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 慈悲 [라]miseicordidia [영]mercy, compassion, p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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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자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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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자비의 시작이다.


친절한 상태나 특성, 친절한 성품이나 성질, 자비로움, 부드러움, 친절한 행동 또는 친함과 선한 의지의 증거. 고어적인 의미로는 친절한 감정, 애정, 사랑 등을 의미한다.
: I. 성서에서의 자비
성서에서 '자비' 는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가 하느님 혹은 예수님께 적용될 때는 '깊은 동정의 마음, 상대를 도와 주는 사랑,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갖는 사랑이나 열망' 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때로 '관대한 용서' 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는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에 대한 구원 은총의 신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서에서의 자비는 동정심과 용서만이 아니라 충실성이 합해진 개념이다. 반면 인간의 자비는 보통 아랫사람의 필요나 사정에 의해 나타난 동정의 표시이다. 그러나 자비가 요구되는 것은 대개 공적인 관계에서이다.
[용어와 의미] 성서에서 '자비' 라는 뜻을 지닌 단어는 여럿이다. 가장 많이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 '깊은 동정심을 갖는다 · 불쌍히 여기다' 라는 의미의 '라함'(四П)이며, 그 명사형은 '라하밈' (口)이니이다. 이것은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지닌 본능적 애착을 나타낸다. 원래 셈족들은 이런 자비가 어머니의 품(1열왕 2.26) 안에, 또는 내장 안에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버지(예레 31, 20 ; 시편 103, 13)나 형제(창세43,30)의 심장 안에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서 곧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동정심으로 나타나고(시편106, 45), 죄에 대해서는 용서로 나타난다(다니 9, 9). 자비를 표현하는 또 다른 히브리어는 '해세드' (ㄱㅇП)이다. 이 단어는 70인역 성서에서 통상적으로 그리스어 '엘레오스' ('('sog)로 번역되었다. '해세드'' 는 그 자체로 자비 혹은 두 사람을 결합시켜 주는 관계를 의미하는데, 충실성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이로써 성서에서 의미하는 자비는 그 본질과 목표에 있어 본능적 선이 아니라, 의식적 의지에서 나오는 실천적 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내적인 의무감과 자기 자신에 대한 충실성에서 나오는 책임 있는 행위이다.
그리고 '호의나 친절을 보이는 혹은 '은혜로운' 이라는 의미의 '하난' (127, '소중히 여기다' , '자애심을 갖다' 라는 의미인 '하말' (hran, '불쌍히 여기다' . '동정심을 가지고 돌보다 라는 의미의 '후스' (017)도 자주 사용되었다. '헴라흐' (一ʼn)는 두 번 명사적으로 나오는데, 모두 야훼의 자비에 관련되어 사용되었다(창세 19,16 ; 이사 63, 9).
신약성서에서는 '누구에게 자비를 베푼다 는 의미의 '엘레에오' ('enscco)가 보통 사용된다. 명사는 '엘레오스'이며, 형용사는 '엘레에몬' ('8.cipov)이다. 그러나 '불쌍히 여기다' . '연민의 마음을 갖다' 는 의미의 '오이크테이로' (oinceipo)는 명사형 '오이크티르모스' (oiktppos)와 형용사형 '오이크티르몬' (oirrupuw)과도 함께 사용되었다. 그 외에도 '동정심으로 마음이 움직이다' 라는 의미의 '스플랑크니조마이' (oricorowovigouca), '동정하다'의 '스플랑크논' (oricinivovov)과 '쉼파테오' (ouproleo)가 있다.
이상의 단어들은 자비, 사랑, 연민의 정, 자비심, 동정심, 너그러움, 선, 심지어는 아주 방대한 의미로 사용되는 은총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자비' 는 이렇게 다의적인 말이지만, 성서적 개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비참함에 대해서 자신의 연민을 드러내 보이며, 인간은 창조주를 본받아 자기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구약성서에서의 의미] 하느님의 자비 : '자비' 나 동정' 을 뜻하는 히브리어의 어근 '라함'' 은 '자궁' 이라는 의미의 '레헴' (ㅁП)에서 유래하였다. 그러기에 '라함'의 원래적인 의미는 어머니처럼 혹은 피를 나눈 형제처럼 느끼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느낌은 형제가 같은 자궁에서 나온 데서 혹은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구약성서에서 야훼의 자비는 이와 같은 가족적 사랑으로 설명된다(시편 103, 13 ; 이사 63, 15-16 : 예레 31, 20 등). 야훼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이며(호세 11장), 이스라엘의 어머니시다(이사 49, 15). 또한 이스라엘의 남편이다(이사 54, 4-8). 이처럼 하느님은 자신의 죄많은 자녀 혹은 아내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갖고 사랑과 용서로 되돌아오길 기다린다.
하지만 야훼의 자비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약에서 하느님의 자비는 그분의 충실함, 변함없는 사랑, 그분의 의로움, 심판(호세 2, 19), 당신이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에 끝까지 성실하심을 나타낸다 (출애 33, 19 : 이사 63, 9). 그렇다고 하느님의 자비가 외적인 계약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자비는 하느님이 파견한 사람들과도 관련되어 있다(2역대 36, 15). 일반적으로 야훼의 사랑의 행위는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과 계약 관계를 충실히 지속시킨다.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는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나타날 수 있다. 즉 개인적 혹은 민족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에 의한 용서에서(신명 13, 17 ; 2사무 24, 14 ; 2열왕 13, 23 : 시편 25, 6 : 40, 11 : 51, 1 ; 79, 8 ; 103, 4 :이사 54, 8 : 55, 7 : 예레 3, 32 : 다니 9, 9. 18 : 호세 1, 6-7 ; 요엘 2, 18 ; 미가 7, 19 ; 하바 3, 2 : 즈가 1, 12. 16), 선택된 백성을 그들의 적으로부터 구출하심으로써(느헤 9,27-28 : 시편 25, 6 : 40, 11; 69, 16 ; 79, 8 : 이사 30, 18 :예레 42, 12), 약속을 성취시킴으로써(신명 13, 17 ; 예레33, 26), 유배 동안 그리고 유배에서 돌아와 재건할 때 함께하심으로써(신명 30, 3 ; 이사 14, 1 ; 49, 13 ; 예레 12, 15 : 에제 39, 25), 광야에 버려두지 않고 준비하심에서(느헤 9, 19 이사 49, 10), 당신과의 친교 회복에서(2열왕 13, 23 : 호세2, 19. 23) 드러난다. 또한 야훼께서 선택한 백성과의 계약, 그 백성에 대한 지속적인 사랑, 백성을 위한 배려(미리 준비함), 해로운 것에 대한 보호(출애33, 19 : 이사 54, 10) 등의 행위가 야훼의 자비의 증거이다. 야훼의 자비는 의무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계약을 준수하고 완성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 하느님의 자비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타날 수 있었다(시편 51, 1 ; 57, 1 : 79, 8 ;86, 16 : 123, 2 ; 이사 33, 2 : 다니 9, 18). 그것은 이스라엘이 옳거나 옳은 행동을 해서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계약의 완성에 대한 보증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야훼의 자비에 대한 이스라엘의 요구(권리, 주장)는 계약의 주도권으로 인한 것이다. 만일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먼저 선택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어떤 것을 기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분노에 더디고 변함없이 사랑 많은 "자비롭고 은혜 넘치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출애 34, 6 : 느헤 9, 17 : 시편 86, 15 : 103, 8 ; 145,8 ; 요엘 2, 13 : 요나 4, 2). 사실 이스라엘은 역사의 마지막 대단원인 종말에는 좋은 것, 즉 하느님의 자비를 발견하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이사 14, 1 : 49, 13 : 54, 7; 예레 12, 15 : 33, 26 ; 에제 39, 25 : 즈가 1, 16). 자비는 종말론적 희망의 일부이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의 자비가 단지 인간의 필요와 조건에 대해 고려해 보는 내용의 구절들도 있다. 이런 부분은 히브리어 동사 "하말"을 사용하거나(읍기 27, 22 : 예레 2, 17. 21 ; 3, 43 : 즈가 11, 6), 죄많은 당신 백성에 대한 야훼의 심판과 관련하여 "후스"(예레 13, 14 : 에제 7,4 ; 5, 11 ; 7, 9 ; 8, 18 : 9, 10 : 24, 14)를 사용한다. 그런 경우 하느님은 무자비하게 파괴하면서 선택된 백성을 더이상 불쌍히 여기시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다만 계약 관계에 대한 문맥에서 뿐이다.
인간의 자비 : 구약성서에서 인간의 자비는 자주 등장하지 않지만, 동료 인간의 필요와 조건에 따라 판단된다. 무자비하게 쳐부수거나 적을 사로잡은 정복자는 자비가 없다(신명 7, 2. 16 : 예레 6, 23 : 21, 7). 때로는 패자에 대한 동정심이 생기도록 하느님이 간섭하기도 한다(1열왕 8, 50 : 2역대 30, 9 ; 시편 106, 46 : 예레 42, 12). 또한 우상 숭배자(신명 13, 8), 살인자(신명 19, 13), 거짓 증인(신명 19, 21)에게는 법적으로 동정하지 말라고 한다. 느헤미아(1, 11), 다니엘(1, 9), 사울(1사무 23, 21) 같은 사람은 자신들의 생명과 부를 의지하고 있는 분에게서 특별한 자비를 발견하기도 한다.
구약성서에는 자선 현상 혹은 결핍에 대한 자비를 베푸는 한계를 넘어서는 공동체 관계의 구조가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가족 관계가 가장 밀접한 관계이다. 가족 안에서의 자비(도움, 사랑, 필요에의 배려)는 희망 사항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의무였다. 가족이 있는 곳에는 자비가 있었다. 자비가 없는 곳에는 가족적 유대가 없는 것이었다. 이런 자비는 형제라는 표시이기도 했다(아모 1, 11 ;즈가 7, 9).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지파 혹은 공동체였다. 이웃과 친구는 도움과 배려를 받을 자격이 있다(욥기 19,21 ; 잠언 21, 10). 그리고 어린이, 노인, 가난한 사람들, 고아, 과부들과 같은 공동체에 의존하는 사람들 또한 그러했다. 그들은 도움을 받지 못하고 곤궁한 상태로 공공의 관심과 원조도 없기에 이들에게는 특별히 자비가 요청된다(시편 72, 13 : 에제16, 5 : 즈가 7, 9-10 ; 출애 2, 6). 무장한 정복자 중 최악의 사람들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이들이다(2역대 36, 17 ; 이사13, 18 : 47, 6). 구약성서에서 인간의 자비는 하느님의 자비와 같이 친족 관계로 이해되었다. 인간의 친족 관계는 하느님과의 친족 관계의 한 부분이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자비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사람이 갖게 되는 덕목이다. 하느님은 타인에 대한 자비심이 없는 이방인을 단죄하였다(아모 1, 11). 하느님은 인간들이 형제적 사랑의 계명을 지키기를 바라고(출애 22, 26), 번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그것을 더 원한다(호세 4, 2 ; 6, 6). 정의의 실천은 "연민의 사랑"(미가 6, 8)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누가 정말 단식하기를 원한다면 빈자, 과부, 고아를 도와주어야 하며, 자기 혈육을 모른 체하지 말아야 한다(이사58, 6-11 ; 욥기 31, 16-23). 형제적 사랑의 지평은 인종이나 신앙에 의하여 제한을 받고 있지만(레위 19, 18), 하느님의 모범적 행위를 따라 인간의 마음도 "나는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 (호세 11, 8 : 이사 55, 7)라고 하는 하느님 마음의 넓은 차원까지 점차로 넓혀 져야 한다. 이 형제적 사랑의 지평은 무엇보다 먼저 원수를 갚지 말며, 앙심을 품지 말라는 계명을 통하여 넓혀 졌다. 그러나 이것은 지혜서의 마지막 책들에서 현실적으로 분명히 드러났다. 이 책들은 이 점에 있어 예수의 메시지 윤곽을 잡아 주고있다. 용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 져야 한다(집회27, 30-28, 7).
(신약성서에서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 : 복음에서 병자들이나 그 외 고통 받는 사람들이 예수의 자비를 청하는 모습이 반복해서 나타난다(마태 9, 27 : 15, 22; 17, 15 : 20, 30-34 : 마르 5, 19 : 9, 22 : 10, 47 : 루가17, 13 : 18, 38). 그러기에 예수의 자비는 이와 같은 구제와 치유의 의미로 이해되었다. '엘레오' 라는 동사로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도움을 주다' 라는 의미이다. 이런 필요에 대한 예수의 반응을 기록할 때 신약성서는 '스플랑크니조마이' 라는 동사를 사용하였다. 이 동사의 문자적 의미는 '창자(내장)가 움직였다' 는 뜻이다. 고대 아테네의 3대 비극 작가 중 최초의 인물인 그리스 시인 애스킬로스(Aeschylos, 기원(525/524~456/45)는 이단어를 분노나 사랑의 광포한 열정에 사용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창자 혹은 내장은 더욱 부드러운 사랑, 특히 친절, 자비심, 연민, 불쌍히 여김 등의 중심 기관으로 여겨졌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내장은 우리에게 있어서 동정(연민)의 자리인 심장과 같은 의미이다. 예수가 인간의 필요(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신약성서는 그분의 내장이 움직였다고 표현한다. 그때 예수는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마음을 가졌다(마태 9, 36 : 14, 14 : 20, 34 : 15,32=마르 8, 2 ; 마르 1, 41 : 6, 34 : 루가 7, 13). 이런 의미의 자비는 내면의 느낌이다. 예수의 이런 느낌은 항상 외적 구원 행위로 나타난다. 그의 연민은 맹인을 고치고(마태 20, 34), 나병 환자를 깨끗이 치유하고(마르 1, 41), 무식한 자를 가르치며(마르 6, 34), 죽은 사람을 살리며(루가 7, 13), 주린 자를 먹인다(마태 15, 32 ; 마르 8, 2). 예수는 하느님의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 "모든 점에서 당신의 형제들과 같아지기"(히브 2, 17)를 원하셨다. 이것은 예수가 친히 구원하러 온 그들의 비참한 형편, 그 자체를 몸소 체험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복음사가들이 "자비" 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설명하지 않을지라도, 예수의 모든 행위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루가는 이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특별한 배려를 하고 있다. 예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은 "가난한 자들"이다 (루가 4, 18 ; 7. 22) 죄인들에게 그분은 친히 "친구"가 되어 준다(루가 7. 34). 그는 그들과 상종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루가 5, 27. 30 : 15, 1-2 ; 19, 7). 예수는 군중들에게 일반적으로 증거해 준 자비를(마태 9, 36 : 14, 14 : 15,32), 루가 복음 안에서는 한층 더 개별적으로 보여 준다. 즉 예수는 과부의 "외아들"(루가 7, 13) 혹은 어떤 슬퍼하는 아버지(루가 8, 42 ; 9, 38. 42)에게 관심을 보인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여자들과 외국인들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여 준다. 이렇게 해서 자비의 보편성이 실행에 옮겨졌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루가 3, 6). 예수는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기에 재난을 만난 자들이 하느님께처럼 예수에게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마태 15, 22 ; 17, 15 : 20, 30-31)이라고 반복하며 기도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용서로 본다(2, 17 : 4,6), 이는 신약성서에서 두 번 종말론적인 의미로 정의되었다(2디모 1, 16. 18 : 유다 21). 그런데 유다서에서 예수님의 자비는 심판 때 그분이 되돌아오셔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 주실 영원한 생명으로 이해되었다.
하느님의 자비 : 하느님 자비에 대한 구약의 이해는 거의 그대로 신약으로 전해졌다. 계약을 맺은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넘치는 충실성은 루가 복음 1장에 특별히 강조되어 잘 나타난다(50, 54, 72, 78). 그리고 호세아 2장 23절의 정신을 원용한 베드로 1서 2장 10절에 잘 나타난다. 그리고 유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거나(로마9장) 구약의 자비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된 부분(갈라 6,16 ; 1디모 1, 2 : 2요한 3, 유다 2)도 있다. 자비라는 말마디에 대한 신약에서의 용법은 온전히 구약의 빛(로마 15,9 참조) 아래 해석되었다. 또한 그러한 빛 아래 새로운 뜻을 갖는 구절도 있다(마태 5, 7 : 로마 12, 1 : 에페 2, 4 :야고 5. 11 : 1베드 1, 3).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은 교회가 되었지만, 하느님의 그 사랑 넘치는 충실성은 동일하다.
신약성서에서 하느님의 자비는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난다. 엘리사벳에게 자비는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갖게 한 것이었다(루가 1, 58). 병이 나 죽을 뻔했던 에바프로디도에게 자비는 치유였다(필립 2, 27). 박해자 사울에게는 용서와 새로운 삶이었고(1디모 1, 13 : 1고린 4, 1),그리스도교 사도 직분을 엄격히 수행하는 것이다(2고린4, 1).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선물로 나타난다(로마 9, 23 : 11, 30-32 : 12, 1 : 에페 2, 4).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의 계약은 결정적으로 사랑으로, 완벽한 확증으로, 어떤 힘으로도 파기될 수 없는 봉인으로(로마 8, 38-39), 영원한 약속의 증서로 나타난다.
예수는 자신의 행위를 통하여 하느님 자비의 특징적 면모들을 영구적인 것으로 제시해 주었다. 바리사이파의 편협성으로 말미암아 하느님 나라에서 제외된 자로 여겨지던 죄인들에게 예수는 구약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무한한 자비의 복음을 선포한다. 하느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자는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잃었다가 되찾은 양과 은전에 비길 수 있는 '회개한 죄인들 이다(루가 15, 7. 10).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는 탕자의 귀환을 못내 기다리다가 그가 돌아오는 것을 멀리서 보자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맞아들인다(루가 15,20). 또한 하느님은 마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처럼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오랫동안 기다리셨고, 아직도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계신다(루가 13, 6-9). 하느님은 "자비의 아버지"이며(2고린 1, 3 ; 야고 5,11), 바오로에게 당신의 자비를 보여 주셨고(1고린 7, 25; 2고린 4, 1 ; 1디모 1, 13) 그 자비를 모든 믿는 이들에게 약속한다(마태 5, 7 : 1디모 1, 2 ; 2디모 1, 2 : 디도 1, 4 ; 2요한 1, 3). 구원과 평화 안에 하느님의 자비의 계획이 완성됨에 대하여-이것은 복음의 여명기에 이미 찬미가들로 선포된 것인데(루가 1, 50. 54. 72. 78)-바오로는 그 자비의 방대함과 풍부함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다. 로마서의 핵심은 바로 이것을 계시해 주는 데 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업적 즉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화(義化)가 이루어진다고 여김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를 알아보지 못하는 데 대하여 바오로는 그들 역시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그들도 신앙의 의화를 통하여 자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유대인과는 대조적으로 이방인들은-이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아무것도 약속하신 바가 없었지만-하느님의 넘치는 자비의 세계 안에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비를 얻기 위하여 스스로가 죄인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느님께서 모든 이를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이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었습니다"(로마 11, 32).
인간의 자비 : 인간의 자비는 일반적으로 자기 동료에 대한 배려나 도움, 원조이다(마태 18, 27 : 루가 10, 37 ;16, 24 : 로마 12, 8 ; 필립 2, 1 ; 골로 3, 12 ; 히브 10, 34야고 3, 17 : 1요한 3, 17). 마태오 복음에서 자비는 계약 공동체에서 상호 간의 의무인 동정이다(마태 9, 13 : 12,7 : 23, 23). 율법 학자, 바리사이파, 세리, 죄인 할 것 없이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든 상관없이 서로에게 위로와 도움과 사랑을 주어야 했다. 이것은 그들의 공공의 의무이며 그들 신앙의 일부이다. 하느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시기에 그들도 자비로워야 한다(루가 6, 36 ; 마태5, 7)
"여러분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합니다"(마태 5, 48)라는 예수의 말씀은 루가 복음에는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롭게 되시오"(루가 6, 36)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가 호세아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여 역설한 바와 같이(마태 9, 13 : 12, 7), 천국에 들어가는 본질적 조건 중의 하나이다(마태 5, 7). 착한 사마리아인처럼(루가 10, 30-37)-자기에게 손해를 끼친 자에 대하여 자비심이 가득 차서(마태 18, 23-35) -우리는 길 가는 도중에 만난 이웃에게 연민의 정을 베풀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었기 때문이다(마태 18, 32-33). 따라서 우리는 아마도 모르는 사이에 형제들에 대하여 얼마나 자비를 베풀었느냐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다. 이 자비는 형제들 안에 사는 그리스도 자신에게 베푼 것이다(마태 25, 31-46).
이방인들은 자비롭지 못해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고 있는데(로마 1, 31),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하고 "동정해 주며"(필립 2. 1), 따뜻한 마음으로 너그럽게 대해 주어야 한다(에페 4, 32 : 1베드 3, 8). 그리스도인은 궁핍 중에 있는 형제에 대하여 "자기의 내장을 닫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비를 실천하는 그들 안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1요한 3, 17). 1 사랑)
※ 참고문헌  E.R. Achtemeier, (IDB》 R. Bultman, 《TWNT》 2, pp. 474~4831 K.D. Sakenfeld, love(OT), (ABD) 4, Pp. 375~381/ A.T. Davies, Law and love in Judaism and Christianity, 《ATR》 64, 1982, pp. 454~466/ RL. Howe, Herein is Love A Stucty of Biblical Doctrine of Love, Valley Forge, PA, 1969/ W. Klassen love(NT and early Jewish), (ABD) 4, pp. 381~396/ W. Bauer, trans. by F.W. Gingrich . F.W. Danker, A Greek-English Lexicon ofthe New Testament o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Chicago, The Univ. . ofChicago Press, 1979. [편찬실]
: Ⅱ. 불교에서의 자비
불교 수행상의 근본 정신. 고뇌하는 모든 사람들을 규제하고자 하는 부처의 마음 그 자체. 불교에서 말하는 사랑, 또는 다른 이를 위한 헌신. 자(慈)는 상대방에게 기쁨을 베푼다는 의미이고, 비(悲)는 남의 고통을 덜어 준다는 의미이다. 후에 두 낱말을 합하여 불교적 사랑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는데, 지혜가 불교적 이념을 나타낸다면 자비는 그 실천을 뜻한다.
〔의 미〕 세상은 '나' 와 '남' 과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이 관계에서 자비는 남과의 조화를 이루는 기본적 실천 덕목이다. 근본 불교(석가 당시의 불교)에서는 자비를 셋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는 '중생연' (衆生緣)으로, 가까운 사람이나 가깝지 않은 중생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평등한 자비를 베풀어야 함을 뜻한다. 둘째는 '법연' (法緣)으로, 범부(凡夫) 혹은 번뇌를 끊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베푸는 자비를 의미한다. 셋째는 무연(無緣)으로, 부처가 모든 생명을 대상으로 베푸는 자비를 뜻한다. 이는 사물의 진리를 깨닫고 모든 생명에게 기쁨을 가져다 준다는 뜻이다.
이러한 삼연(三緣)의 자비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사섭' (四攝)과 '사무량' (四無量)인데, 불교의 실천 의지를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용어이다. '사섭'은 보살(菩薩)이 중생을 교화하는 네 가지 방편이다. 첫 째, 보시(布施)에는 재물이 필요한 이에게는 물질적 기여를 하는 '재시' (財施), 진리를 찾는 이들에게는 진리를 전하는 '법시' (法施), 끝내는 두려움 없는 삶을 누리도록 하는 '무외시' (無畏施)가 있다. 둘째로 온화한 얼 굴과 자비로운 말씨를 이르는 '애어' (愛語)는 중생을 불도(佛道)로 전진시키려는 보살의 방편이다. 셋째, 중생과 더불어 일하고 나누는 실천행인 '동사' (同事)는 동체 대비(同體大悲)의 이상을 현실 속에 실현하는 일이다. 넷째, 중생에게 이로움을 가져다 주는 일인 이행(利行)은 하고자 하는 일이 철저히 중생의 이익을 도모해야 한다는 가치관이다.
한편 '사무량' 은 중생을 제도하는 자비의 극치를 말한다. 그래서 중생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는 일인 '자'(慈)와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 주는 일인 '비' (悲)와 남의 기쁨을 진심으로 격려하고 같이 기뻐하는 '희' (喜)가 있다. 마지막으로 '사' (捨)는 그릇된 마음 바탕을 없애 가는 일인데, 구체적으로는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의 작용을 버리는 일을 뜻한다.
〔대승 불교의 자비 사상] 대승 불교(大乘佛教)에서는 자비 사상을 보다 적극적인 의지로 설명한다. 대승 불교는 부파 불교(部派佛教)가 지닌 형식주의와 출가 중심주의를 배격하였기 때문에, 현실 속의 불도 구현이라는 의미에서 보살 사상을 내세운다. 보살 사상의 핵심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이다. 자리는 자신의 수도를 가리키고, 이타는 타인을 위한 배려 · 헌신을 말한다. 보살은 이둘을 조화시킨 이상적 인격이다. 대승 불교가 등장한 이후 거의 모든 대승 불교 경전들에서는 많은 보살들이 등장하였다. 이 보살들이 결국 인간 마음 속에 있는 근원적 자비심의 발로이다. 바다 속에 온갖 보물이 감추어져 있는 것처럼, 중생의 마음 속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보살이란 그 무궁무진한 마음의 세계 가운데 특정한 분야를 상징화시킨 것이다. 예컨대 문수(文殊) 보살은 지혜의 상징, 보현(普賢) 보살은 대원(大願)의 상징, 지장(地藏) 보살은 비원(悲願)을 상징한다. 자비의 화신은 관음(觀音) 보살이다. 《법화경》(法華經)이 관음 사상의 전거 경전이다. 그 내용에 따르면 관음 보살은 모든 중생의 고통을 없애 주는 구고구난(救苦救難)의 존재이다. 바다에서 태풍을 만난다거나 혹은 불구덩이에 떨어지는 등 횡액을 입었을 때, '관세음보살' 이라는 명호를 부르면 곧 그 고통이 사라진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설명은 의타적(依他的) 신앙을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 관음 보살을 내 마음속의 보살로서 설명한다면 오히려 자력 신앙에 가깝다. 인간이 중생일 때는 관음 보살의 가피력으로 고통에서 벗어나지만, 그 다음 단계에 접어들면 내 마음 속의 관세음 보살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내가 관음 보살이 되어 남을 돕고, 세상을 밝게 가꾼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속성 때문에 관음 보살은 민간 신앙으로 널리 유포되어 왔다. 한국의 경우 가장 폭넓은 민중적 호응을 받았던 것도 관음 신앙이다. 자비의 화신이라는 관음 보살의 성격적 특징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는 주로 여성적 모습으로 조각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자비 사상] 의상(義湘, 625~702)이 창건한 동해 낙산사(落山寺)는 가장 대표적인 관음 도량이다. 또 석굴암의 <십일면관음상>도 뛰어난 예술품으로 꼽힌다. 이 열하나의 얼굴은 각각 자비의 단계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십일면신주심경)(-面神祇에%)에는 이 열하나의 얼굴 모습 구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삼면(前三面)은 자애로운 모습, 좌삼면(左三面)은 성내는 모습, 우삼면(右三面)은 미소 짓는 모습, 후일면(後一面)은 웃는 모습, 마지막으로 관음 보살의 본면(本面)을 합하여 도합 열하나가 된다. 전삼면이 자애로운 모습을 띠는 까닭은 모든 중생을 불도(佛道)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즉 세속을 여의고 불교에의 길로 이끈다는 표식이다. 좌삼면이 성내는 까닭은 이 세상의 중생들이 그릇되게 살기 때문이다. 복을 구하지만 행복의 원인을 심지 않고, 부처가 되고자 하면서도 그 인연을 닦지 않기 때문이다. 그릇된 중생들을 질책하기 위해서 일부러 성내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우삼면이 미소 짓는 이유는 이제 정업(淨業)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결과보다 경과를 중요시할 줄 알고, 올바로 사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원문은 '백아상출' (白牙上出), 즉 흰이가 위로 드러나는 모습이라고 표현되었는데 이것을 미소 짓는 모습이라고 번역한다. 불교의 길에 들어선 이들에 대한 찬탄의 의미이다. 후일면은 대폭소상(大暴笑相)이라고 하였는데, 말 그대로 크게 웃는 모습이다. 이것은 모든 것을 용납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선이나 악,크고 작은 모든 상대적 가치 기준을 초월하여 이 세상을 모두 포섭한다는 뜻이다. 크나 큰 미소는 모든 것을 용납하는 대인의 경지이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십일면관음은 자비의 단계를 변증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자비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베푸는 나약한 패배주의와 혼동되어서는 안 되며, 때에 따라서는 강력한 응징의 힘을 발휘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 점에서 대승 불교의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는 이상이 싹튼다. 즉 그릇된 것을 용납하지 않는 단호한 처신이 곧 자비일 수 있다는 논리이다. 한국 불교에서 이자비의 이상을 가장 잘 실현한 예로는 원효(元曉, 617~686)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는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 《보살계본지범요기八菩薩戒本持犯要記) 등 200여 권의 저술을 남긴 학승(學僧)이었다. 또 그는 대중 불교를 지향하면서 민중적 삶을 살았던 불교인이었다. 그가 대중 교화의 방편으로 '무애가' (無碍歌)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거나, 뱀복이, 혜공(惠空) 대안(大安) 등 사회의 이단아들과 친분을 맺었다는 등의 기사는 모두 자비행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는 불교가 왕실과 일부분의 귀족들에게 점유된 현실을 비판하였고, 생동하는 삶의 한가운데 점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원효가 요석 공주와의 파계로 설총(薛聰)을 얻었다는 기사도 형식주의적 계율관에 대한 도전적 의미가 있다.
의상 또한 자비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특히 그는 이 땅에 관음 신앙을 정착시킨 인물로 꼽힌다.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것은 관음 보살이었다. 중국 유학 당시나 귀국 후에도 관음 보살과의 만남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가 남긴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이나 《백화도량발원문》(百花道場發願文) 등은 모두 관음 보살에 대한 간곡한 신앙 고백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평생을 청빈과 검약으로 일관하였지만 백성들의 도탄에 대해서는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강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문무왕(文武王)이 남산성을 쌓고 백성들의 원성을 자초했을 때 의상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왕이 덕이 높으시면 땅 위에 금을 긋고 '넘지 말라' 하실 때 개미 한 마리 넘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덕이 없으시면 만리장성을 쌓는다 하더라도 하루 저녁에 무너지는 법입니다." 이 말을 듣고 문무왕은 곧 성 쌓는 일을 멈추었다고 한다. 조선의 승병 대장이었던 서산(西山)은 "닦아야 할 길이 한량없지만 그 핵심은 자비와 인용(忍辱)이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불교의 실천적 의지를 천명하는 선언이 바로 자비의 길임을 알 수 있다.
[관음 신앙의 사례〕 민간에서의 관음 신앙은 주로 그 영험에 대한 믿음이 주류를 이룬다. 신라 초기의 명승이었던 자장(慈藏, 610~654)은 그 부모가 분황사의 천수대비(千手大悲) 관음 보살에게 기도하여 얻은 아들이었다. 또 중생사(衆生寺)의 관음 보살은 외국으로 납치되었던 화랑을 돌아오게 만든 영험을 안고 있었다. 의상이 창건한 낙산사의 관음상 또한 많은 영험 사례를 남겼다. 조신(調信)의 설화는 그 대표적 예이다. 신라 말엽에 낙산사에는 조신이라는 스님이 살고 있었다. 그는 남몰래 이웃마을의 처녀를 짝사랑하였는데 이곳 관음상 앞에서 그 처녀와 맺어 주기를 빌곤 하였다. 어느 날 그 처녀가 절에 찾아와서 말한다. "나도 스님을 사모하지만 사람들의 눈길 때문에 이곳에서는 곤란합니다." 이윽고 두 남녀는 야반도주를 하여 태백산으로 숨어 들었다. 처음에는 행복하게 살았지만 후삼국 시대의 전란 통에 갈수록 가세가 기울었다. 나중에는 온 식구가 거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느 날 큰아들이 밥을 빌러 나갔다가 개에 물려서 고통을 받게 된다. 내외는 하염없이 울면서 말한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콩 한 조각이라도 서로 나누는 등 정의가 깊었습니다. 그러나 가세가 빈궁해서 이제 식구들 양식조차 해결할 길이 없으니 대책을 강구해야 하지않겠습니까? 당신은 큰아이를 데리고 일단 낙산사로 가고 나는 둘째와 더불어 친정으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훗날을 기약합시다." 내외가 울부짖으며 해어지는데, 정신을 차리고 본즉 꿈이었다. 하루 저녁 사이에 조신의 머리는 하얗게 세었으며, 더 이상 세속의 욕망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그는 나중에 꿈에서 본 태백산 기슭에 토굴을 짓고 평생을 수도로써 마쳤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는 <조신의 헛된 꿈>이라는 설화인데 우리 나라 소설의 효시로 손꼽힐 만한 작품이다. 또 조선 중기의 고승 언기(彥機, 1581~1644)는 도를 깨달은 후 양치기 생활을 하였다. 그는 양들을 교화함으로써 동물과 의사 소통하는 등의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만년에 그는 대동강 가에 움막을 짓고 거지나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평양 시내에는 거지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조선 후기의 고승 경허(鏡虛, 1849~1912)도 자비행을 몸소 실천한 인물로 꼽힌다. 그는 동학사에서 대도를 이룬 고승인데, 만년에는 만주에서 어린이들을 모아 한문을 가르치는 일로 일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자비의 삶은 종교적 헌신의 단면일 수 있다. 불교의 경우에는 그 시발점을 무아(無我)로서 설명한다. 즉 '나' 라고 하는 존재의 비영원성은 나에게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나' 와 '남' 과의 정당한 관계 수립이 요구되며, 결국 상대방에 대한 헌신으로 나타날 수 있다. "내가 없으면 남이 있을 수 없고, 남이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다"는 연기(緣起)의 이상은 자비라는 실천행으로 완성된다. 이때의 자비는 동체대비의 마음이 선행할 때 가능한 일이다. 나와 중생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진리를 체득해야 하며, 중생과 한 몸이 되어 생활함으로써 결국 중생을 부처로서 성숙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명구 색즉시공(色即是空)도 이러한 사상을 표현하는 선언이다. 색(色)은 물질이며 중생을 상징하는 반면, 공(空)은 부처이다. 이 경구는 중생과 부처가 하나라는 선언이다. 대립적인 가치 기준이 이 경지에서는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속과 열반, 삶과 죽음이 하나의전체로서 파악되는 지혜이다. 이 이상적 경지를 이룬 이가 보살이며 부처이다. 따라서 불교의 자비는 공과 무아에 바탕을 두면서 불이(不二)와 중도를 실천하는 이상적 실천 의지인 셈이다. 한국 불교의 1600년 역사는 이 자비행의 발자취였고, 역대의 위인들 또한 자비의 실현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 보살 ; 불교)
※ 참고문헌  정병조, 《불교입문》, 불지사, 1996/ 中村元, 《慈悲》,岩波書店, 1979. 〔鄭柄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