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교구 仁川教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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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 부천시 · 김포시 · 시흥시(일부) · 안산시(일부) 등 1개 광역시와 4개 시를 사목 관할 구역으로 하는 주교구. 1958년 서울 대목구에서 인천 감목 대리구로 분리되어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되었으며, 1961년 6월 6일 인천 대목구로 설정되었다. 이후 1962년 3월 10일 한국 교회에 교계 제도가 설립되면서 정식 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서울 · 대전 · 춘천 등과 함께 서울 관구를 형성하였다. [역대 교구장] 초대 맥노튼(W.McNaughton, 羅吉模) 굴리엘모(1961. 6~2002. 4), 2대 최기산(崔基山) 보니파시오(2002. 4~현재). 〔교 세] 1965년 41,955명, 1970년 55,248명, 1980년 84,632명, 1990년 216,796명, 2000년 353,219명.
: I . 복음의 전래와 본당의 설립
〔복음의 전래와 순교자의 탄생] 인천교구의 관할 지역에 복음이 전래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1838년 10월 인천의 정 바오로가 위패를 부수어 버린 사건으로, 당시 인천에 거주하던 50명 이상의 천주교 신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또 12명 정도의 신자가 옥에 갇혔다는 기록에서, 1838년 이전에 이미 복음이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가운데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가 발생하면서, 부평 출신의 성녀 김성임(金成任, 마르타)과 인천의 양반 출신으로 홍봉주(洪鳳周, 토마스)의 아내인 심소사(沈召史, 바르바라)가 서울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였고, 인천의 양반 출신으로 인천에서 체포된 민극가(閔, 스테파노) 성인도 이때 순교하였다. 또 1841년에는 인천 맡머리의 양반 출신인 이군겸(야고보)이 체포되어 옥사하였고, 욕유도(甕津郡 龍遊島?) 출신으로 조카 이군겸의 집에 거처하던 장 아나스타시아도 체포되었다. 이어 1846년 병오박해(丙午迫害) 때에는 양주 출신으로 1817년에 인천 신자와 결혼한 우술임(禹述任, 수산나)이 순교했는데, 그녀는 남편의 권고로 입교한 뒤 1828년에 인천에서 체포되어 사형당할 뻔하였다. 그러나 임신 중이라 석방되었고, 남편이 사망한 후인 1841년에 서울로 이사했다가 1846년에 순교하였다. 그런데 우술임이 1817년에 인천에서 입교한 사실이나, 또 민극가 성인이 20세(1806) 이전에 입교한 사실에서 인천 지역에는 1838년보다 상당히 이른 시기에 복음이 전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에는 더욱 많은 순교자들이 인천 지역에서 탄생하였다. 즉 1866년에는 인천 함박리(현 경기도 부천시 옥길동) 출신인 박도섭이 함박리에서 체포되어 수원에서 순교하였고, 1867년에는 인천 재궁골 출신으로 진천에 살던 이 안나가 죽산에서 순교하였으며, 인천 함박리 출신으로 양지(陽智) 사기막골에 살던 심원경(스테파노)과 그의 아들 심봉학이 수원에서 순교하였다. 이어 1868년에는 인천 사람인 김 스타니슬라오가 체포되어 서울에서 순교하였고, 인천 출신은 아니지만 박순집(朴順集, 베드로)의 이모부인 손 베드로와 그의 아내, 그리고 사위 백치문(사도 요한)이 제물포에서, 장치선(張致善) · 최인서(崔仁瑞, 요한) · 박서방(朴N集의 형) · 조 서방이 강화에서 처형되었다. 또 인천에 살았던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의 아들 이신규(李身逵, 마티아)와 인천에 거주하던 심 바오로, 금부도사를 지냈으며 인천 식골[食谷, 현 경기도 부천시 옥길동]에 거주하던 조학경도 이때 체포되어 서울에서 순교하였고, 1870년에는 인천 함박리 사람으로 박도섭의 아들인 박사앙이 체포되어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1871년에는 이연구(李蓮龜) · 이균학(李筠鶴) · 이재겸(李在謙)의 부인 정(鄭) 씨 · 손자 이명현(李明玄) · 백용석(白用石) · 김아지(金阿只) 등이 제물포에서 참수되었고, 박상손(朴尚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은 강화 갑곶에서 참수되었다. 이외에도 인천교구와 관련된 순교자들은 다수 존재하며, 박해 후에 살아 남은 신자들은 각처에서 소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함으로써 인천교구의 뿌리를 형성하였다.
[본당의 설립과 발전] 제물포는 1883년 1월에 개항되었고, 개항 후에는 1888년까지 각국의 거류지가 마련되면서 우리 나라 최초의 외국인 거류지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86년 한불조약(韓備條約)으로 선교사들의 개항장 거주가 허용되자, 블랑(J. Blanc, 白圭三) 주교는 1888년에 제물포에 본당을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당시 페낭(Penang) 신학교에 있던 빌렘(J. Wilhelm, 洪錫九) 신부에게 새 본당 지역을 맡아 주도록 요청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빌렘 신부는 1889년 7월 1일 제물포에 부임함으로써 제물포(인천, 현 답동) 본당을 설립하였다.
빌렘 신부가 부임할 당시 인천 지방의 교우는 한국인 59명 · 일본인 25명 등 84명이 존재해 있었다. 빌렘 신부는 이들을 사목하기 위해 외국인들의 왕래가 잦고 주민들이 많이 모여 살던 하인천에 자리를 잡으려고 했으나, 입지 조건이 불편하고 또 장래의 발전 가능성이 적어 결국 1890년에 답동 언덕의 3,212평을 성당 부지로 매입하였다. 이후 빌렘 신부는 여기에 성당과 교리실을 건축하려고 계획하다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되었고, 그의 후임으로 1890년 11월 1일 르 비엘(E.LeViel,申三德) 신부가 부임하였다. 르 비엘 신부는 이웃의 야산을 추가로 매입한 뒤, 1891년 7월에 임시 성당 겸 경리부(經理部) 건물을 완공하였다.
답동 본당이 완전히 정착하게 된 것은 3대 주임 마라발(J. Maraval, 徐若瑟) 신부 때였다. 1893년 4월에 부임한 그는 7월 초에 수녀원 건립 공사를 시작했고, 1894년에는 코스트(Coste, 高宜善) 신부로부터 성당 설계도를 받아 성당의 기초 공사도 시작하였다. 그 해 8월에 수녀원이 완공되어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진출하였고, 성당 공사는 1894년 청일 전쟁(淸日戰爭)으로 일시 중단되었으나, 이듬해 8월 11일 정초식을 거행하였고, 1896년 7월에 종탑을 완공한 뒤, 1897년 7월 4일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마라발 신부는 성당 건립 외에도 1900년 9월 1일에 천주학방(인천 박문초등학교의 전신)을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전개하였고, 1901~1902년에는 영종(永宗) 공소(현 옹진군 영종도의 돌곽재)와 대골 공소(현 시흥군 소래읍 부곡리)를 설립하여 공소 사목에도 힘을 쏟았다.
한편 당시의 인천 지역은 개항장이라는 특별한 여건, 즉 교우들이 생계 때문에 이주해 왔고 또 생활이 어려워지면 다시 떠날 사람들이 많아 신자수에 변동이 많았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수녀회의 활동은 교세 확장에 큰 힘이 되었다. 즉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무료 진료소(海星病院의 전신)를 운영함과 동시에, 1894년 가을부터는 고아들을 위한 '성영회' (聖嬰會) 사업은 전개하였고(海星保育院) 1899년 8월에는 인천 성당에서 여성교육 기관인 '여자기술학교' 를 시작함으로써 많은 개종자들을 탄생시켰다.
마라발 신부에 이어 1904년 4월 4대 주임으로 임명된 드뇌(E. Deneux, 全學俊) 신부는 1910년까지 구월리(九月里) · 고잔(현 김포군 검단면 오류리) · 새말(현 시흥군 소래읍 대야리) · 부평 공소를, 1911년에 새골(현 인천시 남구 만수동) 공소, 1912년에 대야동 공소, 1918년에 남동 공소, 1923년에 신창리(현 인천시 중구 신창동) 공소, 1925년에 강화 공소, 1928년에는 온수리(현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공소를 설립하는 등 재임 기간 동안 교세 확장에 주력하였고, 1909년 12월 8일에는 박문학교 (博文學校, 남자부)를 설립하고 설립자 겸 학교장으로 취임했다. 이 학교는 1917년 4월에 여자부(1912년 설립)와 통합된 뒤, 1925년 11월 17일에 '인천 사립 박문보통학교 로당국의 정식 인가를 받았다. 또 1919년 3 · 1 만세 운동때에는 강화(江華) 신자인 김용순(金龍頓) · 조기신(趙基信) · 신태윤(申泰允) 등이 참여하여 독립에의 의지를 나타냈고, 1926년 5월 10일에는 총독부로부터 해성보육원(海星保育院)의 시설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1934년 4월에 신자수의 증가에 따라 답동 성당의 개축 공사를 시작하였고, 이듬해 10월에는 해성보육원 부속 해성 병원(海星病院)을 개설하였으며, 1937년 3월 성당 구내에 '박문유치원' 을 설립, 개원하였다.
1937년 6월 5대 주임으로 임명된 임종국(林鍾國, 바오로) 신부는 최초의 한국인 주임 신부로, 이후 20년 동안 재임하면서 본당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부임 직후 성모회를 발족시켰으며, 1937년 6월 30일에 성당의 증축을 완료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또 현재의 사목회와 같은 체제를 갖추어 평신도들의 참여 의식을 고취시켰고, 이듬해 1월 23일에는 부녀 회원들로 구성된 소화 데레사회를 조직하였다. 이어 10월 15일에는 3층의 해성병원 건물을 신축하여 병원다운 면모를 갖추었고, 시외의 신자들을 위해 1938년에 소사 공소를, 1941년 12월에는 부평 공소를 신설하였다. 아울러 1942년 1월 서울교구가 방인 교구가 되면서, 그 해 여름부터 본당의 자치를 목표로 준비 작업을 시작하여 1943년 1월 교구 안에서 제일 먼저 재정적 자립을 선언하였다. 그렇지만 일제 말기의 종교 탄압으로 성당 종을 탈취당해야 했고, 1945년 4월 1일에는 일제의 소개령(疏開令)에 의해 박문학교의 남학교 교사(校舍)가 헐리기도 하였다.
〔본당의 분할과 교세의 확장] 1945년 8월 광복이 되면서 인천 지구도 새로운 발전의 시기를 맞았다. 먼저 교구에서는 그 해 9월 30일 '소화(昭和)고등여학교 를 인수하여 '박문여자중학교' 로 개편하였고, 답동 본당에서는 1946년 12월 15일에 '가톨릭 청년회' 주최로 '전재민(戰災民) 구제 음악회' 를 개최하여 수익금을 관계 당국에 전달하였다. 그런 가운데 1946년에 정식 복사반이 조직되었고, 1948년에는 가톨릭 학생회인 '용심회' (勇心會)가 설립되었다.
한편 인천교구 관할 지역에는 1889년에 설립된 답동 본당이 1945년까지 유일한 본당으로 존재했었다. 그러나 신자수가 점차 증가하면서 하나의 본당이 사목하기에는 관할 지역이 너무 광대하자, 교구에서는 1946년 4월 5일 소사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킨 데 이어 1948년 11월에 걸포리(傑浦里) 공소를 김포(金浦) 본당으로 승격시켜 인천의 북쪽 지역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948년 12월 15일에는 '독쟁이' 에 건물을 신축한 뒤 해성보육원의 분원을 마련하였고, 1950년 3월 18일에 백석 공소를 설정하였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답동 본당도 피해를 입게 되었다. 즉 1950년 9월 16일 유엔군이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할 때 성당은 포탄에 맞아 제대 위 지붕이 뚫어졌고, 해성병원을 맡고 있던 수녀들은 미군이 주둔하고 있던 덕적도에 200명의 고아와 함께 6개월 동안 피신하였다. 그런 가운데 1951년 8월 31일 박문여자중학교에 고등학교가 병설되었고, 이듬해 3월에 부평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1955년 6월에는 성모자애병원이 개원되었다. 또 1956년 4월에 소사 본당의 신성우( 申聖雨, 마르코) 신부가 '소명가정실습학교' 를 설립하였고, 8월에는 박문여자중 · 고등학교가 송림동의 새 교사로 이전하였으며, 9월 1일에는 윤을수(尹乙洙, 라우렌시오) 신부가 소사에 '인보 성체 수도회' (인보 성체 수녀원은 1958년 6월 5일에 설립)와 사회 사업 전문 학교인 '구산후생학교 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57년 9월 22일에 답동 본당에서 레지오 마리애의 첫 번째 회합이 있었고, 이듬해 1월에는 강화 본당이 신설되는 등 광복 후 인천지역에는 본당 · 병원 · 학교의 설립을 통해 활발한 가톨릭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 II . 교구의 설정과 변모
[인천 감목 대리구의 설정] 1958년 9월 인천과 부천 그리고 백령 · 연평 · 강화 · 덕적 · 영종도 등 인근 도서지역은 서울 대목구에서 분리되어 '인천 감목 대리구 로 설정되고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되었다. 당시 서울교구장이던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는 재정과 사제수의 부족 때문에 인천 지구의 사목을 메리놀회에 요청했던 것이다. 처음에 메리놀회에서는 노기남 주교의 요청을 거절했으나 결국 인천 지역의 사목을 맡게 되었고, 코너스(J. Conners, 權) 신부와 기본스(J.Gibbons, 盧) 신부등이 감목 대리직을 수행하였다.
감목 대리구의 설정과 동시에 1958년 10월에 광복 후부터 성당 건립을 위해 노력하던 연평도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이듬해에는 백령도(白翎島)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영흥(靈興) 공소(옹진군 영흥면) · 선재(仙才) 공소(옹진군 영흥면) · 운서리(雲西里) 공소(옹진군 영종면) 등이 새로 설립되었다. 이 시기 인천 지구에서는 도서 지방의 전교에 힘을 쏟았는데, 1960년 4월에는 코너스 신부의 주도로 170개의 섬에 사는 65만 명의 섬사람들을 전교하기 위해 '해상 전교부 를 마련하였고, '가톨릭 구제회' 는 도서 지역에 구호 양곡을 보급하기도하였다. 이러한 교회의 활동으로 도서 지역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이후 6~7년 동안 전례 없는 교세 확장이 이루어졌다. 아울러 1960년 4월에 화교(華僑)들에 대한 전교를 목표로 선인동에 중국인 성당을 설립하였고, 7월에는 도화동 본당이 답동 본당에서 분리 · 설정되었다.
[인천교구의 설정] 교황청에서는 1961년 6월 6일 인천 감목 대리구를 대목구(代牧區)로 승격시킨 뒤, 6월 21일에 청주교구의 부감목으로 활동 중이던 맥노튼(W.McNaughton, 羅吉模) 신부를 인천 대목구의 첫 감목에 임명하였다. 신설 대목구의 관할 지역은 인천시 · 부천군도서(육지 제외) · 강화군 · 김포군 · 황해도 웅진군(3개면제외)이었으며, 관할 본당은 답동 · 송림동 · 부평 · 김포 · 강화 · 도화동 · 북성동(현 해안) · 연평도 · 백령도 본당 등 9개였다. 그리고 공소는 59개, 신자수는 23,169명이었으며, 신부 19명 · 수녀 96명 · 대신학생 13명 ·소신학생 19명 · 여자중 · 고등학교 1개 · 초등학교 1개 · 유치원 1개 · 고아원 3개 · 병원 2개를 경영하였고,평신도 사도직 조직은 '바다의 별' 꾸리아 산하에 24개의 쁘레시디움이 있었다.
맥노튼 주교의 주교 서품식은 1961년 8월 24일 그의 고향인 미국 로렌스(Lawrence)의 '성 마리아 성당' 에서 거행되었고, 10월 26일에는 답동 성당에서 주피(X.Zupi) 주한 교황 사절에 의해 인천 대목구 설립식과 주교임명장 수여식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11월 14일에 재단 법인 인천교구 천주교 유지 재단 이 설립되었다. 이에 앞서 1961년 2월부터는 서해의 외딴 섬인 이작도(伊作島, 옹진군 영흥면 이작리)와 풍도(豊島, 옹진군 대부도 풍도리)에 대한 선교가 시작되었고, 3월에는 소명여자중학교가 개교하였으며, 10월 1일에는 답동 성당에서 인천시 천주교 신자 총 단합 대회' 가 개최되었다. 그런 가운데 1962년 한국 교회에 정식 교계 제도가 도입되면서인천 대목구는 3월 10일 인천교구로 승격되었고, 7월 1일 주교좌 답동 성당에서 교구 설정식과 주교 착좌식이 거행되었다.
[교구의 활성화와 교세의 확장] 맥노튼 주교는 교회 일치를 기본 모토로 하여 전교를 교회의 제1차 사명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전교를 위해서는 신자들의 교리 지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겨, 1962년 8월 24일에 '종교 교육위원회' (명도회 교리 교사 연합회의 전신)를 발족시켰다. 또 1962년 3월 25일에는 인천 지역 최초로 답동 신용 협동 조합' 이 설립되었고, 이듬해 6월 16일에는 교구 창설 이래 최초의 전 교구 성체 거동이 있었으며, 1964년 2월에 '학교 법인 인천 가톨릭 교육 재단' 이 설립되었다.
교구로 승격된 후 인천교구에는 수많은 본당이 증설되 었는데, 1962~1965년 사이에는 화수동(花水洞) · 주안동(朱安洞, 현 주안1동) · 독쟁이(현 용현) · 부평1동 ·덕적 · 마송(현 통진) · 영종 · 고잔 본당이 설립되었고, 1966년 12월에는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 성당' 인 화수동 성당이 준공되었다. 이와 함께 수도회의 활동도 활발하여 1962년 4월에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육아 시설인 도화동 보양원을 인수하여 운영하였고, 예수성심 시녀회는 1963년 3월 이후 여러 본당에 분원을 개설하였다. 또 메리놀 수녀회는 1963년 3월에 개원한 강화 본당 진료소를 맡아 운영하였고,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는 1964년부터 성모자애병원을 관리하였다. 그리고 성가 수녀회는 소사에서 양로원과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1967년 7월 4일에 '인천교구 수녀 연합회' 가 결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1962년 3월 10일 영화중 · 고등학교(인천 대건고등학교의 전신)를 교구에서 인수하였고, 3월 17일에 소명여자중학교에 고등학교가 병설되었으며, 백령도에 '복자 김 안드레아 병원' (1959. 6), 강화에 그리스도 왕 의원' (1965. 3), 덕적도에 '복자 유 베드로 병원' (1966. 12)을 설립하는 등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구에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일어났다. 먼저 전례에 있어서, 1964년 8월에 미사를 봉헌할 때 신자들을 향하여 봉헌할 수 있는 특허를 모든 신부들에게 부여하였고, 미사 때에 제대 옆이나 성당 중앙에 안치되었던 제병과 주수병을 복사 및 두 명의 평신도 대표가 사제에게 가져와 바치는 예절을 도입하였다. 그리고 한국어 성가에 의한 창(唱) 미사에 분향도 허용하였다. 새 전례의 일부 시행에 이어 교구에서는 공의 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즉 맥노튼 주교와 인천교구의 신부들은 1965년 4월 21일에 성공회 신부, 프로테스탄트 목사들과 함께 교회일치에 대한 간담회를 마련했고, 11월에는 송림동 본당에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의 간담회가 있었다. 또한 1967년 3월 5일에 가톨릭 학생회가 주도한 교회 일치를 위한 심포지엄이 인천시 공보관에서 개최되었으며, 이듬해 2월 12일에는 강화 성당에서 천주교 · 성공회 · 감리교 · 장로교 · 복음 교회 등 5개 종파의 지도자들이 모여 교회 일치를 위한 '강화 지구 기독교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교회 일치를 위한 움직임과 함께 교회의 쇄신을 위한 노력도 이루어졌다. 특히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평신도들의 활동과 교리 교육을 강화했는데, 그 결과 많은 청소년들이 교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에 교구에서는 1965년 12월에 '가톨릭 고등학생 연합회' 를 창설하고, 이듬해에는 성직자 · 수도자들이 '학생 활동위원회' 를 조직하여 청소년들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이어 1966년 3월 '인천 가톨릭 노동 청년회' 가 결성되었고, 이듬해 6월에 '인천 가톨릭 사회 복지회' 가 설립되었으며, 8월에는 교구의 효율적인 사목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교구 사목위원회' 가 발족되었다. 또 1968년 1월 25일에 인천교구 제1회 꾸르실료 수련회를 개최한 뒤 꾸르실료를 창설하였고, 4월 16일에는 우리 나라에서는 최초로 부주교제를 도입한 후 시노트(J. Sinnott, 진) 신부를 초대 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4월 20일에 어린이들이 첫 고해 전 첫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고해 중사제의 사죄경을 우리말로 외우도록 하여 사목상의 변화도 꾀하였다. 1968년 초 '심도 직물' 의 노조 탄압 사건 이 발생했을 때에는 교구를 비롯하여 한국 교회 전체가 사회 정의와 노동자들의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하였고, 1969년 7월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서 보양원을 전환하여 성 요셉 직업 보도원' 을 개설하였다. 이어 1971년 1월 성소 양성을 위해 '인천교구 성소 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2월 1일에 토요 특전 미사를 허용하였고, 2월 11일에는 평신도에게 성체 분배권을 부여하였다.
1973년 7월 7일 인천교구에서는 '제1차 교구 발전 3개년 계획' 을 수립 · 발표하였다. 이 계획은 교구가 당면한 중요 사업으로 ① 사제와 신자들에 대한 재교육, ②1982년까지 교구의 완전 자립을 위한 준비, ③ 교구 행정 및 문서의 통일을 위한 조직의 일원화 등 세 가지를 설정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1973년 10월에 가톨릭 회관이 완공됨과 동시에 답동 본당에서 인천교구 성년 선포 및 성체 대회를 거행하였고, 1974년 2월에 '인천교구 사목회 회칙' 이 발표되어 교구 내 모든 성당에서도 사목회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6월 11일에는 인천교구 최초의 '청년 신앙 대회' (주제 : 너 어디에 있느냐)를 개최하였고, 7월6일에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주교의 납치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는 교구 차원의 기도회를 통하여 정부에 인권 회복을 위한 노력을 촉구하였다. 1975년에는 '제2차 교구 발전 3개년 계획' 이 수립되었는데, 이 계획의 목표는 교구 내 모든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는 것이며, 구체적인 내용은 신앙의 재강화 · 각종 조직의 정비 · 지도자의 자질 향상 · 공동체 의식 계발 · 효율적인 선교 방안의 모색 등이었다. 그런 가운데 1975년 8월에 성심여자대학의 부천 분교가 완공되었고, 11월에 '성령 쇄신 봉사회' , 12월에 '교도소 사목 후원회' , 이듬해 4월에는 '정의 평화위원회' 와 '행복한 가정 운동' , 10월에는 '인성회' 등이 창설되어 각종 조직이 정비되었다. 또 1975년 4월에 영종도 본당의 시노트 신부가 정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강제 추방되었고, 1977년 9월에는 인천교구 총대리이자 정의 구현 사제단에 속한 김병상(金秉相, 필립보) 신부가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교구에서는 기도회 등을 통해 인권을 유린하는 조치와 법의 철폐를 촉구했으며, 1976~1978년의 동일방직 노조 탄압 사건 때에는 인천 가톨릭 노동 청년회가 주체적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인천교구는 1978년에 교구 설정 이래 최대의 염원이었던 재정적 자립을 이룩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국의 교구 중에서 복음화율이 가장 높았는데, 이러한 성과는 16년의 짧은 역사 속에서도 일치를 향한 교구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이와 함께 1979년 3월 '인천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가 창립되었고, 12월에 '가톨릭 의사 협의회' 가, 1980년 3월에는 '가톨릭 여성 연합회' · '가톨릭 약사회' · '가톨릭 간호사회' 가, 12월에는 '중등학교 가톨릭 교사회' 가 설립되는 등 평신도 단체들의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1979년 11월부터는 16개 본당의 주보를 통합하여 신속한 행정 처리와 홍보의 통일을 기하였다. 또 1980년 2월 28일에 사목국과 교육원을 정식으로 개설하여 교구 기구의 전문화 시대를 열었으며, 11월 30일에는 〈어린이 주보>를 창간하여 교구 차원에서 더욱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아동 사목을 전개하였다.
1981년 교구 설정 20주년을 맞은 교구에서는 이해를 이웃 전교의 해로 정하고, 선교하는 공동체 구현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3월에 전교를 위한 '묵주 기도 천만 단 바치기 운동' 과 리플릿(leatlet) 전교를 시작하였고, 4월 7일에는 평신도 지도자 양성과 예비 신자 교육을 위해 교구 '신학 연수원' 을 개설하였다. 이어 5월 10일에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성소 계발과 후원을 목적으로 '인천교구 성소 후원회' 를 조직하였으며, 6월 6일에는 교구 설정 20주년 기념 '성체 대회' 를, 10월 3일에는 교구 설정 20주년 기념 순교 자료 전시회' 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982년 3월 성심여자대학이 부천으로 완전히 이전하였고, 6월 11일에 신앙 쇄신 · 형제적 일치 ·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인천교구 청년 신앙 대회' (주제 : 너 어디 있느냐)를 개최하였다. 이듬해 3월 1일에는 더욱 효과적인 교구 사목을 위해 '인천교구 사목 협의회' 를 설치하였으며, 성서 읽기 운동을 생활화하기 위해 '인천교구성서 위원회' 를 구성하였다. 또 3월 9일에 자금의 효율적 조성과 이용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본당들의 가톨릭 협동 조합 설립을 승인하였고, 4월 26일에는 '인천교구 사제 평의회' 를 구성하여 사목 기구의 체계화를 도모하였다.
한편 인천교구는 1980년 7월 12일 "선교 200주년 인천교구 준비위원회"를 발족하여 일찍부터 한국 교회 창립 200주년을 준비하였는데, 1983년 2월 22일에 준비 위원회의 조직과 체계를 변경하여 전국 기구와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 효율적인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 23일 인천 종합 경기장에서 50여 명의 교구 사제단과 30,000여 명의 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순교자 현양 신앙 대회' 를 거행하였고, 12월 15일에는 교회 내외의 정확한 홍보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교구홍보 교육국' 을 설립하였다. 이어 1984년 9월 11일 교구 정의 평화위원회' 를 구성하였으며, 이듬해 1월에는 농 · 어촌 사목의 문제점을 타개하기 위해 '제1차 농어촌 본당 회장 · 공소 회장 및 지도자 교육' 을 실시하였다.
: Ⅲ . 교구의 성장과 현재
[교구 설정 25주년과 성년 교구로의 발전] 교구 설정 25주년인 1986년을 맞아 교구에서는 '교구 설정 25주년 준비위원회' 를 구성하였다. 이 위원회에서는 교구민들이 성년(成年) 교구의 성인(成人)으로서 의식을 완비하고, 교구의 모든 일들을 주관할 수 있도록 성장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1986년 1월에 제2차 농어촌 본당 지도자 교육을, 2월에 제2차 평신도 지도자 교육을 실시하였고, 6월 6일에는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모든 이가 하나 되기를' 이라는 주제로 신앙 대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교구에서는 25주년을 맞아 청소년 야영장 건립,주교관 신축, 이승훈 묘소(인천시 남구 장수동 산 132-1)성역화를 기념 사업으로 계획하였다. 이에 1986년 6월 12일에 1983년부터 진행된 강화군 내가면 청소년 야영장의 축복식을 거행하였고, 10월 19일에는 이승훈 묘역의 성역화를 위한 기공식을 거행하였으며, 1987년 6월 12일에는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새 주교관을 완공 · 축성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 23일 교회 내 사회 운동 단체들의 협의체인 '인천교구 천주교 사회 운동 협의회' 를 창립하였고, 1989년 3월에 교구 법원을 설립하였다.
1989년 10월 4~8일까지 서울에서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라는 주제로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 가 거행되었다. 이에 앞서 인천교구에서는 1987년 11월 11일 '세계 성체 대회 준비 성직자 · 수도자 연수회' 를 실시하여 교구 차원에서 성체 대회의 본뜻과 성체의 삶을 신자들에게 주지시켰고, 성체에 관한 사목 실천 사항으로, 성체 신심 함양 · 성체 분배권자 교육 및 재교육 · 지속적인 성체 조배 · 성체 신심 행사 · 성체 교리 강화 등을 정하고, 1988년 9월 5일부터 6개월 간 교구 내 37개 본당 3,700여 명의 신자들을 연수시켰다. 뿐만 아니라 교구에서는 대회의 내용인 '나눔의 삶 도 구현시키고자 한 마음 한 몸 운동' 에도 적극 협조하여, 1989년 1월 8일 한마음 한 몸 운동의 일환인 '생명의 나눔-헌혈 운동'을 도화동 본당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4월 28일 '주안 가톨릭 노동 사목' 난입과 주안5동 백순기(白淳基, 힐라리오) 보좌 신부의 폭행 사건이 벌어졌을 때에는 이 사건을 교권과 노동 사목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고 규정한 뒤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1991년 교구 설정 30주년을 맞이한 교구에서는 1월 25일에 《인천교구사》를 발간하여 30년의 교구사를 정리하였고, 2월 19일에는 항해자들에 대한 사목적인 견지에서 '해양 사목부' 를 설치하였다. 또 1993년 7월 29일 가톨릭 환경 연구소를 창립하였고, 이듬해 1월에 교구안팎의 소식을 전하는 월간 신문 <가톨릭 인천>을 창간하였으며, 9월에는 성심여자대학이 가톨릭대학과 통합되었다. 그리고 1996년 3월에 관할 구역을 10개 지구로 개편함과 동시에 인천 가톨릭대학교를 개교하였고, 7월 1일에는 전례 음악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1997년 4월 '인천교구 시노드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어 교구 쇄신을 위한 첫발을 내디였으며, 이듬해 3월 29일에 인천교구에서는 처음으로 주안1동 성당에서 '소년 꾸리아 연합 아치에스 행사 가 거행되었다. 또 5월 22일에 '인천교구 실직자 대책위원회' 를 발족시킨 데 이어, 11월 25일에는 "1만 세대 실직 가정 겨울 나기 '사랑의 쌀 모으기' 추진 본부"를 출범시켰으며, 12월 18일에는 '인천교구2000년 대희년 준비위원회' 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1999년 6월 6일에 2년 간의 준비 끝에 "그리스도와 함께 희망과 쇄신을 향해 나아갑시다" 를 주제로 '인천교구 시노드' 가 주안3동 성당에서 개막되었고, 11월 10일에 는 최기산 신부가 인천교구 부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어 12월 27일에 부천 실내 체육관에서 서품식을 거행하였다.
[교구의 현재〕 2000년 1월 25일 첫 대희년 특별 미사가 답동 성당에서 최기산 주교의 주례로 봉헌되었다. 대희년을 맞아 교구 내 단체들은 각종 행사를 가졌는데, 2000년 3월 24일에는 여성 연합회가 여성들의 대희년 행사를 개최하였고, 5월 7일에는 장애인 연합회와 사회 복지회가, 5월 10일에는 노동 사목위원회가 각각 대희년 맞이 행사를 개최하였다. 또 2000년 7월 27일에 6. 15 남북 공동 선언 이행과 평화 통일을 염원하는 '가톨릭 청년 통일 한마당 준비위원회' 의 기도회 및 촛불 행진이 있었고, 8월 19~20일에는 '교구 발전 20년 실행계획' 수립을 위한 워크숍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9월 20일에 인천 가톨릭대학교의 성당 봉헌식이 있었고, 10월 29일에는 '그분 안에 우리의 기쁨이 있습니다' 라는 주제로 '2000년 대희년 청년 축제' 가 펼쳐졌다. 이어 11월 19일에 1년 6개월에 걸쳐 진행된 교구 시노드가 폐막되었고, 12월에는 동춘동으로 이전한 박문초등학교의 건물을 개조한 뒤, 가톨릭 회관에 있던 교구청을 이전하였다.
2001년 초에는 한국 교회 안에서는 처음으로 교구 조직 안에 '청년국' 을 신설하여 청년 사목을 총괄하게 하였고, 5월 1일에는 사목 연구소를 출범시켰다. 또 5월 24일에 박순집(朴順集, 베드로)의 유해 일부를 서울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에서 도화동 성당으로 이장하였으며, 6월 6일에는 '감사' 라는 주제로 부천 실내 체육관에서 '교구 설정 40주년 기념 신앙 쇄신 대회' 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9월 20일에는 강화 갑곶 성지에서 순교자 현양 미사 및 박순집 유해 안장식을 거행하였고, 11월 18일에는 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의 '똑바로 운동' (도덕성 회복 실천 운동) 선포식을 답동 성당에서 개최하였다. 아울러 2002년 4월 17일 한국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노동 사목의 중요성을 알리고 노동 사목의 질적인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노동자 주일' 을 신설하였다.
2002년 4월 25일, 1961년부터 교구장직을 수행하던 맥노튼 주교가 퇴임함에 따라 부교구장인 최기산 주교가 제2대 인천교구장으로 답동 주교좌 성당에서 착좌식을 거행하였다. 최기산 주교의 인천교구장 착좌는 인천교구가 40여 년 만에 명실공히 한국인 교구 체제를 갖춤으로써 삼천년기 새로운 복음화의 전기를 맞이했다는 점과 교회사적으로는 한국 가톨릭 교회가 선교사 주교 시대를 마감하고 처음으로 주교단 토착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를 사목 표어로 정한 최기산 주교는 취임 강론에서 "이 시대에 맡겨진 새 복음화 · 재복음화 · 사회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며, "북방 선교와 아시아 복음화라는 계획하에, 북한과 중국 선교의 기초" 를 다지며, 아울러 '20년 복음화 계획 추진' , '송도 · 영종도 · 김포 매립지의 경제 특구 지정에 따른 교세 팽창 , '공단 밀집 지역 특성에 맞는 노동 사목 활성화 문제' 등 교구의 현안 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였다.
2000년 12월 말 현재 인천교구는 총 신자수 353,219명, 본당수 80개, 공소수 51개, 사제수 173명(외국인 및 수도회 소속 포함), 진출 수도회 47개, 병원과 의원 2개, 사회 복지 기관 33개, 사회 교육 기관 1개, 유치원 10개, 초등학교 1개, 중학교 2개, 고등학교 3개, 대학교 1개, 대신학교 1개를 관할하는 교구로 성장하였다. (-답동 본당 ; 맥노튼, 윌리엄 존)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가톨릭신문>/ 화신문>/ 《경향잡지》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인천교구의 전사》, 1987/ -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문》, 1988/ 一, 교구 25년》, 1987/ -,<교세 통계표》, 1988/ -, <황해도 천주교회사》,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84/ 인천교구사 편찬위원회 . 한국교회사연구소편, 《인천교구사》, 천주교 인천교구, 1991/ 천주교 답동 교회, 《답동대성당 100년사》, 1989. [白秉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