 주교 일기》4,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pp. 273~274/ 《함경도 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pp. 42~55/ 《黃海道天主教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pp. 53~55/ 《양양 본당 80년사》, 천주교 춘천교구 양양 교회, 2001, pp. 43~55/ 《경향잡지》 526호(1923. 9),786호(1934. 7), 792호(1934. 10), 800호(1935. 2), 805호(1935. 5), 811호 (1935.8), 814호(1935. 9), 821호(1936. 12), 887호(1938. 10)/ 李元淳, 〈朝鮮末期社會의 '敎案' 硏究>, 《韓國天主教會史 硏究》, 한국교회사연 구소, 1986, p. 176/ 崔奭祐, 《韓國天主教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 소, 1982, pp. 243~246. 〔徐鍾泰〕
이천 본당
伊川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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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