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인노첸시오 1세(?~417) : 교황(401~417). 성인증거자. 축일은 7월 28일.
〔생 애〕 교황 인노첸시오 1세의 출생에 대한 내용과 업적에 대하여 자세히 전해지지는 않는다. 그는 선임 교황인 아나스타시오 1세(399~401)의 아들로 알바노(Alba-no)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며, 401년 12월 21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는 아버지의 이름이 인노첸시오(Innocentius)라고 전해 준다. 교황 인노첸시오 1세는 교황 시리치오(384~399), 레오 1세(440~461), 젤라시오 1세(492~496) 등과 더불어 4~5세기의 가장 중요한 교황 중 한 사람이다.
교황 수위권 확립 : 교황은 로마 교회가 다른 모든 교회보다 우위에 있도록 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로마 교회를 표준으로 하여 모든 유럽 교회가 교회제도를 정비하도록 이끌었다. 교황은 교회의 명령권과 관리권뿐 아니라 신학 논쟁에 있어서의 최후의 결정권을 로마 교회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이단에 대해서는 매우 강력하게 대처했고, 교회의 규칙을 매우 엄격하게 지키도록 하였다. 그는 로마에 남아 있던 대립 교황 노바시아노(251~258?)의 추종자들이 속한 교회를 자신의 관할로 끌어들였다.
서고트족의 알라리크(Alaric)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인 호노리우스(395~423)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로마를 포위하였다(408~410). 이에 교황은 알라리크와 라벤나(Ravenna)에 머물러 있던 호노리우스 황제와의 평화 중재를 위해 나섰다. 그리고 알라리크는 조건이 만족할 만한 경우 평화 협정을 체결할 것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알라리크는 로마를 공격하였고, 교황은 로마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교황은 서방뿐 아니라 동방의 모든 교회의 대표로 구체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관한 예가 데살로니카의 주교에게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되었음을 통보하고 전임 교황이 부여한 권한을 재확인한 일이다. 일리리쿰(Ⅲyricum) 교구가 동로마 제국 내에 놓이게 되자 다마소 1세 교황(366~384)은 이 지역에 대한 교황의 권한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선언하였고, 시리치오 교황(384~399)은 데살로니카의 주교에게 일리리쿰의 주교 임명권을 위임하였다. 바로 이 권한을 교황 인노첸시오 1세가 데살로니카의 주교인 루포(Rufus)에게 있음을 재확인하였다. 그래서 루포 주교는 교황의 대리인 자격을 지니게 되었다. 404년 2월 15일에는 루앙(Rouen)의 주교인 빅트리치오(Victricius,+407)가 문의한 교회 내의 규정에 관한 문제에 대한 결의 내용을 통보하였다. 이때에 문의한 사항은 주교 임명, 성직자 임명, 성직의 개념 규정등에 관한 것이었다. 결의된 내용에는 교회에 관한 중요한 문제는 교황청에서 판결을 내리도록 하고 성직자 임명, 성직자 독신제, 개종한 이단자들에 대한 처리, 수도자, 수녀 등에 관한 처리 지침 등이 들어 있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모든 교회 내적 일의 처리는 로마 교회의 처리 지침을 표준으로 통일하는 것이었다. 교황은 스페인의 주교에게도 같은 지침을 전달하였다. 당시 스페인의 교회도 프리스킬라를 추종하는 무리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교황은 이 문제를 비롯하여 다른 교회 내의 문제에 대한 처리 지침을 전달하였다. 이 밖에도 툴루즈의 엑수페리오(Exuperius,+411) 주교, 그리고 마케도니아 교구의 여러 주교들, 그리고 구비오(Gubbio)의 데센티오(Decentius,+410) 주교, 노체라(Nocera)의 펠릭스(Felix) 주교 등에게도 교회 내부의 업무 처리 지침을 전하였다. 그리고 영국에 있는 막시모와 세베로 주교에게는 성직자로 지내던 도중 아이를 갖게 된 사제의 처리 지침을 전하였다. 교황은 이 경우 사제를 성직에서 물러나도록 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강력한 교회 내적인 통일 작업에는 특히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였던 요한 그리소스토모(Joannes Chrysostomus, 344/354?~407)의 강력한 뒷받침이 있었다. 그는 황후였던 에우독시아(Eudoxia)와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로 총주교(384~412)의 탄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교황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요한 그리소스토모는 결국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래서 교황도 그를 위해 노력하면서 콘스탄티노플 교구를 맡은 아르사치오(Arsacius, 404~405)와 아티쿠스(Atticus, 405/406?~425)를 인정하지 않았다. 요한 그리소스토모가 세상을 떠난 후 교황은 그의 복권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 결과 테오필로가 죽은 412년에 요한 그리소스토모는 복권되었다. 하지만, 이 문제로 알렉산드리아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노플과의 관계도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단에 대한 문제 : 교황 인노첸시오 1세는 호노리우스 황제와의 관계가 비교적 좋아 당시 강한 세력을 펼치던 이단에 대한 금지 조치를 이끌어 냈다. 당시에는 마니교, 몬타누스주의, 그리고 프리스킬라주의 등의 이단이 난무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모두 황제의 명으로 단죄하였다. 또한, 교황은 아리우스주의 문제 때문에 발생했던 안티오키아 총주교좌와의 대립을 해결하였다. 안티오키아의 총주교였던 알렉산데르(414~424)는 로마 교회에 속하기를 원했다. 교황은 그를 안티오키아의 총주교로 인정함으로써 관계를 회복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1세는 펠라지우스주의에 대한 결정도 내렸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예로니모(347~419)와 수녀들이 펠라지우스주의자들로부터 폭력적인 공격을 받아 부제 한 명이 사망하고 수도원은 불탔다. 이 싸움은 예루살렘의 주교인 요한(386~417)과 예로니모가 대립하는 가운데 발생하였다. 이때 교황은 예로니모를 격려하는 편지와 예루살렘 주교를 훈계하는 편지를 보냈다. 결국 415년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개최되어 교황이 펠라지우스주의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동방 교회들은 디오스폴리스(Dispolis)에서 별도의 시노드를 개최하여 펠라지우스주의자들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아프리카 주교들은 카르타고에서 회의를 열고 펠라지우스주의자들을 단죄하였다. 그리고 이 내용을 교황에게 보고하였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주교들 중의 한 사람인 아우구스티노(Augusinus Hipponen-sis, 354~430)는 펠라지우스주의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담은 편지를 교황에게 보냈다. 교황은 417년 1월 펠라지우스주의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펠라지우스(354?~ 418?)를 파문하였다. 펠라지우스는 교황에게 자신의 사상을 변명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교황은 이 편지를 받아 보지 못하고 417년 3월 17일 선종했다. 그의 유해는 아나스타시오 1세 교황이 묻힌 비아 포르투엔시스(ViaPortuensis)에 있는 묘지에 안장되었다. 교황은 신자들의 기부금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교좌 성당인 성 비탈리 성당을 건축하였다. (→ 아우구스티노, 히포의 ; 예로니모 ; 요한 그리소스토모 ; 펠라지우스주의)
※ 참고문헌 J.P. Kirsch,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VIII, Kevin Night, 1999/ C. Hoβ, Biographisch-Bibliographisches Kirchenlexikon, Bd.II, Verlag Traugott Bautz, 1990/ É. Amann, 7, pp. 1940~1950/ P.T. Camelot, 《NCE》 7, pp. 519~520/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1996, pp. 37~38. 〔李種凡〕
② 인노첸시오 3세(1160/1161~1216) : 교황(1198~1216). 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교황 중 한 사람.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소집했으며, 도미니코회와 작은 형제회를 인가했다. 본명은 로타리오 데 세니(Lotario de Segni) .
〔초기 생애〕 로타리오는 1160년 또는 1161년에 이탈리아 캄파냐(Campagna)에서 트라시몬도(Trasimondo deSegni)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로마에 있는 성 안드레아 수도원 학교를 다녔으나 정식 신학 공부는 파리에서 시작하였다. 이때 파리 대학은 보수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는데 이것은 후에 그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볼로냐에서 법률 공부를 하였다. 1190년에 그는 삼촌인 교황 글레멘스 3세(1187~1191)에 의해 성 세르지오와 바코 성당 명의의 부제 추기경이 되었다. 그러나 세니 가문과 적대적인 오르시니(Orsini) 가문 출신인 첼레스티노 3세(1191~1198)가 교황에 재임하던 시기에는 아나니(Anagni)에 머물며 주로 명상과 독서에 몰두하면서 저술 활동을 하였다. 교황 첼레스티노 3세는 자신의 후임으로 조반니 디 콜론나(Giovanni di Colonna)가 되기를 바랐지만, 로타리오 추기경이 1198년 1월 8일 2차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그는 2월 21일 사제 서품을 받았고, 다음날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교황으로서의 활동〕 직면한 문제들 : 재위 초기 교황에게는 교황령에서 교황권의 불안정, 2명의 독일 왕 선출, 프랑스와 영국 즉 카페 왕조와 앙주 왕조의 전쟁 등 3가지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즉위할 당시 로마는 교황권으로부터 독립해 있었으나, 그는 곧 이를 원 상태로 회복하였다. 갈등이 있었지만 몇 년만에 자신을 반대하는 귀족 당파를 평정하고 민중들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스폴레토 공국과 안코나 변경을 얻었다.
1197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1190~1197)가 사망한 다음 후계자가 쉽게 정해지지 않았다. 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가 시칠리아의 왕으로 봉해졌고, 황후인 콘스탄차 1세가 섭정을 맡았다. 그런데,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족 출신 남작들은 게르만족이 시칠리아를 지배하는 것을 거부하고 더욱이 어린 왕이 오르는 것은 반대하였다. 그래서 콘스탄차 1세는 교황의 도움을 청했고, 교황은 이 기회를 교황권의 공고화에 활용하였다. 교황은 교서를 발표하여 프리드리히 2세를 시칠리아의 왕으로 인정하기 전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 내었다. 1198년 11월 28일 황후가 사망하자 고아가 된 왕은 철저하게 교황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를 진심으로 돌보았고 성인이 된 프리드리히 2세를 보호하였다.
독일의 위기 : 독일에서는 1197년에 두 명의 왕이 등장하였다. 필리프(Philipp von Schwaben, 1198~1208)와 오토(Otto von Braunschweig, 1198~1218)가 동시에 자신의 지지자들에 의해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 결과 시민 전쟁이 일어났고, 필리프와 오토는 서로 교황으로부터 황제로 인정을 받으려고 하였다. 이에 교황은 독일의 영주들에게는 황제를 선출할 권리만 있고 교황은 선출된 황제를 검증하고 도유하고 대관식을 거행할 배타적 권리를 갖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1201년 3월 1일 교황은 오토를 독일의 왕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오토는 적을 많이 만들었고, 그 결과로 필리프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교황은 필리프와 화평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필리프에게 우골리노(Ugolino of Ostia) 추기경과 레오(Leo of Santa Croce) 추기경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필리프가 1208년 암살당하자 오토는 선거를 통해 독일의 왕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10월 로마에서 교황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4세로 대관되었다. 이때 오토는 교황을 보호하고 로마와 교황령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즉 오토는 대관식 전에 교황이 스폴레토(Spoleto), 안코나(Ancona) 그리고 마틸다 백작 부인이 기부한 것을 계속 소유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엄숙히 약속하였다. 교황은 이외에도 교회 성직자를 자율적으로 선출하는 일, 영적인 일에 관한 판결에 대한 교황의 독점권, 그리고 성직자가 관할하는 지역의 세금을 교회가 독점하는 것 등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즉위 후 오토 4세는 교황령을 일부를 빼앗고 시칠리아를 침공하였다. 이에 교황이 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오토는 거부했고, 교황은 오토를 파문하였다. 독일의 제후들은 교황의 제안을 받아들여 1211년 9월 뉘른베르크에서 프리드리히 2세를 독일의 왕으로 선출하였고, 1212년 12월 제후들은 이 선출을 재확인하였다. 1212년 12월 9일 프리드리히 2세는 황제로 대관되었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는 〈에거 황금 문서〉(Golden Bull of Eger, 1213. 7. 12)를 발표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 황제는 1215년 아헨(Aachen)에서 황제 대관식을 한 번 더 거행하였다.
영국과의 갈등 : 영국에서는 캔터베리의 주교 선출과 관련해서 영국 국왕의 개입으로 부정 선거 시비가 발생하였다. 존 왕(1199~1216)은 캔터베리의 월터(H. Walter) 대주교가 사망한 후 신임 대주교 임명 문제로 교황과 대립하였다. 교황은 1207년에 아일랜드 추기경인 랭턴(S.Langton, ?~1228)을 대주교로 받아들이라고 하였으나, 존왕은 거부하였다. 이에 교황은 그를 파문하였으나 효과가 없자, 신하들의 충성 서약을 무효화하고 존 왕을 교회의 적으로 선언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하였다. 프랑스의 영국 침략을 두려워한 존 왕은 결국 교황에게 굴복하고 영국과 아일랜드가 교황청의 봉토임을 1213년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귀족들은 존 왕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귀족들에게 이양하는 〈마그나 카르타〉(Magna Charta)에 서명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후에 왕권과 시민권이 대립할 때 시민에게 이로운 결정적인 근거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교황은 자신의 동의 없이 강요된 것이기에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십자군 : 교황은 성지 회복을 위한 제4차 십자군(1202~1204)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 원정은 교회 역사에서 대단히 수치스러운 군사 원정이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의 이기적인 욕심이 개입되어 교황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약탈하고 파괴하였다. 이 비이성적인 행동은 동 서방 교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알비파(Albigen-ses)에 대한 십자군을 조직하도록 1208년에 지시하였다. 당시 알비파는 프랑스의 가톨릭 교회를 흔들고 있었는데, 교황은 이단 심문을 통해 단죄하도록 교황 대사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그런데 교황 사절인 카스텔노의 베드로가 알비파에 의해 살해되자 교황은 십자군 조직을 지시했던 것이다. 이 십자군을 통해 이단과 세속 권력이 공모하는 것을 단절시켰으며, 정치적 혼란을 막을 수 있었다.
교회 내의 업적 :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최대 업적 중의 하나가 1215년에 개최한 제4차 라테란 공의회였다. 이 공의회에는 중세 시기의 교회 내 모임 중 가장 많은 1,200명이 참석하였다. 모든 주교들이 의무적으로 이 공의회에 참여하였다. 교황은 이 공의회를 통해 교회 개혁을 추진하고, 신앙과 윤리를 강화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려고 하였다. 공의회는 독일의 황제 선거와 관련해서 프리드리히 2세의 선출을 인정하였다. 성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재확인되었고, 주교의 주요 직무로써 신앙의 전파와 사목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은 부활 시 기에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해야 한다는 의무를 지닌다는 점도 재확인하였다. 여기서 결정된 70가지 조항을 통해 실체 변화(Transsubstantiatio)에 관한 규정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삼위 일체설과 연관하여 성변화에 관한 이단적인 주장을 하던 플로라의 요아킴(Joa-chim de Floris, 1132~1202)의 일부 주장이 단죄를 받았다. 이러한 개혁은 그 후 여러 가지 위협으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역할을 해 주었다.
또한, 교황은 당시 늘어나는 수도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중에도 작은 형제회와 도미니코회를 지원하였다. 이는 복음의 가르침과 사도들을 본받아 청빈 운동을 실천함으로써 이단을 물리치고 교회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검소했던 교황은 다른 이들에게도 이를 권장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성지 해방을 위한 제5차 십자군을 준비하던 1216년 7월 16일 열병으로 페루자에서 선종하였다. 교황의 유해는 그곳의 성 라우렌시오 성당에 안장되었다가 교황 레오 13세(1878~1903)에 의해 로마의 라테란 대성전으로 이전하였다.
〔평 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사고는 그의 저서인《인간의 미천한 상태에 대하여》(De misera condicione homi-mis)에서 잘 드러난다. 즉 인간은 "불쌍하고 하느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매달린 존재이다. 그러나 비록 교황이 하느님보다는 작지만 다른 인간보다는 더 큰 존재이다" 라고 교황직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그는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 교황권을 법률적으로 확고히 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증명서의 아버지(Vater der Urkunde)라는 별칭답게 교회의 문서 발급 수수료 관련 제도를 통일하고, 교황청 문서의 진위 여부를 검사하는 규정도 제정하였다. 이러한 공문서에 대한 규정은 로마법의 전통에 입각하여 마련하였다. 그래서 그의 교령 중 상당 부분은 교황 그레고리오 9세(1227~1241)의 《교령집》(Liber Decretalium)에 수록되었다.
또한 그는 교황 중에서는 최초로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라고 불렀다. 이는 유럽에서 교황의 지위와 임무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려는 것이었다. 특히 로마에서 교황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데 교황은 심혈을 기울였다. 아울러 그는 교황권을 중세 국가와 권력의 한 축으로 정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교황청의 영토는 두 배로 늘었다. 사실 교황은 세속 정치에 깊이 관여하면서 세속 정치에 교황권의 영향력을 최대한 확대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는 교황직을 본래의 모습대로 회복시키고, 그 결과
교황직은 서구 그리스도교를 이끌어 가는 절대적인 요인으로 자리잡게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라테란공의회, 제4차 ; 십자군 ; 알비파)
※ 참고문헌 R. Beck, Deutschland. Ein historisches Lesebuch, Verlag C.H. Beck, München, 1990/ M. Hanst, Biographisch-Bibliographisches Kirchenlexikon, Bd. II , Verlag Traugott Bautz, 1990/ R. Kottje, Ökumenische Kirchengeschichte, Bd. 2, Matthias-Grünewald-Verlag, 1993/A. 프란츤, 최석우 역, 《개정 증보판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2001/ W. Ullmann, 《NCE》 7, pp. 521~524/ G.B. Ladner, 《EB》 9, pp. 604~606/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1996, pp. 186~188/ M. Ott,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VIII, Kevin Knight, 1999. 〔편찬실〕
③ 인노첸시오 8세 (⇨ 르네상스 교황)
인노첸시오 Innocentius
글자 크기
9권

1 / 3
인노첸시오 1세 교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