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 본당

林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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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주교좌 본당. 광주 광역시 북구 임동 5-11소재. 1967년 1월 1일 북동(北洞) 본당에서 분리 · 설정되었으며, 주보는 안셀모. 관할 구역은 임동, 신안동, 유동, 양1동, 양3동. [교 세] 1967년 1,510명, 1971년 1,127명, 1975년 1,521명, 1980년 1,947명, 1985년 3,966명, 1990년 5,718명, 1995년 5,776명, 2000년 4,522명. [역대 신부] 초대 브랜던(P. Brandon, 부) 파트리치오(1966. 12~1968. 11), 2대 캐롤런(C. Carolan, 차) 가롤로(1968. 11~1969. 10), 3대 브랜던(1969. 10~1974. 4), 4대 카(P. Carr) 프란치스코(1974. 4~1977. 3), 5대 이천수(李淺水) 라자로(1977. 3~1981. 8), 6대 박상수(朴常洙)고스마(1981. 8~1985. 6), 7대 장용복(張容福) 미카엘(1985. 6~1990. 1), 8대 정규완(鄭圭完) 토마스 아퀴나스(1990. 1~1995. 2), 9대 김충호(金忠鎬) 미카엘(1995.2~2000. 1), 10대 손대철(孫大徵) 안드레아(2000. 1~2001.1), 11대 신동술(申東述) 라이문도(2001. 1~현재).
1960년대에 광주의 외곽 지역이었던 임동, 양동(良洞), 유동(柳洞), 신용동(新龍洞, 현 신안동 · 용봉동 포함)은 주로 논과 밭이었으나 도시 성장의 추세로 보아 지리적인 발전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북동 주임 모란(T.Moran, 안) 신부는 이 지역에 많은 관심을 가져 매일 전교 활동을 하는 등 교세 확장에 노력하였다. 1964년 북동 본당은 본당의 신자수가 3,000여 명을 헤아리게 되자 계림동(鷄林洞) 본당과 월산동(月山洞) 본당을 분리시켰는데, 임동 지역도 신자수의 증가와 지역적인 발전 가능성으로 보아 성당 건립이 절실하였다. 1966년 3월 미국의 안셀모라는 신자의 도움으로 성 요한 병원 부근의 약 3,000여 평의 대지를 마련함으로써 임동 성당의 건립이 가능해졌다. 이후 교구적인 차원의 관심 속에서 본당 건립이 진행되었는데, 교적이 분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부족한 상태였으나, 적지 않은 신자들의 호응으로 공사를 착수할 수 있었다. 월산동 주임 브랜던 신부가 광주대교구장 헨리(H. Henry,玄海) 대주교의 지시로 현장 감독을 맡았으며, 임동 본당은 임동 지역 887명의 신자와 광천동(光川洞) 공소신자 343명, 비아(飛雅) 공소 신자 232명의 교적을 이관받았다. 성당 건립을 감독하던 브랜던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된 후 성당 내부의 비품이 마련되고 성모상이 건립되었으며, 본당 설립에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안셀모 신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 본당 주보를 안셀모로 정하였다. 1967년 2월 주님 봉헌 축일에 첫 미사가 봉헌되었으며, 4월 본당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같은 해신자들의 활발한 활동과 본당의 문제 해결 등을 적극적으로 주도해 나갈 명도회와 부인회가 결성되었고, 교리실을 가톨릭 센터에서 운영하던 성심고등공민학교 장소로 사용하게 하는 등 교육 사목에 적극 협조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지역이 발전하여 신자수가 증가되어 감에 따라 본당 공소였던 광천동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어 800명의 신자를 이관하였다. 1970년 3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중학 과정 교육을 시킴과 동시에 가톨릭 정신을 심어 주자는 뜻에서 성심실업중학교가 설립되었다. 4대 주임으로 부임한 카신부는 항상 강론에 "말로 하지 말고 실천을 하십시오. 기계적으로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 주십시오"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본당 분위기를 활기차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임에 따라 신자수는 점차 증가되었고 예비 신자 교육이 더욱 활기를 띠었다. 5대 주임 이천수 신부는 1977년을 교회 재정 자립을 위한 기초 작업의 해로 정하고 생활 실태를 소상히 파악한 후 교무금을 책정함으로써 교무금에 대한 신자들의 인식을 혁신시켰다. 1977년 6월 연도회 · 임우회 · 성심회가 창립되었고, 10월 까리따스 수녀회 소속 수녀들이 파견되어 본당 사목과 전교 활동이 한층 수월해졌다. 1978년 1월 유치원이 설립되었으며, 6월 본당 주보인 <숲고을>이 발행되기 시작하였다. 1977년 5월 정결하신 어머니 쁘레시디움을 시작으로 1981년 9월까지 6개의 쁘레시디움이 설립되었으며, 1979년 10월 서광 신용 협동 조합이 설립되어 현재까지 신자들의 경제적 지위 향상과 지역 사회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당시 주교좌 본당이던 북동 본당의 건물이 노후되고, 그 동안 증가된 많은 신자와 단체들의 활동으로 인해 너무 협소하게 되었다. 이에 광주대교구에서는 1979년 7월 8일 대성당 건립 추진 검토 위원회의 첫 회합을 가진 후 임동 본당 부지 내에 대성당을 건립하기로 확정 ·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980년 12월 15일 헨리 대주교 기념 주교좌 대성당의 기공식이 거행되었으며, 1983년 9월 28일 윤공희(尹恭熙, 빅토리노) 대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6대 주임 박상수 신부의 사목 시기에는 신자들의 일치와 단결, 본당의 성화와 발전을 꾀하는 한편, 빈천시오회와 사도들의 모후를 비롯한 11개의 쁘레시디움이 설립되었고, 성소 후원회 · 요셉회 · 로사회 등 5개의 신심 단체가 발족되었다. 그리고 대성당의 건립이 끝난 후 사무실 위의 공간에 소성당을 건립하였으며, 1984년 7월 15일 본당 신자를 위한 묘지축성식이 거행되었다. 7대 주임 장용복 신부 재임시에는 대성당 외장 공사가 실질적으로 마무리되었지만, 내부의 미흡한 부분과 주변 조경 사업 및 단장에 진력하여 1985년 초 대성당과 소성당 사이를 돔으로 잇고 성당 입구를 앞쪽으로 옮겨 100평을 넓히고 성당 앞 계단을 단장하였다. 1987년도에 들어서면서 교무금을 자율적으로 책정하게 하였으며, 대성당 2층 소성당 옆에 성체 현시 방을 만들었고, 10월 28일 성모 동굴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8대 주임인 정규완 신부는 부임 후 신자들의 성화와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였는데 특히 노인 사목과 아동 사목에 심혈을 기울였다. 1990년 8월 대성당 보수 공사를 하였으며, 9월 14일 레지오 쁘레시디움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 구역별로 레지오를 재편성하였다. 1992년 1년 동안 생명 운동 생활화 도표를 작성 · 배포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생활 실천으로 모범을 보이도록 하였고, 같은 해 7월 3일 생명 보전 운동 본당 실천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94년 3월 20일 사제관과 수녀원 별관 기공식을 거행한 후 1955년 1월 29일 준공하여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1995년 8월 성모 동굴을 대성당 옆으로 이전한 데 이어 2000년 1월 대희년 성지 순례 성당으로 지정받았고, 8월 용봉동 본당을 분리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 광주대교구청과 임동 본당 사이의 담장을 허물어 진입로를 내어 하나로 이어지는 공간을 만들었으며, 2002년 1월 레지오 회합실을 개조하여 성체 조배방을 마련하였다. (→ 광주대교구 ; 북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가톨릭신문>/ 천주교 광주대교구,《광주대교구 50년사》, 1990/ 천주교 광주대교구 임동 교회, 《임 동 본525년사》, 1992. [白秉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