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영J[ta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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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대제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 주는 교황 레오 3세.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남부 유럽에 있는 반도 국가. 공식 이름은 이탈리아 공화국(Italian Republic)이며, 양원제를 택한 의회제 국가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하여, 남부 유럽의 주요 전략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수도는 로마이며, 국교는 없으나 국민들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이다.
북으로 알프스 산맥이 프랑스 · 스위스 · 오스트리아와 자연적인 국경을 이루고 있으며, 남으로는 지중해가 펄쳐져 있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들과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다. 동으로는 아드리아 해를 건너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마주 보고 있다. 이탈리아 반도의 총 면적은 301 263km로써 한반도의 약 1.5배이다. 영토는 알프스 산맥 이남에서 지중해로 길게 뻗어 있는 장화 모양의 긴 반도와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 70여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며 사계절의 구분은 한국에 비해 덜한 편이다. 즉 겨울이 끝나면 여름이 일찍 시작되며 가을과 겨울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사계절보다는 이 계절적 특징이 더욱 강하다. 위도상 이탈리아가 한국보다 북부에 위치하고 있지만, 지중해성 기후로 인해 대체적으로 따뜻하다. 경작 가능한 토지는 북부 지역의 포(Po) 강 유역에 집중되어 지역적 격차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전 국토의 35%는 산악이고, 42%가 구릉 지대이며, 약 23%만이 평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탈리아의 역사는 로마 제국과 함께 시작되는데, 대략 기원전 7세기경 로마인들이 정치적으로 성장하여 주변을 통합하면서 제국으로 성장하였다.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이탈리아 반도는 권력의 진공 상태가 되었으며, 19세기 중반에 이탈리아가 통일될 때까지 끊임없이 외세의 유입과 침입을 받았다. 중세 시기에 가톨릭 교회는 반도 내에서 중심 세력으로 영향을 미치는데, 이는 800년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768~814)가 교황 레오 3세(795~816)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교황은 또한 교황령의 수장으로서 세속적인 권력도 행사하였다.
: I . 중세 시기의 이탈리아
[중세의 시작] 중세 이탈리아 교회의 첫 번째 과업은 반도 내로 들어온 야만족들을 기존의 교회 구조에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5세기와 6세기 이탈리아에서 게르만왕국들의 설립은 기존의 가톨릭 교회에 병행하는 아리우스주의 교회를 만들었다. 동고트의 테오도리쿠스 왕은 자신의 지배를 로마 제국의 연장으로 간주하였으며, 기존의 가톨릭 교회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의 통치는 로마-그리스도교 문학의 번영기와 일치하는데, 이는 보에 시우스(A.M.T.S. Boetius, 470/475?~524), 카시오도(Ca-ssiodorus, 480?~585) 등의 작품에서 잘 나타난다. 이후 이탈리아에서 고트족의 권력은 장기적인 전쟁(535~554)을통해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527~565)에 의해 파괴되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의 지배는 오래가지 않았는데, 이는 568년에 이탈리아가 게르만족의 한 갈래인 롬바르드족에게 침략당했기 때문이다. 아리우스주의를 따르고 상대적으로 문명화되지 못한 롬바르드족은 피정복민들과 성직자들을 억압적으로 대했으며, 가톨릭 교계 제도를 파괴하거나 유폐시켰다. 그들은 파비아에 수도를 두고 북부 이탈리아에 왕국을 건설하였다. 한편 토스카나의 일부를 포함한 로마 공국, 라벤나 총독, 나폴리 공국 및 시칠리아는 동로마 제국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교황과 롬바르드족의 여왕인 테오데린데(The-odelinde)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우호적으로 변모하였다. 반가톨릭적 대응이 있었으나, 7세기에 롬바르드 왕국과 그 백성들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롬바르드 왕들은 교회와 협조하지 않았으며, 교회 사람들을 정부에 포함시키지도 않았다. 더구나 동로마 제국의 재침입이 임박하자, 그들은 라벤나 총독부를 침입하고 로마를 위협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동방에서의 문제들 때문에 적절한 군사적 보호를 해줄 수 없었기에 그레고리오 1세 교황(590~604)과 그 계승자들은 롬바르드족의 세력 확장에 대한 이탈리아-로마 세력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8세기에는 교황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 오랫동안 존재하였던 갈등이 확산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황제 교황주의(Caseaopappimins)를 주장하고 있었기에, 선출된 교황을 비준하는 권리를 주장하였으며 교리 문제에 개입하려 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는 교황 비질리오(537~555)에게 삼장서를 단죄하도록 강요했는데, 이로 인해 이탈리아에는 교회 분리주의가 횡행하였다. 특히 헤라클리우스 황제(610~641)와 콘스탄스 2세 황제(641~668)는 그리스도 단의설(momobeletismms)과 양의설(dyotheletimus)을 언급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리스 도론에 대한 이단을 지지하였다. 또한, 콘스탄스 2세는 교황 마르티노 1세(649~653)가 황제의 칙령인 <티포스>(Typos)를 단죄하자, 그를 체포하고 유배시켰다. 8세기의 동로마 제국 황제들이 성화상 파괴를 지지하자, 수천명의 그리스 수도자들은 남부 이탈리아와 로마로 피신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2세(715~731)와 3세(731~741)는 황제 레오 3세(717~741)의 성화상 파괴 칙령을 반대하였는데, 황제는 그 대가로 칼라브리아와 시칠리아에 있는 교황 토지를 몰수함으로써 보복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3세가 로마에서 성화상 파괴자들을 배척하는 교회 회의(731)를 소집하자, 중부 이탈리아의 백성들은 교황을 지지하였다.
751년 롬바르드 왕인 아이스툴프(Aistulf, 749~768)가 라벤나를 장악하고 로마 공국을 위협하였다. 이로서 중부 이탈리아에서 동로마 제국의 군사력은 붕괴되었다. 롬바르드족에 대한 보호 조치가 없자 교황은 북부에서 새로이 부상하는 프랑크족에게 눈을 돌렸다. 교황은 프랑크 왕국의 피핀(Pippin, 741~768)에게 로마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두 차례의 전투(754~755, 756)에서 피핀은 롬바르드로부터 총독령을 빼앗았으며, 이를 교황에게 준 결과로 교황령(敎皇領)이 만들어졌다. 프랑크족과 교황의 연합은 피핀의 아들인 카를 대제 시기에 절정에 이르렀다. 이후 5세기 동안 이탈리아의 운명은 카롤링거 왕조의 왕들과 독일에 있는 그들의 계승자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프랑크 왕들은 롬바르드족에게는 낯선 반(半)신 중심주의의 왕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세속권과 교회 권력의 적절한 관계에 대한 프랑크족의 개념이 이탈리아에 이식되었는데, 이로써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변모하였다. 롬바르드 왕국의 모든 주교 선거에 왕이 재가하는 권리가 확립되었으며, 주교좌는 부분적으로 국가에 대한 의무를 지는 국가직이며, 주교 선출자는 왕의 충복이라는 원칙이 설정되었다. 824년에 로타르 1세(Lothar I,795~855)는 루트비히 1세(778~840)와 공동 황제로서 황제가 교황의 선출에 대한 재가권을 갖는 것을 인정하였다. 843년 로타르 왕과 두 아우 사이의 베르됨조약으로 영토가 분할되어 프랑스 · 독일 · 이탈리아의 원형이 이루어졌다.
프랑크 왕국 치하의 이탈리아 교회는 카롤링거 왕조에 의해 많은 개혁들이 확산되었다. 일부 이탈리아 주교들은 자발적으로 메츠의 크로데강(Chroleang)이 제안한 것과 프랑크 왕국에서 규범이 된 공동 생활을 자신의 성직자들에게 채택하도록 하였다. 《베네딕도 규칙》을 제국내의 모든 수도원들이 준수하도록 하였으며, 모든 성당에서 성직자들은 '규율 준수 생활' (Vita canonica)을 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개혁들은 나름대로의 결실이 있었으나, 봉건주의의 성장과 850년 이후 제국의 붕괴를 야기한 새로운 형태의 외침으로 부각되지 않았다. 일종의 원시 봉건주의가 롬바르드 이탈리아에 존재하였으나, 프랑크족의 정복 이후 좀 더 발달한 프랑크 왕국의 봉건 제도들이 반도에 유입되면서, 이들이 교회에 영향을 주었다. 많은 주교좌와 수도원들은 왕국으로부터 면세 제도를 통해 특혜를 받았으며, 지방 관청의 통제로부터 벗어났다. 주교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봉록을 받았으며 이것이 교회록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점증하는 무정부 상태는 9세기 말엽에 교황직이 거의 지방 기관으로 전락하게 만들었으며, 교황 선거를 지배하는 로마의 파벌들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교황들이 외국의 보호를 받으려는 시도와 필요한 개혁을 수행하려는 노력은 오래가지 못하였으며, 북부 이탈리아의 교구들은 점차 정치 투쟁에 빠져들었다. 왕이 지명한다는 측면에서 주교는 사실상 왕의 봉신에 가까운 것이었다.
오토 3세(996~1002) 치하에서 영성적 분위기는 급진적으로 변모되었다. 오토는 로마를 그리스도교 국가인 로마 제국의 수도로 삼고 싶은 욕망을 가졌는데, 이는 제국이 사제직을 수행하는 사도들의 봉사자인 황제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로 자리 매김시키려는 것을 의미하였다. 오토의 이상은 자신의 스승인 오리야크의 제르베르(Ger-band'aumilackc네이대회 수도자였다가 후에 교황 실베스테르 2세(999~1003)가 되는-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자신의 선친들과는 달리 오토 3세는 독일 주교들을 이탈리아에 임명하였다. 그는 중부 이탈리아를 교황에게 선사함으로써 라벤나와 로마의 확고한 군사적 통로를 확보한 셈이었다. 그는 또한 이탈리아 교회의 실질적인 개혁 계획을 교황에게 제시하였다. 998년 황제의 칙령으로 모든 교회의 재산이 해당 주교나 수도원 원장의 일생 동안만 유효하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교회봉신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오토의 죽음은 봉신들이 다시 권력을 잡는 것이었지만,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2세(1014~1024)에게 패하였다. 하인 리히 2세는 제국의 충실한 주교였던 베르철리의 레오의 도움으로 이러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1022년 파비아에서 개혁 교회 회의를 주도하였는데, 이 회의에서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하였다.
〔중세 중기] 이탈리아에서 중세 중반기는 10세기 후반 수도원에서 시작된 개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개혁 운동은 모든 사회 계층으로 파급되었다. 클뤼니 개혁 운동은 이탈리아에서 곧 호응을 얻었는데, 많은 수도원들이 이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이 개혁 운동의 초기에는 성직자들의 도덕적 변화를 강조하였는데, 이는 독일 왕인 하인리히 3세(1039~1056)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하인리히 3세의 집권 시기는 황제권이 교황권보다 강력했던 시기였다. 1046~1054년 사이에 그는 4명의 독일 출신 교황을 임명하였으며, 이들 중 세 번째 교황인 레오 9세(1048~1054)는 개혁 운동의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054년 이후 피렌체는 개혁 운동의 초점이 되었다. 피렌체의 주교는 1058년 개혁주의자들에 의해 선출되었으며, 후에 토스카나의 공작인 고드프루아(Godemio)에 의해 니콜라오 2세 교황(1058~1061)으로 등극하였다. 1059년 교황에 의해 소집된 라테란 교회 회의는 성직자의 도덕적 각성, 성직 매매 금지를 결정하였으며, 중요한 개선안인 교황 선거법을 반포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1073~1085)은 재임 초기에 결혼한 성직자에 대한 엄격한 조치를 취하였는데, 그레고리오 개혁의 중점 사항은 1075년 로마 교회 회의의 교령에 있는 것처럼 평신도의 성직 서임에 반대하는 투쟁이 었다. 개혁주의자들의 눈에 평신도의 성직 서임은 교회의 자율성을 파괴하고, 교회가 괴로워하는 도덕적 악의 원천이 되는 교회와 국가의 긴밀한 공생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인리히 4세의 반발과 밀라노 주교를 자신이 임명하려는 주장 등은 이탈리아를 반세기 동안 분열하게 만든 성직 서임 투쟁을 본격화하는 것이었다. 이 논쟁에서 교황에게 지속적으로 충성을 표시한 이탈리아의 유일한 유력자는 토스카나의 백작 마틸다였는데, 그녀의 군사 지원은 여러 차례 위험을 막아 주었다. 또한, 그녀의 관할 구역인 카노사(Canosa) 성은 1077년 그레고리오 7세 교황 앞에서 하인리히 4세가 용서를 청했던 장소였다. 1122년에 체결된 보름스 정교 조약은 성직서임 투쟁을 종식시켰다. 형식에 있어서 교회의 승리로 보이는 이 조약은 실제로는 이탈리아 도시들의 승리였다. 그 이유는 갈등 관계에 있는 당사자들과의 협상을 통해 선출된 집정관하에서 자신들의 독립을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9세기 초부터 아랍인이 지배하고 있던 시칠리아에는 이즈음 노르만 족이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1130년에는 시칠리아와 반도 남부가 통일되어 시칠리아 왕국이 세워졌다. 이 왕국에서는 그리스 · 아랍 · 노르만의 요소가 융합된 강력한 왕권 제도가 발전되었다.
성직 서임 투쟁 기간을 통해 황제의 많은 권한이 이탈리아의 도시들에게 이양되었다. 11세기에 유럽의 안정과 결제 . 발전을 배경으로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밀라노 등의 내륙 도시도 발전하였다. 도시가 번영하면서 귀족과 상인들은 자치 조직을 만들어 자치 도시 운동을 전개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로타르 3세 황제(1133~1137)나 콘라트 3세(1138~1152) 시대에는 급진적인 변화가 없었지만, 프리드리히 1세(1152~1190)는 이탈리아에서 황제의 권력을 확고히 하려는 결심을 하였다. 그는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를 시도했기에 교황 알렉산데르 3세(1159~1181)와 연합한 롬바르디아 동맹의 군사적 저항을 받았다. 이탈리아에서 6번의 전투 중 5번째인 루가노(1176)에서 프리드리히 1세는 패배하였다. 베네치아에서 교황과 화해한 그는 도시 국가들과 콘스탄츠 평화 협정(1183)을 맺으면서 실질적인 자치권을 허락하였다. 교황과 황제의 갈등을 통해 양자는 이념적 지지가 필요하였고, 결국 법학이 발전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볼로냐 대학이 중심이 되었다. 12세기에 교회법이 연구되면서 교황의 권위는 법적인 용어로 전환될 수 있었다. 1140년 경 그라시아노(Graiamus, ?~1158?)가 볼로냐에서 《그라시아노 법령집》(Decretum Gratiani)을 발간함으로써 교회법을 학문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1150년 이후 법령의 원칙들은 알렉산데르 3세와 인노천시오 3세(1198~1216) 등에 의해 계승 · 확장 · 적용되었다. 인노천시오 교황 시기에 교회의 구조는 군주국과 관료제의 형태를 띠게 되며, 교황청에서 훈련받은 법률가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켈피(Guelfi, 교황파)와 기벨리니(Ghibellimin, 황제파)는 교황들과 호헨스타우펜 왕조의 왕들 사이의 투쟁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용어이다. 그러나 이 두 용어는 본래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던 자치시(comme)들과 소군주들 내부의갈등으로 포장되었다.
십자군 시기(1100~130)에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그리고 롬바르디아와 토스카나의 많은 해상 공화국들은 서유럽에서 시작된 경제적 진보를 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무역과 산업의 팽창은 대규모의 중심지에서 발견되었으나 이탈리아의 전 지역에 그 효과가 파급되었으며, 이로 인해 사회 구조는 다양화되었고 여러 사회 집단 간의 이해 관계도 갈등의 양상을 보였다. 12세기에 이탈리아의 자치시들은 지주와 부유한 상인들의 과두제로 통치되었다. 자치시의 발전 과정에서 과거 주교들에 의해 행사되었던 대부분의 권력을 자치시 정부가 장악하였다. 12세기 말에는 장인들과 상인들의 길드가 권력을 잡았으며, 13세기에는 길드 연합과 다른 지방 집단들이 많은 자치시의 행정을 관장하였다. 이 시기에는 교회와 국가(자치시에 의해 대표되는)의 갈등이 나타났다. 이는 자치시 정부가 성직자의 특권을 없애고 세금 면제를 허용하지않으며, 성직자를 도시 정부의 사법권 아래 두었기 때문이다. 사제들의 축재와 세속적 생활은 비판의 대상이었다. 이때 나타난 반성직주의는 종교적 불안정을 보여 주었다.
전통적인 수도원은 도시 공동체의 출현에 따른 영성적위기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다. 새로 만들어진 시토회는 1120년 이후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장되었으나 그들이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세속으로부터의 탈피였다. 이탈리아의 시토회원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플로라의 요아킴(Joachim de Floris, 1131~1202)은 탁발 수도자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언하였다. 수도회의 정신은 13세기 초 탁발 수도회인 작은 형제회와 도미니코회에 의해 변형되었다. 1206년 교황 인노천시오 3세로부터 인가를 받은 도미니코회 혹은 설교자회(Preaching Friars)는 볼로냐에 본부를 설립하였으나 이탈리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작은 형제회였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182~1226)는 이탈리아 문명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영적 혁명가였다. 이 수도회들로 인해
성직자들과 일반 시민들간의 거리를 줄였으며 이단에 빠진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돌아오게 하였다. 13세기에 이 수도회의 지도력은 이탈리아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1250년경 이탈리아에서 이단은 점차 소멸되기 시작하였으며, 백년이 지나지 않아 거의 사라졌다.
〔중세 후기와 르네상스] 《신곡》(LaDivina Commedia)의 저자 단테(A. Dante, 1265~1321)의 생애는 중세의 몰락과 일치하는 시기였다. 두 세기 동안 중세의 이상과 제도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통합되었다. 1300년 이후에도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으나, 하인리히 7세(1308~1313)의 원정 이외에는 황제들이 직접 통제를 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없었다. 남부에서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94~1303)와 나폴리의 왕 카를로 2세(1254?~1309)가 시칠리아의 지배자로 아라곤 가문의 왕을 인정함으로써 20년에 걸친 시칠리아 만종(晩鐘) 학살 전쟁(Sicilian Vespers)이 1302년에 끝났다. 북부 이 탈리아에서는 켈피(교황파)와 기벨리니(황제파)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어 군대를 가진 많은 인물들이 도시 군주(signori)로 도약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14세기에 일부 도시 군주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통합과 정복으로 확장하였다. 10여 개 정도로 분할된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들은 밀라노 공국, 베네치아와 피렌체 공화국, 교황령, 그리고 나폴리 왕국이었는데 이들은 15세기에 연합 과 제휴를 통해 세력의 균형을 도모하였다.
교황의 입장에서 중세 후기는 굴욕과 분리의 시기였다. 교황의 아비농 유배로 로마와 교황청과의 일치가 붕괴되었으며, 교회의 권위는 서방 교회의 분열로 더욱 손실을 입었다. 교황들의 아비농에서의 장기 체류(1309~1378)는 부분적으로 이탈리아에 만연된 무정부 상태에 기인하였으며, 로마는 안전하지 않았고, 교황령은 거의 통제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 시기의 새로운 재정 제도는 교황청의 고비용 구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동시에 교황령에 대한 교황의 권위를 보전하려는 의도에서 개발되었다. 교황의 조세 수입은 이탈리아의 교회와 수도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었으나, 교황의 이탈리아 교구들에 대한 통제는 증가하는 세금 납부 유예로 강화되었다. 따라서 이탈리아 교회의 경제적 상황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북부 이탈리아의 교회는 1500년경까지 빈곤해졌는데, 이는 교회의 재산이 토지에 대한 세가 인상되지 않은 소작인들에게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위 성직자들은 르네상스 양식의 고가 건축물과 미술품들을 만들도록 하였다.
1454년 밀라노와 베네치아 사이에 맺은 로디 평화 조약은 이탈리아의 오랜 전란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여기서 수립된 이탈리아 동맹에 피렌체 · 나폴리 · 교황령이 가담함으로써 이탈리아는 본격적인 르네상스 시대를 맞았다. 르네상스 시대는 정치적으로 전제적 경향이 강화된 시기로써 밀라노에는 비스콘티 가문의 전제적 지배에 이어 용병대장 출신의 스포르차가 새로운 전제 군주로 등장했고, 피렌체에는 메디치 가문의 지배가 이어졌다. 메디치 영향하의 피렌체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적 전통과는 양립할 수 없는 신플라톤주의의 종교적 형태를 취하였다. 1494년 프랑스의 침입으로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스페인 왕가들의 전쟁터가 되었다. 유럽에서 가장 문명화된 장소인 이탈리아는 민족적 정체성을 갖지 못한 채 근대로 접어들었다.
: II . 근대 이탈리아
[외세 침입기] 15세기 후반기의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의 절정기에 있었으며 경제적 · 상업적 번영을 누렸다. 북부 유럽의 방문객들은 이탈리아의 경이로움과 번영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이탈리아는 파멸의 초입에 있었다. 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는 강력한 군주국으로 변모하여 이탈리아에 대한 탐욕스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반도의 주요 국가는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교황령 그리고 나폴리 왕국이었고, 소국으로는 페라라, 만토바, 모데나 그리고 사보야가 있었다. 당시에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는 아라곤 왕국에 속해 있었다. 도시 국가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힘과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었으며 소규모의 전쟁에 참가하고 정치 권력의 향방을 쫓고 있었다. 정치 권력을 추구함은 외부의 힘에 호소하게 되었고, 외부의 세력들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있을 때 늘상 개입하였다. 이탈리아는 그 후 여러 세기 동안 프랑스 · 스페인 · 오스트리아 군주들이 경쟁하는 정치적 야심의 희생물이 되었다. .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1515~1547)는 무력으로 이탈리아를 침공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는 막시밀리안 황제(+1519) · 교황 레오 10세(1513~1521) · 아라곤의 페르디 난도(+1516) · 막시밀리안 스포르차 치하의 밀라노, 로렌초 데 메디치 치하의 피렌체, 그리고 스위스 연방에 대항하여 영국의 헨리 8세와 베네치아와의 연합을 결성하였다. 프랑스는 이틀 간의 마리냐노 전투(1516. 9. 13~14)에서 대승하였으며, 이로써 이탈리아 정치에 개입하려는 스위스의 모험이 종식되었고 무적의 스위스 보병대의 전설도 끝났다. 프랑스는 밀라노를 얻게 되었으며, 뒤이은 평화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위치를 유리하게 만들었으나 그 기간은 너무 짧았다. 1516년 카를 5세 (1516~1556)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자 유럽 정치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는 3년 뒤 막시밀리안 황제의 계승자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1519~1556)가 되었으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계승자가 되었다. 이후 발루아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경쟁이 이탈리아에서 전개되었다.
교황 레오 10세와 헨리 8세는 프랑수아 1세에 대항하기 위해 카를 5세를 지지하였다. 1522년 프랑스는 밀라노 · 파르마 · 피아천자 · 제노바를 잃었으나, 1524년에 다시 밀라노를 재병합하였다. 다음해에 샤를 드 부르봉 공작 지휘하의 스페인 군대와 페스카라의 마르키스는 파비아에서 프랑수아 1세를 크게 대패시켰다(1525. 2. 24) . 프랑스 왕은 포로로 잡혔으며 마드리드에서 죄수로 취급받았다. 이탈리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고 서명한 마드리드 조약(1526. 1. 14)에도 불구하고 몇 달 후 프랑수아는 코냐크 동맹이라는 새로운 연합체를 결성하여 카를 5세에 대항하였다. 이 연합은 교황 글레멘스 7세(1523~1534) · 밀라노 · 베네치아 · 피렌체를 포함한 것이었다. 교황의 코냐크 동맹 참가는 카를 황제의 스페인 및 독일 용병들에게 로마가 고초를 겪는 원인이 되었다(1527. 5. 6). 글레멘스 교황은 천사의 성(Castel Sant'An-gelo)에서 실질적인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바르셀로나 조약(1529. 6. 29)에 의해 교황령은 교황에게 귀속되며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에 의해 통치받게 되었다. 캄브라이 조약(1529. 8. 3)에 의해 프랑스는 다시금 이탈리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으며, 베네치아는 자신들의 정복지를 되돌려 주어야 했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밀라노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는 종신 통치자로 확약받았다. 카를 5세는 교황에 의해 황제이자 이탈리아 왕으로 인정받았다(1530.2.23).
16세기 후반에서 1701년 사이에 이탈리아는 분열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넓은 지역은 외세의 의해 직접 지배를 받았으며, 명목상의 독립을 누리던 국가들도 유럽 정치에서 수동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위축되었다. 이들의 운명은 이탈리아 외부 또는 내부에서 벌어지는 열강들의 전투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이탈리아는 18세기에 지적 영역에서 이룩한 업적으로 유럽에 영향을 주었으나 무역과 상업 분야에서는 더 이상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하였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국가는 교황령이었다. 그리고 명목상 독립된 국가 중에서는 베네치아 · 제노바 · 사보야 정도였다.
18세기 유럽에서의 왕위 계승 전쟁은 이탈리아에서 외세의 성격에 중요한 변화를 야기하였으며, 독립 국가들의 운명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으로 교황령에는 본질적인 변화가 없었으나 종교적으로는 교회 전체에 어려운 시기였다.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시칠리아는 스페인의 통치에서 사보야의 빅토리오 아마데우스 2세에게 이양되었지만, 얼마 후 다시 스페인 치하(1718)로 넘어갔으며, 2년 뒤에는 오스트리아 수중으로 들어갔다.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자 나폴리와 시칠리아는 스페인의 부르봉(1735)에게 주어졌다. 스페인 펠리페 5세 왕(1700~1746)의 아들인 카를로스 4세(1735~1759)는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접수하였다. 그리고 1738년에는 양 시칠리아의 왕위를 받았다. 타누치(M. Tanucci, 1698~1783)의 도움을 받은 그는 계몽주의로 정부를 재조직하였다. 그러나 교회 재산에 대한 세속화 문제로 교회와 갈등을 겪었는데, 이는 1741년 교황 베네딕도 14세(1740~1758)와의 협약으로 조정되었다. 카를로스 3세(1759~1825)가 스페인의 왕이 되기 위해 나폴리 왕위(1734~1759)를 포기하면서 카를로스 4세는 셋째 아들인 페르디난도 1세(1759~1825)에게 양위하였다. 타누치는 페르디난도가 성인이 될 때(1767)까지 섭정을 하였다. 페르디난도는 오스트리아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인 마리아 카롤리나(ManaCarolina, 1752~1814)와 혼인하였다. 그녀의 영향력과 타누치가 1771년 사임하면서 고문이 된 영국의 존 액턴경의 영향으로 페르디난도는 친오스트리아 정책을 채택하였다. 18세기의 나폴리는 예술적 · 지적 결과들이 풍부했던 황금의 시기였다.
18세기 후반에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받는 롬바르디아와 토스카나는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누렸으며 농업, 조세, 형법, 교육 등의 분야에서 많은 개혁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교황령을 제외하고 사보야나 여타의 이탈리아 지역처럼 이 지역도 성직자 특권의 박탈, 수도원 억압, 교회 재산의 세속화 등을 통해 계몽주의 정책을 펼쳤으며, 특히 오스트리아의 왕이 된 요제프 2세(1780~1790) 치하에 그 정도가 심하였다. 프랑스 철학자들의 이념들도 이탈리아에 소개되었다. 이는 민족적 애국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점차 발달 · 확산되었는데 과거의 지방적 애국주의와는 차별되는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 시기]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자 계몽주의 사상은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들어왔다. 이는 프리메이슨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들은 프랑스의 제1차 점령기(1796~1799)에 이탈리아의 여러 절대 국가들을 전복시키고 공화국을 세우려는 자코뱅 클럽(Club desJacobins)으로 변모하였다. 교회는 이 시기에 심각한 구조적 위기를 겪었는데, 교회의 경제적 특권이 사라지고, 교회 재산이 억류되었으며 많은 가톨릭 단체들의 활동이 중지되었다. 하지만, 피스토이아 교회 회의로 유포되던 얀센주의를 억제할 수 있었다. 반프랑스 운동이 일어났는데(1798. 9~1799. 10), 가장 활발한 운동은 루포(F. Ruffo, 1744~1827) 추기경이 이끄는 산페디스트들이었다. 프랑스의 2차 점령기(1800~1814)에는 애국주의자들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자코뱅주의와 가톨릭을 융합하려는 태
도를 보였다. 이 시기에 프랑스 군대는 약탈을 삼가해 민심을 얻고 봉건제 폐지, 나폴레옹 법전의 도임, 행정 개혁, 종교의 자유 등을 추진했다.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자, 롬바르디아인들은 그를 왕으로 하는 이탈리아 공화국을 1805년에 수립했다. 나폴레옹 체제에 서 산업이 싹트고 부르주아지의 입장이 강화된 한편, 반도 전체에 시행된 공통의 행정 · 군사 · 교육 제도는 이탈리아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상을 전파해 이후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대두에 기여했다. 프랑스 점령기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교황 비오 6세(1775~1799)와 7세(1800~1823)의 유배 및 교황령의 세속적 권한을 억압(1797,1808)하는 것이었다.
: Ⅲ . 현대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통일] 1815년의 빈 회의는 이탈리아를 프랑스 점령 이전의 시기인 구체제로 되돌려 놓았다. 교황의 세속 권력과 교회의 재산 및 특권이 복구되었는데 이는 콘살비(E. Consalvi, 1757~1824) 추기경의 외교적 노력 덕분이었다. 나폴레옹 3세가 다시 이탈리아를 침공하기 전(1852)까지 반도의 주인이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 부르크 왕가는 헌법적 · 민족적 자유를 억압하였다. 그들은 요셉주의의 법적 원칙들을 충실히 실행하는 자들이었으며, 교회에 주는 이권들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였다. 1818~1855년 사이에 그들은 양 시칠리아 왕국(1818, 1834) · 사르데냐 왕국(1836) · 루카 공국(1841,1846, 1856) · 토스카나 대공국(1848, 1851) 및 오스트리아(1855)와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탈리아 통일 운동(Risorgimentom발전하였는데, 이는 자유와 정치적 독립 및 통일을 위한 사상과 행동이었다. 카르보나리와 여타의 비밀 단체들은 통일 운동을 하면서 절대주의와 그 특권을 없애기 위해 입헌 혁명(1820~1821, 1830~1831)을 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이들 세력들을 억압하고 이탈리아의 절대 국가들을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펠리코(S. Pellico, 1789~1854), 콘팔로니에리(F.Confalonieri, 1785~1846) 및 다른 그리스도교 인사들이 죽임를 당했다. 유신론자이자 애국자였던 마치니(G.Mazzini, 1805~1872)는 '청년 이탈리아당' (Giovine Italia,1832)을 조직하여 억압받는 국민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공화국 건설을 표방하면서 이탈리아를 통일한다는 급진적 계획을 갖고 있었다. 마치니의 견해에 반대하는 입장에는 조베르티(V. Gioberti, 1801~1852) · 발보(C. Balbo,1789~1853) · 다젤리오(M.T. D'Azeglio)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신교황파로 불렸다. 이들은 군주제하의 국가 연합체를 추구하였고, 국가가 주도하는 테두리하에서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또한 조국과 종교를 불가분의 관계로 여겼다.
1848년의 일정 기간 동안 모든 애국주의 단체들을 하나로 묶어 오스트리아에 대한 독립이 실행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교황 비오 9세(1846~1878)의 입장 변화와 피에몬테에서의 외교적 · 군사적 실패로 신교황파 계획은 실패하였다. 자유주의 신봉자인 사르데냐의 총리 카보우르(C.B. di Cavour, 1810~1861)는 통일 운동을 지휘하였다. 그는 유럽 정부들의 갈등을 적절히 이용하여 점진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가리발디(G. Garibaldi, 1807~1882)와 다른 애국자들의 도움으로 드디어 사보야 왕가가 왕이 되는 이탈리아 왕국을 탄생시켰다(1861. 3. 14). 로마는 수도로 선언되었으며, 1870년에 실제로 수도가 되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가 교황의 수위성과 무류성을 발표하였지만, 그 당시 교황령을 잃으면서 교황의 정치적 권력은 사라졌다. 비오 9세는 로마를 지키 기에 역부족이었다. 로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탈리아 정부는 보장법(1871)을 제안하였지만, 교황은 독립성이 훼손되는 일방적인 협정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교황은 또한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새로운 국가를 인정하지 말라고 호소하였다. 그 후 이탈리아 정부들은 우익(1876년까지)이든 좌익(1876~1914)이든 이탈리아 왕국내에서 교황청의 정치적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경제 분야에서는 교회 재산에 대한 몰수 및 과세 · 자선 단체의 세속화가 이루어졌고, 법률 분야에서는 협약의 폐지 · 종교 단체의 해산 · 교황청의 특권 소멸 · 사제의 군복무 의무화 · 학교에서 종교 교육의 금지 · 국립 대학에서의 신학부 억제(1873) · 민간혼의 개시 등이 이루어졌다. 한편 국가는 종교에 대한 공격, 교황과 성직자에 대한 적대적 선전 등에 대해 가만히 있거나 오히려 부추기는 모습을 보였다. 제도적 측면에서는 정부가 교육과 행정을 세속화시키고 학교와 군대에서 극좌와 프리메이슨의 견해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교회는 부정적 요소를 물리치고 변화된 상황에 적응함으로써 자신이 생명력을 유지시켰다. 이탈리아 통일 운동 시기에 교회의 중요한 발전은 수도회의 성장과 근대적 가톨릭 운동의 발전이었다. 1815~1915년 사이에 이탈리아에서는 300개가 넘는 수녀회가 설립되었다. 이들은 교육 · 자선 · 사회 사업 · 선교 사업 등 활발한 사도직 활동을 펼쳤다.
당시에 교황청은 교회와 국가의 불편한 관계를 종식시키고자 노력하였으나 모두가 단합된 의견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조정은 작가인 카포니(G.Cappomi, 1792~1876) , 역사학자인 칸투(C. Cantu), 애국자인 톰마소(N.Tommaso), 시인 자넬라(G. Gianella), 철학자인 로스미니 세르바티(A. Rosmini-Serbati, 1797~1876), 정치인 다젤리오(M.T.D'Azeglio)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더욱 중요한 인물로는 토스티(L. Tosti, OSB), 카페칠라트로(A. Capecelatro) 추기 경, Bonomelli) 주교 등이 있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조정이 부적절한 것으로 여겼는데, 이들은 교황령의 복귀와 교회의 권리와 특권이 다시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찬탈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안토넬리(G. Anto-nelli, 1806~1876) 추기경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이탈리아의 정치적 통일과 로마가 통일 이탈리아의 수도가 된 것을 거부하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또한 국회에 대해 적극적으로 소극적인 기권을 주창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카소니(G.Caomiti1919)는 볼로냐에서 교회를 방어하는 협회(1865)를 만들었다. 파니(M. Fani, 1845~1869)와 아과데르니 Acquademi, 1838~1922)는 1867년에 이탈리아 가톨릭 청년회를 조직하였다. 파가누지(G.B.Paganuzzi, 1841~1923)와 협력하며 아코데르니는 1875년에 무신론자들에 맞서기 위한 평신도 단체인 이탈리아 가톨릭 대회(Opera dei Congressi)를 설립하였다. 가톨릭 대회는 이탈리아에서 제일 중요한 조직으로 교황청에 대한 봉사를 주임무로 하면서 모든 민주적 운영 방식을 제거하고 위계적 조직을 만들었다. 종교적 문제에 관해 가톨릭 대회는 회칙 <관타 쿠라>(Quanta Cura, 1864. 12. 8)와 <오류표>(Sylabbus)의 경직된 해석을 따랐다.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교황청의 기본 정책인 비타협주의(nonexpedit)를 고수하였다. 가톨릭 대회는 민족 · 지역 · 교구별 대회를 만들었으며 액션 위원회, 공격적 잡지, 항의 소원, 로마로의 순례, 교황을 기념하는 축제 등을 통해 자신들의 견해를 펼쳐 나갔다. 이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로마 문제를 지속적으로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일부 단체는 비타협의 태도를 "선출되지도 선출하지도 말자" (Ne eletti nè elettori)는 표어로 표현하였으며, 다른 단체는 좀 더 역동적이면서 비타협적인 "기권을 통한 준비" (Preparazione nell' astensione)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일부 신자들은 다른 신자들에게 이탈리아가 망할 때까지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토니올로(G. Toniolo)와 일부는 교육 · 여론 · 노동 · 지역과 자치시 행정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에서 가톨릭 사회 운동이 시작되었다. 사회 연구 협회와 국제 사회 과학 잡지는 토니올로와 알바니(M. Albani)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이들은 예수회 원인 쿠르치(C.M. Curci, + 1891)와 리베라토레(M. Libera-tore), 다젤리오(NLT.D'Azeglo) 등에 의해 표현된 재산과 국가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적 이념을 받아들였다. 〈노동 헌장>(RenuiNovarum, 1891.5. 15)의 발표 이전에 이미 조합주의적 형태의 개혁뿐 아니라 민주적 생디칼리즘을 발전시켰다. 또한 이들은 가톨릭 은행, 저축 조합, 협동 조합, 사회적 그리고 자선 단체 등의 수많은 경제 단체를 만들었다. 교육에 대해 이들은 비타협적인 교회를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선회시켰다. 즉, 학교에서 세속화된 과정을 제한하기 위한 모임과 청원의 회부, 본당과 교구 차원에서의 가톨릭 학교 설립 등이다. 그 결과 1921년 이들은 밀라노에서 가톨릭 대학을 설립하였다.
근대주의(modemisimus)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중심을 이루었다. 무리(R. Murir) 신부가 이끄는 정치적 근대주의는 전국 민주 동맹을 결성하였다. 신학적 근대주의는 부오나이우티(E. Buonaiut)와 미노키(S. Minocchi)가 주요 인물로 민주적 운동의 발전을 견제하였는데, 그는 교황 비오 10세(1903~1914)가 근대주의를 단죄하도록 유도했다. 또한, 밀라노 추기경인 페라리(A.C. Ferrari) , 피사의 추기경인 마피(P.Mam), 볼로냐 추기경인 키에사(G. dellla Chiesa) 등의 고위 성직자에 대한 반대를 견제하였다. 교황 비오 10세는 1904년 가톨릭 대회를 해산시켰으며, 독일의 국민 연합(Vollksver)을 따라 가톨릭 사회 운동을 재조직하였다. 그리스도교 생디칼리즘은 1918년 그란데(A. Grande) 스투르초(L. Sturzo) 신부가 중심인 이탈리아 인민당(PPI, 1919)의 지도로 전국적인 규모로 부활하였다. 젠틸로네 협약(1913)은 가톨릭의 보수주의자들과 신부들에게 정치적 · 사회적으로 기본적 헌장을 제공하였다.
[양차 세계 대전과 해방] 제1차 세계 대전 중 정부는 군대 내에 군종 제도를 설치하고 반성직자적 논란을 폐지시켰다. 한편 교회는 위험에 놓인 조국에 대한 연대감을 호소하였다. 1918년 이후 가톨릭 세력은 정당과 노조를 조직하였지만, 당시에 국가를 이끌던 계층들에게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파시즘은 모든 민주주의적 자유(1922~1926)를 종식시켰으나 교회와 교황과는 라테란 조약(1929)을 통해 평화를 이끌어 내었다. 1943년까지 이탈리아의 지도자였던 무솔리니(B.A. Mussolini, 1883~1945)는 자신의 독재적 · 제국주의적 지배에 대한 정당성을 얻기 위해 교회에 특권과 보호를 허락하였다. 가톨릭 평신도 중에서는 자유와 인종주의에 관한 문제에서 정부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943년 무솔리니가 실각한 후 사제와 평신도들은 민족 해방 위원회(CLN)와 기민당(DC)에 참가하여 저항 운동을 벌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탈리아는 1946년에 공화국이 되었다. 1948년 1월 1일에 공포된 공화국 헌법 제7조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라테란 조약에 규정된 대로 계속되며, 상호 간의 협약에 의해서만 개정될 수 있다고 천명하였다.
파시즘 체제의 몰락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은 일반인뿐 아니라 가톨릭 교회에도 희망과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국가 건설 과정에서 가톨릭의 정치 세력과 이념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교회의 사목과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측면에서는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가톨릭 정당이 이탈리아 정치에서 집권당으로 장기 집권함으로써 이탈리아 사회 내에서 굳건히 뿌리내렸다는 사실이 오히려 새로운 변화에 둔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전체 국민의 99%가 가톨릭 신자라는통계와도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었다. 냉전 체제는 이념적으로 좌파 정당들에 대한 교회의 거부감으로 표시되었으며, 전체 유권자의 1/3이 이들 정당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교회와 현실 정치의 괴리로 남게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는 신자들의 정치적 선택에 대한 다원주의를 인정함으로써 교회와 기민당과의 불가분적 관계는 서서히 벌어지게 되었다.
[공의회와 세속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 세계의 변화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대응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교회는 초기에 이 회의에 적절하게 대비 하지 못하였으며 통일된 의견도 없었다. 그러나 1952년에 설립된 이탈리아 주교 회의가 활발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후반기에는 공의회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는 유럽 사회가 노동 운동과 학생 운동 등으로 인해 혼돈의 시기였다. 전후의 경제 성장은 물질적인 풍요를 경험하게 하였지만 젊은 세대의 탈물질주의적 가치 지향은 소비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야기하였다. 그러나 1971년에 설립된 카리타스(Carias)는 교회의 사회 봉사 전통을 이어갔으며, 1976년에 개최된 '복음과 인간 개선' (Evangelizzazione e promozione umana)회의를 통해 이탈리아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였다.
1984년 이탈리아 내각의 총리인 크락시(B. Craxi, 1934~2000)와 교황청의 국무성 장관인 카사롤리(S.Casaroil) 추기경 사이에 라테란 조약 중의 일부 협약에 대한 개정이 확정되었다. 그 내용은 14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주요 내용은 중등학교에서의 의무 종교 교육의 선택화, 종교혼과 더불어 민법상의 결혼 인정, 사제에 대한 국가의 급여 지불제 폐지 등이다. 이는 1929년에 체결되고 공화국 헌법에서 보장된 가톨릭 교회의 배타적이고 우월적인 지위가 거의 사라졌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의 변화였다. 또한, 이탈리아 사회의 세속화라고 설명될 수 있다. 1970년대에 본격화된 이탈리아 사회의 속화는 이혼의 제도적 가능성(1970)과 낙태의 선택적 허락(1981)이 국민 투표를 통해 확정됨으로써 가톨릭 교회와 집권당인 기민당에게 해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탈리아 교회는 영성적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다양한 단체(Azione cattolica, Comu-nione e Liberazione)를 통한 신심 운동을 펼치고 있다. 또한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현대 세계의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1980년대에 청소년의 마약 문제에 대한 자원 봉사(Volontariato)를 통한 치유와 고령화로 인한 노인 복지 문제를 교회가 일부 담당하는 제도(재정은 국가가 부담하되 운영은 교회가 책임지는 방식) 및 본당의 운영에서 평신도의 의견을 반영하는 제도화를 모색하는 것 등을 통해 그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의 많은 불법 이민자들을 돕는 것 등을 포함하여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한편, 교회 지도자들은 이탈리아의 낮은 출생률에 대한 걱정과 관심을 표명하였다.
〔현 황] 이탈리아 교회는 바티칸을 제외하고 총주교좌1, 대주교좌 60(이 중 40개는 관구장좌), 교구 156, 성직자치구 3, 자치 수도원구 7, 군종 교구 1, 본당 25,770개로 구성되어 있다. 총주교좌는 베네치아에 있으며 총주교 1, 추기경 38, 대주교 153, 주교 277, 신부55,173(교구 소속 36,061, 수도회 소속 19,112), 종신 부제2,251, 수사 4,055, 수녀 114,912, 신학생 6,445명이 있다. 이들이 2001년 현재 전체 인구 57,340,000명의 97%인 55,639,000명의 신자들을 담당하고 있다. (⇨교황령 ; 교회록 ; 교회사 ; 그라시아노 법령집 ; 그레고리오 개혁 ; 근대주의 ; 단테 ; 독일 ; 동로마 제국 ; 라벤나 ; 라테란 조약 ; 로마 ; 로마 문제 ; 로마 제국 ; 롬바르드족 ; 르네상스 ; 르네상스 교황 ; 마르티노 1세 ; 보에시우스 ; 삼장서 논쟁 ; 실베스테르 2세 ; 아리우스주의 ; 요셉주의 ; 의전 수도회 ; 클뤼니 ; 황제 교황주의)
※ 참고문헌 Giuseppe Alberigo, Il cristicmesimo in Italia, Roma-Bari, Laterza, 1997/ Gianni Baget Bozzo, Cattolici e democristiani. Un'esperienza politica italiana, Milano, Rizzoli, 1994/ Sergio R. Bernal(a cura di), Teologia e dottrina sociale. Il dialogo ecclesiale in un mondo checambia, Casale Monferrato, Piemme, 1991/ Eusebio di Ceserea, Storia dellachiesa, Bologna, Ed. Dehoniane, 1999/ Roberto Leonardi, D.A. Wertman, Italian Christian Democracy. The Politics of Domincmce, New York, St. Martin's Press, 1989/ Luigi Mezzadri, Storia della chiesa tra Medioevo ed epoca moderna, Roma, CLV, 1999/ S. Pivato, Clericalismo e laicismo nella cultura popolare italiana, Milano, Franco Angeli, 1996/ R. Remond, Religion and Society in Europe, London, Blackwel, 1998/ Luigi Salvatorelli, Sommario della storia d'Italia, Torino, Einaudi, 1982/ Bartolomeo Sorge, I cattolici e l'Italia che verrà, Milano, Oscar Mondadori, 1993/ Alberto Torresani, Storia della chiesa. Dalla comunita di Gerusaleme al giubileo 2000, Milano, Ares, 1999. 〔金始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