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근원적인 차원에서 보면 사실상 그리스도성을 실현하고 있는,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
〔의미와 원천〕 유스티노(Justinus, 100/110?~165)는 인간에게 본래 로고스의 씨앗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교도' 일지라도 이성적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교 이전의 그리스도교인들"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의미와 유사한 사유를 보여 주는 말이다. 또한 사도 바오로가 아테네 아레오파고스의 여러 신전들에 있는 '알려지지 않은 신' 에게 바쳐진 제단도 사실상 모든 것을 만들고 모든 이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을 향한 것이라며 설교한 내용(사도 17, 22-28)도 이와 유사한 구조를 보여 준다. 그러나 현대적인 의미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은 라너(K. Rahner, 1904~1984)에게서 비롯되고 확정된 개념이다.
라너에 의하면,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살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인간성의 깊이에서 솟아오르는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그 신비에 자신을 비우는 사람, 심지어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자기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진리를 탐구하며 자기의 도덕적 양심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는 비그리스도인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소극적 의미를 넘어, 구원이란 종파와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부여되어 있는 원천적인 가능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라너 신학의 핵심이 들어 있다. 이런 입장은 라너가 신학 자문 위원으로 참여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입장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 후 타종교와 대화하는 그리스도교적 근거로 자리잡아 왔다.
〔신학적 근거〕 라너에 의하면, 하느님은 인간의 본성에 선행하면서도 그 본성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 주셨다. 즉 은총을 베푸셨다. 은총은 인간의 본성과 자유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본성과 자유에 선행하는 하느님의 원초적 무상의 선물이며, 조건 없는 호의이다. 스스로를 내어 주는 하느님 자신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다.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수용할 수 있는 바탕이 이미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온 인류가 처한 실존론적(exis-tential) 상황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깨달음에 도달하기를 원하시는"(1디모 2, 4)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의 발로이다. 라너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중시하며, 그것을 신앙적 명제로 받아들인다. 만일 이 구원 의지가 온 인류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온 인류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여전히 마찬가지인 그리스도인에게만 하느님의 구원이 허락된다는 뜻이 된다. 또한, 하느님의 은총을 하나의 사물적이고 대상적인 것으로 제한시키게 된다. 원칙적으로 하느님은 구원의 대상에서 아무도 제외시키지 않는다.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지 않는다. 종파는 물론 성별, 나이,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스스로를 내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존재론적으로 또 구조적으로 아무런 차별없이 성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라너가 보기에, 종교 본연의 모습은 하느님이 주도하여 모든 인간과 맺은 원천적인 관계 안에 있다. 근원적인 종교의 모습은 다양한 경험적 세계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도리어 다양한 종교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역사적으로 중개하는 매체이다. 이러한 다양성을 제외하고서 하느님의 은총은 육화하지 못한다. 원칙적으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상관없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고, 그리스도교적 요소를 갖추고 있으며, 따라서 가능성의 차원에서는 누구나 그리스도인일 수 있
다. 설령 명시적인 그리스도인은 아니라고 해도,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을 지닌다. 이러한 원천적인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하느님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며, 신학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라너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긍정하는 신학을 펼쳤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인간 =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려는 것은 아니었다. "자기 자신의 양심을 따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혹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든 않든, 굳이 무신론자라고 생각하든 혹은 그 반대로 생각하든 상관없이 그런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에 의하여 받아들여져 있는 사람이요, 우리가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표로 고백하고 있는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사람"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스스로 그리스도교적이라고 묘사할 수도 없고 또 묘사하려 들지도 않을지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 있고 또 불려야 하는", 한마디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 쪽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무신론자일 수 있어도, 하느님 쪽에서 보면 엄연한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이다.
〔구원의 그리스도성〕 만일 그렇다면 왜 하필 '그리스도인' 이어야 하는가?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있는 그대로 긍정할 일이지, 왜 그리스도인이라는 규정을 달아놓으려 하는가? 라너는 이와 같은 인간의 기본 처지에서 '그리스도성' 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성을 보지 않고서 그리스도인에게 말하는 그리스도교적 구원은 무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리스도성이 주어져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교도권이나 그리스도교의 교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실천 속에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이 구체화되는 곳이 바로 그리스도성이 구체화되는 곳이다. 자신을 비우고 인간을 사랑하는 곳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구체화되며, 그것이 참 그리스도적인 모습이다. 인간에게 부여된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를 지향하도록 되어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진지하게 자신을 수용할 때 하느님을 수용하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수용하는 셈이 된다. 라너에 의하면 그것은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사람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 ··· 사실상 하느님이 그것을 무한한 것으로, 즉 자기 자신으로 가득 채웠기 때문이며, 또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그가 한 것을 모를 때조차도 그리스도를 긍정한다."
라너는 하느님과 모든 인간의 원천적인 연결성을 그리스도교 언어 안에 담고자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동일시하였다.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자기 전달에 의해 신적으로 고양되어 있는 원천적 본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신비에 자신을 개방하는 사람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긍정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이러한 깊이에 철저히 순종하여 참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든 장본인이기에,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구체화시키는 사람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는 셈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체적 종교사에서 인간이 행하는 체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해석의 기준이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인을 위한 그리스도교적 기준이다. 구체적이고 범주적인 역사 안에 제약되어 있는 그리스도교가 타종교에 비해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뜻으로 쓴 말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스도교 밖의 종교사 안에서도 아무런 편견 없이 계시의 여러 현상을 관찰하고 묘사하고 분석하고 그 궁극적인 의향에 따라서 해석해도 좋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밖의 종교사에서 "구약 및 신약에서의 계시의 하느님이 일하시고 계신 것을 발견한다고 해도··그것에 의해서 그리스도교가 가진 절대성의 권리 주장을 부정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ㅋㅋ그렇게 볼 때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자기 전달에서 오는 은총으로 충만한" 인간 본래의 모습에 충실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원천적으로 그리스도성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그리스도성을 실현하는 이 중에서 제도 교회 밖에 있는 이를 일컬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것이다.
〔비판과 옹호〕 이러한 이론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비판이 분분하다. 비판의 요지는 대체로 그리스도인으로 있고 싶어하지도 않는 타종교인에게 왜 함부로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란 이름을 붙이는가 하는 것이었다. 가령 큉(H. Küng)은 익명의 그리스도인론을 두고 신학적 기만이라고 혹평하면서 교회의 사회성, 역사성은 다 어디로 갔느냐고 반문한다. 니터(P.F. Knitter)나 힉(J. Hick) 등은 다른 종교를 과연 그리스도교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겠느냐며 진보적인 시각에서 비판하였다. 왜 열심한 타종교인을 그리스도교 안으로 몰아넣느냐는 것이다. 또 몰트만(J. Moltmann)은 라너의 신학에 대해 전통적인 교회의 지배권 주장이 형식을 바꾸어 등장한 것이 아니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그리스도교적 절대성을 간과하고 상대화시키고 만다는 수구적 의미에서의 비판도 있다.
그러나 라너의 신학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이와 같은 비판들은 사실상 '익명' · '그리스도' · '교회' 등의 용어 자체에 집착해 라너가 본래 말하려는 바를 간파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해임을 알 수 있다. 라너가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란 표현을 쓰면서 본래 의도했던 것은 그리스도교의 독특성을 보전하면서도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과 구원,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통한 인간과의 본래적인 연결성, 결국 "하느님은 온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기본 원리의 확립에 있었다. 다른 종교들을 무시하거나 낮게 평가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불자(佛者), 무슬림, 힌두인이 본래의 자아를 포기하고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수용해야 한다거나, 모든 인간을 가시적인 그리스도교 안에 넣음으로써 '그리스도인화' 시키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야말로 종파에 관계없이 이미 신화(神化)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가시적 · 유형적 교회라는 건물 안에 끌어들임으로써 그리스도교인화하는 것을 교회의 과제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만일 그렇다면 굳이 '익명' 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라고 표현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란 생로병사(生老病死)에 휩싸여 사는 현재의 모습이 다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하느님 자신을 모시고 사는 고귀한 존재임을, "직접 파악할 수 있는 바보다도 무한히 더 큰 존재임을, 끝없는 자유와 행복을 지니고 계시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인간임을" 밝히려는 것이었다. 이미 초자연적으로 고양되어 있는 온 인류의 실존론적 처지를 밝혀 줌으로써, 종파를 초월한 모든 인간의 본래적 고귀함, 원천적 하느님의 자녀 됨을 다른 이가 아닌 '그리스도인에게' 제시한 것이다.
〔언어의 익명성과 유비성〕 하느님의 은총은 특정 종파에 속한 의인에게만이 아닌, 절대적으로 모든 이의 구체적 실존에 현존한다. 그것은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으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최고의 신적인 생명이자 신앙의 대상이다. 바로 하느님 자신인 것이다. 이 하느님 자신이 언제나 인간의 일상 안에, 인간의 깊은 자아 안에 머물러 계신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역사의 범주 안에 제한되지 않는다. 언제나 유한한 인간의 개념을 넘어서고 일상사를 초월한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아무리 일상의 언어 안에 담으려 해도 담기지 않는, 언제나 더 넓고 깊은 분이다. 하느님은 간접적으로, 다시 말해서 '유비적으로' 밖에 표현되지 않는 분이다. 하느님에 대해 말하기에는 인간의 개념, 언어가 너무 짧다. 그래서 하느님 신앙, 하느님 체험을 표현할 때는 "한편으로는 이렇고, 다른 편으로는 저렇고" 내지는 "이것뿐 아니라 저것 역시"와 같은 상호 보완적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고 라너는 지적하였다. 심지어 대립적인 개념들마저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어떻게 표현하든지 이와 같은 언어상의 표현은 본래적 체험 자체와 같지 않다. 기초(Grund)와 기초 지어진 것(Begründeden)이 상호 관계를 갖기는 하지만 결코 동일한 것은 아니다. 표현될 수 없는 신비를 표현하는 데는 언제나 긴장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술된 것보다 언제나 넓고 깊은 하느님과 그에 대한 표현을 혼동할 수 없으며, 또 표현 자체에 얽매일 수도 없다. '익명' 이란 말마디에 매어 그것이 의도하는 바를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라너 자신도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라는 용어는 얼마든지 반박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보다 더 적절한 용어가 있으면 얼마든지 새로운 용어로 대치할 용의가 있음을 밝힌 바 있다.
더 나아가 자신도 얼마든지 '익명의 불교인' 으로 불릴 수 있다고 말하였다. 불교인의 내적 논리에 따르면, 하느님의 은총에 근거해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면서도 이웃을 향해 자신을 내어 주는 예수는 대자대비한 보살의 다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예수의 정신대로 살려는 그리스도인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불교인' 이라고 명명한다고 해도 불교적으로, 또 그리스도교적으로 전혀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볼 때 '불자' 라는 낱말 자체에는 '그리스도인' 의 본질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기에 열심한 불자를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생생하게 살려 내려는 것이다.
라너는 그리스도교적 사회에서 타종교를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그리스도교적 언어로 '익명의 그리스도인' 을 선택하였다. 그런 점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나 가능한, 그리스도교에만 적용되는 표현이지, 비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승인을 얻어야만 하는 일반 규정은 아니다. "구원의 절대 필요성에 대한 교회의 자기 이해를 표현한 것" 이지, "비신앙인의 구원을 그리스도교가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다른 종교들을 깎아내린다며, 또는 그리스도교를 상대화시킨다며 그 이론에 가한 비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타종교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보전하며, 그리스도교를 상대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독특성과 절대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너는 하느님의 은총, 구원 의지를 종파를 초월하여 온 인류에게 가능한 한 보편적으로 적용하고 설명함으로써, 다양해진 오늘의 신학들과 종교들을 그리스도교의 언어 안에 포섭하려고 했던 것이다. (→ 교회밖에서는 구원이 없다 ; 라너, 칼)
※ 참고문헌 성염 외, 《종교 다원주의 시대의 기독교와 종교적관용》, 민지사, 2001/ 심상태, 《익명의 그리스도인―칼 라너 신학의 비판적 연구》, 성바오로출판사, 1989/ 이제민, 〈K. 라너의 사상 접근―그의 서거 5주기에 부쳐〉, 《종교 신학 연구》 2집, 서강대학교종교신학연구소, 1989/ 이찬수, 《인간은 신의 암호―칼 라너의 신학과 다원적 종교의 세계》, 분도출판사, 1999/ Walter Kern, 박순신 역,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는가》, 가톨릭 출판사, 1991/ K. Rahner, Christianity and the Non-Christian Religions,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5, London, Darton, Longman & Todd, 1961, New York, SeaburyPress, 1974/ ―,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6. London, Darton, Longman & Todd, 1961, New York, Seabury Press, 1974. 〔李贊洙〕
익명의 그리스도인 匿名 ― 人 〔라〕christianus anonymus 〔영〕anonymous 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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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익명의 그리스도인' 개념을 확정시킨 칼 라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