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천주교회사 日 本天主敎會史 [영)Church History of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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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도착한 사베리오와 그 일행.
아시아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는 섬나라 일본의 천주교회 역사.
일본은 홋카이도(北海道) · 혼슈(本州) · 시코쿠(四國) · 규슈(九州) 등 4개의 큰 섬과 1,000여 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도는 도쿄(東京)이며, 공용어는 일본어이다. 입헌 군주제 국가이며, 중의원과 참의원으로 나뉘는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국회가 정치 기구상 최고 기관이다. 국회는 법률 제정, 예산 의결, 조약 승인 등 정치 운용의 근거가 되는 국가 행위를 담당하며, 양원의 가결로 결정된다. 내각은 국회가 승인한 법률과 예산에 입각하여 정치와 행정을 담당한다. 내각은 국회 의원의 호선에 의해 지명된 내각 총리 대신 및 내각 총리 대신이 임명하는 국무 대신으로 구성되는 합의체이다. 국교는 없지만 일본의 주요 종교는 신도 · 불교 · 그리스도교이며, 대부분의 일본인은 신도와 불교를 믿는다. 일반적으로 일본인은 탄생 · 결혼 의식은 신도 의식으로 행하고, 장례 의식은 불교 의식을 따른다. 면적은 377,835k㎡로 한반도의 약 1.5배이다. 2001년 현재 총 인구는 126,510,000명이다.
: I . 기리시탄 시대
기리시탄(切支丹) 교회사는 1549년 사베리오(Francis-cus Xaverius, 1506~1552)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 때부터, 1858년 이른바 "안세이(安政) 5개 국 조약"의 체결로 개항장에서 거류 외국인들의 그리스도교 신앙 활동이 인정되는 때까지, 300년에 걸쳐 전개된 역사이다. 이 시대는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정권에 의해 발표된 기리시탄 금교령을 중심으로, 수용 · 발전기와 순교 · 잠복기로 나누어진다.
〔수용 · 발전기] 복음의 전래 : 이 시기는 사베리오의 복음 전파부터, 근 1세기 간의 일본 내란 사태가 차차 수습되는 쇼구호 정권(織豊政權, 織田信長과 豊臣秀吉의 집정기)을 거처 도쿠가와 막번 체제(德川 幕藩體制)가 확립되는 때까지 약 1세기 동안이다.
일본 천주교회사는 1549년 8월 15일 규슈의 가고시마(鹿兒島) 상륙한 예수회 소속 선교사 사베리오 신부로 부터 시작된다. 그는 이후 2년 3개월에 걸쳐, 히라도(平戶) · 분고(豊後) · 교토(京都)와 야마구치(山口) 등지에서 활동하며 약 700명의 일본인에게 그리스도 신앙을 심어 주고, 중국 선교를 위해 일본을 떠났다(155. 11). 그의 뒤를 이어 토레스(Cosme deTorres) 신부는 적응주의適適應主義 accommodatio) 노선과 포르투갈 상선의 일본 출입을 선교 활동과 연계 지으며, 봉건 영주인 각지의 다이묘(大名)를 입교시켰고, 교토에 대한 선교를 추진하였다. 18년 간의 그의 사목 기간 동안 약 3만 명이 세례를 받았고, 일본 각지에 40여 개의 교회를 건축하였다. 또한, 알메이다(Almeida) 신부의 도움으로 분고에서 병원, 육아원, 양로원 등을 경영하며 서민 대중에게 접근하였다. 그 뒤를 이은 3대 선교 책임자인 카브랄(F.Cabral) 신부는 1570년 성직자 회의를 개최하여 일본 선교 방침을 확정하는 한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각지의 기리시탄 다이묘의 후원으로 교세를 크게 늘일 수 있었다. 그래서 교회의 수가 150여 개로 늘어났고, 그동안 혼란이 심했던 교토에 남만지(南蠻寺)라고 불리는 성당을 건축하였다. 1580년에는 신자의 수가 약 10만 명으로 늘어났다. 사베리오 이후 30년 만에 이처럼 교회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들의 희생적인 선교 활동의 결과라 할 수 있으나, 당시 일본 국내의 정치적 내란 사태 · 사회적 혼미 등의 조건에 힘입은 바가 컸다.
한편 초기 교회가 전개한 각종의 사회 사업과 천문 · 의학 등의 학문 기여도 교회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최초로 기리시탄 신앙을 받아들인 다이묘는 1563년에 세례를 받은 오무라 스미다다(大村純忠)였다. 그의 뒤를 이어 규슈 각지 다이묘들의 개종이 잇달았으며, 교토 주변에서도 기리시탄 다이묘가 생겨나 교회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지방 제후들은 정치적 이유에서 기리시탄 교회와 손을 잡고 후원하다가도 갑자기 등을 돌리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그래서 각지에서 교회의 부침이 심했고, 선교사와 신자들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한편 교회 발전에 지장이 되는 요인은 선교사측에도 있었다. 1579년 7월에 예수회의 동양 순찰사 발리냐노(A. Vali-gnano, 1538~1606) 신부가 일본에 입국하였다. 그는 세 번이나 일본에 드나들며(1579~1582, 1590~1592, 1598~1603) 일본 교회 발전을 지휘하였다. 그는 뛰어난 정치 · 외교적 수완으로 격동기의 일본 실세자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과 계속 접촉하며 어려운 문제를 풀고 일본 교회 발전책을 추진하였다. 순찰사(巡察使, Visitator) 발리냐노는 일본 선교의 혼선이 유럽 우월 의식을 고수하는 카브랄에게 있음을 확인하고, 그를 출국시켰다. 그리고 후임 책임자로 코엘료(G. Coelho) 신부를 임명하고, 나가사키(長崎) 등 세 곳에서 성직자 회의를 개최하여 일본 교회의 새로운 발전책을 모색했다. 그는 일본을 세 개의 선교구(下, 豊後, 都)로 나누고, 각 선교구에 새로운 책임자를 임명하였다. 또한 수도원과 사제관을 마련하도록 조치하고, 해마다 일본 교회의 공적인 활동 보고인 연보(年報)
를 예수회 본부에 제출하도록 통신제(通信制)를 제도화하였다. 한편 일본인 성직자와 수도자의 교육을 위해 대신학교, 소신학교와 수련원을 설립 · 운영하였고, 선교사들은 반드시 일본어를 배우도록 의무화하였다. 선교 활동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포르투갈 상인과 생사 무역(生絲貿易)에 관한 협정을 맺기도 했다. 그리고 기리시탄 다이묘인 오무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나가사키 일대를 교회령(敎會領)으로 받아들였다. 1582년 일본을 떠날 때, 신생 일본 교회의 존재를 유럽에 알리는 동시에 선교 활동의 도움을 얻고자 유럽으로 파견할 이른바 텐쇼 소년 견구 사절단' (天正少年遣歐使節團)을 이끌고 출국하였다.
1582년 부하의 반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자결한 후, 일본의 지배권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포르투갈과의 무역으로 인한 이익을 얻기 위해 집권 시기에는 기리시탄 교회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교회는 열심한 신앙을 지닌 기리시탄 다이묘 다카야마 우곤(高山右近, 1552~1614)의 협조로 교토 지방 각지의 영주와 무장(武將)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한편 히데요시는 일본 예수회 준관 구장 코엘료 신부에게 선교에 대한 특허장을 내렸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일본 평정 사업이 진전되며 지배권을 강화되자 서서히 교회 활동에 압박을 가하더니, 1587년 7월 모든 서양 성직자는 일본을 떠날 것과 선교 활동을 금지하는 기리시탄 금지령(天正禁令)을 선포하였다. 그 주된 이유는 규수 지방의 기리시탄 다이묘 세력에 대한 정치적 경계와 나가사키 일대를 교회령으로 지배하는 교회에 대한 위험 제거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조선 침략의 야욕을 품고 있었던 히데요시로서는 침략전를 앞두고 국내 통제 강화를 목적으로 한 정치적 대책이기도 했다. 이 무렵 일본의 기리시탄 교회는 신자수 약 20만 명에 선교사는 일본인 수사를 합하여 113명 200여 개의 교회를 갖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금교령으로 예수회는 약간 명의 선교사를 국외로 보내고,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일단 규슈 각지의 기리시탄 다이묘 영지내에 숨어 당분간 선교 활동을 자제하고 후일을 대비하 였다.
한편 긴급한 상황 수습을 위해 동양 순찰사 발리냐노 신부는 일본 방문을 요청하였다. 1598년 "인도 부왕(副王) 사절"이란 명목으로 일본에 입국한 발리냐노는 사망한 일본 예수회 준관구장 후임에 고메스(Gomez) 신부를 임명하고, 성직자 회의를 소집하여 일본 선교 체제 재건을 모색하는 한편, 유럽에서 도입한 활판 인쇄기로 일본 선교에 필요한 교리서를 출판하였다. 각종의 "기리시탄판본"을 발간하였고, 일본 입국 때 같이 귀국한 "텐쇼 소년 견구 사절단"을 이끌고 히데요시를 면담하였다. 그 결과 일부 예수회 성직자들이 일본에 체류하며 선교에 종사할 수 있는 양해를 얻어 내는 성과를 얻은 후 출국하였다. 그가 일본을 떠나가기 전인 1592년 4월, 조선 침락 전쟁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금교령과 박해 : 교황청은 1588년 2월 19일 일본교구(日本敎區)를 설정하였으나, 초대 교구장은 일본에 부임하지 못했고, 1592년에 2대 교구장 마르틴스(P. Martins,+1598) 주교가 일본에 입국하였다. 1593년 6월 필리핀의 2차 사절이었던 작은 형제회 소속 성직자 4명이 일본에 와서 히데요시의 묵인하에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어 다음 해에도 같은 회 여러 명의 회원들이 입국하여 활동에 나섰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에 의해 일본 선교의 독점권을 가지고 있던 예수회는 작은 형제회의 일본 진출에 반발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새로 일본 선교에 나선 작은 형제회의 선교사들이 주로 스페인계였기 때문에, 문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두 나라의 알력으로 번지면서 복잡해졌다. 이즈음, "산 펠리페(San Felipe)호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교토와 오사카 등지에 박해령이 선포되었다. 그로 인해 체포된 작은 형제회 6명의 선교사와 일본인 수사와 신자들이 나가사키로 보내져 처형되었다. 이 당시 순교한 이들 중 26명이 1862년에 시성되었다. 이 박해 이후 마르틴스 주교와 선교사들 대부분이 일본을 떠나게 되어 일본 기리시탄 교회는 새로운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순찰사 발리냐노는 1598년 8월 일본 교구의 새 교구장 세르케이라(L.Cerqueira) 주교와 같이 3차로 일본에 입국했다. 그는 10년 이상 계속되는 박해로 타격을 입은 일본 교회의 재건을 위해 선교 체제를 새로 가다듬는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이후 급변하는 일본 정세에 대응할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1603년까지 계속 일본에 머물었다.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일본의 정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집권 초기에는 이웃 국가와의 수교, 유럽 각국과의 무역 통상의 실리를 고려하여, 당시 약 30만 명의 신자가 있는 기리시탄 교회에 대해서 유화적으로 대하였다. 작은 형제회가 일본에 돌아왔으며, 도미니코회도 일본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에야스도 정권이 강화되자 교회령이던 나가사키를 몰수하여 막부(幕府) 직할지로 바꾸었고(1603), 1610년에 벌어진 "오카모토 다이하치(岡本大八) 사건"을 계기로, 자신 주변의 기리시탄을 색출 · 처형하는 한편, 에도(江戶)의 교회와 수도원을 파괴하였다.-이때에 오타 줄리아가 고즈 섬으로 추방되었다. -1612년에는 "기리시탄 금교령"을 선포하고 에도에서 27명의 신자들을 처형하였다.-이 순교자들 중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 땅으로 강제 납치된 후 기리시탄 신앙을 갖게 된 "하치칸 호안"이란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기리시탄 조선인으로서 최초의 순교자이다. 그 후 박해가 격화됨에 따라 일본 각지에서 순교하는 조선인 기리시탄이 상당수 생겨났으며, 그중에는 일본 교회의 순교 복자(福者)로 시복된 분도 여럿 있다.-1614년에는 "일본 대금교령"이 선포되고 대표적 기리시탄이던 다카야마 우곤 일행과 95명의 선교사가 마카오와 마닐라로 추방되었다. 한편 나가사키 시내의 11개 교회가 모두 파괴되었다. 이때의 추방인들 중에도 조선인 기리시탄과 조선인 박 마리나 수녀가 포함되어 있었고, 나가사키의 조선인 교회가 파괴되었다.
〔순교 · 잠복기] 1614년 이에야스 정권에 의해 금교령이 전국적으로 선포되었을 때의 신자수는 약 35만 명 내외로 알려져 있다. 도쿠가와 3대(家康, 秀忠, 家光)에 걸친 박해로 수만 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생겨났다. 살아남은 신자는 배교하거나, 깊은 산과 외딴 섬에 숨어 나름으로 신앙을 지키는 이른바 "가쿠레 기리시탄”(隱打切支丹)이 되었다. 선교사의 추방령 이후에도 일본에 숨어 선교를 하였던 선교사는 45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종래 선교의 노력이 미치지 못했던 동북 지방이나 동해에 접한 지방에서 비밀리에 활동하였다. 이에야스는 1616년에 사망했으나, 기리시탄 박해 정책은 후임 쇼군(將軍) 치하에서 날로 격화되었다. 그리하여 전국 각지에서 순교자가 계속 생겨났다. 1619년에 교토에서 "갱와 대순교(元和 大殉敎)로 일컬어지는 대규모의 박해가 일어나, 교회는 괴멸 순간에 빠졌다. 이런 위험에도 선교사들은 계속 일본으로 숨어 들어왔다.
이에 3대 쇼군인 이에미쓰(德川家光, 1604~1651)는 박해를 더욱 강화하여 잔악한 방법으로 고문을 가하며, 대량으로 기리시탄을 처형하기에 광분했다. 1632년 이후 이른바 "간에이 쇄국령" (寬永鎖國令)을 발표하여 기리시탄 국가의 일본 출입을 엄금하는 한편,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네덜란드선에 한하여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에 한정하여 출입을 허가하는 조치를 단행하였다(1636) 이무렵 박해자들에 의한 가렴주구도 심하였다. 그로 인해 아마쿠사 섬(天草島)에서 농민 소요가 일어나자, 격심한 박해로 사지에 몰린 시마바라 반도(島原半島)의 기리시탄이 합세하여 "시마바라의 난" 으로 확대되었다. 약 4개월에 걸친 공방전 끝에 시마바라 성이 함락되면서 농성군 약 3만 명이 모두 학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에 미쓰 정권은 이를 계기로 아마쿠사 섬과 시마바라 반도에서는 물론 나가사키 · 오무라(大村)와 분고 등 규슈 각지의 기리시탄을 계속 색출하여 대량으로 처형하였다. 각지에서 수많은 순교자가 생겼고 모든 교회는 파괴되어, 교회는 조직적 활동을 계속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일본 기리시탄 시대는 시마바라의 난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교회의 역사는 이른바 "잠복 기리시탄”(潛伏切支丹)의 역사로 접어들었다. 잠복 초기 교회의 재건을 위해, 새로 순찰사로 임명된 루비노(A. Rubino) 신부를 중심으로 한 성직자들의 일본 밀입국이 있었고(1642), 뒤이어 일본 관구장 마르케스(P. Marquez) 신부를 중심으로한 선교사들이 비밀 입국을 하였다(1643). 또한 1708년에 교황청에서 파견한 시도티(G. Sidotti) 신부가 단신으로 일본에 상륙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무의미한 희생만을 가져왔다. 1643년 일본에 잔류했던 고니시 만쇼와 시키네 마루치노 두 일본인 성직자의 순교 후 일본 교회는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사람의 성직자도 없는 교회가 되었다.
1549년 일본에 복음이 전해진 이후 1630년대 초기까지 80년 동안에 기리시탄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유아 세례자를 포함하여 약 76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五野井隆史, <일본 그리스도교사》, p. 12). 이 동안의 기리시탄 순교자는 2~3만 명으로 추산한다(清水紘-,《 リ シタ ソ禁制史》,p. 214). 쇄국 정책을 강화하면서 도쿠가와 막부는 기리시탄을 전멸시키기 위해 조직적인 대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전국에 잠복한 기리시탄 색출을 전문화하기 위해 중앙에 "슈몬 아라다메야쿠" (宗門改役)란 직분을 신설하고, 기리시탄 고발자에 대한 각종 포상제(訴人褒賞, 公儀褒賞 등)를 실시하였다. 또한, 오인조(五人組)를 활용하여 기리시탄 색출의 연대 책임제를 실시하였다. 1635년에는 "데라우케제"(寺請制)를 시행하여 배교 기리시탄의 신앙 상황을 전국의 사찰이 책임지도록 조치하였으며, 배교한 이들의 신앙 상황을 등록하는 종지인별장(宗盲人別狀 또는 宗門改狀)을 해마다 작성하여 당국에 제출하도록 제도화했다. 한편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을수 없는 색출의 방법인 "후미에" (踏繪, 십자가와 성모상 및 성화등을 밟게 하여 배교를 입증하게 하는 제도)를 강행했다. 일단 배교한 자들에게 신앙을 되찾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서약서(南蠻誓詞 또는 切支丹こ乃グ書物)를 제출하도록 했다.
이처럼 철저한 정책과 색출 제도에도 불구하고 숨어서 기리시탄 신앙을 유지하는 신자들이 있었다. 이들이 이른바 "가쿠레 기리시탄"들이었다. 이들은 금지 정책하에서도 나름대로 신앙을 지켰다. 배교자(こ3~30支丹)의 신분으로 사찰의 감독하에 불교도로 생활하는 처지였으나, 이들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생각하며 관음상에 기도를 올렸고, "바스찬력"이라는 그들 나름의 전례력에 따라 예수 성탄 대축일이나 사순 시기와
부활 대축일, 성인축일 등의 의무를 지켰다. 이런 예절을 주관하는 교회 조직과 지도자들이 있었으며, 세례를 주기도했다. 이들의 신앙은 날이 갈수록 순수한 가톨릭의 신앙에서 멀어졌고, 신 · 불 신앙이나 토속 신앙이 뒤섞여 종교 혼합 현상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 생활은 1865년에 이른바 "기리시탄의 부활"이 있을 때까지 200여 년 간 이어졌다. 그 사이, 때로 그들의 신앙 행위가 발각되어 가혹한 탄압과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이들에게 가해진 박해를 일본 교회사에서는 "구즈레“(崩九)라고 표현하고 있다. "오무라군(大村郡) 구즈레"(1657) "분고(豊後) 구즈레"(1660)와 "노미(濃尾) 구즈레"(1661) 등이 다수의 순교자를 낸 박해였다. 지방에 잠복한 이들의 신앙에 놀란 막부는 배교자(고로비 기리시탄)들의 친족의 신앙 상황까지 조사 기록하는 "기리시탄 별장"(切支丹類別帳)이란 제도를 새로이 실시하였다. 그러나 가쿠레 기리시탄들은 불교신자라고 가장하면서, 도쿠가와 막부 말기까지 오지나 멀리 떨어져 있는 섬에서 대를 이어가며 신앙을 지켰다.
: II . 근 · 현대 교회
근 · 현대 교회사는 일본의 개항 이후 현대까지의 교회사이다. 이 시대는 이전의 교회사와 달리 기리시탄 즉 가톨릭뿐만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트도 포함한다. 1858년 "안정 5개국 수호 통상 조약" (安政五個國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된 다음해에 "미국 감독교회"(성공회)와 "미국 장로교회" 그리고 "미국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일본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7년 후 나가사키에서 이른바 "기리시탄 재발견"이 있은 후 가톨릭의 재복음화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일본 교회사는 편의상 다이쇼(大正) 천황이 사망하고 쇼와(昭和) 천황이 즉위하는 1926년을 중심으로, 그 이전의 메이지 · 다이쇼 통치기를 "근대 교회사"로, 그 이후 현재까지를 "현대 교회사"로 나눌 수있다.
〔근대 교회] 재복음화 : 근대 교회사는 일본의 개국(1854년 神奈川條約과 1858년 수호 통상 조약에 의해 5개 항구의 개항으로 시작되었다. 프로테스탄트 각 교파의 재빠른 일본 선교와 가톨릭의 일본 재복음화으로 일본인의 그리스도 신앙은 새 국면을 맞았다.
일본이 오랜 금교령을 폐지하고 그리스도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한 것은 미국이었다. "함포 외교를 통해 1854년 "가나가와 조약" (神奈川條約)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을 개국(開國)시킨 미국은, 1858년 "미 · 일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일본 내 거류지에서 미국인의 신앙 생활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이 조약의 정신에 따라, 일본은 이어서 체결한 "안정 5개국 수호 통상 조약"에서 개항장 거류지에서 일본인과의 혼합 거주와 신앙의 자유를 외교적으로 보장받았다. 이를 근거로 그리스도교 각 교파의 일본 선교 활동이 시작되었다.
일본에 대한 가톨릭의 재복음화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의해 시작되었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1844년 류큐(琉球)를 시작으로 1859년 일본 본토로 진출하여 요코하마(橫濱)에 선교의 거점을 마련하였다. 1865년에는 나가사키로 진출하여 오무라 성당을 건축하고, 근대 일본 가톨릭 교회의 재건에 힘썼다. 새로 건축한 고딕식 교회를 찾는 구경꾼은 많았다. 그런 가운데 성모 마리아상이 안치되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교회를 찾아온 우라가미(浦上)의 가쿠레 기리시탄과 오무라 성당 주임인 프티장(B. Petitjean) 신부의 극적인 만남이 1865년 3월 17일 이루어졌다. "기리시탄의 발견" , "기리시탄의 부활" 이라고 표현되는 이 일을 계기로, 오랜 세월을 두고 나가사키 주변 지역과 고토(五島) · 아마쿠사(天草) · 히라도(주戶)나 이마무라(今村) 등 각지에 숨어, 나름의 방식으로 신앙을 지켜 오던 "가쿠레 기리시탄"들이 속속 정통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금령하에서 "데라우케제”(寺請制)에 의해 일상 생활을 규제받아 오던 사찰과의 관계를 끊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가톨릭 신앙 실천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박해를 받았다. 그 발단은 장례를 거행하면서 불교식으로 지낼 것을 거부함으로써 야기되었다. 새로운 사태가 우라가미 일대에서 계속 이어지자, 기리시탄 박해 정책을 고수해 온 정부는 금령 정책에 따라 박해를 시작하였다. 그로 인해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선 가쿠레 기리시탄 신자들이 나가사키 주변인 우라가미 일대에서 검거되었으며, 엄중한 조사를 받고 일본 각지로 유형(流刑)을 떠나거나 감옥에 갇혀 생활하게 되었다. 이후 이른바 “구즈레”(崩扎)라는 박해가 재개되었다. 우라가미 지역의 가쿠레 기리시탄에게 가해진 "우라가미 구즈레 "는 네 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세 차례(1790~1795, 1842, 1856)는 일본 개국 이전에 발생한 박해였다. 당시 정부는 그들을 기리시탄이 아니라 이교인(異敎人)으로 취급하여 조용하게 처리하였기에 큰 문제로 확대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1867년 150여 년 간의 금령을 어기고 자신들의 신앙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가쿠레 기리시탄 문제로 발생한 "우라가미 4차 구즈레"는 정부 시책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 행위로 여겨졌다. 그렇기에, 당시의 집권 당사자이던 도쿠가와 막부로서는 강력한 대책을 취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이미 일본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막부가 일방적으로 종래와 같은 기리시탄 대량 학살의 박해를 강행하기에는 어려웠다. 막부는 우라가미 일대를 수색하여 수천 명의 가쿠레 기리시탄을 체포 · 투옥하였다. 가혹한 취조가 진행되었으나, 이들에 대한 최종 방침이 확정되지 못하여 시간이 늦춰지는 가운데, 도쿠가와 정권이 무너지고 "왕정 복고의 새 역사가 개막되었다(1868. 1). 우라가미의 기리시탄 처리 문제는 "메이지 정부"(明治政府)로 인계되었다.
신도 국가주의(神道國家主義)의 정책을 내세워 천황 중심의 절대주의 국가 건설을 추진한 신정부는 구미 열강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에 걸쳐 약 7,000명의 체포자 전원을 전국 각지로 유배형에 처하였다. 이런 정부의 강경 대책에 열강은 강력 항의하는 한편, 때마침 서구 각국의 문물 제도를 시찰하기 위해 메이지 정부가 파견한 이와쿠라 외무경(岩倉外務卿) 중심의 구미 시찰단 일행에게 압력을 가하여 신앙의 자유를 수용하도록 권고하였다. 이 구미 시찰단의 건의로, 1893년 "기리시탄 금제" (切支丹禁制)의 오랜 정책이 철폐되고, 전국 각지로 유배되었던 가톨릭 신자인 기리시탄들이 각기 귀향할 수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지배하에 야기되었으며 "우라가미 4차 구즈레"의 박해를 끝으로, 가톨릭 교회는 일본에서 정부 공인하에 선교 활동을 펄 수 있게 되었다. 1873년의 일본 가톨릭 교회는 15,000여 명의 신자가 있었으며, 그 대다수는 나가사키 지방에서 숨어 살던 이른바 "부활 기리시탄"(復活切支丹)이었다. 프로테스탄트의 선교 : 일본 근대 교회는 기리시탄의 독점 시대가 아니고, 프로테스탄트와 공존하는 시대였다. 일본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선교는 "미국 외국 전도 협회" 산하의 각 교파가 협력하여 일본 선교에 나섬으로 시작되었다. 1858년에 "미국 감독교회" 와 "미국 장로교회" 그리고 "미국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의 일본 선교가 시작되었고, 다음해에 "미국 침례교회가 진출했다.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일본인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생겨났고, 일본인 교역자도 생겨났다. 일본인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1865년의 "야노" (矢野)라는 성을 가진 의사로 알려져 있다. 1874년부터 신약성서의 일본어 번역이 시작되어 1879년에 완성됨으로써, 선교 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었고 각지에 교회가 건축되었다. 초기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요코하마, 효고(兵庫), 하코다테(函館), 나가사키 등 개항장 및 외국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생겨났고, 차차 도쿄(東京), 오사카(大阪)나 지방 옛 영주들의 거점이었던 중 · 소도시로 확대되었다. 일본 프로테스탄트의 초기 일본인 지도자들은 사족층(士族層)에 속하는 지식인들이 대부분이었다. 프로테스탄트의 일본 선교는 에도 막부 시대의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뿌리 깊은 부정적 사교 의식(邪敎意識)과 전통적인 박해 정책, 그리고 농촌 사회에 강인한 뿌리를 두고 있는 불교 세력과 오랜 시대에 걸쳐 지켜 온 촌락 공동체 유대의 전통 등으로 도시 지역을 제외한 농촌 지역으로의 선교는 좀처럼 신장되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은 일본인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사종관(邪宗觀)을 불식하기 위하여, 가톨릭 교회와 다름을 강조하고, 때로는 비방도 하면서 스스로 예수교(耶蘇敎)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천주교와 구별 지었다. 1880년대에 선교사와 일본인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의 농촌 선교 활동이 활발 해지면서 점차 농촌으로 그 세력이 뻗어 나갔다. 1877년 장로교계 각파가 연합하여 "일본 기독 일치 교회”(日本基督一致敎會, 후에 日本基督教會로 개칭)를 결성하고, 일본인 전도사와 교역자 양성을 강화하며 일본인 중심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한편 미국에서 시작된 "교파 교회" (敎派敎會)에 구애 받지 않은 "조합 교회 운동"(組合敎會運動)이 1874년부터 시작되었으며, 교세 신장이 빨라 1890년에는 일치 교회의 교세를 능가하였다. 그 밖에도 청교도적 경건을 강조하는 "침례교"가 1859년 미국에서 진출했다. 일찍이 일본 선교에 나섰던 성공회는 1881년 "일본 성공회"(日本聖公會)를 결성하고, 일본에 있어서의 자치 · 자급 · 자주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 프로테스탄트의 신자수는 1886년에 14,263 명이었다고 한다.
국가와의 갈등 : 1889년 "대일본 제국 헌법" (大日本帝國憲法)이 제정 · 선포되었고, 다음해에 "교육칙어"(敎育勅語)를 발포하면서 천황 중심의 절대주의 국가 체제 확립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근대 일본은 헌법에서 "신앙의 자유" 를 확정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국 신민으로의 충성과 의무를 다할 때의 자유의 보장이었지,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아니었다. 오히려 신격화(神格(k)한 천황을 국민 도덕과 교육 기본을 지
표로 설정하는 교육칙어를 내세워,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그리스도적 애덕"의 실천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하여 제도적인 압박을 가하였다.
그리스도교와 천황제의 갈등은 1891년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의 이른바 "불경 사건" (不敬事件)으로 표출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리스도교를 일본 국체에 반대하는 종교로 여론을 조작하고, 국수 단체를 앞세워 그리스도교 신앙을 비방하는 한편, 그리스도 교회를 천황 절대화의 틀 속에 넣고자 각종 시책을 취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교육을 학교에서 실시하지 못하는 법적조치를 취하였고, 재학중의 징병 유예 제도를 통해 그리스도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압박을 가하였다. 1890년대에는 조여드는 국가주의 정책에 그리스도교가 부득이 영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편 일본 정부의 압력과 교회 내의 민족주의적인 책동으로 "그리스도교의 일본화" , 즉 일본적 그리스도교로의 변화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일부에서 일어났다. 이런 경향은 당시 "자유주의 신학"의 흐름을 도입하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신앙 활동에 큰 혼선을 자아냈다. 종래의 복음주의적 정통파 교회와의 사이에 혼란이 조성되어, 결과적으로 많은 지식층 신자들을 잃었다. 1894년의 청일 전쟁은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의 서막을 여는 전쟁이었다. 그보다 10년 후의 러일 전쟁은 일본 제국의 동아시아 침략의 기반이 조성되는 전쟁이었다. 이 두 차례의 전쟁을 일본 그리스도교는 정의로운 전쟁(義戰)으로 규정하고, 여러 형태로 전쟁에 협력하였으며 전승을 축원하였다. 한편 "그리스도교의 일본화 운동"이 교회 내에서 적극 추진되었다. "일본 기독교회"는 1905년 외국 선교회와의 협력 관계를 끊고 독립한 그리스도 교단으로 활동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1907년에 감리교 3개 파가 연합하여 일본인이 주도하는 "일본 감리교회"를 선포하였다. 1911년에는 일본 프로테스탄트 8개 교파가 "일본기독교 연맹"(日本基督教連盟)을 조직하여 일본인이 주도하는 선교 체제를 보다 강화하고, 그리스도교의 일본화를 시도하였다. 정부는 이 기세를 이용하여 신도 · 불교 그리고 가톨릭을 포함한 그리스도교 "3파 회의"를 소집하여 "황도를 부익하고 더욱더 국민 도덕의 진흥을 도모한다"는 결의를 이끌어 냈다. 이는 일본 내 모든 종교가 대등하게 인정을 받은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3개 교가 국가 제사를 주도하는 국가 신도(國家神道)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는 뒷날 신사 참배가 문제되었을 때, 커다란 저항 없이 이를 수용하게 되는 일본 그리스도교의 취약성을 드러낸 전조적 조치였다. 1912년 이후 다이쇼(大正) 천황 치하의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통해 프로테스탄트 각 교파는 협동 선교 체제를 강화하고, "전국 협동 전도" 운동을 일으켜 교세를 신장시켰다. 1912년 79,000명의 신자는 1920년에 164,000명으로 증가하였다.
교회의 발전 : 가톨릭도 메이지 정부의 "천황 절대 체제" 강화 정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개교회주의(個敎會主義)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와는 달리 세계적 보편 교회의 일부라는 특성을 살리면서 근대 교회로의 발전을 추구하였다. 근대 일본 교회의 장래를 염두에 둔 교황청은 일본 대목구를 설정하고, 그 사목 책임을 파리 외국 전교회에 맡긴 것이 일본의 개항 전인 1846년이었다. 그로부터 30년 후 일본대목구는 "북일본 대목구"(동경)와 "남일본 대목구”(長崎)로 분리되었으며, 1888년 남일본 대목구는 그 동안의 발전으로 다시 "중부 대목구”(大阪)와 "남부 대목구"(長崎)로 분리되었다. 다음해에 제국 헌법의 신앙 자유의 규정에 따라 일본 가톨릭 교회는 "묵인받는 교회" 에서 "공인된 교회"가 되었다. 1891년 교계 제도가 설정되어 한 개의 대교구와 3개의 교구로 분할되었다(東京大教區, 函館 · 大阪 · 長崎의 교구). 그런데 1904년 이후 지목구(知牧區)가 계속 생기면서 새로운 전교회들이 일본에 진출하여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에 설립된 시코쿠(四國) 지목구는 도미니코회가, 1912년 나가사키(長崎) 교구는 신언회(神言會)에게, 1915년 삿포로(札幌) 지목구는 작은 형제회, 1922년 나고야(名古屋) 지목구는 신언회, 1923년 히로시마(廣島) 지목구는 예수회가 담당하게 되었다. 박해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고 일본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예수회가 250여 년 만에 다시 일본에 진출 한 것은 190년 만의 일이었다. 예수회는 1927년 조치 대학(上智大學)을 설립하여 일본에서 고등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에 최초로 여자 수도회가 진출한 것은 1872년이었고, 최초로 남자 수도회가 진출한 것은 1883년의 일이었다. 일본의 정치적 성장, 일본 교회의 발전이 일정 궤도에 올라섬에 따라 교황청은 1919년에 "주일본 교황 사절"을 상주시키는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이와 같은 제도적 발전과는 달리, 일본 가톨릭의 선교가 급신장한 것은 아니었다. 1880년 23,00여 명의 신자가 일본에 있었으나, 다섯 교구가 생겨난 1905년에는 58,000여 명이었으며, 쇼와 천왕이 즉위하는 1926년에는 67,000여명의 신자가 있었다. 결국, 약 45년 간에 45,000여 명의 신자이 늘어났을 뿐이었다.
〔현대 교회] 신사 참배 : 일본의 현대 교회사는 1926년 쇼와 시대(昭和時代)의 시작과 함께 개막된다. 20세기 말까지 약 75년 간의 일본 현대사는 1945년의 일본 제국 패전을 사이에 두고 제2차 세계대전 전과 후로 나누어진다. 전기는 일본 제국주의의 끝없는 야망으로 전쟁이 이어진 시기였다. 군국주의 파시즘의 횡포와 확대된 침략 전쟁을 위한 전시 체제의 강화와 국민 사상 통제를 위해, 외래 종교이며 외국인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그리스도교는 여러 형태로 압박을 받았다. 1931년 일본 군부의 망동으로 인한 만주 사변(滿洲事變) 이후 발생한 조치(上智) 대학생의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 참배 거부 사건이나, 1933년 엠미오시마(奄美大島)에서의 외국인 신부 추방 사건 등은 군부가 직접 주도한 가톨릭 탄압이었다. 이후 행정력을 동원한 탄압과 박해가 전쟁의 확대와 함께 강도 높게 가해진다. 그동안 여러 해를 두고 강제로 이어져 온 신사 참배 문제는 유일신 종교에 대한 신앙적 변절과 사상적 굴복을 강요하는 폭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배는 애국심과 충성의 표현일 뿐이라는 일본 정부의 발표를 근거로, 주일 교황 사절이 신사 참배를 인정한 일은 역사적 과오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조치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폭거에 대한 사목적 측면에서의 야합 조치일 뿐이었다.
전쟁 중의 교회 : 1937년 일본 제국은 "중일 전쟁"을 도발하여 중국 본토로 침략전을 확대하였다. 일제는 "국가 총동원법"을 발동하여 적극적 자세로 전쟁에 협력할 것을 그리스도 교회에 공개적으로 압력을 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1939년에는 "종교 단체법"을 제정하여 교단인가 조건을 강화하고, 외국 선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34개 교파를 통합하여 "일본 기독교단"을 창설하고, 이에 불참한 성공회에 박해를 가하였다. 한편 가톨릭 교회를 "일본 천주공교 교단"(日本天主公敎敎團)으로 인가하고, 도이 다스오(土井辰雄) 동경 대주교가 일본 가톨릭 교회를 통괄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도발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신도 · 불교 · 그리스도교의 삼교 통합을 단행하여 "대일본 종교 보국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문부 대신 니노미야 육군 중장을 임명함으로써 종교계는 완전히 군부 통제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그리스도교를 적성 종교로 몰아 서양 성직자를 체포 · 추방하거나 거주지 제한 조치를 취하여 교회 일을 못하도록 조치했다. 일본군이 가톨릭 신자가 많은 프랑스 인도차이나를 지배하게 되자, 일본 천주교 공단에게 사제와 신자를 파견하여 전쟁 수행에 참여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기간에 불경죄나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박해받은 그리스도계 인물이 상당수였고, 200여 곳의 교회가 폐쇄되었다.
계속 극심해지는 갖가지 압박에 가톨릭 교회도 부득이 일제의 국책에 영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장차의 발전을 위해 사목 체제를 가다듬었다. 1923년 당시까지 해외로 파견하던 일본인 신학생을 일본 국내에서 육성하기 위하여 동경 신학교를 설립했으며, 1927년 후쿠오카 교구. 가고시마 지목구를 신설하고, 나가사키 교구에 처음으로 일본인 주교를 임명하였다(早坂久之助 주교). 1937년 동경 대교구장에 파리 외방전교회 대주교가 아닌 일본인이 임명되었다(土井辰雄대주교). 한편 미야자키(宮崎, 1929), 가라후토(樺太,1933), 교토(京都, 1937)와 우라와(浦和, 1939) 등의 지목구가 설립되었다. 또한 일본 교회의 사목권이 파리 외방 전교회 독점 체제에서 외국 선교회와의 공동 사목, 다시 일본인 중심 사목 체제로 이행되었다. 이러한 조직상의 발전은 현저하였으나, 전시하의 통제와 탄압, 그리고 일본 특유의 종교 생활 풍토로 교세의 신장은 여의치 않았다. 1936년 96,000여 명의 신자가 1940년에 119,000여 명으로 증가하였으나, 태평양 전쟁기에는 교세가 위축되어 1946년의 교세는 108,000여 명이었다.
전쟁 후 교회의 활동 :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은 일본 교회사에도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일이었다. 천황 절대주의 체제, 군부의 전횡과 신도의 횡포에서 그리스도교는 해방될 수 있었다. 언론 · 종교 · 사상의 자유를 확고하게 다지려는 점령군의 정책과 자유 민주의 압력으로 1947년에 제정된 일본의 신헌법에는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규정되었다. 결국 연합군의 승리로 과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성직자 추방령(伴天連追放令) 이후 360년 만에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신앙의 자유, 정교 분리의 원칙 확정과 점령군의 정신적 · 물질적 후원을 얻으며 일본 그리스도교는 군국주의의 횡포로 묶였던 하나의 교단 조직을 해체하였다. 이후 성공회, 구세군, 동양 복음 선교회, 침례교 연맹, 루터파 교회 등의 교단 조직으로 재편되었다. 1950년부터 농촌 전도 · 개척 전도 · 지역 전도 · 방문 전도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패전 후 1950년까지 20만 명 정도이던 프로테스탄트의 교세는 1955년에 376,000여 명, 30년 뒤인 1985년에는 61만 명을 돌파하였다. 전후 40년 만에 신자수가 3배로 늘어난 것이다.
가톨릭 교회도 전쟁 종결 후 곧 "천주공교 교단"을 해체하고, 제1차 주교단 회의를 통해 "교구 연맹"(敎區連盟)을 조직했다. 한편 전시에 일본을 떠났던 서양인 성직자들을 다시 맞아들이며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였다. 그래서 교회 재건에 나서는 한편, 연합국 교회의 후원을 받으며 선교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또한 교육 사업 ,출판 문화 사업에 힘써 가톨릭을 홍보하는 한편, 각종의 사회 사업을 다양하게 전개하며 그리스도적 사랑 실천에 나섰다.
: Ⅲ . 일본 가톨릭 교회의 현황
현대 일본의 가톨릭 교회는 3개의 대교구(東京, 大阪,長崎)와 13개의 교구(札幌, 仙台, 新瀉, 名古屋, 浦和, 橫濱,京都, 廣島, 高松, 福岡, 大分, 鹿兒島, 那覇敎區), 1개의 지목구로 나누어져 있으며, 본당은 873개가 있다. 추기경 1,대주교 4, 주교 18, 신부 1,871(교구 소속 586, 수도회 소속 1,285), 종신 부제 6명이 있다. 일본 교회의 성직자는 교구 소속보다 선교회나 수도회 소속의 성직자가 약 2배나 많은 점이 특이하다. 2001년도의 신자 총수는 500,000명으로, 일본의 총인구 대비 0.39%이다. 신자수가 5만 이상인 교구는 세 개의 대교구이고, 그 외 교구의 신자수는 모두 4만 미만이다. 그중에서도 교구의 신자수 1만 명 미만의 교구가 6개나 된다. 일본 국내에는 이 밖에 유학이나 연수, 또는 외교관이나 상사원과 연구자 등 체류자와 많은 외국인 노동자 등의 가톨릭 신자가 많다(그 총수가 41만 명 이상으로 보도되고 있다). 일본 교회는 46개의 선교회, 비선교 수도회가 193개의 남자 수도원과 725개의 여자 수도원이 있는데, 수도원의 수가 전국의 본당 수보다 많은 점도 특이하다. 일본 교회의 수도자 총수는 6,814명(수사 262, 수녀 6,552)이다.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대신학교 두 곳과 교구와 수도회가 경영하는 소신학교가 7개 교에서 성직자 양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신자수에 비하여 일본 가톨릭의 문화 사업은 매우 활발하다. 유치원560, 소학교 54, 중학교 98, 고등학교 113, 단과 대학27, 대학교가 18개 교나 된다. 그 밖의 고등 전문학교와 전수 학교 등의 각종 학교와 특수 교육 학교까지 합하면 그 총수가 890개 교나 될 정도로 활발하다. 25개의 종합 병원, 8개의 진료소, 4개의 노인 시설을 통한 의료 사업과 129개의 보육소, 109개의 아동 복지 사업 시설과 67개의 노인 홈과 108개의 노인 복지 사업 시설을 통한 사회 복지 사업도 활발하다. 가톨릭 센터나 가톨릭 회관이 70개나 되고, 교회 기관이 운영하는 기숙사가 25곳으로 파악되고 있다. 500년에 걸친 일본의 그리스도 교회사에 비추어 볼 때, 현대 일본의 교세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회 사업 활동을 통해 일본 사회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교회 지도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1930~1940년대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해 교회가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사과하였고 용서를 청했다. 1998년에 개최된 주교 대의원 회의 아시아 특별 총회에 참석한 일본 주교들은, 교회가 너무 서구 지향적이기에 아시아 교회의 발전이 더디다고 비판하였다. 2001년 3월 교황청 정기 방문을 한 일본 주교들에게 교황은, 물질적 풍요와 소비 중심적인 풍조가 만연함에 따라 영성적 불안이 증가하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교회는 궁극적인 대답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교황은 이 문제들의 해결을 통해 "교회의 전체적인 신비적이고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전통과 조화를 이루며 예수가 '아시아인과 만날 수 있도록' 대처해야 한다" 고 언급하였다. 나아가 주교들의 사목 활동의 목적은 신앙인들과 일본인들 사이의 믿음과 신뢰를 증가시키는 것임을 기억하라고 요청하면서, 교회 공동체는 "기도의 학교이며 복음이 샘솟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일본 주교들은 20세기 말, 다가오는 21세기에는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와 환경과 상호 대화에 초점을 맞추어 일본 교회를 발전시키는 방안을 찾기로 하였다. 외래 종교가 선교하기 힘든 일본 사회이기는 하지만, 앞으로 더욱 충실하게 발전하며 일본 사회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 일본 ; → 나가사키 ; 다카야마 우곤 ; 류큐 교회 ; 무교회주의 ; 발리냐노, 알레산드로 ; 빌렐라,가스파르 ; 빌리옹, 아마투스 ; 사베리오, 프란치스코 ;신도 ; 신사 참배 ; 파리 외방전교회 ; 한국)
※ 참고문헌 海老澤有道, 《 日本キ リ シ タ {>} 史》, 塙書房, 1966/ 五野井隆史, 日本日キ リ ㅈ 卜敎史》, 吉川弘文館, 1990/ 片岡彌吉, 《 日 本キ リ シ タ ソ 殉教史》, 時事通信社, 1982/ 清水紘一 ## リ シ タ ソ禁制史》, 教育社, 1981/ 片岡彌吉, 《浦上四番崩れ》, 筑摩書房, 1963/ \t 卜~ 7》, 力 卜 リ ソ 7 中央協議會 《カ 卜 リ ソ 7 教會教勢 2000年度》,力 卜 リ ソ 7 中央協議會, 2001. 6. [李元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