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예수회 연보 日本耶蘇會年報 [라]Litterae annuae Japoni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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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2~ 1584년의 연보(1586년, 왼쪽)와 일본 관구의 연보(16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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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2~ 1584년의 연보(1586년, 왼쪽)와 일본 관구의 연보(1614년).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가 인가한 예수회는 종래의 수도회에는 없었던 새로운 것을 여러 가지 시도했다. 그중에서도 창설자 이냐시오 (Ignatius de Loyola, 1541~1556)가 시작한, 전 회원에게 장려한 '회원 상호간의 통신 보고 의 제도는 중요하다. 이냐시오는 각지에 흩어져 있던 예수회원이 로마에 있는 본부와 빈번하게 상호 서한을 주고받음으로써 회원 서로를 견고하게 함과 동시에 선교지에 파견된 회원이 선교의 진전 상황을 본부에 상세히 보고하는 것을 기대했다. 이냐시오 자신도 빈번하게 서한을 썼는데, 그 수가 7,000통에 다다른다(이냐시오 자신이 직접 쓴 것은 175통, 나머지는 유능한 비서인 폴랑코의 대필) .
예수회의 회원 상호 편지 왕복의 습관에서 주목할 것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Francisccus de Xaverius, 1506~1552)의 서간이다. 사베리오는 인도 및 동남 아시아 각지, 그리고 일본에서 보낸 것까지 합쳐서 140통의 서한을 로마 본부, 유럽과 아시아에 있는 예수회원에게 보냈다. 그 내용은 사베리오 자신의 선교 체험이며 유럽인의 타문화 체험의 귀중한 자료이기도 했다. 그의 뜨거운 선교 열의는 높이 평가되어, 로마 본부는 이 사베리오 서한을 곧 회원 내에 회람시켰다.
1545년에는 최초의 인쇄본이 파리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편찬되어, 예수회원 이외에도 아시아 선교 사정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 결과 청년들이 선교사에 뜻을 두고 예수회의 문을 두들겼다. 더구나 트리엔트 공의회에 참석했던 교회 지도자들의 사이에서도 사베리오 서한이 많이 읽혀져, 가톨릭 재발흥의 열을 높였다. 일본에 있어서는 사베리오와 함께 일본에 왔던 고스마 토레스 신부와 후안 페르난데스 수사를 비롯해, 일본 선교 초기 멈버인 발타사르 가고 신부, 가스팔 비레라 신부 등이 선교지의 상황을 자세히 계속 전하고 있었다.
아시아와 유럽 간의 왕복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포르투갈의 무역선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항해는 조난의 위험도 많았기 때문에, 보낸 서한이 반드시 전달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서 서한을 보낼 때, 보내는 사람은 여러 장을 써서(3통, 나중에는 4통) 별도로 여기저기에 발송하는 방법을 취했다. 그 결과 유럽의 몇몇 문서실이나 로마 본부의 고문서관에 남아 있는 서한을 보면, 수취인이 다른 동일한 내용의 서한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 선교사는 로마 · 마카오 · 고아 등의 예수회원에게 편지를 많이 보냈다. 고아 · 마카오에서 받은 사람은 자신이 받은 서한이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사본을 한 통 만들어 놓고, 원본은 로마로 보내기도 하였다. 이런 작업의 과정에서 이탈리아어 · 라틴어 · 스페인어 등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그 모든것이 로마 본부로 전송되었기 때문에 한 서한이 다른 언어를 포함해 네 종류나 존재하는 일도 있었다.
이들 서한은 대부분 선교지에서의 성공과 희망에 젖어 있는 내용이 많았지만, 선교지의 상황이 유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많이 출판되었다. 1555년에 포르투갈의 쿠임브라에 출판소가 개설되어 예수회 통신의 인쇄본이 간행되어 나왔다. 이후 유럽 각지에서도 같은 모양의 출판소가 탄생했는데, 이렇게 출판된 서한에는 유럽인 독자들의 편의를 고려했기 때문에 현지 선교사간의 내부 사정이나 일본의 복잡한 상황은 그냥 지나치는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선교사의 완전한 상황을 글로써 그대로 전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예수회 통신의 출판 서한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1598년에 포르투갈의 에부라에서 출판된 두권의 간행본 《예수회원 일화 서간집》(耶蘇會員 華書簡集, Cartas que OS Padres Irmaos daCompanhia de Iesus)이다. 일본 선교 시작 처음 30년 동안은, 통신을 통한 서신 방법은 아직 제도로서는 통일이 되어 있지 않았고,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자유로운 재량에 맡겨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서한 내용은 선교사 각자의 주관적인 입장이 많아지는 경향이 서서히 강하게 나오게 되어, 많은 경우는 선교의 고충과 고난과 실패보다는 성공과 성과를 자랑하는 것 같은 서한이 많이 쓰여지기도 하였다. 천정(天正) 7년(1579)에 일본에 왔던 예수회 순찰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1538~1606)는 유럽이나 인도에서 입수했던 일본 통신의 내용과 실제 자신이 일본에 와서 본 일본 선교 사정이 매우 다르고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래서 선교 보고 통신 제도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개혁에 착수해서, 통신의 서식을 개인 재량에 맡기지 않기로 했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 '일본 연보' 라고 불리는 예수회 선교 보고이다. 발리냐노는 일본에서의 공식 보고는 지구장의 책임하에 작성하도록 명령했다. 일본 각지에 있는 선교사들이 먼저 지구장에게 보고서를 보내면, 지구장은 이것을 로마로 보낸다. 이때 선교 전체를 객관적으로 보고 있는 책임자인 지구장은 각지의 선교사들의 보고서에서 과장된 것이라고 판단되면 확인하여 내용을 수정하고 첨가해서 정확을 기한 후에 로마로 보냈다.
제1의 연보는 일본의 일반 상황을 개략적으로 묘사한 후, 일본에 존재했던 각지의 교회의 상황 및 거기에 관련된 예수회원의 활동 내용으로 되어 있다. 1580년 일본의 선교지를 세 곳의 지구로 개편해 나누었는데, 세 지구에서 보낸 보고서가 그 주된 내용이 되었다. 각 공동체의 회원은 일지를 지구장에게 보내고, 지구장은 그것을 요약해서 준관구장(일본 예수회는 당시 준관구였다)에게 보냈다. 준관구장은 그것에 기반을 두고, 그 해의 연차 보고로써 로마에 제출했다. 일본 연보는 1620년대 말까지 일본에서 보내 온 내용인 것이다. 예를 들면 로드리게스 지람(Joao Rodriguez Giram)은 1609~1610년까지의 연보를 이탈리아어로 1615년에 출판했으며, 세바스티아노 비에이라(Sebastiano Vieira)는 1613~1614년까지의 연보를 이탈리아어로 출판했다.
일본 예수회 연보와 함께 개인적인 서한도 계속 로마에 있는 본부로 보내졌는데, 이때의 개인 서한은, 일본 포교의 책임자가 판단해서 연보에 기재하여 공공연히 알려지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되는 개인적인 사항 및 예수회 내부의 인사나 재정 문제를 취급한 내용이었다. 1581년 일본이 인도 관구로부터 독립해서 준관구가 된 이후 일본 준관구장은 이러한 개인 서한을 직접 로마 총장에게 보냈다. 일본 예수회 연보는 1614년 이후 그리스도교에 대한 금교(禁敎) 정책이 심해지자 일본 그리스도교 교회와 함께 그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 사베리오, 프란치스코 ; 예수회 ; 이나시오, 로콜라의 ; 일본 천주교회사)
※ 참고문헌  F. Lach, Asia in the Making ofEurope,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1965, 1, bk. 1, pp. 314~333/ J.W. O'Malley, The First Jesuits,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3/ J. Rodriguez Giram S.J. Lettera annua del Giappone del 1609~ 1610, Roma, 1615/ S.Vieira S.J. Lettera annua del Giappono dell'ano M.DC. III-M.DC. XIV,Roma, 1617. [全壽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