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학 人間學 〔라〕Anthropologia 〔영〕Anthropology

I . 신학에서의 인간학 · II . 철학에서의 인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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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범할 수 있는 인간의 마음.

죄를 범할 수 있는 인간의 마음.


인간을 여러 관점에서 문제의 대상으로 삼고,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연구하는 학문. I . 신학에서의 인간학 모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서 인간학적인 내용을 찾아내는 학문. "인간에 대한 교리" 라고도 불리는 "신학적 인간학" (Theological Anthropology)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인간, 혹은 특정한 신학적 혹은 종교적 시각에서 바라본 인간에 대한 연구이다. 신학적 인간학에서는 인간학적 주제를 종교적인 언어로 다루며 인간을 탐구한다. 이때 신학적 인간학은 그리스도교적 가르침 안에 활용된 다양한 인간에 대한 정의를 수용한다. 즉 신학적 인간학은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진리를 기본 전제로 하며, 그로 인해 모든 신학에 협력하게 된다. 많은 신학자들은 우리가 하느님을 "그분 자체로는" 알 수 없고,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알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해 동시에 관심을 갖는다. 이는 바르트(K. Barth, 1886~1968)가 "신학은 신인간학(神人間學, Theanthropology)이라 불려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말한 것에도 잘 나타나 있다. 신학적 인간학은 성서에, 특히 창조와 육화에 대한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성서의 인간관〕 성서에서 인간은 홀로 있지 않으며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있다. 인간에 대한 연구는 인간의 기원, 본질, 조건, 존엄성 그리고 운명이 하느님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다(창세1, 26-27). 인간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은 영적인 부분을 의미한다. 성서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는 육과 정신과 영이다. 그것들이 현실에서 일치를 이루고 있다. 사람은 영의 강한 점을 지니지만, 육 안의 나약함도 지니고 있다. 히브리어 '네페쉬'(נֶפֶשׁ)는 "영"과 "생명"이란 의미가 있다. 숨을 쉬는 것은 생명이 있음을 의미한다. 숨을 쉬는 사람만이 자신 안에서 삶의 원리를 지닌 살아 있는 존재일 수 있다(창세 2,7). 성서는 하느님께서 지성과 자유 의지를 사람에게 선물로 주시고, 사람 안에 하느님 자신의 영을 넣어 주셨다고 하였다.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창세 2, 7). 결국 하느님의 영이 인간을 신적인 삶에 참여하도록 기회를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동시에 유한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인간을 "흙의 먼지"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처음부터 인간 안에는 모순이, 혹은 양극성이 있었다. 즉, "생명의 숨"과 "흙의 먼지"라는 양극성이 있었다. 창세기에서 등장하는 "아담" (אָדָם)은 첫 사람의 이름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아담의 이름은 그의 협조자 여성과 더불어 풍요를 가져오는 삶과 많은 생산을 이루는 생활을 한다(창세1, 27-28). 또한, 인간은 하느님과 우정 관계를 맺고 자유롭게 다가간다(창세 2,25 ; 3, 8). 비록 원죄를 통하여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면서 자신과 후손이 매이게 되었고, 죄로 인해 인간의 하느님 모상성을 흠가게 하였지만 그 모상을 파괴하지는 못했다. 죄는 어떤 본래의 선물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상이고,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로 인간의 훼손되었던 모상이 다시 창조되었다(2고린 5, 17 ; 3, 18 ; 에페 4, 24 ;갈라 6, 15 ; 골로 3, 10). 인간은 명백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을 얻는다(에페 1,23 ; 3, 19). 따라서 인간의 궁극적 존엄성과 운명은 인간의 창조자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테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1881~1955)도, 사람은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보편적 요소들을 종합하지만, 현재 인간은 변형의 과정 안에 있다고 말하였다(The Phenomenon of Man, tr. B. Wall, New York, 1959, p. 281). 그리스 철학에서는 인간이 정신계와 물질계라는 두 세계를 소유한 소우주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성서의 종합적 개념과는 다르다. 인간은 자신을 여러 가지 측면으로 나타낸다. 인간은 자신이 생명을 불어넣는 분에 의해 생명을 얻은 '영' 의 특성을 지닌다. 인간의 정신은 하느님께로 열려 있다. 육신은 그러한 정신과 영의 모습을 외부로 표현하는 수단이다. 이 안에서 인간은 죄인과 새로난 사람, 즉 육적인 사람과 천상의 사람이라는 두 가지 범주가 종합되어 있다. 이러한 구분은 사도 바오로의 표현(로마 7, 22 ; 에페 1, 16 ; 2골로 4, 16)에도 등장하는데, 이는 그리스 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427~348/347)은 사나운 맹수, 이름하여 악마적 본능과 싸우는 내부적 인간에 대해 말하였다. 이러한 표현은 랍비 문학, 필로(Philon, 13~54), 신비주의 저술들, 스토아 학파, 플로티노스(Plotinos, 204/205~270) 사상 등에서도 나타난다. 〔신학적인 주제들〕 인간의 구성에 대한 견해 : 초기부터 그리스도교 인간학은 인간을 두 층으로 나누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는 영혼에 관한 플라톤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철학적 문제와 관련하여 규정하였다. 외부적 인간과 내부적 인간, 지상의 사람과 영적인 사람 사이의 성서적 대조가 교부들에게로 넘어와서 영혼과 육신으로 나뉜 그리스 철학적인 구분과 일치되었다. 오리제네스(Origenes Alexandriae, 185~254)는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라는 주제를 자주 거론하였다. 그에 따르면, "내면적인 인간에게서 미덕의 자리와 이해와 지식의 총체가 발견된다. 그곳이 바로 하느님의 모상이 재생되는 곳이다" . 가시아노(Joannes Cassianus, 360?~432/435?)에게 내부적 인간은 "악마의 생각에 대항하여 온통 내부적 투쟁을 하는 데 전념하는 사람" 이다. 테오판 레클루스(Theo-phane le Recluse, 1815~1894)는, 이 내부적 인간을 마음, 영성 생활의 중심, 성령의 자리로 보았다. 교부들은 항상 이 인간의 두 층인 육신과 영혼의 결합을 꾀하려 하였다. 인간은 분명 하나의 실체이지만, 영혼은 스스로 존재하며 육신에 생명을 준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영혼과 육신의 결합을 이해시키려고 한 교부들의 노력은 본질의 결합까지 이끌어 가지는 못했다. 이 문제는 영혼을 살아 있는 '형태' , 유기적 존재로 본 스콜라 학파에 의해 시도되었다. 초기의 교부들은 플라톤 철학이 던진 또 다른 거대한 장애물을 극복해야 하였다. 그들은 인간을 플라톤의 용어로 천상의 식물이라고 규정하였다. 그것은 인간 영혼 안에 있는 '거룩함' 때문이었다. 성서에서 '네페쉬' 는 종종 하느님과 '루아흐' (רוּחַ)에 관한 천상 세계와 대조되기는 하지만, 인간을 '살아 있는 영혼' 이 되게 하는 '생명체의 숨' 이다. 실상, '루아흐' 는 생명을 창조하는 하느님의 영(민수 16, 22), 인간에게 힘 또는 영적인 능력을 주는 하느님의 신적 생명력(판관 13,25 : 이사 40, 13)을 가리킨다. 성서를 바탕으로 한다면, 철학적으로 정의된 '육―영' 은 신학적으로 '육―영―성령' 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것이 동방 교회에 전승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의 의미와 사용에 있어서 혼란이 있다. 인간의 마음 : 성서에서 마음은 영성 생활의 충만함을 내포하며, 모든 능력과 활동을 갖춘 완전한 인간을 포함한다. 또한 그 안에 하느님께 대한 충실함이 내재한다(로마 11, 3-4 참조). 교부들과 중세 교회의 학자들에게 이러한 성서적 표현들은 셈족적인 영향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이에 영성적인 해석을 가미하려 하였다. 본성적 관점에서 그리스인들은 이성이나 정신(νοῦς)을 성서적 마음' 으로 대체하지 않았다.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azianzenus, 329/330~389/390)에 따르면, 잠언 50장 2절의 '깨끗한 마음' 은 곧 정신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후 중세 교회 학자들은 열정적 마음(cordis affec-tus)을 지성적 이성(intellectus ratio)으로 대비시켰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는 하느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 "나를 따르라"(루가 5, 27)는 복음적 충고를 따를 것을 강조하였다. 의지의 활동이 마음에 의해 지시된다(an actus voluntatis quae hic significatur per cor). 테오판 레클루스에게 있어서 '마음이란 것' 과 '느낌이란 것' 은 하나이며 똑같은 것이다. 그런데 영성작가들에게 마음은 가장 불분명한 개념 중의 하나이기에, 정의하는 데 힘들어 한다. 심리학자들이 이 문제에 관한 토론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방법은 결코 문제를 명확히 할 수 없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마음은 인간의 심리 구조를 도식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며, 그러한 마음이 영성 생활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보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마음에 대한 성서의 개념을 명확히 한 후에야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심리 구조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적 · 종교적인 개념에서 마음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곳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소위 눈 속의 동공이 외부와 내부 두 세계의 교차점이듯, 하느님이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오시는 신비한 지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누스' (νοῦς)는 '영혼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 이며, '영혼의 지도자' 이고 하느님과 만남의 기능을 한다. 이러한 전승이 그리스도교화되어 기도의 고전적 정의, 즉 마음이 하느님께로 올라간다고 표현되었다. 그래서 하느님과 인간의 삶에서 나타나는 많은 관계들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 말로써 '누스' 를 더 이상 '기능' , '능력' 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영혼의 영역' 에서 '영혼의 본질에서' 인간의 모든 힘이 모이는 '삶의 중심' , '삶의 뿌리' 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곳으로 표현하였다. 그 중심점이 곧 마음이다. 성서에서 생물학적으로 신체의 중심적 기관인 심장을 의미하는 단어인 '카르디아' (καρδία)는 상징적으로는 감정의 자리(로마 10, 1 ; 2고린 7, 3) , 사유의 자리(요한 12, 40), 의지의 자리(루가 21, 14)를 가리킨다. 그 이유는 신앙과 영성이 나오는 곳이 바로 마음이기 때문이며(루가 16, 15; 로마 5, 5 : 히브 8, 10), 그래서 마음은 깨끗해야 한다(마태 5, 8)라고 하였다. 이후, 특히 그리스인들이나 러시아인에게 '카르디아' 란 용어가 '마음' 이란 의미로 정착되었다. 이들에게서 기도의 고전적 정의는 "마음의 오름" , 즉 마음이 하느님께로 올라간다는 뜻이 되었다. 인간의 육신 : 고대 사회와 성서에서는 육신에 대한 숭배가 있었다. 하지만 고대 철학자들 중에는 육신을 영혼의 '적' 으로 멸시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향락을 위해 그것을 이용하려 하든지 배척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플라톤 학파에서 영혼과 육신의 결합은 타락으로 간주되었다. 스토아 학파 역시 육신을 인간 자유 의지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보며, 육신에 속하는 바를 추구하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Epicteus). 이와는 달리 성서에서 육신은 인간이 일생 동안 지니다가 죽음을 통해 없어지고 부활 때 다시 찾게 되는 단순한 살과 뼈의 집합이 아니다. 사도 바오로는 인간을 여러 가지 상황으로 제시하였다. 즉 육신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으며(로마 7, 18-19) 죽음을 가져오고(로마 8, 6) 하느님과 원수가 되게 하며(로마 8, 7) 성령을 거슬러(갈라 5, 17) 하느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1고린 15, 50) 결국 멸망을 가져온다(갈라 6, 8)고 하였다. 반면,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로마 7, 4) 그분의 지체이며(1고린 6, 15), 그의 육신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고(1고린 6, 19) 그리스도가 안에 계시며(갈라 2. 20)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몸이 깨끗해졌다(히브 10, 22)고 하였다. 구약성서에서는 육과 육신이 '바사르' (בָּשָׂר)로 지칭되었다. 이 단어는 전체 인간(창세 40, 19 ; 욥기 2, 5), 살(욥기 10, 1 ; 애가 3, 4), 혈연 관계(창세 2, 23 ; 37, 27) 등을 일컫는다. 이러한 몸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이기에 온전히 영이신 하느님 앞에 유한하고 헛되다(창세6, 3 ; 욥기 10, 4 ; 이사 31, 3 ; 예레 17, 5). 반면, 신약성서에서는 '소마' (σῶμα)와 '사륵스' (σάρξ)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 중 '소마' 는 총체적인 몸 즉, 육신을 뜻한다. 그래서 인간 전체(로마 12, 1), 부활한 몸(로마 8,14), 거룩한 몸(1고린 7, 34), 그리스도의 몸(마르 14, 22)등을 일컬을 때 사용되었다. 한편, '사륵스' 는 '육' 을 뜻하며, 주로 부정한 의미에서 성령과 반대되는 개념(갈라 4, 23 ; 필립 3, 3)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이 '육' 을 십자가에 못박은 존재(로마 7, 5 ; 갈라 5, 24)로 언급되었다. 하느님 왕국을 계승할 수 없는(1고린 15,50) 사라질 '육' (필립 3, 19)과 달리 육신은 구세주처럼 고양될 것이다(1고린 6, 14).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을 이루며(1고린 6, 15), 성령의 성전(1고린 6, 19)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육신을 하느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데 써야 하는 것이다(1고린 6, 20). 플라톤 철학은 교부들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초기 수도자들의 엄격한 수덕주의에는, 한편으로 정신이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 '육체의 열망' 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관념을 뜻하는 표현들이 드러나며, 다른 한편에서는 플라톤 철학과 아주 유사해 보이는 육신에 관한 불신이 드러난다. 그러나 철학이 전적으로 무지했던 수도자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플라톤이나 플로티노스의 사상이 수도자들의 엄격한 수덕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한 표현들 안에 들어 있는 철학적인 영향 관계를 무시 할 수는 없지만, 수도자들의 생활이 독자적으로 미친 영 향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영혼과 육신의 이중론에 있어서 동방 교회는 육신에 관한 개념의 역사적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동방 교회의 많은 영성 생활 관련 주제들은 그리스사상, 즉 영혼과 육신의 관계에 대한 문제, 타율적인 존재들이 하느님의 지혜를 통하여 신비스럽게 결합되어 있는 것에 관한 개념의 궁극적 근거에 분명히 영향을 미쳤다. 인간은 원죄 이후 근본적으로 영혼과 육신의 구성이 변증법적으로 반대되는 특성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은 인간의 영성화 정도에 따라 증가 또는 감소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노시스주의자들에 반대하여 이레네오(Irenaeus Lugdu-nensis, 130/140?~202)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구원은 육신을 부정한다. 그것은 지상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육신에 대한 비난은 창조, 육화, 구원 등 그리스도교 신비의 총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플라톤 사상에 영향을 받은 교부들조차도 육신이 인간 본성의 완전한 부분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신약성서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은 구원의 신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화하여 오셨다" (1요한 4, 2 ; 2요한 7)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파문하였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Ignatius Antiochenus, 35?~107)는 그리스도 가현설(Docetismus)에 반대하여 싸웠다. 이 주장이 그리스도교의 근본을 훼손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이레네오는 그노시스주의자들에게 인간의 육신은 "멸하지 않을 수" 있다고도 하였다. 육신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근본적 교의이기 때문이다. 예로니모(Hieronymus, 341?~420)는, 오리제네스주의자들이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였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종말론에서 이성적 존재는 점차 천사의 상태로 올라가며 영적인 육신을 취하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비난은 불공정하다. 에바그리오(Evagrius)가 비록 천사의 상태로올라간 육신을 더 이상 육적이 아닌 영적인 것, 천사와 같은 것으로 보았지만 그것은 여전히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되기에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그리스도 가현설적인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리제네스주의자들의 영향은 교회의 역사를 따라 지속되고 있다. 이들은 육신을 인간의 신화(神化)가 완전하게 실현될 때까지 점차 완전하게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일시적인 요소로 보았다. 솔로비요프(V. Soloviëv)는 과장된 '영성주의' 를 동방 교회의 영원한 유혹으로 보았다. 그는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은 육적인 실체, '외부' 를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테오판 레클루스도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가 영적일지라도 최고의 등급에서 그들은 육적으로 표현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인간의 육신과 영혼의 신비로운 결합 : "육신과 영혼으로 구성된 인간은 이중적이다" 라고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2세기)는 말하였다. 육신과 영혼의 결합은 신비스러운 것이다. "한편으로 육신은 육적인 것에 기원을 두며, 다른 한편으로 영혼은 외부로부터 먼지, 피조물까지 그 자신을 통합하여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육신과 섞여 있다." 이러한 신비로운 결합, 두 가지 서로 다른 본성의 결합은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에게 있어서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다. 그의 대답에 따르면, "오직 하느님만이 이 '혼합' 의 이유를 아신다." 그레고리오에 의하면, 영혼과 육신이 결합된 까닭은, 첫째 우리가 싸우고 투쟁하고 불 속의 금처럼 연마되어 영광을 물려받을 수 있기 위한 것이고, 둘째 하느님이 영혼 안에 존재하시듯 영혼도 육신안에 존재하여 영혼이 더 열등한 본성인 육신을 그 안으로 끌어들여 그것을 신적인 것으로 들어 올리려는 것이다. 인간 영혼과 육신의 결합에 관한 신학적 주장과는 또 달리 영성 저술가들은 실천적인 의미에서 그러한 주장을 하였다. 그들은 인간이 유혹과 육신을 거슬러 끊임없이 싸워야 하며, 그럼으로써 육신과 모든 가시적 우주가 영성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죽음 : 고대 동방인들은 삶과 죽음을 각기 고유한 두 영역으로 보았다. 공간적인 관점에서 죽음은 죽은 자의 영역으로 인식하였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죽음의 자연적 보상을 강조함으로써 죽음을 육신으로부터의 해방, 영원한 것이 되는 것, 우주로의 재흡수 등으로 해석하였다. 구약성서에서는 죽은 자의 거처를 '셔올'(שְׁאוֹל)이라 하였다. 그것은 저승을 지배하고 생명체가 살아가는 땅의 중심 밑에 있는 지역, 제국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병, 속박, 역경 등은 저승으로 추락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죽음의 힘 혹은 죽음의 천사는 그들 멋대로 활동하지 못한다. 그들은 야훼가 허락하는 장소와 시간에만 활동한다. 죽음의 힘 뒤에서 죄인을 치는 분은 바로 야훼이기 때문이다. 인간 죽음에 대한 필요성은 인간의 죄 많음과 연결되어 있다(창세 3장). 신약성서에서도 이렇게 말하면서(로마 5, 12) 더불어 강조하는 것은 영광에 가득찬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사도 3, 15 ; 5, 31 ; 히브 2, 10)이라는 것이다. 동방 교회의 성화는 오랜 전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구류되어 있는 죽은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지옥에 내려오는 신비를 표현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죽음은 두 가지 각도로 보여진다. 죄에 대한 벌과 구원의 표시 즉 그리스도를 닮아 감이다. 영성 작가들은 죽음의 긴박성을 숙고하도록 하였다. 수도자들은 스스로를 "나날이 죽음의 지점에 이르는 사람" 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죽음은 관상에 좋은 주제이다. 만일 그것이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또한 우리의 나날의 세계를 파괴하고 우리가 이 세상 조건에 일치하여 지금의 삶에 축적해 놓은 힘을 초과하는 깊고 커다란 것을 가져온다. 그리스도교의 죽음에 관한 긍정적 측면을 찬양하면서 교부들은, "육신으로 벗어나 영적으로 됨" , "이 세상으로부터 의 해방" , "악으로부터 육신이란 옷을 벗어 내려놓을 때 사라져 버릴 열정으로부터의 정화", "무지에서 완벽한 그노시스로의 이동" , "반쯤 잠들어 있는 것에서 초의식으로" 등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죽음의 표현들을 솔로 비요프는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태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승리하신 중요성을 경감시킨다고 확신하였다. 그에 의하면, 죽음은 그 자체가 긍정적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소위 영의 세계로의 이동은 단지 환상일 뿐이다. 따라서 솔로비요프는 죽음에 대한 설교는 육신의 부활에 대한 신앙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견해의 차이와 통합〕 그리스도교 역사가 진행하는 동안, 인간학에 대한 매우 다양한 견해가 등장하였다. 그런데, 각 입장이 보이는 차이는 매우 극단적이어서 화해의 가능성이 적다.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인 슐라이어 마허(F.E.D. Schleiermacher, 1768~1834)는 인간에 대한 매우 극단적인 견해는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354~430)의 견해를 따르는 칼뱅주의자들은 인간의 죄성 혹은 "전적인 부패"를 크게 강조했다. 이 주장이 주로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영향을 미쳐 왔는데, 그들은 가톨릭교회가 펠라지우스주의 (Pelagianismus)와 신인 협동설(神人協同說, synergismus)의 경향을 보인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사실 많은 신학자들은 중간 노선을 따른다. 1960년대 이후 죄에 대한 주제가 침묵을 지킨 반면, 20세기 초반에는 죄에 대한 강한 강조와 소망과 초월성이 부각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이유는 명백하지 않다. 아마도 근본적인 부분에 대한 문제 제기라기 보다는 강조의 차이인 듯하다. 또 다른 차이는 세상에 대한 긍정과 세상에 대한 부정이다. 창조 교리는 물질 세계 및 몸은 하느님의 작품이며,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라고 알려 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물질적인 것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다른 일부에서는 지나치게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현재는 인간학적인 질문에 대한 상당한 의견 수렴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인간의 실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에서 가장 위협적인 특징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취급하는 것이다. 즉, 어떤 자연 현상을 연구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인간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순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또한, 인간 남녀에 대한 존중을 감소시킨다. 나아가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개념을 배제하며, 인격주의적 철학자들이 '나―너' 의 관계를 일컬었던 범주를 취급하지 않는다. 이런 견해는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렸다고 볼 수 있고, 반대로 인간의 입지를 확대 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충실하고, 동시에 자기 이해를 위한 인간 남녀의 가장 깊은 요구를 만족시킬 설득력 있는 인간학의 완성이라는 요청에 직면해 있다. (⇦ 신학적 인간학 ; 인간 ; → 생명 ;영혼 ; 육신 ; 육화 ; 죄) ※ 참고문헌  Sinclair B. Ferguson ed., New Dictionary of Theology, Illinois, U.S.A., Inter-Varsity Press, 1966/ Karl Rahner ed., Encyclopedia of Theology, Germany, Tunbridge Wells, Kent, Burns & Oates, 1986/ J.A. Fichtner, 《NCE》 1, p. 613/ Mircea Eliade ed., The Encyclopedia of Religion 1, New York · London, Macmilan Publishing Company, 1987/ T. Špidlik, The Spirituality of the Christian East, Kalamazoo, 1986. 〔郭承龍〕 II . 철학에서의 인간학 인간의 본성, 인간과 세계의 관계 등을 연구하는 학문.자연 과학적 · 역사학적 · 사회학적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연구를 포함하기도 한다. '철학적 인간학' (Philoso-phical Anthropology)이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셸러(M.Scheler, 1874~1928)는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에 관해서 모든 과학들이 얻어 낸 풍성한 개별 지식을 근거로 하여, 인간의 자기 의식과 자기 성찰에 관한 새로운 형식을 전개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란트만(N. Landsmann, 1913~ )은 "철학적 인간학은 전인간에 관해서, 인간의 본질에 관해서,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특성에 관해서 묻는다"라고 말하였다. 〔인간 연구의 문제점〕 인간에 관한 연구를 할 때, 우리는 이미 인간에 관해서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해석학에서는 '전이해' (前理解)라고 말한다. 예컨대, 어떤 생물학자가 인간을 해명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어떤 지식을 가졌다고 했을 때, 그 생물학자의 지식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 생물학자는 먼저 인간을 알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가령, 어떤 진화론자가 인간의 두개골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한 화석(化石) 뼈를 발견했을 경우, 그 화석 뼈 자체는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한다. 그 진화론자는 화석 뼈가 인간을 해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하고, 또 인간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어야만 한다. 진화론자는 처음부터 창조설을 거부하고 인간은 다른 동물로부터 진화되었고, 다른 동물은 유기체로부터, 또 유기체는 무기체로부터 진화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가지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인간에 관한 연구를 할 때, 사람들은 이미 인간에 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출발한다.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을 것이라든가, 아니면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물질로만 구성된 동물에 불과하다는 '전이해' 를 사람들은 가지고 있다. 이 인간에 대한 '전이해' 는 인간에 대한 연구를 하는 사람의 인생관과 세계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 관한 연구를 할 때, 연구자 자신의 인간에 대한 자기 이해가 항상 전제되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에 대한 '전이해' 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전이해' 는 더 풍부하고 완전한 이해를 위하여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셀러는 "인간은 동물처럼 종(種)의 성질을 가지고 확고부동하게 고정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를 형성하면서 점차적으로 커지고 있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개방된 존재이다"라 하였다. 인간은 본래부터 확정된 성격이나 정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의 삶은 미리 정해진 궤도에 따라 달리는 기차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은 본래부터 미완성인 채로 세상에 태어났다. 하느님이나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완성하도록 위임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완성하는 과제를 이미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 완성은 그가 스스로 자기 자신에 관해서 만든 어떤 관념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기 행동의 동기를 안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실제로는 전혀 엉뚱한 다른 충동을 받고 행동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인간에 관한 연구를 할 때, 절대적으로 타당성을 인정받은 출발점이란 없다.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말할 때, 학자들은 그러한 특성이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가를 설명한다. 그러나 우연히 착안한 어떤 현상으로부터 인간의 전부를 밝힐 수 있다고 추론하는 것은 자의적이고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인간 존재는 본질적으로 다원적이다. 〔인간 연구의 문제 유형〕 인간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매우 다양하게 다원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물음에 대답을 이끌어 낼 확고한 출발점이 없다. 이 물음은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제기되며, 또 이 물음은 여러 가지 경우에 제기된다. 첫째, 인간은 동물이므로 다른 동물과 비교해 봄으로써 인간의 특성을 살피려고 한다. 여기서 인간은 빈약한 본능을 가졌으며 비전문화(非專門化)되어 있지만, 자기의 생존을 위해 자기 의식과 자기 반성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든가, 인간도 환경의 지배를 받기는 해도 다른 동물과 달리 이성(理性)의 도움으로 환경을 변화시키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 우수한 학습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철학적 인간학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여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둘째,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서 연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을 밖으로부터 고찰해 보는 것과 안으로부터 성찰해 보는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인간을 밖으로부터 고찰하는 경우, 인간은 문화적 존재 · 사회적 존재 · 역사적 존재임을 통찰할 수 있다. 인간은 문화와 사회와 역사의 창조자이면서 또한 문화 · 사회 · 역사(전통)에 의해 이루어지는 피조자(被造者)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미완성 상태로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어떻게 자기 완성을 하며, 문화 창조자로서의 인간에게 자유와 개성이 인간 이해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가를 알게 된다. 또 문화의 피조자라는 면에서 인간을 볼 때, 인간의 사회성 ·역사성이 인간 이해에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을 안으로부터 성찰할 때, 이른바 정신적 존재, 또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의 정신과 이성의 이해의 변천 과정을 역사적으로 개관해 보며, 정신 · 이성 · 오성 · 의지 · 감정 · 영혼과 육체의 의미 등을 살펴보게 된다. 셋째, 인간과 신(神)과의 관계를 통찰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른바 신학적 인간학 및 종교적 인간학이 발생하고 그리스도교적 인간학, 불교적 인간학, 이슬람적 인간학, 유교적 인간학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를 통해 영혼 불멸 · 영생 · 은총 · 구원 · 죽음 · 고통 · 희망 · 사랑의 의미가 인간 이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위기에 처해 있을 때나 누구를 사랑할 때, 대체로 절대자 또는 초자연적 존재에게 기원(祈願)을 한다. 그래서 인간을 종교적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종교가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 주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밖에도 인간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특정한 학문에 주안점을 두고 비판적인 시각에서 제기할 수 있다. 예컨대 교육학적 인간학 · 의학적 인간학 · 정치학적 인간학 · 법학적 인간학이라고 불리는 철학적인 영역들이 있다. 또한때 마르크스주의적 인간학이라는 말이 동구(東歐)에서 유행한 적이 있다. 여기서는 인간 소외의 해소와 인간의 존엄성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해명해 보려고 하였다. 〔인간 이해의 방법〕 철학적 인간학은 그 대상인 인간과 이중으로 연결되어 있다. 첫째로 인간에 관해서 직접 탐구하는 것은 인간에 관한 특수 과학들인데, 이 특수 과학들의 성과들이 다시 간접적으로 철학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인간의 포괄적인 전체 이해를 다룬다. 예컨대 셀러는 푈러(Föhler)의 동물학적인 유인원 연구에서 자신의 정신 개념에 대한 새로운 기초를 놓았다. 겔렌(A. Gehlen,1904~1976)은 동물계에서 인간의 특수 위치를 순수하게 해부학적으로 해석한 것을 받아들여서, 인간은 결핍 존재(Mängelwesen)라는 자신의 명제를 증명하는 데 이용했고 인간과 문화와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이러한 관찰에 있어서 하나의 특수 과학의 성과가 그 과학의 특정한 영역을 넘어서 인간의 전체적인 이해와 연결된다. 이런 경우 철학은 인간의 이해에 접근하는 간접적인 통로를, 즉 특수 과학들이 철학에게 제공해 주는 연구 성과들을 통해서 가는 통로를 갖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서로 분리된 연구 과정의 길이 있는데 하나의 과정이 다른 과정위에 연결된다. 그런데 인간에 관한 특수 과학들 자체가 철학적이며 철학적 인간학의 관찰 방법에 이르기까지 심화되면, 서로 분리되어 있는 두 연구 과정들의 경계선은 흐려지기 시작한다. 둘째로, 철학적 인간학의 관찰들은 특수 과학들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직접 그의 대상인 인간을 다룬다. 인간 존재의 경험 속에 나타나는 삶의 경험에 있어서 하나의 직접적인 통로를 발견하고 여기에 철학적 인간학의 관찰 근거를 찾는다. 우리가 관찰하고 체험하는 삶의 현상들이 바로 이와 같은 영역에 속한다. 우리는 모두 불안이 무엇이며 환희가 무엇이며 신뢰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철학적 인간학의 연구에 있어서도 이러한 직접적인 삶의 체험에서 출발할 수 있다. 길(Klaus Giel)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적인 현상들을 아무런 전제 없이 있는 그대로 관찰한 다는 것은 모든 인간적인 것이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이미 이해되고 있으며, 또한 어떤 이론을 통하지 않고도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가능한 일이다. 철학적 인간학은 이러한 직접적인 삶의 이해를 간과할 수 없으며 직접적인 삶의 이해는 철학적 인간학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특수 과학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직접적인 삶의 체험의 성과들을 과소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러한 직접적인 삶의 체험을 한갓 '시적인 명증(明證)'을 가졌을 뿐이고, 과학의 연구 결과들만 확실한 기초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실제에 있어서는 정당하지 못하다.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모든 과학의 연구는 이미 과학 이전에 삶의 체험 속에 주어져 있는 개념들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러한 개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이해의 범위 안에서 작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철학적 인간학이 인간의 고유한 삶의 체험 속에 그의 대상인 인간에 대한 이해의 직접적인 길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것은 결코 가공적인 사변을 하는 것으로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확하게 경험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기도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별 과학들의 방법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삶의 체험의 특수한 성격을 밝혀내는 것이다. 경험적으로 연구한다는 것도 우리의 삶의 현실 속에 주어진 사실을 연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경험 형성이 '전이해' 와 밀접하게 관련되고 있음을 자세히 논하지는 않겠으나, 이해의 순환성이 삶의 경험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해하는 방법을 현상학적인 방법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현상학은 직접 삶의 경험에 기초한 방법의 엄밀한 표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레스너(H.Ple-ssner)가 현상학의 방법을 중요시하고, 후설(E. Husserl,1859~1938)과 셀러를 극찬하면서도 이를 절대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를 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상학적인 방법이 철학적 인간학에 적용될 때에는 독자적인 성격을 가진다. 현상학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은 그것이 철학적 인간학에 미리 결정적인 방법으로 주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철학적 인간학이 그 자신의 본질에 의해서 자신의 과제를 다루는 데 알맞도록 발전시켜 가야 할 성질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상학이라는 말을 아주 넓은 의미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모든 무리한 단순화와 체계를 거부하고, 비교와 구별을 하는 연구 자세로 현상들 그 자체를 바라보려고 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경향을 뵈이텐디에크(F. Buy-tendiik), 퐁티(M. Ponty), 립스(H.Lipps) 등에서 볼 수 있는데, 그들은 현상학적 관찰 방법을 비교적으로 자유롭게 구사한 사람들 가운데 대표자라고 하겠다. 이와는 다른 면에서 고찰해 보면 철학은 이러한 직접적인 삶의 체험에만 의존할 수 없으며, 또한 모든 과학적인 연구의 확실한 기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철학이 직접적인 삶의 경험에만 의존한다면, 출발점의 우연성을 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철학은 특수 과학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내용적인 확대와 보완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기초적인 출발점의 확인과 교정을 위해서도 특수 과학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직접적인 삶의 체험에 의존하는 방법과 간접적으로 특수 과학들의 성과들에 의존하는 방법 사이에는 일방적인 선후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철학적인 관찰은 언제나 특수 과학들이 이미 이루어 놓은 성과들을 받아들여서 새롭게 정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으며, 또한 철학이 항상 미리 특수 과학에 대해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단지 상호 의존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아프리오리' (a priori, 선험적인)한 면과 '아포스테리오리' (aposteriori, 후천적인)한 면의 융합을 꾀하며, 삶을 파악하고 다시 그것을 자유롭게 하여 주면서 개방성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 인간이 동물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간은 동물이긴 하지만 한 갓 짐승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인간과 짐승의 근본적인 차이는 있는가? 첫째로, 인간과 다른 동물(짐승)이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점은 동물이 육체적인 기관 기능에서 인간보다 더욱 전문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른 동물의 모든 육체적인 기관들은 자연적인 생활 조건과 특수한 환경에 알맞게 되어 있다. 겔렌은 신생아의 생물학적인 초기 양상을 연구하고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하면 미완성된 상태로 출생한다"고 말하였다. 다른 동물들은 그들이 살아가야 할 자연 환경에 꼭 알맞도록 육체적인 기관 기능들이 특수하게 완성된 상태로 출생한다. 그들은 환경에 대한 반응으로 행동할 때 기계적이며 자동적으로 되어 있다. 동물의 이빨은 육식이나 초식에 알맞게 되어 있으나, 인간의 치아는 육식에도 초식에도 꼭 알맞도록 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인간은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본능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농사를 지어 곡식을 먹고 살 수도 있고 또는 목축이나 사냥을 해서 짐승의 고기를 먹고살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엇을 먹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때그때의 경우에 따라서 결정할 문제이지 다른 동물처럼 자연적인 본능이나 육체적인 기관에 의해서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인간의 수태 시기도 다른 동물처럼 시기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고, 언제나 성교(性交)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처럼 인간의 육체적인 기관들이 특수한 생활 조건과 특정한 환경에 꼭 맞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생존 경쟁을 하는 데 있어서 불리한 조건이기도 하고, 반면 유리한 조건이라고도 생각할 수도 있다. 인간의 치아는 맹수에 비해서 육식을 하는 데 있어서 매우 불리하고 초식을 하는 데 있어서도, 초식 동물에 비하면 매우 불리하다. 그러나 인간은 꾀를 써서 요리를 만들어 많은 종류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겔렌은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결핍된 존재라고 말하면서. 인간은 동시에 그의 결핍의 보상으로 자기 반성과 자기 의식을 할 수 있는 정신이 주어졌다고 한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처음부터 생각하는 능력이 주어졌다. 인간이 비전문화되어 있다는 것은 그가 자유로운 정신의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인간의 성장 리듬이다. 인간은 다른 포유 동물 에 비하면 더 오랜 임신 기간을 필요로 할 것 같은데, 1년 정도 더 빨리 출생한다고 한다. 포르트만은 이 현상을 "자궁외 조기 출산"이라고 말하였다.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더 오랜 성장 기간을 갖는다. 인간은 성인이 되는 데 거의 20년이 걸린다. 그러나 고래는 2년 만에 20m에 이르는 거의 완전한 성숙에 도달한다. 다른 동물은 모태안에서 육체적인 기관들이 성숙한 다음에 출생하기 때문에 오랜 성장 기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성장 리듬도 매우 특이하다. 인간은 출생 후 20년 동안 계속 일정하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의 리듬이 다른 동물에 비해서 매우 특이하다. 인간은 육체적인 성장이 끝난 후에도 다른 동물보다 더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하고, 또 그 후에도 정신적으로 더 성장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다른 포유 동물의 수명은 짧으면 2년이나 3년이고, 보통은 12~15년 살 수 있고, 드물게 30년까지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다른 동물은 성장 기간이 끝나면, 그 동물들의 기관들이 바로 쇠퇴한다. 그러나 인간은 계속해서 배우고 생각하면서 삶의 경험을 쌓고, 자신의 경험을 축적해서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 준다. 인간의 조기 출생과 유년기가 긴 것은 인간은 본래부터 배우게 되어 있는 학습 존재임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직립 보행 같은 기본 자세조차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소질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아이에게 보여 주고 가르쳐 주는 표본과 모범의 영향에 따른다. 그래서 인간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배우고 생각하도록 되어 있다. 셋째, 인간에게는 환경이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는 환경이 열려져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세계가 개방되어 있는 존재'(Weltoffenes Wesen)라는 것이다. 다른 동물은 주어진 일정한 환경에서 인간보다 더 잘 적응하지만, 일단 환경이 크게 바뀌면 능동적으로 환경을 자신의 삶에 맞도록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환경과 세계의 지배를 받기도 하지만, 또한 환경과 세계를 자기 삶에 알맞도록 변조시킬 수가 있다. 인간은 환경에 고정되거나 매여 있지 않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은 환경을 고정시킨 채로 유일하게 가지고 있다. 인간은 하나의 환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집단마다 그때그때 인간에게 적합한 또 다른 환경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은 관심을 갖기에 따라서 다른 생물의 환경 속으로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다. 환경에 얽매여 있는 것과 세계가 열려 있다는 것은 인간 내부에서 서로 교차하고 있다. 그래서 만일 인간이 동물처럼 유전적으로 확정되어 있는 환경 속에서만 산다면, 인간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로타커는 말한 바 있다. 인간은 본래부터 윤리적인 존재이다. 돼지는 과식을 하지 않는다. 필요한 만큼 먹고 더 이상 먹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과음 과식을 하고 소화 불량에 잘 걸린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처럼 자동 조절이 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때그때마다 인간은 자기 반성을 통해서 자기 제어를 해야 한다. 니체(F.Nietzsche, 1844~1900)는 인간은 자기를 극복해야 할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동물들은 영양 상태와 발육이 좋은 때를 골라서 발정기와 생식 기간이 정해진다. 그리고 주위 환경이 종족 번식에 적합한 때에 수태를 한다. 천재지변이 있을 때나 동물의 건강 상태가 나쁠 때는 동물은 교미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정신적으로 불안하거나 고도의 정신 생활을 하기 어려울 때, 병이 들었거나 주위 여건이 나쁠 때, 또 전쟁 중이거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일수록 성욕이 항진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동물은 수태 중일 때는 성교를 하지 않으나, 인간은 아무 때나 성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자유가 주어져 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자기의 뜻에 맞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도 있고 자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물은 그러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의식적으로 자기 반성을 통하여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윤리적인 결단을 해야 한다. 그런 음식은 먹어서는 안 된다고 윤리적인 판단이 내려지면 인간은 그런 음식을 먹지 않을 수 있다. 건강에 해로울 때처럼 필요하면 인간은 금욕 생활을 하도록 되어 있다. 사실 인간을 정신적 존재라고 할 때, 정신이라는 말은 자기 억제와 금욕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 생활이란 윤리적인 행위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동물과 다른 사람다움의 범례(paradigm)를 다음과 같이 열거할 수 있는데, 각 범례들은 서로 배타적이거나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상관되고 중복되어 있다. 첫째, 생물학적으로 비전문화되어 있다. 둘째, 물음을 묻는 존재이다(지성 또는 이성). 셋째, 문화의 창조자이며 피조자이다. 넷째, 자유 의지를 가진 윤리적 존재이다. 다섯째, 고유한 내면적 세계를 가지고 있다. 여섯째, 이해를 초월하는 탈중심성을 가지며, 불편 부당한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다. 일곱째, 유토피아 의식을 가지며 미래 지향적이다. 여덟째, 사회적 존재이다. 아홉째, 학습 존재이다. 열 번째, 상징적인 존재이다. 열한 번째, 종교적인 존재(기도 · 희망 · 사랑)이다. 열두 번째, 수치를 아는 존재이다. (⇦ 인간 ; 철학적 인간학 ; → 인격, 철학에서 의 ; 인격주의) ※ 참고문헌  진교훈 외, 《오늘의 철학적 인간학》, 경문사, 1997/진교훈, 《철학적 인간학 연구》 I . Ⅱ, 경문사, 1983 . 1994/ E.Coreth, Was ist der Mensch?, Wien, Styria, 1973(진교훈 역, 《철학적 인간학》, 종로서적, 1984)/ W. Delmiiller, Grundkurs Philosophische Anthropologie, München, Funle, 1996/ D. Holbrook, Further Studies in Philosophical Anthropology, Avebury, Gower, 1988/ M. Landmann, Philosophische Anthropologie, Berlin, Walter de Gruyer, 1969(진교훈 역,《철학적 인간》, 경문사, 1977, 개정판, 1998)/ B. Mondin, Philosophical Anthropology, Rome, Urbana Univ. Press, 1985. 〔秦敎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