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체나 도미니 [라]InCoenaDomimi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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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만찬 파스카 목요일에 연례적으로 발표하였던 교황 칙서. "만찬 칙서" (BullaCoenae)라고도 한다.
이 칙서를 발표하는 예식은 로마 베드로 대성전의 로지아(loggia)에서 교황을 비롯하여 추기경단과 교황청 고위 성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에 열렸다. 먼저 로마 공소원의 한 판사가 라틴어로 칙서를 낭독한 다음, 부제 추기경이 이탈리아어로 낭독하였다. 칙서 낭독이 끝나면, 교황은 밀랍으로 만든 불타는 횃불을 로지아 아래에 있는 베드로 광장으로 내던졌다. 주님의 최후 만찬 때에 생긴 변절자를 밝히겠다는 생각에서 이 칙서를 파스카 목요일에 발표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
〔역사와 내용] 이 칙서는 교황에게 사죄가 유보된 온갖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한 제재인 교정벌(矯正罰, cen-sura)의 목록을 담고 있다. 교정벌을 정기적으로 발표하는 관습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요크 교회 회의(1195)의 교령 제10조는 한 해에 세 번씩 종을 울리고 촛불을 밝혀 위증자들에 대한 파문 제재를 발표하도록 모든 사제들에게 명령하고 있다. 런던 교회 회의(1200)는 마술사,위증자, 방화범, 절도범, 강간범 등에 대한 파문 제재를 매년 발표하도록 하였다. 이른바 "만찬 칙서"의 목록은 14세기에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시대가 지나면서 수정 · 보완되다가, 교황 우르바노 8세(1623~1644)가 1627년에 최종 개정을 하였다. 그 뒤 이 목록은 19세기에 공식 폐지될 때까지 바뀌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다. 교황 우르바노 5세(1362~1370) 때인 1363년에 이 목록은 7개 사안을 담고 있었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1세(1370~1378) 때인 1372년에는 9개, 교황 마르티노 5세(1417~1431) 때인 1420년에는 10개, 교황 율리오 2세(1503~1513) 때인 1511년에는 12개,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 때인 1536년에는 17개, 교황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 때인 1577년에는 20개, 1583년에 21개로 늘어났다. 하지만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 때인 1606년과 1619년에 20개가 되었다. 교황 우르바노 8세가 최종적으로 확정한 이 칙서 목록에 수록된 주요범죄 사안들은 다음과 같다.
① 배교, 이단, 이교(離敎).
② 교황이 세계 공의회에 제소하는 사안.
③ 교황 직속 주교좌들에 대한 침해.
④ 난파선의 약탈과 표류 화물의 점유.
⑤ 법으로 허용되지 않거나 성좌의 허가를 받지 않은 세금과 통행료의 강제 징수 또는 증액.
⑥ 교황 칙서나 소칙서의 위조.
⑦ 사라센인, 투르크인 그리고 그리스도교 국가의 다른 적들에게 무기와 군수품 또는 전쟁 물자의 공급.
⑧ 로마 궁정으로 보내는 식량과 기타 물자의 수송 방해.
⑨ 로마 궁정을 오가는 여행자들에게 저지르는 폭력.
⑩ 추기경들에 대한 폭력.
⑪ 교황 사절과 대사들에 대한 폭력.
⑫ 로마 궁정의 업무를 취급하는 사람들에 대한 폭력 .
⑬ 세속 법정에 대한 성직자의 소원.
⑭ 세속 법정에 대한 성직자의 영적 사건 심리.
15 세속 법정에 대한 성직자의 종속.
16 교회 법관들에 대한 핍박.
@ 교회 재산의 횡령, 또는 소속 교회 권위의 허가를 받지 않은 교회 재산의 강점.
18 교황의 특별 허가를 받지 않은, 성직자들에 대한 세금이나 십일조의 부과.
19 성직자들의 주요 범죄 사건에 대한 세속 판사들의 간섭.
@ 어떠한 지방이든 교황령(敎皇領)에 대한 침략 · 점령 · 강탈.
〔반발과 대응] 교황 비오 5세(1566~1572)가 나폴리 왕에게 보낸 서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만찬 칙서의 좀더 오래된 판본들에는 총주교, 대주교와 주교들에게 관할지역 내에서 이 칙서의 정례적인 반포를 감독하라고 명령하는 조항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명령은 시행되지 않았다. 모든 지방 교회에서 이 칙서를 장엄하게 반포하려는 교황의 노력들은 세속 통치자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스페인의 왕인 펠리페 2세(1556~1598)는 1582년에 이 칙서를 발표하려는 교황 대사를 추방하였었다. 프랑스와 포르투갈에서는 이 칙서의 발표가 금지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루돌프 2세(1576~1612)도 이 칙서를 반대하였다. 이처럼 군주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칙서는 교구의 예식, 수도자들의 관구 회의, 희년의 반포 등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알려졌다. 고해 사제들은 흔히 이 칙서의 사본을 휴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밀라노의 대주교였던 보로메오(Carolus Borromaeus,1538~1584)는 자신의 교구 내에 있는 모든 고해소 안에 이 칙서의 사본을 붙여 두었다. 로마에서는 1770년까지 매년 파스카 목요일에 이 만찬 칙서의 장엄 반포식이 열렸으며, 교황 글레멘스 14세(1769~1774)가 이를 생략한 후부터는 다시 열리지 않았다.
18세기에 이르러 교황의 특권에 대한 반대가 점차 널리 확산되고 국가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일련의 노력에 따른 결과로 이 칙서는 공격을 받았다. 이 칙서의 일부 조항들이 중세의 교회와 국가라는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 때에는 세속 통치자들이 다룰 힘도 없고 또 다루기도 싫어하는 사안들에 대해서, 교황은 영적인 힘으로 악을 치유하고 또 억압받는 사람들을 옹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와 상황이 바뀌었다. 교황 글레멘스 13세(1758~1769)가 1768년 1월 30일 파르마의 페르디난도 대공을 파문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이 칙서에 대한 반대가 일기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의 주세 1세는 1768년 4월 2일 칙령을 발표하여, 이 만찬 칙서를 인쇄 · 판매 · 배포하거나 법률적 조회를 하는 것은 반역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와 유사한 칙령들이 같은 해에 나폴리의 왕인 페르디난도 1세(1759~1806), 파르마의 대공, 모나코의 군주,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자유 국가들 및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1740-1780)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요제프 2세(1765~1790)는 1781년 4월 14일에 "교황이 지금까지 이른바 5년 기한부 특별 권한으로 부여해 왔던, '만찬 칙서' 에 유보된 사건들의 사죄권을 지금부터 앞으로는 완전히 폐지한다" 고 공포하였다. 같은 해 5월 4일에 그는 만찬 칙서를 예식서에서 삭제하고 더 이상 사용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1769년에는 이 칙서를 비난하는 르 브레(LeBret의 저서 《이른바 주님 만찬 칙서의 실용사(實用史) 그리고 국가와 교회에 미친 그 심대한 영향》(Pragmatiche Geschichte der SO berufenen Bulle in Coena Domini, und ihrer furchterlichen Folgen fuir Staat undKirche)이 전 4권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이 책의 끝 부분에서 칙서의 폐기를 교황 글레멘스 14세(1769~1774)의 인품과 지혜와 도량에 호소하였다.
여러 그리스도교 국가의 통치자들과 화합해야 할 필요성을 추기경 시기 때 이미 피력하였던 교황 글레멘스 14세는 이 만찬 칙서를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칙서를 공식적으로 폐지하지도 않았다. 교황 비오 5세가 이 칙서는 성좌에서 다른 것으로 대체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법률적 효력을 지닌다는 조항을 삽입하였기 때문에, 교황은 계속하여 주교들에게 5년 기한부 특별 권한으로 이 칙서에 포함된 사건들에 대한 사죄권을 부여하였다.
[칙서의 폐지] 교황 비오 9세(1846~1878)도 1855년경까지 그렇게 하였다. 따라서 이 칙서의 주요 조항들은 법률적으로 효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일부 조항들이 있다는 이유로 이 칙서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적용되지 않았고 구속력을 지니지도 못하였다. 교황은 1869년 교황령 <아포스톨리체세디스>(Apostolicae Sedis)를 발표하여 만찬 칙서를 공식적으로 폐지하였다. 이 교황령 서문에는 시대와 관습이 변화하여 더 이상 본래의 목적을 이룰 수 없는 교회의 일부 제재들은 이제 유익하거나 적절하지 않게 되었다고 언급하였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루어진 교회와 교황의 무류성에 관한 토론에서도 이 만찬 칙서에 대한 분명한 반대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 참고문헌  L.J. Rogier R. Aubert M.D. Knowles (dir.), Nowwelle Histoire de L'Eglise. Reforme et Contre-Refomme, vol. 3, Paris, Seuil, 1968/W.M. Plöchl, Abendmahlsbulle, (LThK) 1, p.32. [姜大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