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印度 〔영〕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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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800년 이전에 사용된 돌에 새겨진 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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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800년 이전에 사용된 돌에 새겨진 인장.

아시아의 중앙 남부에 있는 국가. 공식 국가명은 인도 공화국(Republic of India). 국토 면적이 세계에서 7번째로 넓고, 인구는 세계에서 2번째로 많다. 수도는 뉴델리(New Delhi)이며, 국토 면적은 330만 ㎢이다. 북쪽에는 히말라야 산맥이 있으며, 중국 · 네팔 · 부탄과 접경을 이루며, 북서쪽은 파키스탄과 국경을 접한다. 동쪽은 대부분 벵골 만을 접하고 있으며, 일부 지역이 미얀마 및 방글라데시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서쪽은 아라비아 해, 남쪽은 인도양으로 둘러싸여 있다. 인도는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나라로 백인종, 흑인종, 황인종 외에도 오스트랄로이드, 몽골인, 네그로이드 등 모든 인종을 다 볼 수 있다. 언어는 15개 주요 지방어가 있으며, 이를 다시 세분하면 1,652종에 달하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가장 큰 어족은 대다수 주민들이 사용하는 드라비다 어족과 인도이란 어족이며, 그 밖의 소수 어족으로 오스트로아시아 어족과 시노티베트 어족이 있다. 인구의 45%가 쓰는 힌디어가 인도 정부의 공식어이지만, 18세기 이후 영국의 인도 정복으로 들어온 영어도 여전히 공식어로 사용된다.
연방 공화국인 인도는 25개 주와 중앙 정부의 직접 관할을 받는 7개 연방 직할주로 구성되어 있다. 연방 정부와 주정부 간의 역할 분담에 의해 국정이 운영된다. 행정부는 대통령 · 부통령 · 국무위원회로 구성되며 대통령이 국가 원수로서의 지위를 갖는 대신, 행정 실무는 내각 수반인 총리가 담당하는 의원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
반만 년의 역사와 광대한 영토가 빚어낸 문화적 다양성 때문에 '종교의 백과 사전' 이라 할 수 있는 인도는 세계적인 종교의 발상지인 동시에 근거지이다. 그래서, 인구의 대다수가 믿는 힌두교를 비롯하여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시크교, 불교, 자이나교 등 많은 종교가 존재한다. 힌두교는 기원전 2000~1500년경 베다 시대 이전에 체계를 갖춘 것으로 여겨진다. 인도 국민의 약 83%가 믿는 힌두교는 강력한 국민 통합 요소이기도 하지만, 카스트 제도로 인해 분열 요소로 작용되기도 한다. 기원전 6~5세기경 힌두교에서 불교와 자이나교가 파생되었다. 서기 16세기에 무굴 제국이 건설된 이후 인도의 대부분 지역에 이슬람이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이 지배적이던 지역이 인도의 독립 당시 파키스탄으로 분리됨으로써 현재 이슬람을 믿는 인도인은 전체 인구의 약 10% 정도이다. 그리스도교는 전체 인도 인구의 약 2% 정도이다. 총 인구는 2001년 현재 986,610,000명이다.
〔인더스 문명과 전개〕 현재의 인도와 1947년에 분리 · 독립한 파키스탄 및 방글라데시를 포함한 인도아(印度亞) 대륙에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의 삶은 주로 사냥과 채집에 의존했으며, 후기에는 소 · 양 · 물소 등의 가축을 길렀다.
인더스 문명 :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4000년경 발루치스탄 고원 지대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농경 문화가 기원전 3000년경 인더스 강 유역의 범람지로 확대 · 발전하면서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하였다. 이 문명의 가장 큰 특징은 도시 계획에 있다. 건물들은 일정한 간격을 둔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골목길 상하 좌우로는 벽돌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사방으로 연결되는 수로를 판 흔적이 있다. 남북 방향으로는 성채가 다른 지역보다 다소 높게 건설되었고, 그 아래로는 시가지가 격자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이미 도시의 기능과 효율성을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중 목욕탕의 유적도 발견되며 조장(鳥葬)의 풍습이 있었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인더스 문명은 방사성 동위 원소를 이용한 연대 측정법에 따라 기원전 2300~1750년에 실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갑작스러운 멸망의 원인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홍수에 의한 자연 재해설, 인구 폭발에 따른 식량 부족설, 외부의 공격에 의한 파괴설 등 여러 가지 학설이 가정 수준에서 제기된다. 그러나 인더스 문명이 인도 문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아리아인의 침입과 카스트의 정착 : 인더스 문명이 몰락하면서 문명의 중심지는 갠지스 강과 인도 남부의 해안 지방으로 옮겨졌다. 기원전 15~13세기경 아리아인들이 인도아 대륙을 침입하였다. 이들은 현재 유럽인들의 조상으로, 본래 시베리아 남북부와 투르키스탄 등지에 살던 유목민이었다. 이들은 기원전 18~17세기경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다가 인도까지 침입한 것인데, 처음에는 펀자브(Punjab)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후 활동 무대를 갠지스 강 유역으로 옮기고, 농경을 주로 하는 정착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당시 인도에 살던 원주민들을 쉽게 정복하고, 그들을 노예화하였다. 이것이 카스트 제도로 승려 · 사제 계습인 브라만(Brahman) 귀족 · 지배 계급인 크샤트리아(Ksatriya), 평민 계급인 바이샤(Vaisya) , 노예 계급인 수드라(Sudra)로 분류되었다. 이중 브라만과 크샤트리아 이외에는 인격적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오늘날의 인도인들은 당시의 원주민인 드라비다인과 아리아인의 혼혈이다.
고대 도시 국가의 성립 : 아리아인들은 점차 도시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였으며, 기원전 7세기 무렵에는 이미 상당한 세력을 지닌 국가들이 나타났다. 이 국가들에서 일반적으로 왕은 거의 상징적 존재였고, 실권은 부족장 회의에 있었다. 이때 번성한 국가들은 주로 갠지스강의 동부 지역에 위치해 있었는데, 북부에는 코살라, 중부에는 마가다, 남부에는 비데하 등이 대표적이었다. 기원전 4세기경까지 정복 전쟁이 이어졌는데, 마가다왕국의 왕 빔비사라(기원전 582~554)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부족장들을 누르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확장 정책을 추구했다. 이즈음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artha, 기원전 624~544?)에 의해 불교가 일어났다. 빔비사라의 아들 아자타사트루(기원전 554~527)는 카시 · 코살라 · 비데하 등을 정복하여 인도아 대륙의 최강자로 부상하였다.
마우리아 제국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침입(기원전 327~326)은 인도의 정치 · 종교 · 문화 ·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침입으로 인도인의 민족 의식이 눈뜨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힘입어 인도를 통일한 왕이 마우리아 제국의 찬드라 굽타(기원전 327~297)이다. 그는 마가다 지역의 난다 왕조를 무너뜨리고,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서북 인도를 평정했다. 그리고 인더스 강 유역의 그리스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결국, 그는 카르나타가 남부 지역과 아프가니스탄의 일부를 제외한 인도의 전지역을 통일하였다. 그에 의해 인도인에 의한 최초의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의 손자인 아소카 왕(기원전 273~232) 시대에 마우리아 왕조는 번영의 절정기에 도달하였다. 그는 인도의 남부 타밀 지역을 제외한 전 인도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는 완비된 행정 조직과 정비된 도로망을 통해 중앙과 지방을 효과적으로 관리 · 통제하였다. 그는 특히 불교의 보호와 전파에 큰 업적을 세웠다. 불교의 가르침을 국가 통치의 기본 이념으로 삼았으며, 스스로 불교 신자가 되어 불교의 해외 전파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그의 업적 때문에, 불교에서는 그를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 칭송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사후 제국은 분열과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 이유는 여러 왕자들이 각자의 영역을 분할 · 통치함으로써 중앙 집권제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한 점, 그리고 지방마다 서로 다른 화폐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회적 · 경제적으로 통일 제국의 기능을 원할하게 발휘하지 못한 점 등이 있다.
그리스도교의 전래 : 대다수의 인도 신자들은 인도에서의 복음 전파는 사도 토마스(Thomas)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믿는다. 《토마스 행전》에 따르면, 사도 토마스는 서기 52년 남부 인도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7개의 성당을 세웠으며, 72년 현재의 마드라스(Madras)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그리고, 토마스 사도의 무덤 위에 성당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토마스의 행적을 분명히 전해 주는 역사적 증거는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역사가들은 인도 남부에 일찍이 많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고대 이래 남부 인도의 여러 나라들은 유대나 로마와 활발하게 접촉했고, 홍해와 페르시아 만의 항구들과 빈번하게 해상 무역을 나누었다. 서기 2세기경에 인도를 방문한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이며 선교사인 판테오누스는 인도에서 그리스도인을 목격했다는 기록을 남겼고, 325년에 개최된 니체아 공의회에는 요한이라는 대표가 '페르시아와 대(大)인도의 주교' 로 서명하였다.
이집트 상인 코스마스(Cosmas Indicopleustes)는 6세기경 인도를 여행하다가 남서부에 위치한 말라바르(Mala-bar, 현재의 Kerala)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만났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토마스 그리스도인"이라 소개했다고 전한다(Topographia Christiana, Ⅲ, 178). 그러나, 이 명칭은 사도 토마스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8세기의 마르 토마스(Mâr Thomas)에게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인도에 거주한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나사렛교(Nazranis)라고 불렸다. 이들의 사회 · 종교 생활을 알려 주는 정보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남부 지방의 언어인 드라비다어 기도서(Dravidian Liturgy)를 가졌고, 힌두교에서의 개종이 개인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또 개별적 숭배를 인정하는 힌두교의 전통이나 백성이 믿는 다양한 종교를 존중하는 입장의 통치자들은 당시 남부 지방에서 번성한 불교나 자이나교처럼 그리스 도교를 하나의 종파로 인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굽타 왕조 : 마우리아 왕조의 인도 지배가 사실상 끝난 뒤 북인도에서 일어난 굽타 왕조(320~540)가 불완전 하지만 제국의 형태를 갖추었다. 이 왕조의 3대 왕인 찬드라 굽타 1세(320~330)의 등극을 계기로 인도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의 아들인 사무드라 굽타(330~375)는 북인도의 전역을 합병하였고, 합병하지 못한 지역으로부터는 조공을 받았다. 뒤를 이은 찬드라 굽타 2세(375~415)는 적대 세력인 샤카족을 409년 굽타 왕조에 병합시킴으로써 서북 인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굽타 왕조는 서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와 활발한 무역을 함으로써 문화적 교류까지 하게 되었다. 그는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시기인 345년 가나의 토마스(Thomas of Canaan)라는 시리아 상인이 페르시아의 황제인 샤푸르 2세(309~379)의 박해를 피해 도망친 시리아 그리스도인 무리를 데리고 후추의 수출항으로 유명한 말라바르 해안의 트라방코르(Travancore)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그곳의 통치자인 페르말이 준 교외의 땅에 거주지를 세우고 자신들의 믿음을 지켰다. 5세기 후반에 페르시아에 있는 갈데아 교회의 총주교가 이들에게 주교를 파견하여 교구가 설립되었다. 그들은 시리아어 기도서를 도입 · 사용했고, 그래서 이후 시리아 그리스도인(Syrian Christians)이라 불렸다. 5세기 말경부터는 네스토리우스 이단을 따르는 페르시아로부터 파견된 주교들이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하였다.
굽타 왕조는 6대 왕인 쿠마라 굽타(415~454) 때부터, 서북 변경 지대에서 활동하던 훈족의 잦은 침입으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혼란을 틈타 지역 영주들이 이탈하기 시작하였고, 경제적 위기도 가중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후 인도아 대륙은 대규모 민족 이동과 정치적 혼란으로 여러 군소 왕국이 난립하였다. 인도남부에서는 900년경 촐라 왕조가 주도권을 잡고 이후 300여 년 동안 이 지역의 강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주변 소왕국들의 압박으로 그 세력은 상대적으로 불안정하였다. 이 시기 이미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따르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곳에 교회를 세웠다.
〔이슬람 시대〕 10세기 말부터 투르크와 아랍계 이민족들의 침입에 시달린 인도아 대륙은 13세기경부터 이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에 서아시아에서 이주한 또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이었다. 3세기 말에 신앙을 받아들인 아르메니아에서 무역과 모험을 찾아 무슬림이 통치하던 인도의 여러 도시에 정착한 아르메니아인의 존재는 지금도 여러 도시에서 목격된다.
1122년 로마에 '인도 총대주교좌' 가 세워졌다. 13세기에는 유럽인 여행자나 도미니코회와 작은 형제회 선교사들을 통해 인도와 교황청과의 접촉이 유지되었다. 몬테 코르비노의 요한(Joannes de Monte Corvino, 1247~1328)은 1292년 혹은 1293년경에 인도에 도착하여 약 13개월 간 성 토마스 성당에 머물렀다. 4명의 작은 형제회의 선교사들이 현재의 뭄바이 근처인 타나(Thana)에서 순교한 해는 1321년이었으며, 마리뇰리의 요한(Joannes deMarignolli)은 1345~1346년에 인도를 방문했다. 또한 교황 요한 22세(1316~1334)는 1329년 콜롬보에 교구를 설립하였다.
델리 술탄국 : 무슬림인 투르크와 아프가니스탄인들은 델리(Delhi)에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고, 인도인들을 지배하였다.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1210)는 델리에 웅대한 궁전과 모스크 및 거대한 탑을 세웠다. 그는 인도를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확장으로 보지 않고, 인도에 델리를 수도로 한 본격적인 이슬람 정권을 세웠다. 이 왕조는 쿠트브 웃 딘과 마찬가지로 투르크계 궁정 노예 출신이 거나 그 직계 자손이었기에 노예 왕조(1206~1290)라고 부른다. 제3대 술탄인 일투트미시(IItutmish, ?~1236)는 1220년 인더스 강 유역의 북부 변경 지방을 병합하고, 1225년에는 벵골을, 1228년에는 신드 지방을 점령했다. 그는 1229년에 바그다드의 칼리프로부터 정식으로 술탄이란 칭호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몽골군의 침입에 시달리다가 1241년 서부 펀자브 지방을 잃으면서 위세가 꺾였다.
1290년부터 또 다른 투르크계 세력인 할지 왕조(Khal-ji dynasty, 1290~1320)가 등장하였다. 이 왕조의 알라 웃딘은 동인도와 데칸을 정복하였고, 남인도까지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연이은 정복 전쟁으로 여러 지역을 지배하였지만, 북인도의 반란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1320년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에 의해 투글루크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 왕조 역시 통일 제국을 건설하려고 하였으나, 1398년 중앙 아시아의 몽골군이 티무르(Timur, 1336~1405)의 지휘하에 인도를 침입함으로써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후 인도는 티무르의 위임을 받은 사이이드 왕조와 그 뒤를 이은 로디 왕조 등이 명멸을 거듭하고, 각 지역의 군소 왕국들이 술탄국의 세력 약화를 틈타 난립하였다.
남부 인도의 왕조들 : 남부 인도에는 술탄국의 원정을 여러 차례 물리치면서 북부 데칸을 지배한 바마니 왕조(1347~1527)와 남부 데칸을 지배한 힌두교 왕국인 비자야나가르 왕국(1336~1565)이 등장하였다. 이 두 나라는 비옥하고 광물 자원이 풍부한 지역을 차지하려는 상호 정복 전쟁을 계속하였다. 특히 무역을 통한 이익 증대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고야 지방을 점령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1538년 바마니 왕국은 5개의 국가로 분열되었으며, 비자야나가르 왕국은 1565년 이슬람 연합군에 패함으로써 종말을 고했다.
〔무굴 제국〕 이슬람 세력이 제국 형태로 나타난 것이 무굴 제국이다. 이 기간 동안 인도아 대륙에서는 이슬람 문화와 힌두 문화가 서로 융합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티무르의 5대손인 바베(1483~1530)는 1526년 마지막 술탄인 이브라힘과 델리 근교의 파니파트에서 싸워 격파하였다. 그는 여세를 몰아 델리에서 아그라로 진격하여 스스로 인도의 파트샤임을 선포하였다. 그는 서쪽의 야무나 강부터 바다흐산과 카불을 거쳐 동쪽은 벵골, 남쪽은 나르마다 강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였다.
이 제국을 대제국으로 만든 사람은 악바르(1542~1605)였다. 그는 결혼 정책이나 종족간의 타협을 통해 인도의 여러 세력들을 무굴 제국의 실질적인 동반자로 만들었다. 그의 뛰어난 지도력에 힘입어 그의 시대에 무굴 제국은 북인도의 전 지역을 지배함으로써 데칸과 벵골 만 및 아라비아 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또는 그는 힌두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실질적인 융합에도 공헌하였다. 그의 사후, 무굴 제국은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반목이 재연되면서 분열의 조짐이 나타났다. 특히 지적이고 배타적인 소수의 브라만과 다수의 농노 계층인 수드라로 구성된 마라타족의 흥기는 무굴 제국에 큰 위협이 되었다. 이들은 무굴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으며, 1738년에는 무굴 제국의 심장부인 델리 근교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1761년 아프가니스탄 군대에 대패함으로써 더 이상 세력 확장을 하지 못했다. 이후 북인도는 아프가니스탄과 마라타 및 무굴 제국 등이 힘의 공백기를 맞으면서 혼란과 분열을 거듭했다. 이 혼란의 와중에 인도 대륙을 넘보기 시작한 것이 유럽 세력이었다.
〔선교 활동〕 포르투갈의 고아 점령 :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0~1514)가 인도의 캘리컷(Calicut, 현재의 Kozhikode)에 도착함으로써 향료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 후 알부케르케(Afonso de Al-buquerque, 1453~1515)는 1510년에 비자푸르의 술탄에게서 인도의 서안 지방인 고아(Goa)를 탈취하여, 동방 포르투갈령의 수도로 삼았다. 하지만 158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점령당함으로써, 스페인도 인도에 진출하였다. 포르투갈의 군사적 정복과 상업지의 건설에 뒤이어 수 많은 인도인 신자들이 탄생하였다. 정복자인 포르투갈인들은 인도인의 개종을 위한 선교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인도인의 가톨릭 개종은 서해안의 여러 지방, 특히 포르투갈의 영토인 고아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16세기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통치자들은 국가적차원에서 선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인도에서 선교 활동의 선구자는 작은 형제회였다. 1518년 고아에 가장 먼저 수도원을 설립한 작은 형제회는 봄베이, 고아에서 서해안을 따라 남부 지방의 코친(Cochin), 퀼론(Quilon)에 이르는 여러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또 크란가노르(Cranganore) 등 여러 곳에 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인도인의 개종이 큰 발전을 보인 것은 1542년 사베리오(Francisicus Xaverius, 1506~1552)가 고아에 도착한 뒤였다. 그는 남부 지방의 언어인 타밀어로 된 교리 문답서를 만들고 해안에 사는 가난한 어부들과 낮은 계층에게 봉사하면서 선교의 효과를 거두었다. 남부에 있는 트라방코르에서만 한 달 동안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을 정도였다. 고아의 성 바오로 대학을 맡아서 인도인 신부와 교리 교사를 양성한 사람도 사베리오였다. 예수회는 사베리오의 교리서를 인도에서 최초로 인쇄하였고(1557), 추기경이었지만 포르투갈의 왕이 된 엔리케(Henrique, 1578~1580)의 교리서(1578)과 호르헤(Marcos Jorge)의 교리서(1579) 등을 타밀어로 번역 · 간행하였다.
1548년에 인도에 도착한 도미니코회는 코친과 고아에 수도원을 세웠고, 1600년에는 고아의 인근 지역에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는 대학도 설립했다. 1572년 페르시아에서 인도에 진출한 아우구스티노회는 고아 지방에 대규모 수도원을 건설하고 동부 벵골 지방의 무슬림을 상대로 선교 활동을 하였다. 아우구스티노 수녀회는 1606년 고아 지방에 산타 모니카 수녀원을 설립했다.
선교의 확대 : 포르투갈이 인도에서 점령한 영토와 신자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인도에서 교계 제도의 발달은 아주 느렸다. 특히 포르투갈에서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로 오는 뱃길은 멀고 힘들었고, 그만큼 양측의 긴밀한 연계는 어려웠다. 초대 주교인 후안(Juande Albuquerque, OFM, +1553)이 고아에 도착한 해는 1538년이었다. 고아는 1558년에 코친과 말라카를 포함하는 대교구가 되었다.
포르투갈이 통치하던 시기에 설립된 가장 유명한 기관은 자선소(Misericordia)였다.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이 기관은 25개 지역에 설립되었으며, 교리 교사를 양성하고 그들을 부모나 다른 사람의 박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특별 숙소가 있었다. 이 숙소는 고아(1522)와 코친(1572)에 각각 문을 열었다. 그리스도인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 숙소의 책임자는 정부에서 봉급을 받았고, 대개 수도자 중에서 선발되었다. 인도에서 포르투갈의 세력이 쇠퇴하자 이 기관도 쇠퇴했고, 코친은 1840년에, 고아는 1962년에 각각 문을 닫았다.
1572년 인도에는 약 28만 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선교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인 1600년경에는 아마도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이는 본국의 포르투갈 정부와 인도에 있는 포르투갈의 식민 정부가 노력한 결과였다. 고아를 다스리는 포르투갈의 총독들은 선교 단체와 긴밀하게 협력했다. 포르투갈령의 영토에서는 우상 숭배가 금지되고 그리스도교를 장려했다. 그러나 강제 개종은 실시되지 않았다. 포르투갈의 영토가 아닌 코친과 같은 왕국에서는 통치자가 가톨릭 개종을 금지하여 재산을 박탈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개종자를 처벌했다.
가톨릭과 말라바르 교회 : 16세기 초, 남부에 포르투갈인이 도착하자 그곳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가톨릭 신자라고 자처하면서 포르투갈을 환영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그들이 이단인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따르는 이들이었기에, 그들의 성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1599년에 캘커타에서 약 20km 떨어진 디암퍼(Diamper)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배척하고 교황에게 순명할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 회의 후에 이어진 로마 가톨릭화를 위한 개혁에 반발한 일부 말라바르 교회 신자들이 1653년에 교황청과 단절하였다. 이들은 여러 분파 과정을 거쳐 일부는 개혁 시리아 동방 교회로, 또 일부는 가톨릭 동방 교회의 시리아어 전례를 따르고 있다.
무굴 제국과 선교 : 예수회가 북부에 위치한 무굴 제국과 접촉하면서 포르투갈의 선교 활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무굴의 황제 악바르의 초청을 받은 예수회 선교사들은 궁정에서 황제와 종교에 관한 토론을 나눴지만, 개종시키지는 못했다. 그 뒤를 이은 자한기르(Jahangir, 1605~1627) 황제도 예수회 선교사들을 초대했다. 선교사들은 황제의 조카에게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곧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이후 무굴의 황제들은 무슬림의 가톨릭 개종을 허용하지 않았고, 무굴 제국 안에서 신자는 극소수가 되었다. 그로 인해 무굴에서 활약한 선교사들은 많지 않았다.
가톨릭의 인도화 :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원 노빌리(Roberto de Nobili, 1577~1656)는 내륙 도시인 마두라(Ma-dura)로 파견되었다. 그는 산스크리트어와 타밀어를 배워서 상층 힌두인에게 익숙한 언어로 설교하여 파랑기(Parangis, 포르투갈을 경멸하는 용어)의 오명을 벗으려고 시도했다. 노빌리는 힌두교 성자의 복장으로 채식과 금주를 하면서 '로마인 브라만' 이 되어 힌두교의 관습에 그리스도교를 적응시키려고 애썼다. 이러한 '선교 적응 방식' 에 대한 격렬한 논쟁은 1744년 교황 베네딕도 14세(1740~1758)가 그 방법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유럽의 식민지 확대〕 17세기에 경쟁 해양국인 영국과 네덜란드가 등장하면서 포르투갈의 위치는 크게 달라졌다. 네덜란드는 코친 등 남부 인도를 차지했고, 서해안의 봄베이는 영국의 손에 넘어갔다. 1720년에는 이들 지방에서 활동하던 포르투갈의 작은 형제회가 철수하였다. 1759년, 포르투갈이 본국과 각 식민지에서 예수회의 추방을 선포한 결과, 인도의 포르투갈 영토에 있던 예수회원들도 추방되거나 투옥되었다. 특히 세계 무역을 지배하려는 프랑스와 영국의 각축전은 치열했다. 그러나 7년 전쟁에서의 패배와 카르나티크 전쟁(1744~1748,1750~1754, 1758~1763) 및 플라시 전쟁(1757)에서 프랑스가 영국군에 대패하였다. 이후 인도아 대륙을 점령하려는 영국의 야욕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이 무렵 남부 인도에 있는 마이소르 왕국의 티푸 술탄(1782~1799)은 각종 선교회를 공격했다. 또한, 프랑스와 동맹을 꾀하면서 군대의 근대화와 내정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를 통해 영국의 위협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1799년 영국군의 침입으로 실패하였다. 마이소르의 영토는 대부분 영국과 하이데라바드및 마라타에 분할 · 병합되었다. 그런데, 하이데라바드는 1798년에 영국과 군사 보호 조약을 맺음으로써 실질적으로 영국의 지배 아래에 들어갔다. 한편, 북인도에서는 마라타 연합과 시크 세력이 영국에 대항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마라타 연합은 1772년 이후 총리의 계승 문제로 내분이 심각해졌고, 제1차 마라타 전쟁(1775~1782)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마라타 연합의 내분에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가 가세한 것이었다. 결국, 제2차 마라타 전쟁(1802~1805)으로 영국이 개입하였고, 1818년 이후 마라타 연합은 사실상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시크 왕국도 내부 분열에 따른 1 · 2차 시크 전쟁(1845~1846,1848~1849)의 결과 영국군에 패하였다. 이리하여 인도의 거의 전 지역이 영국령이 되었다.
포르투갈의 보호권과 교황청 : 1835년 포르투갈이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한 이후 인도에 있는 포르투갈인 중에서 신자의 비율은 점차 감소했다. 1700년에 80만명이던 신자는 백 년 뒤인 1800년에 50만 명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포르투갈의 한정된 자원과 광대한 인도 선교를 감독하는 데 물리적 어려움이 있음을 인지한 교황청은 1622년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의 설립 이후 인도에 데칸(Deccan) 대목구를 1637년에 설립하였다. 1659년에는 말라바르에 대목구가 세워졌고 1671년에는 카나라 대목구가 설립되었다. 1808년에는 아그라에, 1834~1836년에는 벵골, 마드라스, 실론의 콜롬보, 퐁디셰리에도 대목구가 세워졌다. 이 대목구들이 다시 분할되어 1882년에 대목구의 수는 14개로 늘어났다. 포르투갈 관할 교구로는 1558년에 설립된 고아 대교구와 코친 교구, 말라바르 교회 신자들을 위한 크란그노(Cranganore) 교구가 있었다.
그로 인해 교황청에서 임명한 주교와 포르투갈 성직자간에 갈등이 생겼다. 전자는 교황에게서 임명받았음을 주장하였고, 후자는 전통적인 보호권(padrado)의 권한을 내세우며 자신들을 임명하고 지원해 준 포르투갈 정부에 충성을 보냈다. 1640~1667년 교황청은 포르투갈의 독립과 포르투갈 왕이 임명한 성직자를 인정하지 않았다. 교황청은 포교성성이 파견한 대주교와 선교사(거의 모두 이탈리아인)를 지지하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포르투갈과 갈등을 피하는 입장을 취했다. 비록 교구는 적었지만 이러한 갈등은 1800년까지 지속되었다.
영국의 지배 : 영국의 인도 지배가 확대되면서 이에 대한 반감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기득권을 상실한 왕가(王家)와 지방 세력들의 불만이 조직화되었고, 인도의 전통 관습이나 생활 양식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인도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그로인해 폭동과 반란이 야기되었다. 1850년대 이후 그 횟수가 많아졌고, 1857년 5월 메루트의 세포이가 폭동을 일으켜 델리를 점령하였다. 그들은 명목뿐인 무굴 황제를 다시 옹립하고 그의 통치 부활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뚜렷한 구심점이 없고 효과적인 전략이나 지휘 체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 해 9월 델리를 빼앗겼다. 영국군은 이어 칸푸르를 함락시켰고, 반란군은 영국 · 네팔 연합군에 의해 1858년 3월 완전히 패배하였다.
이 반란이 수습된 후 "인도 통치법"이 1858년 8월에 발효되었다. 일종의 유화 정책이었는데, 이 법의 시행으로 인도인들은 공무원이 될 수 있었으며 인도의 전통적인 제도나 관습도 보존될 수 있었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악명을 떨치던 동인도 회사가 문을 닫았고, 영국 국왕에 의한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후 인도인들의 민족 의식이 일깨워지면서 종교와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최초의 종교 · 사회 개혁 운동은 벵골을 중심으로 일어난 브라모사마지(Brahmo Samaj)였다. 이를 통해 힌두교도의 전통적 관습 및 종교 의례 등에 개혁이 시도되었다. 유아혼의 폐지와 교육의 기회 균등, 이혼의 자유, 과부의 지위 개선 등 불합리한 사회 제도 및 관습을 비판하고 철폐를 요구했다. 그 외에도 여러 운동이 전개되어 전근대적인 사회 관습을 개혁하려는 방향으로 실천되었다. 특히 인도인들의 각성은 간디(M.K. Gandhi, 1869~1948)를 민족 지도자로 맞이하면서 새로운 활력과 희망을 갖게 되었다. 영국의 인도 지배로 인도인들 중에 영어를 배우고 서구식 사고를 하는 신(新)중간 계층이 형성되었다. 한편, 사회 제도가 근대화되고 각종 관공서 · 법원 · 학교 등이 생겨나면서 이에 필요한 인력의 양성도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 결과 변호사 · 의사 · 교사 등의 직업에 서구식 교육을 받은 젊은 계층이 생겨났고, 이들은 훗날 반영(反英)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 인물들이 되었다.
관할권의 분리 : 1886년 교황청과 포르투갈 사이의 새로운 정교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보호권의 관할권이 회복되고 인도 · 스리랑카에 새로운 교계 제도가 설립되었다. 인도는 스리랑카와 더불어 8개 대교구로 나뉘었다. 아그라 · 봄베이 · 캘커타 · 고아 · 마드라스 등 여러 도시에는 대교구가 세워졌고, 이 대교구들에는 19개의 교구와 3개 대목구, 4개의 지목구가 소속되었다. 1887년에는 말라바르 전례를 따르는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별도의 교계 제도가 설정되어 코타얌(Kottayam)과 트리추르(Trichur)가 대목구가 되었다. 1932년에는 남부의 말란카르 전례를 따르는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교계 제도도 설정되어서 트리반드룸(Trivandrum) 대교구가 만들어졌다.
교황 레오 13세(1878~1903)에 의해 교계 제도가 설정된 1886년, 인도의 가톨릭 신자는 약 1백만 명을 헤아렸다. 1921년에는 그 수가 250만 명으로 증가했고, 파키스탄이 분리된 직후인 1951년에는 540만 명을 기록했다. 가톨릭 신자가 증가하자 새로운 교구와 성직자도 증가했다. 특히 인도인 성직자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923년에는 첫 인도인 주교가 임명되었다. 1935년에는 대주교가 외국인 7명에 인도인 2명이었는데, 1961년에는 비율이 2 : 13이 될 만큼 인도인 성직자가 늘어났다. 20세기 들어서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가톨릭의 인도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독립한 직후인 1950년 보호권은 폐지되었고, 인도 가톨릭에 대한 포르투갈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졌다. 1909년에는 2,800 명의 사제 중 1,750명이 인도인이었지만 1961년에는 6,600명의 사제 중 4,500명이 인도인이었다. 1952년 인도에는 최초의 인도인 추기경이 임명되었고, 1969년과 1976년에도 두 명의 인도인 추기경이 탄생했다.
〔인도의 독립과 현 상황〕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 협력하는 대가로 인도인들에게 자치를 약속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인도인들은 간디를 중심으로 영국 제품 불매 운동을 전개하면서, 무저항 비폭력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영국은 강압 정책을 병행하면서, 차츰 인도의 자치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영국에는 보수단 정권이 퇴진하고, 노동당 정권이 들어섰다. 노동당 정권은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전개하면서, 인도의 독립 문제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마침내 1947년 2월 영국 정부는 '1948년 6월 이전에 책임 있는 인도인 단체에게 권력을 이양' 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무슬림들은 파키스탄 독립국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분열은 힌두교도가 대다수인 인도와 무슬림이 대다수인 파키스탄으로의 분리를 초래했다. 결국, 1947년 8월 15일 인도에는 2개의 공화국, 즉 인도와 파키스탄이 과도기적 임시 정부 형태의 국가로 탄생하였다. 그후 인도는 1950년에 완전 독립하였고, 파키스탄은 1956년 이슬람 공화국을 선언함으로써 독립하였다. 하지만 펀자브와 벵골은 주민들의 종교 성향에 따라 각각 2개로 분리되어 양국에 포함되었으며, 카슈미르는 아직까지도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인도는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64)를 총리로 한국회가 1952년의 선거를 통해 구성되었다. 확정되지 않은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1962년에 중국과, 1965년에는 파키스탄과 국경 분쟁을 겪었다. 1967년에는 인디라간디(Indira Gandhi, 1917~1984)가 총리에 취임했다. 1971년 파키스탄과 국경 두 곳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했다. 인디라 간디는 1984년 시크교도에 대한 정부 정책에 불만을 품은 시크교도인 개인 경호원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의 아들 라지브 간디 (Rajiv Gandhi, 1944~1991)가 그 해 총리에 취임하였으나, 내정 및 경제 안정에 실패하여 물러났다. 이후 종교 분쟁, 당의 내분으로 11개월 만에 총리가 사임하자그가 총리로 재취임하였으나, 1991년 5월 선거 유세중 폭탄 테러로 사망하였다. 1997년 9월 5일 인도를 조국삼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평생을 바친 데레사(Tere-sa of Calcutta, 1910~1997) 수녀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각국의 고위 사절들이 참석하였고, 전세계가 애도하는 가운데 국장으로 치러졌다.
현재 인도의 정치적 상황은 불안정하다. 카슈미르 · 펀자브 · 아삼 주의 분리주의 운동, 힌두교도와 무슬림 간의 유혈 충돌 등의 내분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또한, 인도와 파키스탄의 영토 분쟁은 양국 간의 무력 충돌로 확대됨으로써 양국 관계가 복잡해지고 있으며, 핵무기의 사용까지 언급하는 등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가톨릭과 오늘의 인도〕 인도 가톨릭 신자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낮은 계층 출신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장 쉬운 개종 대상은 하층민이고, 선교가 거의 불가능한 계층은 브라만이다. 교육받은 계층의 개종은 드문 현상이다. 포르투갈의 열성적인 선교로 1800년까지는 개종자가 늘었지만 1800년대 중반에 인도의 식민 통치를 확고하게 자리잡은 영국은 종교적 중립이라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유럽의 통치에 저항하는 민족주의의 성장도 가톨릭의 성장에 걸림돌이었다.
가톨릭 신자는 포르투갈의 영토였던 고아와 남부 지방의 케랄라 주에 집중되어 있다. 케랄라는 예전의 코친, 트라방코르, 말라바르를 포함하는 인도 남단의 주지방으로 1961년에는 고아와 함께 가톨릭 신자의 44%가 있었다. 또 34%의 가톨릭 신자는 서해안 지방에 몰려 있었다. 무굴 제국의 통치 기반으로 개종이 어려웠던 북부의 갠지스 강 유역에는 인구가 많이 몰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자가 상대적으로 적어서 12% 정도이다. 현재 시리아-말라바르 전례 안에서 전례와 전승에 관한갈등이 야기되고 있다. 또한, 로마 전례와 동방 전례를 따르는 인도의 가톨릭 교회들 사이에는 자신들의 전통적인 영역 밖에 있는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배려에 대한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다. 교황청에서는 타종교에 대한 존중 없이 세상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선포하지 말자며 종교 다원주의를 가르친 인도의 몇몇 예수회원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1998~2001년 중반까지 반그리스도교적인 폭력과 테러가 150건 이상 서부 인도에서 발생하였다.
가톨릭의 중요한 사회적 기여는 근대 교육의 발전, 특히 문맹 퇴치와 여성 교육의 증진에 있다. 1868년 티르차라팔리에 세워진 가톨릭 대학을 비롯하여 수많은 학교와 대학들이 케랄라, 천나이, 마이소르, 봄베이 등지에 산재해 있다. 물론 가톨릭 교육 기관에 재학하는 학생의 대다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다. 가톨릭 신자가 적기 때문인데, 가톨릭 신자는 교육을 통해 상층 출신의 힌두교도, 무슬림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가톨릭 성직자들이 높은 명성을 갖는 것도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인도 정부는 선교 교육을 금지하고 있고, 교육을 통한 개종은 쉽지 않다.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는 인도를 방문한 첫 교황이었다. 교황은 제38차 세계 성체 대회 기간 중(1964. 11.28~12. 6) 인도의 봄베이를 방문하였는데, 이는 역사상 의의가 크다. 왜냐하면 신자수가 전체 인구의 2%가 안되는 비그리스도교 국가에서 개최되는 성체 대회에 교황이 직접 참석한 최초의 행사였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6년 2월 1~10일까지 인도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종교의 우월성과 초월자에 대한 당신들의 탁월한 감성은 물질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세계관에 대항하는 증거가 된다"고 말하였다. 이를 통해 교황은 상대적으로 교세가 약한 인도에서 힌두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신자들에 대한 박해와 폭력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원했다. 1999년 11월 6~7일까지 인도를 다시 방문한 교황은 주교 대의원 회의 아시아 특별 총회(1998. 1. 18~5. 14)의 건의안에 대한 응답으로 교황권고 〈아시아 교회〉(Ecclesia in Asia)를 뉴델리에서 발표하였다.
2001년 말 현재 인도에는 동인도 명의의 총주교좌 1,시리아-말라바르 전례를 따르는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상급 대주교좌(major archbishopric) 1, 대교구 24, 교구 119,본당 7,988개가 있다. 추기경 4, 총주교 1, 대주교 30, 주교 146, 신부 18,938(교구 소속 10,690, 수도회 소속8,248), 종신 부제 19, 수사 2,558, 수녀 79,608, 신학생 10,058명이 있다. 또한 총 인구의 1.8%인 17,760,000명의 신자가 있다.
가톨릭의 유적 : 인도에서 가톨릭 신자는 언제나 소수 집단이었고 힌두교도나 무슬림과 비교할 때 경제적으로도 부유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인도에서는 크고 훌륭한 힌두교 사원이나 무슬림 사원은 있지만, 큰 성당 등의 건축물은 없다.
포르투갈이 오기 이전에 존재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기념물은 마드라스 근처 밀라포르(Mylapore)에 있는 사도 토마스 성당이다. 토마스가 사망한 장소로 알려져서 국내외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곳은 13세기에 폴로(Marco Polo, 1254~1324)가 방문했고, 일찍이 9세기에 유럽에 소개된 순례 장소이다. 중세―정치적 상황이 나빠지기 전―이전에는 큰 성당과 수도원이 있던 당시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였을 것이다. 현재는 포르투갈이 활동하던 시대에 폐허에 건설한 두 개의 교회가 남아 있다.
인도 가톨릭의 요람인 고아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은 사베리오의 유해가 있는 예수(Bom Jesus) 성당이다. 수많은 후원자를 가진 이 성당은 아름다운 내부 장식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베리오의 일생을 묘사한 4개의 아름다운 동판과 은으로 만든 사베리오상(像)은 모두 후원자들이 기부한 것이다. 그의 유해가 담긴 관은 정교한 예술 작품이다. 유해는 정기적으로 공개되는데, 이날에는 세계 전역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든다. (→ 간디 ;노빌리, 로베르토 ; 데레사, 캘커타의 ; 동방 전례 ; 라마크리시나 ; 말라바르 그리스도교 ; 무니, 에드워드 프란시즈 ; 방글라데시 ; 보호권 ; 불교 ; 사랑의 선교회 ; 사베리오, 프란치스코 ; 파키스탄 ; 힌두교)
※ 참고문헌  2002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Division, 2002/ C.B. Firth, An Introduction to Indian Church History,Mysore, 1961/ Gerald Studdert-Kennedy, British Christians. Indian Nationalists and Raj, New Delhi, 1991/ J.H. Gense, The Church at the Gateway of India. 1720~1960, Bombay, 1960/ L.W. Brown, The Indian Christians of St. Thomas, London, 1956/ P. Thomas, Christians and Christianity in India and Pakistan, London, 1954/ 一, Churches in India, New Delhi, 1990/ J. Wicki, 《NCE》, pp. 435~444. 〔金善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