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과 상통하는 능력을 갖춘 신. 인간적 형태 또는 심의(心意) 등의 인격성을 갖춘 신.
인격신은 신과 인간의 상호성, 상통성이 전제된 개념이다. 신이 인간과 교감한다는, 인간의 요청을 듣고 그에 응답한다는 기본적인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기도도 나오게 된다. "하느님, 제 기도에 귀기울이소서. 저의 간청을 외면하지 마소서. 제게 주의를 기울이시어 응답해 주소서" (시편 54, 2-3).
〔인격신과 신인 동형론〕 '인격신' 개념은 '신인 동형론' (anthropomorphism)적 사고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신인 동형론은, 신을 사람(anthropos) 모습(morphe)의 확대판으로 여기는 사상이다. 그때의 신은 하나의 확대된 개인과 같다. 그러나 아무리 확대되었더라도 그 신은 사람의 형식과 척도로 재량되고, 그 척도 안으로 환원된 신이다. 인간적 인격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는,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우상' 인 것이다. 성서에 의하면, 우상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는도다. 그들의 손은 만지지 못하고 그들의 발은 걷지 못하며 그들의 목구멍으로는 소리 내지 못하는도다"(시편 115, 5-7). 반대로 인격적인 신은 "귀를 심으신 분께서 듣지 못하신단 말이냐? 눈을 빚으신 분께서 보지 못하신단 말이냐?(시편 94, 9)고 할 때의 그 신이다. 즉, 확대된 인간의 귀나 확대된 인간의 눈을 가진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 귀를 붙여 줌으로써 자신의 음성을 듣게 하고 눈을 끼워 주심으로써 자신을 보게 하는 신이다. 그런 점에서 신의 인격적 구조는 인간의 인격적 구조와 통하면서 그것을 넘어선다. 신격(神格), 즉 위격(位格)은 인격(人格)의 근거가 된다는 말이다.
〔인격신과 인격〕 근거가 된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신은 인간의 인격에 감응하는 인격적 구조를 갖고 있으면서도 둘째, 그 안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의 인격성은 인간의 사유를 넘어서면서도 인간에게 비인격적이고 사물적인 '그것' (It)이 아닌 '그분' 으로 불릴 만한 인격적 구조를 갖고 있다. 가령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은 아담을 비롯한 많은 예언자들과 대화한다. 신은 자기 백성의 고통을 방관만 하지 않고 그 고통에 개입해 고통을 함께 느끼고,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고자 한다. 그러한 신은 오성적 영역에서 인식되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인격적 결단을 통해 체험되는 분이다. 인간의 인격적 결단이 신앙이라면, 그리고 그 결단 속에서 신을 체험한다면, 신은 인격적으로만 경험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신은 '인격적' (personal)이다. '인격적' 이라는 형용사적 표현은 신이 한 인격(a person)과 통하면서도 그 한 인격에 갇히지 않는 개방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신이 인격적으로 경험된다는 점에서 인격신이라는 말로 신인 동형론을 근본적으로 피해 갈 수는 없지만, 성서적이고 신학적 의미에서 신인 동형론에 머무는 신은 인격신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신학자들의 인격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인격' 이라는 말의 쓰임새는 간단하지 않다. 특별히 하느님의 위격성에 대한 논의는 삼위 일체론 안에서 격렬하게 진행되어 왔다. 삼위 일체론에서 사용하는 '위격' 은 라틴어 '페르소나' (persona)의 번역어이다. 이 '페르소나' 는 성서에는 없는 용어이다. 역사적 인물 예수가 보여 준 구원의 활동이 전적으로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테르툴리아노(Tertullianus, 160~223)가 처음 신학화한 용어이다. '페르소나' 는 본래 법정에 나오지 않은 피의자를 대신해 판결을 받아 주는 인물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였다. 테르툴리아노는 역사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하느님의 다양한 모습들, 즉 인간에게 나타나는 하느님의 모습,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역할 등을 구명하고자 '페르소나' 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래서, 하느님이 인간과 관련을 맺고 인간의 체험 안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하였다.
하느님의 관계적 속성을 잘 드러내 준 신학자는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이다. 그는 하느님의 '페르소나' 를 '관계' 로 파악했다. 가령 테르툴리아노는 성부 · 성자인 예수 · 성령의 관계를 "하나의 실체(substantia)이면서 세 개의 위격(persona)"이라고 하였는데, 아우구스티노는 이 세 위격들을 실체보다는 관계로 파악했다. 위격은 본질상 관계로서만 존재한다는, 즉 자신의 실재를 자기 안에 폐쇄시키지 않고 행동적으로 현실화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하느님의 존재 방식 자체를 위격적, 다시 말해 관계적으로 이해했다. 하느님은 애당초 자기 "안에서의 존재" (esse in)가 아니라, 타자"에게로의 존재" (esse ad)라는 것이다. 인격신은 타자 지향적으로만 존재한다. 하느님이 인격적이라는 말은, 하느님은 타자에게 스스로를 전달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 원초적 전달이 바로 관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느님은 애당초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다. 유대인 신학자 부버(Martin Buber, 1878~1965)에게 하느님은 도구적이고 비인칭적인 '그것' (It)이 아니라 "영원한 당신" (Eter-nal Thou)이다. 하느님은 나와 대화하는 인격적 이인칭이다. 인간의 형편을 알고 기도를 듣는 신은 '그것' 이 아니며, 단순한 인격적 은유로써의 '그분' 만도 아니다. 하느님은 애당초 인간과의 관계 속에 있으며, 인간과 이야기하는 '당신' 이다. 벨테(Bernhard Welte, 1906~1983)도 동의하듯이, 하느님을 '당신' 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기본적이고 단순한 사건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인격적 존재의 근원, 출처에 대한 승인을 뜻한다. 인격신은 인간 존재의 출처이다. 또한, 출처이고 근원이기에 초월자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인격성 안에 갇히지 않는다. 인간적 인격과 교감하되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당신' 으로서의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에 의하면, 하느님의 인격성을 논하는 것은 상징적 행위이다.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초인격적이기에 인격적 표상으로 다 담아내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비인격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신인 동형론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 기존의 인간 표상적 접근은 오늘날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며, 새로운 신앙의 형식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래서 그에 의하면, 신이 인격적이라는 말은 '하나의 인격' 이 아닌, 모든 인격적인 것의 '근거' 라는 차원에서 풀어야 한다. 틸리히는 이런 식으로 구체적 인격을 '넘어서는' 인격 내지는 그 '근거성' 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
그러나 오트(Heinrich Ott)는 이러한 접근을 비판하면서, 정말 하느님이 인격적인 것의 근거가 된다면, 그 하느님은 '한 인격' 이기도 하다고 말하였다. "그분은 정말로 한 인격으로서 우리를 관계하시고 우리에게 관계당하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서 말씀 들으시면서, 대면하여 서 계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분 역시 눈은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는 있어도 듣지못하는 ··· 우상에 속하고 말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사실을 더욱 강조하는 이는 하트숀(Charles Hartshorne,1897~2000)이다. 그는, 하느님의 위격은 인간의 인격성과 다르지 않다. 하느님은 인간의 인격성 안에서만, 그 모습으로만 드러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트손은 도리어 하느님을 한 인격(a person)이라는 차원에서 본다. 그 인격 너머의 것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예수의 인격신〕 성서에 나타난 예수와 성부와의 관계는 하트손의 입장보다는 부버 · 벨테 · 탈리히 더 나아가 오트의 입장을 지지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성서에 나타난 예수와 성부의 관계, 예수가 사용한 성부에 대한 호칭에서 인격신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는 성부를 아버지, 더 나아가 '아빠' 라고 불렀다. 그것은 예수와 성부이신 하느님의 친밀한 관계를 뜻한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다면 그는 하느님의 아들인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인격적인 관계에 있다. 아들은 아버지에 의존하면서 아버지를 반영해 주고, 아버지의 모습은 아들을 통해 드러난다. 아들을 보면 아버지가 보인다. 당연히 예수가 아버지라고 부른 하느님은 역사적 인물인 예수의 인격성과 상통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인격적 구조는 하느님의 인격적 구조를 빼닮았다.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17?~1274)는 이 관계를 이렇게 규정한다."아버지께서는···당신과 당신을 닮은 당신의 동질성을 발설하셨다. 그리고 그 점에 있어서 당신의 전 능력을 발설하셨다. 그분은 당신이 만들어 낼 수 있었던, 특히 만들어 내고자 하셨던 것을 발설하셨으며, 모든 것을 그분안에서 표현하셨다" (Hexaemeron I, 13).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에 대한 주도권은 역시 아버지에게 있다. 그렇다면 예수가 아버지라고 부른 하느님은 아들 예수 안에조차 갇히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이고 예수는 아들이다. 성서에서 예수의 입을 빌어 적고 있듯이, "나의 아버지께서는 만유보다도 크시다"(요한 10, 29).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 역시 유사한 구조를 지닌다. 인격신은 인간적 인격에 대해 주도권을 쥔 근거이면서, 그 인격을 반영해 준다. 그 인격의 요청에 부응하면서 그 인격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상의 개념들을 틸리히식 표현을 빌어 정리해 볼 수 있다. 즉, 신에 대한 인격적 표상은 일종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징은 그것이 상징하고 있는 더 높은 현실성에 참여한다. 참여한다는 점에서 "인격적인 상징으로 상징되는 더 높은 현실성은 무인격적인 것이 아니라, 더 높은 뜻에서 인격적인 현실성이다." 그런 점에서 하느님은 인격적 존재, 즉 인격신인 것이다. 골비쳐(Helmut Goll-witzer)는 하느님의 즉자성(卽自性)을 강조하면서, 하느님이 인간 '때문에' 계신다는 기능적 차원을 거부하였다. 하느님의 인격성은 자신의 즉자성 속에서 인간의 인격성에 관여하고 그 근거가 되는 초인격이라는 것이다. 또 브라운(Herbert Braun)이 너에 대해 나로 하여금 '~하도록 요청' 하는 요구의 출처가 하느님이라고 볼 때도 하느님의 인격성은 너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며, 그 관계를 낳는 출처가 하느님의 인격성이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예수가 모든 곳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요구하는 말씀의 근거를 하느님의 인격성에서 찾았다는 뜻이다. (→ 삼위 일체 ; 위격 ; 인격,철학에서의 ; 하느님)
※ 참고문헌 이종성, 《삼위 일체론》, 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고트홀트 하센휘틀, 심상태 역, 《하느님―과학 시대를 위한 신론 입문》, 성바오로출판사, 1983/ 베른하르트 벨테, 오창선 역, 《종교 철학》, 분도출판사, 1998/ 하인리히 오트, 김광식 역, 《살아 계신 하나님》, 현대신서 49, 대한기독교서회, 1984/ 한스 롯터, 안명옥 역, 《인격과 윤리》, 성바오로출판사, 2000/ John Oman, Grace and Personality, New York, Association Press, 1961. 〔李贊洙〕
인격신 人格神 〔라〕personalis Deus 〔영〕Personal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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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세 개의 위격을 가진 삼위 일체의 하느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