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 [영〕American Indian, Amerind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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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경 켄사스의 선교지(왼쪽)와 1792년 캘리포니아에 세워진 선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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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경 켄사스의 선교지(왼쪽)와 1792년 캘리포니아에 세워진 선교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거주와 문화] 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상은 아시아의 몽골 인종에 속하는 수렵민으로서 빙하 시대 말(약 2만~3만5천 년 전) 베링 해협을 건너 북아메리카로 이주했다. 불을 사용하고 개를 기르는 것이나 특수한 의식과 치료법 등의 문화적인 특징이 당시의 아시아 문화와 비슷하다. 이들은 대부분 유랑 생활을 하는 수렵 채집민들로서 동굴이나 바위를 은신처로 삼아 생활하였다. 주요 식량원은 고기였으며, 짐승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기원전 6000년경 무렵에는 일반적으로 해안과 강가에서 생활하였으며, 서로 다른 부족들 사이에 교역 제도가 발달하였다. 기원전 2000년경 미국 남서부의 여러 부족 집단들은 옥수수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나, 원시 농업이 인디언 문화에 실질적인 도움을 준 것은 1세기 이후였다. 잉여 자원은 특권을 지닌 특정 집단의 부로 이용되었으며, 정교한 장례 의식에 사용되었다. 한랭기인 200~700년에 농업 발달이 위축되고 문화는 후퇴했다. 700~1200년 미시시피 강 유역에서 촌락 중심의 문화가 발달했는데, 발전된 농업 방식과 복잡한 종교 의식이 특징이었다. 고전 푸에블로 시대(Classic Pueblo period,1050~1300)는 건축 기술과 도기 제조 기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벼랑에 1~4층으로 된 큰 공동 주택에는 20~1,000개의 방이 있었으며, 고유한 지역적 양식의 다채색 도기가 생산되었다. 퇴행 부에블로 시대(Regre-ssive Pueblo period, 1300~1700)에는 부족들이 남쪽과 동쪽으로 이주하였다. 1600년대 말부터 시작된 식민지 시대 유럽 국가들이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하여 시행한 정책은 국가마다 달랐다.
[초기의 선교) 16세기에 이르러 북아메리카 대륙의 광대한 지역은 스페인과 프랑스, 영국 등 유럽의 세 나라에 의해 대부분 식민지화되었다. 아울러 선교 활동도 미국 남동부, 남서부, 북동부, 남부, 서부, 미시시피 계곡, 그리고 캐나다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스페인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아메리카 인디언을 그리스도교로 개종해 이주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교역 관계를 맺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초기 영국 법은 불법으로 인디언 영토를 몰수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1763년 선언을 통해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 지역 전체를 아메리카 원주민 영토로 규정하였다. 이 정책은 영국의 지배가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뒤에 미국 정부에서도 채택하였다. 미국 남동부와 남서부에서의 선교 활동은 스페인의 보호권 아래서 150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는데, 그 지역은 1800년대 초까지 이 보호권 체제하에 있었다. 미국 남동부에서의 선교 활동은 현재 플로리다의 세인트 오거스틴(St. Augustine)에 스페인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1565년에 도착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해 9월 6일 멘도사(Francisco de Mendoza)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영국 해군력이 스페인에 도전하기 전까지 복음화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 후 선교 활동에 대한 지원이 부족하게 되었고 선교사 몇 사람이 살해되기도 하였다. 플로리다가 1763년 영국의 지배로 넘어갔을 때 초기 선교 활동의 결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영국 지배하의 20년 동안(1763~1783) 약 4만 명의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종교 관습으로 되돌아갔고, 그것이 미국 남동부에서 펼쳐졌던 스페인 선교 활동의 종말이었다.
미국 남서부의 선교 활동은 스페인의 작은 형제회와 예수회에 의해 펼쳐졌다. 이들 초기 선교사들 중 작은 형제회의 파디야(Juan de Padillla)는 1542년 캔자스에서 순교해 미국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점진적으로 진행되던 선교 활동에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특히 스페인 정착민들과 군인들, 행정 당국자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심한 모욕과 학대로 인해 야기된 폭동 등으로 빈번히 중단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선교사로는 예수회의 키노(E.F. Kino, 1645~1711), 살바티에라(J.M. Salvatiera), 그리고 세타(J. Saeta) 등이 있다. 1680년에 일어난 푸에블로 폭동으로 21명의 작은 형제회 평신도 선교사들이 임지에서 순교했다. 이후 재건 작업은 어려웠는데, 1821년 멕시코 혁명으로 스페인 사람들이 강제로 추방되면서 선교사들도 추방당하였다. 1837년의 텍사스 독립 전쟁은 리오그란데 강을 따라 이루어지던 선교 노력을 약화시켰다.
미국 서부의 선교는 1600년대 후반 예수회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1767년 스페인 영토에서 추방당하였다. 그들은 18개의 잘 조직된 선교 중심지를 만들어 놓고 떠났야 했지만, 곧 이어서 스페인의 작은 형제회가 예수회를 대신하여 선교 활동을 하였다. 세라(J. Serra,1713~1784) 신부는 1769년 샌디에이고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으며, 1784년 그가 죽기 전까지 9개의 선교 센터를 세웠다. 캘리포니아를 가로지르는 스페인 선교 센터는 21개까지 이르렀으며, 그 선교 센터들은 인디언들을 위한 교육, 계몽, 그리고 정치 조직의 중심으로서 활동하였다.
미국 북동부와 캐나다의 초기 복음화를 위해 예수회의 비아드(Biard)와 마씨(Massé) 신부가 1611년 현재의 메인(Maine) 주에 도착한 이래 프랑스 예수회, 프란치스코회, 카푸친 작은 형제회와 쉴피스회가 활동하였다. 캐나다에서는 1615년에 선교사들이 활동을 시작했으며, 1639년에는 우르술라회 수녀들이 도착했다. 북아메리카에서 멕시코 다음으로 두 번째로 오래된 지목구인 췌백은 1674년에 교구로 설정되었다.
선교회들은 휴런족(Hurons), , 이로쿼이족(roqusis), 페탄족(Petans) , 알공킨족(Algonquins), 아베나키족(Abena-kis), 모호크족(Mobawks) 등의 특정한 부족에 초점을 맞추어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전쟁과 부족 전쟁 때문에 선교 활동이 종종 와해되었다.
영국 예수회와 작은 형제회가 미국 남부에서 기울였던 선교 활동은 주로 메릴랜드의 총독으로 1661년에 부임한 볼티모어(C.C. Baltimore, 1637~1715)와 함께 들어온 영국 가톨릭 식민지 개척자들을 위해 선택된 영구 거주지에 제한되었다. 몇몇 선교 단체들은 주변 지역인 아나코스티아(Anacostia)와 포토파코(Potopaco)에서 활동하였다. 청교도에 의해서 1645년 가톨릭 공동체가 파괴되었는데, 적대적인 서스퀴해나족(Supwathamas)s)의 습격으로 선교 활동은 더욱 방해를 받았다. 그 후의 시도들도 메릴랜드에서의 선교 활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효과적이지 못하였다.
1600년대 중반에 온 프랑스 예수회원들이 광대한 미시시피 계곡의 인디언들에게는 최초의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후에 췌백 교구의 사제들과 프랑스 작은 형제회회원들과 함께 활동을 하였다. 선교 지역은 마르케트(J.Marquette, 1637~1675)와 함께 미시간 호를 발견했던 니콜레(J. Nicolet, 1598~1642), 졸리에(L. Jolliet, 1645~1700) 등 탐험가의 행적을 따라 이루어졌다. 복음화 노력은 위네바고족(Winnebagos) 치퍼와족(Chippewas), 수족(Sioux)그리고 알공킨족과 같은 부족에 초점을 두었으나 전쟁과 부족간 경쟁은 종종 선교 활동을 중지시켰다. 복음화, 탐험, 언어학과 인간 발전을 위해 뛰어난 활동을 했던 선교사들로는 마르케트, 헤니핀(L. Hennepin, +1701)과 알로우즈(C.J. Allouez, 1622~1689) 등을 들 수 있다. 미시시피 계곡에서 펼쳐졌던 선교 활동들은 북아메리카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예수회에 대한 억압 이후에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선교의 두 번째 단계] 1700년대 말에 이르러 북아메리카의 교회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다. 1763년의 파리 조약은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없앴으며, 미국은 1776년에 독립하였다.
미국 가톨릭 교회의 재치권과 행정은, 프랑스령 캐나다를 영국이 정복할 때(1763)부터 볼티모어의 초대 주교로 캐롤(John Carroll, 1735~1815)이 임명될 때(1789)까지 혼란스러웠다. 가톨릭 신자들은 메릴랜드 식민지 수립때(1634)부터 영국 식민 통치를 받으면서 아메리카 혁명때까지 가혹한 법률 아래서 박해로 고통받았다. 그들은 1800년에 3만 5천 명밖에 되지 못했는데, 끊임없이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1822년 리용에서 설립된 신앙 전교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Faith)의 재정적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가톨릭 자선 및 교육 단체의 기원은 1727년 미국에 진출한 프랑스 우르술라회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메리카 출신으로는 최초로 시성된 시튼(E. Seton, 1774~1821)이 원주민 여성을 위한 최초의 수녀회인 사랑의 씨튼 수녀회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수녀회의 학교들은 아메리카의 본당 체제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초를 형성했으며, 많은 이주민 자녀들의 교리 교육과 복음화의 주요 수단이 되었다.
1830년 인디언 이주법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강제 정책이 오랫동안 시행되었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자 백인들이 서부를 향해 대규모로 이주했으며, 수많은 조약을 통해 서부 개척로 주변 영토에 대한 인디언의 권리는 무효화되었다. 1876년 수족과 샤이엔족의 커스터 학살을 포함해 전쟁이 여러 차례 잇달아 일어났다. 1887년까지 대부분의 인디언이 보호 구역으로 이주했다. 1887년 도스 일반 토지 분배법에 따라 인디언은 상당히 많은 영토를 잃었다. 1934년에 시행된 인디언 재조직법(Indian Reorganization Act)에 따라 아메리카 원주민의 지위 향상을 위한 사업 계획이 확정되었다. 1950년대 이후 여러 가지 새로운 정책이 수립되고, 인디언 문제에 관한 미국민의 인식이 높아졌다.
1900~1965년까지 인디언 중 가톨릭 신자는 150%정도 증가하였다. 또한 230명의 성직자가 360개의 성당이나 강당에서 인디언을 대상으로 사목하고 있으며, 인디언 보호 구역 내에 학교를 설립 · 운영하고 있다. (→미국)
※ 참고문헌  W. Andrews (ed.), Concise Dictionary of American History,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62/ J. Dolan, The American Catholic Experience, Garden City, New York, Doubleday and Company Inc., 1985/ J. Ellis · R. Trisco,A Guide to American Catholic History, Santa Barbara, ABC-Clio, 1982/ J. Hennessey, American Catholics, New York, Oxford Univ. Press, 1981/ M. Noll,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2. [金俊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