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촌

敎友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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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 이후에 설립된 충남의 사랑골 공소와 옹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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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 이후에 설립된 충남의 사랑골 공소와 옹기점.


동일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이룩한 집단 부락. 이와 같은 성격을 지 닌 부락은 일찍부터 세계 각처에 존재해 왔고, 각 종교 마다 자기들만의 집단 부락을 이와 동일한 명칭으로 부 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박해 시 대 이래로 형성되어 온 '천주교 교우들의 신앙 집단' 을 교우촌으로 부르고 있다. 〔형성과 변모〕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교우촌이 형성되 기 시작한 시기는 1791년(정조 15)의 진산사건(珍山事 件)으로 박해가 본격화된 이후였다. 기록으로는 1801년 신유박해를 전후한 시기에 충청도 · 경기도 · 경상도 · 강 원도 남부의 산간 지대에서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 고, 1830년대 초에는 이미 전라도 지역과 경상도 남부 지역에까지 확대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다가 1830년 대 이후 각 교우촌은 선교사들의 방문을 받으면서 공소 (公所)로 발전하였으며, 신앙의 자유가 이루어진 뒤에는 각 본당(本堂)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1861년 제 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설정한 8개 지역의 본당 중심지도 바로 이들 교우촌이었다. 한 편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éol, 高) 주교는 1850년 의 보고서에서 전국의 공소수를 185개소 이상이라고 하 였는데, 교우촌은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박해 시대의 교우촌들은 곧 순교의 터전이요 그 지역 교회의 중심지였으며, 성직자들의 피난처요 활동 근거지 였다. 그러므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점차 교회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훗날 사적지로 조성되기도 하였다. 이들 중 대표적인 교우촌들은 다음 표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대부분 깊은 산간 지대였다. 그 후 교우촌의 신자들은 일제 시대 초까지 점차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 여 새로운 곳에 교우촌을 건설하였으며, 동시에 박해 시 대의 교우촌은 점차 명맥을 잃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와서는 교우촌이라고 하여도 신자가 아닌 가 족이 섞여 살게 되었고, 따라서 교우촌 본래의 의미는 점차 퇴색되어 갔다. 〔생활과 의미〕 박해 시대 교우촌의 생활은 대부분 회 장들이 중심이 되어 공동으로 이루어졌으며, 필요한 경 우 신자들은 다른 교우촌과 연락을 취하거나 교회 업무 를 뒷받침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생활 수단은 화전으로 일군 밭 농사, 분업을 필요로 하던 옹기점이나 숯막 운 영 등이었다. 따라서 이들 교우촌이 있던 곳에는 현재에 도 가끔 옹기점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숨어 사 는 피난 생활이었으므로 그들의 생활 형편은 대부분 가 난할 수밖에 없었고, 때로는 그들의 재물을 노린 사람들 의 밀고와 약탈로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뿐만 아니 라 어떤 곳에서는 탄압의 손길이 두려워 새로 건설한 교 우촌을 버리고 모두 이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교우촌의 신앙 생활은 철저하긴 했으나, 신자들의 교 리 이해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많은 교우들 이 글을 알지 못했고, 본래 교리서들이 많지 않았던 데 다가 그나마도 박해의 와중에서 이를 빼앗겨 버리거나 잃어 버린 때문이었다. 당시의 신앙 생활 중에서 부전자 습(父傳子習) · 모전여습(母傳女習) 등 구전에 의한 교 리 학습이 많았던 사실이 나타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때문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는 훗날 한 글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지어 널리 전파함으로써 교 우들이 교리를 이해하거나 전교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 도록 하였다. 또 교우촌의 신자들 가운데는 일생 동안 성체성사를 받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 들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들으면서, 그리고 교리를 몸소 실천하거나 복음의 진리를 믿으면서 순교 신심을 닦아 나갔다. 이처럼 모든 것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교우들만의 집단 부락을 형성한 이유는 박해를 피해 신앙 생활을 영 위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박해 시대의 교우촌은 피 난처요 신앙 근거지로서, 또 전교 활동의 터전으로서 중 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우촌은 또 다 른 비밀 지하 교회(crypto church)로서 한국 천주교회가 발전과 쇠퇴를 거듭하면서도 재생의 활로를 얻게 되는 바탕이었고, 수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킴으로써 한국 순 교사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순교자와 증거자들》, 한국교회사 연구소, 1982/ 김진소, 《신바람 사는 보람》,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車基眞, 〈迫害期 천주교 신자들의 信仰과 生活〉, 《교회와 역사》 제 164호( 1989. 1), 한국교회사연구소, pp. 6~11. 〔車基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