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 수단(자본)을 개인(자본가)이 소유하고, 그 개인이 소유한 생산 수단을 자유롭게 활용하여 생산 활동을 하며, 이윤을 목표로 생산 활동을 해 나아가도록 경제를 운영하는 방식. 봉건 제도의 붕괴 이후 서양에서 등장한 지배적인 경제 체제로, 사유 재산, 자유 기업 및 이윤 동기가 자본주의 체제의 주요 특징이다. 자유 시장 경제, 자유 기업 경제라고도 한다.
[의 미]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는 임금 제도를 통해 유지되어 왔다. 이 제도에 따라 노동자들이 다른 사람의 재산(자본)과 자신의 노동력과 기술을 활용해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한다. 이러한 활동의 생산물은 재산의소유자에 의해 판매되고, 재산의 소유자는 노동자들이 기여한 몫에 대해 임금을 지불하고 일부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몫, 즉 자신의 재산을 사용한 데 대한 몫으로 보유한다.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 철학은 자유주의(개인주의) )이다. 즉 인간은 이기심에 의해 활동하므로 각 개인은 자기의 이익을 가장 크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각 개인이 스스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의 안 보이는 손' (invisible hand) 즉 시장에 의해 사회 전체의 이익도 가장 커지게 된다.
자유주의는 경제적으로는 시장을 통한 무제한적인 자유 경쟁으로 나타나고, 정치적으로는 재산권을 보호할 때를 제외하고는 국가가 경제 생활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제한적인 경쟁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최선을 다해 일하도록 하여 마침내 제일 좋은 상품을 제일 싼값으로 생산하게 한다. 그리하여 최대 생산과 최적 분배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 체제가 커다란 성공을 거둔 것은 사실이다. 시장과 경쟁은 고유한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자유 경쟁을 통해 기술을 개발하여 현대 경제의 기반과 현대 문명의 구조를 발전시켜 왔다. 예컨대 인간의 평균 수명이 35세에서 70세로 연장되었으며, 저소득층을 포함해 모든 이의 생활 수준이 괄목할 만하게 향상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는 매우 위험스러운 사회 불안을 가져오고 사회 문제를 야기시킨 것 또한 사실이다. 아무런 재산도 소유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초기에는 노동 조합을 통해 결속하지도 못한 노동자들은 재산이 아니라 오직 노동력만을 가지고 자유 경쟁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부의 생산이 이루어지는 뒤안길에는 노동자들의 엄청난 빈곤이 쌓여 가고 있었다. 경제 성장은 무산자들의 사회적 퇴보를 대가로 치르면서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이에 교회는 자본주의의 사회적 해악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여 왔다.
[자본주의에 대한 교회의 비판] 교회는 1891년 교황 레오 13세(1878~1903)가 <노동 헌장>으로도 불리는 사회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를 발표하여 자본주의 체제의 여러 가지 폐해를 비판하고 노동자들의 임금을 비롯한 여러 가지 노동 조건의 개선 방향을 제시한 이래 자본주의의 개혁을 위한 반성의 원리, 판단 기준 및 행동 지침을 제시해 왔다.
자본주의 체제의 주요 특징적 요소들은 교회의 사회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교회는 사유 재산과 자유 기업을 옹호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 제도의 사회적 의무가 지켜져야 한다는 전제가 항상 뒤따른다. 이윤을 추구하거나 저축하는 자금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 또한 결코 부도덕한 일은 아니다. 교회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그 자체로 단죄하지 않는다. 교황 비오 11세(1922~1939)는 "확실히 그 경제 체제는 그 본질상 사악한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자본가가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노동자의 인간 존엄성, 경제 생활의 사회적 성격, 사회 정의와 공동선을 조금도 돌보지 않고 기업과 경제 활동을 전적으로 자신의 임의에 따라 이득이 되는 쪽으로 운영한다면 이는 중대한 남용이다"(<사십주년> 40항) 교회는 자본주의 체제를 본질적으로 그릇된 것이라고 배격하지 않으면서도 바른 질서를 침해하는 남용을 부단히 비판해 왔다. 이를 위해 교회는 특히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 철학인 자유주의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 첫째, 자유주의는 사회 경제 생활의 궁극 목표를 최대의 물질적 복지에 두고 이를 위해 끊임없는 생산 증대를 추구한다. 하지만 생산이 아무리 증대되더라도 재화가 균등하게 분배되어야만 복지가 증대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에 자유주의는 생산에 참가하는 모든 이가 자기가 노력해서 이룩한 만큼의 몫을 차지한다고 전제하므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더욱이 자유주의는 가치 체계를 전도시킨다. 사실 경제적 번영은 인간적 공동선과 동의어가 아니다. 물론 경제적 번영이 인간적 공동선에서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인간적 가치 체계에 통합되어 인간을 위한 사회 공동선에 기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망각함으로써 자유주의 경제는 물질주의의 길을 열어 놓게 되었다.
교황의 사회 회칙들은 사회 경제 생활의 이러한 목적을 거듭 강조하였다. 이 중 한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다양한 경제 활동은 서로 간에 상호 부조와 봉사를 제공하는 말하자면 하나의 유기체로 결합되고, 한 공동체를 이루는 부분이 된다. 자연 자원, 기술 성취, 경제 분야의 사회적 조직이 줄 수 있는 모든 재화가 모든 사람에게 보장될 때라야, 경제 사회 체제는 건전하게 수립되고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될 것이다. 이 재화는 정직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충족시키기에 그리고 신중하게 이용하기만 한다면 덕을 쌓는 데 방해가 아니라 도움이 되는 더 높은 수준의 번영과 문화 생활로 인간을 향상시키기에 충분하여야 한다" (34항).
둘째, 자유주의는 경제 활동의 동기로 개인의 이익 추구만을 내세운다. 개인의 이익을 전부 합하면 사회 전체의 이익이 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이익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지 제일 잘 아는 것은 각 개인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에서는 전체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는 길밖에 없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교회의 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교회도 노동이 경제 성장에 대한 자극 요인이며, 개인 이익의 정당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윤은 공동선과 정의의규범보다 부차적인 것이다. 이윤은 공동체에 봉사한 대가로서, 그것도 정당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얻어졌을 때 비로소 정당한 것이다. 경제 활동은 모든 인간 활동의목적을 벗어나면 안 된다. 즉 지상의 이익을 추구함에 있어서 인간은 초자연적 이익을 망각하면 안 되는 것이다.
셋째, 자유주의는 경제 생활의 조건으로 완전한 자유를 강조한다. 왜냐하면 이 조건이 충족되어야 개인의 이익과 사회 전체의 이익이 조화를 이룰 수 있고, 경제 법칙이 아무런 강요도 받지 않고 통용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유주의는 사회 경제 생활에 대한 공권력의 개입에 반대하며 직업인들간의 협약을 통한 자유의 규제에도 반대한다. 결국 자유주의는 자유의 이름으로 적어도 노동자들에게는 결사의 자유를 폐지했던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자유의 개념을 용인할 수 없다. 교회는 경제 활동 분야에서 경제 법칙의 상대적 자발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경제 활동은 도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경제 생활이 인간적 가치들 중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잡아 주는 것이 바로 도덕이기 때문이다. "경제 활동과 도덕률은 그 고유의 영역에서 각기 자체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경제 질서와 도덕 질서가 서로 다르고 이질적인 것이어서 전혀 무관하다는 주장은 그릇된 것이다. 도덕적 법칙은 우리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최고 최종 목적을 찾도록 명하고,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에 있어서는 특수 목적을 일반 목적에 제대로 종속시키면서, 자연법 또는 대자연의 창조주께서 설정하신 그 목적을 똑바로 추구하라고 명한다. 만일 이 법칙이 충실히 준수 된다면, 결국 개인들의 것이거나 사회의 것이거나, 특수한 경제적 목표는 보편 목적론적 질서와 밀접하게 결합될 것이며, 그 결과 우리는 만물의 최종 목적, 즉 최고 불멸의 선이신 하느님께까지 점진적 과정을 거쳐 도달할 것이다"(17항).
자본주의의 남용에 대한 단죄 : 교회는 자본주의의 기본 철학인 자유주의(개인주의)와 이에 바탕을 둔 자유 경쟁의 결과를 단죄한다. 자유 경쟁은 자유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질서와 사회 전체의 번영을 자동적으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소수의 손에 부가 집중되고 경제력이 독점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최강자의 생존만을 허용하는 무제한적인 자유 경쟁의 자연적 귀결이며, 이 강자란 흔히 가장 무자비하게 싸우는 자, 양심의 명령을 가차없이 무시하는 자를 의미한다"(41항). 교회는 "오늘날 부의 축적뿐만 아니라 거대한 권력과 경제의 독점적 지배력이 소수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는 현상" (41항)을 단죄한다. 교황 비오 11세는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권력은 자본을 보유하고 통제하여 신용 대부를 결정하고 그 할당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 행사할 때 극히 독재적으로 된다. 그들은 말하자면 전 경제 체제에 혈액을 공급하고, 자기의 수중에 경제의 생명을 쥐고 있는 까닭에 누구도 감히 그들의 뜻을 거스르려 하지 않는 것이다" (41항).
교회는 이러한 권력의 집중은 지배권 쟁취를 위한 세 가지 투쟁을 유발한다고 본다. 즉 경제력 자체의 독점을 위한 투쟁이, 그리고 경제 투쟁에서 국가의 힘과 영향력을 이용할 수 있도록 정치 권력을 지배하기 위한 투쟁이, 마지막으로 국제적 차원에서 각국이 자국민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국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투쟁이 유발된다는 것이다.
국제적 차원에서의 투쟁은 세계 무역 기구(WTO) 협상이나 국가간의 무역 전쟁 등에서 빈번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국내 차원에서의 투쟁은 결국 정격 유착을 낳게 한다. 교회는 정치 및 경제의 권력 집중은 정치 질서와 경제 질서의 남용이라는 길을 열게 되고 두 질서의 혼란을 가져와 어느 한쪽에도 유익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경제 권력과 깊숙이 연루되어 있는 정부는 정치도 경제도 모두 그르칠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자본주의의 근간이 되는 여러 제도들을 단죄하지 않으면서도 그 남용에 대해서는 엄숙하게 단죄한다. 교황의 문헌들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예컨대 교황 비오12세(1939~1958)는 1942년 성탄절 라디오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자신의 형편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자연과 합치되기는커녕 하느님의 질서에 그리고 하느님께서 지상 재화에 정해 놓으신 목적에 배치되는 장치에 대항하는 노동자를 교회는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 없다." 또한 1944년 9월 1일 라디오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이 거듭 강조하였다. "교회는 전적으로 그릇된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사유 재산권을 인정하는, 따라서 참되고 건전한 사회 질서에 배치되는 그러한 체제들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곳에서, 예컨대 '자본주의' 는 그러한 그릇된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공동선에 전혀 예속되지 않는 무제한적인 권리를 재산에 부여하고 있거니와, 교회는 이를 자연법에 위배되는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1950년 발표한 <멘티노스트레>(Ment Nostrae)에서 사제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경제 체제에 대해 교회는 그 심각한 결과에 대해 비판하기를 잊지 않았다. 사실 교회는 그 체제가 증진, 옹호하고 있는 자본과 재산권의 남용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자본과 재산은 사회 전체의 유익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하며,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옹호, 증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왔다." 자본주의에 대한 교회의 비판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자본주의는 공동선에 예속되지 않은 무제한적인 권리를 재산에 부여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노동자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거부하거나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개념 즉 공동선과 노동의 존엄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재산에 절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교회가 배격하는 물질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한 자유 자본주의가 금전에 부여하는 무제한적인 권력, 이에 따라 이루어지는 재화의 불공정한 분배, 경제 기구가 사람들에게 가하는 억압 등은 하느님의 법을 심히 거스르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이러한 남용을 막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의무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교회와 여러 양식 있는 인사들의 노력으로 다양한 사회 입법을 통해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자본주의로 말미암아 허다한 고통이 왔고 불의가 저질러졌으며 형제 간에 투쟁이 벌어져 왔으며, 오늘도 그 결과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민족들의발전> 26항).
[자본주의의 개혁을 위한 몇 가지 지침] 자본주의의 남용을 막기 위한 투쟁으로 자본주의의 기본 철학과 제도들을 정면으로 배격하고 등장한 것이 바로 사회주의였다. 이는 공산주의에서 가장 강력하게 표출되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낳은 자손이자 적수인 셈이다. 양 체제가 근본적으로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점들을 지니고 있지만, 인과 체계를 지니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교황 비오 11세가 문화 사회주의를 언급하면서 극명하게 밝힌 바와 같이, "이 문화 사회주의의 조상은 자유주의이며, 그 후손은 '볼세비즘' 일 것이다" (<사십 주년> 50항). 교황 비오 11세가 회칙 <사십 주년>(Quadragesimimo Anno,1931.5.15)을 발표한 지 70년 이상이 지난 오늘, 자본주의의 후손인 볼세비즘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와의 경쟁에서 패배를 자인했고 이에 따라 세계 질서는 급격한 재편성 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과연 유일한 모델인가? 교회는 요즈음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어려운 물음, 즉 "공산주의의 몰락 후 자본주의가 승리를 거두는 사회 체제인가? 또 경제와 사회를 재건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나라들의 목표로 자본주의를 삼아야 하는가? 이것이 실제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발전의 길을 찾고 있는 제3 세계의 국가들에 제안되어야 할 모형인가?"(〈백 주년> 42항)라는 물음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천명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노동 헌장> 반포 100주년을 기념하여 발표한 회칙 <백 주년>(Centesimus Annus, 1991. 5. 1)에서 자본주의는 결코 유일한 모델일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35항) 다음과 같이 밝힌다. "만일 '자본주의' 가 기업, 시장, 사유 재산과 여기에 따르는 생산 수단의 책임, 경제 분야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로운 창의력의 기본적이고 긍정적인 역할을 인정하는 경제 체제를 의미한다면, 대답은 분명히 긍정적이다. 그러나 만일 '자본주의' 가 경제 영역의 자유를 전체적이며 인간적인 자유의 봉사에 두는,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것을 핵심으로 하는 자유의 특수한 차원과 같이 경제적 자유를 보는, 확고 부동한 형태로서의 정치적 구조 내에 제한되지 않는 체제를 의미한다면 그러면 대답은 부정적이다"(42항).
교회는 "마르크스주의의 해결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주변화와 착취의 현실들(특히 제3 세계) 그리고 인간 소외의 현실들(특히 선진국들)은 세계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이러한 현상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교회는 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물질적 · 도덕적으로 극심한 빈곤 속에 살고 있음을 우려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은여러 나라에서 정확하게 현실주의적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들에 있어서 장애물들을 제거하지만 그러나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충분하지 못하다" (42항)고 지적하였다. 교회는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어떠한 시도도 처음부터 실패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들을 취급조차 하지 않으려는 그리고 시장 세력의 자유로운 전개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경솔하게 믿는 근본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확산될 위험까지도 있다" (42항).
교회는 자본주의 체제가 결코 유일한 모델일 수는 없지만 만일 여기에 인간 중심적 가치들을 부가한다면 경제 체제의 올바른 기초 형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교회는 자본주의 체제가 인간 중심적 체제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의 목적 달성 : 교회는 인간이 모든 경제 활동의 건설자요, 중심이며 목적임을 강조한다. 경제의 목적은 경제적 합리성 원리에 따른 행동이나 단순한 이윤 획득이나 최대 다수를 위한 최대의 물질적 행복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적절한 공급으로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경제라고 정의 내리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해로운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은 경제의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의 목적은 개인과 사회 집단이 인간 존엄성에 알맞은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물질적 필수조건들을 지속적으로 마련해 주는 데 있다.
시장 경제가 소비주의를 가져와서는 안 된다 : 소비재 광고는 소비자들에게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데 뜻이있다. 그러기에 상상력을 과도하게 자극하거나 물적 소유욕을 충동하여 소비자들을 혼란하게 하고 현혹시켜서는 안된다. 교회는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가치 순위에 의한 의식이 약화되거나 사멸되거나, 전도되어 있으며, 그들은 영적 가치를 무시하거나 망각하거나 부정하면서 기술 과학의 진보 · 경제 발전 · 물질적 번영을 생의 최고의, 심지어 유일한 목적으로 지지, 옹호하고 있음을”(〈어머니와 교사> 176항) 우려하고 있다.
시장 기구로는 부족하다 : 자유 경쟁은 비록 일정한 한계 안에서는 정당하고 유익하지만 시장 기구가 경제 문제의 지도 원리로 작용할 수는 없다. 경제란 자동 조작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고유한 조절 의지에 따라 전개되는 문화 과정인 것이다. 사유 재산권, 시장 기구 등은 경제 활동의 사회적 목표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 시장경제는 조정을 받아야 한다. 경제 활동의 목적 및 공동선과 관련하여 생기는 긴급한 문제들(예컨대 부의 확산, 지속적 성장, 실업 해소, 환경 보호 등)은 단지 시장과 가격 기구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국가가 적절한 개입을 통해 시장 기구를 보완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국가가 이러한 개입을 통해 개인의 경제적 창의력을 말살하게 되면 정치적 독재가 출현하고 경제가 침체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교황 요한 23세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국가의 적절한 활동이 부족하거나 없는 곳에는 반드시 고질적인 혼란이 있고, 밀밭에 가라지 처럼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무성하는 염치없는 강자들의 약자들에 대한 착취가 있을 뿐이다" (58항). 그러나 교황 요한 23세가 동시에 강조하는 바와 같이, "각자의 개인적 창의가 없는 곳에는 정치적 독재가 있으며, 더욱이 경제가 침체되어 물질적 필요 이외에 정신적 필요와 관련되는 소비재와 서비스가 부족하게 된다. 이 재화와 서비스는 특히 개인의 창의성을 촉진하는 것이다" (57항). 경제력에 대한 통제 : 시장 경제에서는 경제력의 집중을 막는 조치가 취해져야 하며, 독점과 카르텔이 불가피한 경우 이들을 통제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모든 경제 부문에서 자유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민간 기업은 경쟁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여 온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시장 경제를 내부적으로 위협한다. 교회는 독점을 언제나 단호히 배격해 왔다.
교황 비오 11세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것(독점)은 절제할 줄 모르는 강렬한 힘이기 때문에, 만일 그것이 인류에게 유익하게 되려면 강력하게 통제되고 지혜롭게 관리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독점 경제는 그 자체로서는 억제될 수도 통제될 수도 없다. 따라서 이 독점을 엄격하고 단호하게 규제하기 위해서는 더욱 높고 고상한 원칙을 찾아야 하는 바, 이는 곧 사회 정의와 사회애(社會愛)이다. 그러므로 국가와 사회 생활의 모든 제도는 정의의 정신으로 물들여져야 하고, 이 정의가 진정으로 실현되어야 하며, 말하자면 경제 전체를 지배하는 법적, 사회적 질서를 수립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애는 이 질서의 활력이 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 질서를 효과적으로 보호하고 옹호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사십 주년> 37항).
가치와 우선 순위 : 경제는 인간과 사회의 유일한 목적이 아니며 최고 목적은 더욱 아니다. 따라서 경제는 진정한 목적 서열에서 제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결혼과 가정, 종교와 도덕, 문화 가치, "만물의 최종 목적"인 하느님은 경제보다 높은 서열을 차지한다(동 17항). 이는 "경제 분야에서 도달할 수 있는 목표와 도달할 수 없는 목표, 그리고 그때에 필요한 수단이 무엇인지"(동 17항)를 "수단과 목적"의 맥락에서 제시하는 이른바 경제 법칙은 독자성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사실을 결코 배격하지 않는다.
인간과 그의 양심과 유리되어 있는 추상적 경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경제 분야의 종사자들에게 "이웃을 위한 봉사"의 사고 방식을 강조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은 것을 봉사의 형태로 제시하였다. 즉 자기 가족을 돌보는 것,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되는 것,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 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봉사의 뜻이 없다면, 이윤에 대한 탐욕만 남게 된다(Summa Theologiae, Ⅱ.Il,q. 77, a. 4. c.)
자본과 노동 : 산업 혁명 이래 자본주의 체제의 특징이 되어 온 자본과 노동의 분리를 그리스도인의 양심상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노동이 자본에 대립되거나 자본이 노동에 대립되는 것일 수 없으며, 더구나 이러한 개념의 이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서로 대립될 수는 없다"('노동하는 인간> 13항). 사실 자본에 대한 인간의 우위성에 바탕을 둔 경제 체제는 근본적으로 자본과 노동간의 대립을 극복해야 한다.
교회는 자본과 노동 간의 대립을 극복하거나 완화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본다. 첫째 방법은 당사자들 간의 협력이다. 노사 간의 단체 협약은 각기 그 구성원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투쟁이나 집단 및 계급 이기주의가 되면 안 된다. 오히려 노사 간의 투쟁은 사회 정의를 위한 것이어야지 투쟁을 위한 투쟁이나 상대방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노동하는 인간> 20항). 둘째 방법은 근로자들의 재산 형성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것을 요구해 왔다. 재산이 광범위하게 확산될수록 현대 사회에 재산에 따른 기능적 위기를 극복하거나 완화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기술 진보의 합리화 : 기술이 근로 생활에 도입된 이래 노동자들이 기술 장치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비판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기술을 비난하지 않는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기술을 "인간 노동의 협조자"(5항)라고 부른다. 억압적이고 비인간적인 조건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무수히 있으며 이러한 상황을 개선해야 할 기술이 지나치게 진보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무절제한 기술 진보의 위험을 경고한다. "노동의 기계화가 인간을 밀어내고 개인의 만족감이나 창의력이나 책임감을 빼앗아 버리거나 많은 노동자들의 직업을 빼앗아 버린다면, 혹은 기계에 대한 과신으로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전락시킨다면, 기술은 인간의 협조자가 아니라 그의 적이나 다름이 없을 수도 있다" (5항). 기술 진보는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기업의 기본적 권력 구조 : 교회는 기업의 권력 구조가 노동자들의 자치 정신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기업은 모든 구성원들이 원만한 상호 관계를 유지할 때 비로소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기업 조직에서 상하 관계의 기능적인 권위 체계는 필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업과 인간 노동에 있어서 투자된 자본이 아니라 인간이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적용되어야 할 원칙은 "사물의 질서가 인간 질서에 종속될 것이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사목 26항)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최근에 와서 이윤 획득과 비용 절약의 필요성 때문에 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기업가들은 기업의 구성원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고, 이러한 시각에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 따라서 이기심을 바탕으로 한 이윤 획득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더욱이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수익성이 있는 발전은 그러한 자세에 의하지 않고서는 보장될 수 없다.
세계적 차원의 책임 : 현대의 세계 경제는 어느 나라에서든 아무리 경제 강국이라 해도 완전한 경제 자립이나 자급 자족이 어려울 만큼 각국이 상호 의존하여 있다. 이러한 상호 의존 체제에서 고도 공업국이나 다국적 기업들이 자신들의 힘을 남용하여 원자재 가격을 하락시킴으로써 약소국들을 착취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부유한 나라들과 빈곤한 나라들 간의 소득 불균형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교회는 전세계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는 세계 체제가 창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선진국들은 국제 경제 관계에서 공동선의 범위가 이제 전세계로 확대되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교회는 부유한 국가들이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국가들을 도와 주도록 권고한다. 교회는 또한 이러한 빈곤의 고리는 개발 원조가 충분히 확대되고, 군비 지출이 크게 감소하고 농업이 개혁되어야 비로소 부서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국제 시장에서의 경쟁으로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전세계적인 규제 조치가 필요하다.
고용 보장 : 일자리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간접 고용주" , 즉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 노동 정책의 수립 과정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노동하는 인간>18항)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국가를 초월하는 노동에 관한 전반적 계획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환경 보전 : 경제 활동이 생태계를 파괴하고 인간 생활의 물리적 · 도덕적 기반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교회는 자연 자원을 인간이 자기의 경제적인 필요에만 의거하여 사용할 수는 없으며, 자연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며 인간은 그것에 대해 절대 지배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 공업화의 위험스러운 후속 결과를 막기위해 자원의 이용 방법에 있어서 도덕적 요청을 존중해야 한다고 밝혔다(<사회적 관심> 34항). 교회는 자연 환경뿐만 아니라 인간 환경의 보전, 즉 진정한 인간 환경을 위한 도덕조건의 보전, 더 나아가 인간 환경의 기본 구조로서의 가정 및 생명권 보호를 역설하였다(<백 주년> 38~39항).
재분배 제도 : 현대 산업국들에서는 경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국민 소득의 분배를 조세나 사회 보험 등을 통해 수정하여 왔다. 그러나 아직도 무수한 사람들이 자기탓 없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더욱이 시장 기구는 질병, 노년 등과 같은 생의 일상적인 위험을 구제해 주지 못한다. 이를 위해 사회 제도들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사회 보장 제도를 전반적으로 퇴보의 징조요, 자기 책임을 대중 책임으로 돌리는 징조로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러나 교회는 인간 자신을 위해 자기 책임의 강화를 옹호하고 국가가 모든 것을 제공하고자 하는 복지적 국가주의를 배격한다.
[평 가] 교회는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를 그릇된 것으로 배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교회는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자의 인간적 존엄성, 경제 생활의 사회적 성격, 사회주의와 공공선을 존중하는 가운데 운영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회는 특히 공산주의가 붕괴한 이후에도 소외와 착취의 현실은 그대로 남아 있음을 지적하면서, 일방적인 자본주의 예찬론을 경계하고 자본주의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교회는 인간이 모든 경제 활동의 중심이며 목적이므로 모든 경제 활동은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자본주의 개혁의 기본 원리로 제시한다. 10 사회주의 ; → 베버, 막스)
※ 참고문헌 Jean Villain, La Chiesa e contro il capitalismo?, Milano,Nuova Accademia Editrice, 1963/ John F. Cronin, Social Principles and Econimic Life, Milwauke, Bruce Publishing Company,1964/ Constant Van Gestel, La docttrina sociale della Chiesa, Roma, Cittta Nuova Editrice, 1966/ Pierre Bigo, La doctrine sociale de I'Église, Paris, Presse Universitaire de Paris, 1966/ Joseph Cardinal Hoffner, Economic Systems and Economic Ethics. Ordo socialis(Engish translation of the Inaugural paper read at the Autumn General Meeting of the German Bishop's Conference in Fulda on September 23. 1985)/ 최영철 외 역 <교회와 사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 김종수 외 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2. 〔韓弘淳〕
자본주의 資本主義 [라]capitalismus [영]capit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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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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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자본주의 체제가 결코 유일한 모델일 수는 없지만, 인간 중심적 가치들을 부가한다면 경제 체제의 올바른 기초 형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