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교회의 한국인 순교자들 日本敎會 - 韓國人殉教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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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박해와 순교자들.

일본의 박해와 순교자들.

일본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것은 1549년 8월 15일 예수회의 프란치스코 사베리오(F. Xaverius) 신부가 가고시마(鹿兒島)에 입국하면서부터였다. 일본에서는 이때부터 그리스도교 신자는 물론,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을 포르투갈어의 발음을 따라 기리시탄(切支丹 또는 吉利支丹)이라고 불렀으며, 이에 명치(明治) 이전의 일본 교회를 기리시탄 교회라고 칭한다.
일본 기리시탄 교회(1549~1865) 내의 한국인 신자는, 임진 · 정유왜란 때에 일본으로 끌려간 부로(俘虜, 군인 신분의 포로가 아닌 일본으로 납치당한 일반인들로, 역사 기록에 포로와는 달리 부로로 표기되어 있다)들 가운데,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이들의 수는 상당히 많았는데, 프로이스(Frois) 신부에 의하면 1594년에 입교한 조선인 부로는 2,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조선인 부로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참한 노예 생활을 강요 당했는데, 이러한 현실 속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가르침을 복음으로 느끼고 신앙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조선인 신자들은 특히, 서양 배의 출입이 공식적으로 허용되고, 분위기도 자유로웠던 나가사키(長崎) 지방에 많았다. 이들은 1610년 이곳에 조선인 교회(성 라우렌시오 교회)를 건축할 정도로 열심이었고, 이 교회는 1620년 박해령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10년 간 유지되었다.
조선인 기리시탄들의 신앙은 매우 놀라워 일본 선교에 종사하던 예수회 성직자들의 신임을 받았다. 그리하여 1594년 당시 일본 예수회의 부관구장이던 고메스(Pedro G6mez) 신부는 조선인 기리시탄 가운데 유식한 신자를 택하여 교리를 익히게 한 후, 이들로 하여금 자국인(自國人) 부로들에 대한 선교는 물론, 한글 기도서를 작성하도록 조치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어떤 조선인 도주쿠 (同宿, 성직자들에게 거처를 제공하거나 선교 활동을 보조하는 자)는 오무라(大村)에서 200명을 교화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또 이들 중 일부는 예수회에 입회하는 것을 열망했는데, 1608년 예수회 총장이 조선인의 예수회 입회를 정식 허가함에 따라 권 빈천시오 가베에(嘉兵衛)는 예수회 수사, 가이오는 예수회 수련자가 되었다.
권 빈천시오는 1612년 중국을 통해 조선 입국을 개척하라는 일본 예수회의 지시에 따라 중국에 파견되었다. 그는 6년에 걸쳐 조선 입국의 기회를 얻고자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18년 일본에 돌아왔다. 그 후 권빈천시오는 중국인과 조선인 전교에 종사하다가 나가사키에서 체포되어 1626년 4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또 가이오는 1614년 마닐라로 추방되는 기리시탄 지도자 다카야마 우곤(高山右近)을 따라 자진하여 마닐라로 갔다가 이듬해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 후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그는 체포된 지 1년 반 만인 1624년 나가사키에서 순교하였다. 이 밖에도 조선인 부로 중에는 예수회의 '도주쿠' 나 '간보우' (看坊, 공소 회장), '고모노' (小者, 성직자 또는 도주쿠의 종복)로 활동하다가 순교한 사람들도 많으며, 1612년 '베아타스 여자 수도회' 에 입회한 뒤, 마닐라로 추방되었다가 1636년에 사망한 조선인 수녀 박 마리나도 있다.
당시 조선인 기리시탄들은 도쿠가와(德川) 정권의 오랜 박해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는데, 그들 중 9명은 1867년 7월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복(諡福)된 '205명의 일본 복자(福者)'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표 1> 참조).
한편 시복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일본에서 포교 활동을 펴고 있던 성직자들의 기록을 통하여 순교한 것이 확실한 조선인 기리시탄들은 <표 2>와 같다.
순교자 이외에도 순교자적 삶을 통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감화를 준 사람들도 있다. 1612년 고즈시마(神津島)로 유배당한 오타 줄리아의 신앙 생활은 잘 알려져 있으며, 1613년 아리마(有馬)에서 체포되어 갖은 형벌을 이겨내고 추방당한 후, 청빈으로 정결 생활을 지키다 사망한 막센시아(Maxenia)도 칭송받을 만하다. 또 1614년에 사가(佐賀)에서 체포된 군나이 도메 부자(父子)는 당국에 제출한 배교 증명서를 돌려받기 위해, 십자가를 메고 사가 시내에서 시위를 감행하다가 체포되어 나가사키로 추방되었으며, 같은 해 에도(江戶, 현재의 東京)에서 체포된 벙어리 마누엘은 이마에 십자가가 찍히는 낙형을 받고, 손가락이 잘리는 참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이를 이겨내고 나가사키로 추방되었다. 또 나가사키의 이사벨라(Isabella)는 1626년 남편과 같이 나가사키에서 체포된 뒤, 운젠(雲仙)으로 연행되어 이른바 '지고쿠 세메' (地獄責女)라는 고문을 받게 되었다. 이 고문은 유황을 내뿜는 열탕(熱湯)가의 말뚝에, 옷을 벗긴 채 팔을 뒤로 묶고, 머리 위에 돌을 올려 놓은 다음 이를 떨어뜨리면 배교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며칠 동안 잠을 재우지 않고 거듭 열탕을 퍼부으며 배교를 강요하는 고문에, 많은 일본인 신자들은 배교했으나 이사벨라는 13일 동안 시달리면서도 끝내 배교하지 않았다.
1638년 시마바라(島原) 난을 끝으로 일본 기리시탄 교회의 공적인 조직은 모두 붕괴되었다. 이에 남은 교인들은 정부의 철저한 탄압과 쇄국 체제의 강화에 따른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이 차단된 상황 속에서, 부득이 고로비 기리시탄' (轉ごキ リ シ タ ソ, 배교 기리시탄)을 가장하며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신앙을 지키는 이른바 '가쿠레 기리시탄' (隱九切支丹)들이 존재했는데, 이런 시대에 조선인 부로 기리시탄이나 그 후손들도 가쿠레 기리시탄이 되어 신앙을 지켜 왔음은 그들의 신분과 신앙을 조사한 '진베즈초' (人別帳)를 통해 알 수 있다.
한편 예수회 역사 연구소의 일본실장 메디나 신부(Luiz de Medina, 1929~1999)는 조선인 기리시탄에 주목하여 한국 교회의 기원 문제를 언급하기도 하였다. 즉 도쿠가와(德川) 정권이 조선과 국교 회복을 교섭하는 단계에서, 왜란 때에 일본으로 강제 납치된 조선인 부로들의 본국 송환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약 30년에 걸쳐 7,000명에 가까운 조선인이 귀국하였는데, 이들 가운데는 기리시탄 쇄환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귀국 후 모국에 아름다운 교회 건물을 짓고, 기리시탄 신앙 생활을 공동 영위했으며, 일본 예수회는 이 교회를 위하여 성직자를 파견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메디나 신부는 왜란 때 전선에서 죽어 가는 어린 생명에게 일본 기리시탄 군사가 베푼 대세(代洗) 문제나, 일본에 생겨난 조선 부로 기리시탄의 존재를 들어, "한국 천주교회의 임란 기원설"을 주장하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400년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근거가 희박한 '전문(傳聞)에 의한 서한 기록' 을 토대로 한 것으로 신빙할 수가 없으며, 또 이러한 사실은 비록 한국인의 신앙 생활과 관련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본 교회사 안의 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나가사키 ; 일본 천주교회사)
※ 참고문헌  崔奭祐, <일본 교회의 한국인 순교자>, 《韓國天主教會史의 探究》 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李修-, 《 日 本の中 明朝鮮人キ リ シ タ ン》, 下關, 1984/ 李元淳, <倭亂과 朝鮮俘虜〉, 《朝鮮時代史論集》, 느티나무사, 1993/ Luiz de Medina, 《遙力 る 高麗》, 近藤 出版社, 1988/ 山口正之, 《朝鮮西教史》, 雄山閣, 1967/ 片岡瑠美子, 《 リ シ タ 2 時代の女子修道會》, 東京, 1976/ 片岡彌吉, 《日本キ リ シ タ ソ殉教史》, 時事通信社, 1982/ Luiz de Medina, On the Origins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동아 연구》, 1989, 서강대학교. [李元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