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체 李林(1840~1911)

글자 크기
9
청말(淸末)에 활동한 중국인 예수회 신부. 저술가. 번역가. 출판인. 교육자. 강소성(江蘇省) 천사(川沙) 서이가(西李家, 현재 상해 천사현) 출신. 본명은 호연(浩然). 세례명은 라우렌시오. 자(字)는 문어(問漁). 호(號)는 대목제주(大木齋主). 12세에 상해 서회공학(西滙公學)에 입학하여 1862년에 졸업하였는데, 재학 중인 1856년 8월 18일 성모 시태회(聖母始胎會)에 가입한 기록이 남아 있다. 1862년 졸업과 동시 예수회에 입회하여 1872년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이후 6년 동안 선교 업무를 전담하다가 1878년부터 상해 동가도(董家渡) 소수도원(小修道院)의 라틴어 교수로 봉직하였다. 소수도원은 전국의 유망한 인재를 최다 125명까지 발탁하여 서양 선교사와 동등한 자질을 갖추도록 하는 중등 교육 신학원이었다. 이체의 문필가로서의 재능은 이미 잘 알려져 사제로 서품되던 해에 이미 서회공학의 은사이며 당대 최고의 선교사 한학가(漢學家)인 예수회 신부 안젤로 조톨리(Angelo Zottoli, 晁德莊)의 저술 《진교자증》(眞敎自證)을 교열하였다. 그는 1879년 3월 16일 상해에서 가톨릭 회보인 《익문록》(益聞錄)을 반월간으로 창간하였다가 제11기부터는 주간으로 발행하였으며, 1898년 8월 17일 〈격치신보〉(格致新報)와 합병하여 〈격치익문회보〉(格致益聞滙報)라는 제호로 주 2회 간행하였다. 이 회보는 1907년에 〈시사과학회보〉(時事科學報)로,1908년부터는 간략히 〈회보〉(滙報)로 명칭이 바뀌었다. 〈익문록〉은 교회뿐 아니라 중국 국민을 크게 계몽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체는 1887년 6월 1일에는 월간 《성심보》(聖心報)도 창간하였다. 이 당시 강남에서는 심즉관(沈則寬), 장승계(蔣升階) 신부와 마량(馬良) 등 많은 중국인 예수회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계몽 정치가이자 교육자인 마량은 이체와 동갑으로 서회공학의 동기일 뿐 아니라 예수회도 함께 입회하였다. 비록 사제직을 포기하였으나 마량은 1903년 예수회 정신에 입각한 고등 교육 기관인 진단학원(震旦學院)을 상해에 설립하였는데, 이체는 1906년부터 이 학원 원장과 철학 교수를 맡았으며 〈회보〉와 《성심보》의 주편(主編)도 겸하였다. 〈회보〉는 이체가 1911년 6월 8일 향년 72세로 서거하자 8월 12일자로 정간되었고, 교회는 이듬해 《성교 잡지》(聖敎雜誌)를 발간하여 이를 대신하게 하였다. 이체는 "책을 쓰지 않았던 해가 없었다"고 스스로 회고할 만큼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저술과 번역이 60종에 달하는 데 창작 17종, 번역 39종, 편집 4종이다. 이 가운데 학술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것으로는 《이굴》(理窟) · 《철학제강》(哲學提綱) 2권 · 《신경역의》(信經譯義) · 《객문록존》(客問錄存) · 《천연론박의》(天演論駁義) · 《경자교난기》(庚子敎難記) · 《권화기》(拳禍記) 2권이 있다. 특히 《권화기》는 의화단(義和團) 운동의 전 과정과 중국 각지
의 교회와 교민에게 끼친 의화단의 피해를 당대에 서술하여 사료로써의 가치가 높다. 편저 중에는 중국 천주교의 초석이라고 불리는 서광계(徐光啓)의 《서문정공집》(徐文定公集, 1896)과 오력(吳歷) 신부의 《묵정집》(墨井集, 1909)이 있다. 상해 서가회(徐家匯)에는 당시 교회 업무와 출판 일과 관련된 그의 서찰이 수십 통 보존되어있다. 이체는 성직자로서 평생을 저술 · 번역 · 교육 사업에 바쳤고, 특히 출판물을 통하여 그리스도교를 널리 선교하며 대중 계몽 운동을 펼친 중국의 개화 선각자였다.
※ 참고문헌  方豪, 《中國天主教史人物傳》 第三冊, 香港, 公敎眞理學會, 1973/ 鐘鳴旦 等, 《徐家匯藏書樓 明清天主教文獻》 5卷, 臺北, 輔仁大學神學院, 1996. 〔張貞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