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 특히 고난 · 불행 · 재해 등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 또는 그 시설에 베푸는 물질적 · 경제적 원조. 그리스도교에서 자선은 전통적으로 회개의 주요한 형식 중 하나로 여겨져 왔으며, 기도 · 단식과 함께 신앙 생활의 주요 요소를 구성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반드시 이웃과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동반해야 하며, 그것은 자선 행위로 증명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자선은 이웃 사랑의 직접적 표현이자 구체적인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신학적으로는 이웃 사랑의 구체적 열매인 친절과 자비 가운데 이웃의 곤경에 대한 연민과 구제를 표현하는 덕(德), 곧 자비와 더욱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베풀어지는 선행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선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선행이다. 하지만 단지 가진 자들이 가지지 못한 자들과 나눈다는 윤리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복음적 요구이다.
[성서에서의 언급] 구약성서 : 구약성서를 기록한 히브리어에는 자선을 뜻하는 용어는 없다. 단지 "구제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 '나탄' (@@@)이 없는 자에게 필요한 것을 값없이 선사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동족에 관한 여러 가지 규정이나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도리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레위 25, 35-38. 39-42).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은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구약성서에서부터 자선이 적극적으로 강조되고 장려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자선의 개념은 정의의 맥락에서 이해되었다. 이를테면 야훼께서 정의롭게 행동하시는 것처럼 그분을 믿는 이들도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언급되는 '정의' 의 개념은 법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의 개념이다. 이웃과의 관계에 충실함이 정의이고 의로움이며, 가난한 이웃과의 관계에 충실함은 자선의 형태로 구체화되어야 했다. 이것은 70인역 성서에서 그리스어 '엘레에모시네' 가 히브리어로 하느님의 자비(시편24, 5 ; 이사 59, 16),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성실한 응답인 정의(신명 5, 25), 동족을 위해 베푸는 인간의 자비(창세 47, 29) 등을 의미한다는 데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인간 상호 간의 자비 곧 이웃 사랑은 행위로 실천되지 않으면 진정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 행위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궁핍한 사람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베푸는 것이다. 궁핍한 사람에 대한 실천적 사랑이 이웃 사랑의 가장 우선적인 임무이며(신명 15, 11 ; 이사58, 4-7), 의로운 질서의 재건을 돕는 일이다. 자선은 정의를 가져다준다. 해질 무렵 가난한 사람이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담보로 잡힌 그의 겉옷을 돌려주는 일은 야훼 앞에서 정의로운 일이다(신명 24, 13).
자선은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실천되어야 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이러한 의미가 담긴 자선의 의무를 여러 가지로 규정하였다. 이런 규정은 확실히 고대로부터 전래된 것이다. 이 규정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일곱째 해마다 땅을 놀리고 묵혀야 할 의무(출애 23, 11), 수확하면서 남은 이삭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밭과 포도밭에 남겨 두어야 할 의무(레위 19, 9-10 : 23, 22 : 신명 24, 20-21 : 룻기 2, 2-8), 삼 년마다 소출의 십일조를 레위인과 이방인, 고아, 과부와 같이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하여 저장해 두어야 할 의무(신명 14, 28-29 : 토비 1, 8)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외국인에 대한 규정들 역시 자선의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레위 19, 33-34). 가난한 자들이 동족이든 외국인이든 너그러운 마음으로(신명 15, 11 : 잠언 3, 27-28 : 14, 21)정성껏(집회 18, 15-17) 그들의 호소에 응해야 한다. 한편 유배 이후에는 개인적인 자선의 종교적 성격이 강조되었다. 욥은 하느님을 향한 자신의 경외심이 궁핍한 이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쉴 곳을 베풀어주도록 재촉한
다고 말한다(읍기 31, 16-23). 자선은 죄를 깨끗이 없애주고 죽음에서 구해 주며(토비 12, 9 ; 다니 4, 24 : 집회 3,30), 베푸는 이에게 하느님의 호의를 가져다준다(토비 4,7 ; 잠언 21, 13). 그런가 하면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거절하면 그에 따른 응보가 내린다(잠언 21, 13). 하느님께서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집회4, 1-6).
이처럼 자선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 행위의 실천인 한(잠언 19, 17), 자선은 단순히 박애의 차원을 넘어서 종교 행위로써의 가치를 지닌다. 자선은 성서가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을 참된 행복이라고 간주할 만큼 영원한 사랑의 표시로 확고히 자리잡고 있다(시편 41, 1-4). 자선은 또한 죄를 없애주는 구속의 가치를 지니며(집회 3,30),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와 같은 것이고(집회 35, 2) 자기 재물을 하늘에 쌓는 행위이다(집회 29, 12).
신약성서 : '자선' 이라는 의미의 단어는 그리스어 '엘레에모시네' (g入enuooivm)에서 비롯되었다. 이 단어는 본래 "동정"을 의미하였는데, 자비로운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마태 6, 1-2 ; 루가 11, 41 ; 사도 9, 36). 그런데 신약성서에서 자선은 주로 사랑과 연민에서 우러나오는 종교 행위로 간주된다.이러한 자선의 의미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했던 예수의 활동 자체가 자선의 의미를 가지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루가 4, 18) 그분의 메시아로서의 사명 자체가 자선의 의미를 복음적 차원으로 드높인다. 특히 가난한 이들의 복음사가라고 불리는 루가의 저술(루가 복음과 사도 행전)은 이러한 사실을 부각시키며 자선을 권고한다. 그리고 야고보서와 함께 자선이 내포하는 정의의 의미에 주목하고 있다.
복음에 따르면, 예수가 굶주린 군중에 대해 가졌던 측은한 마음이 자비 또는 자선의 발로가 되었다(마르 8, 2-3). 상처 입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루가 10, 29-37)나 최후 심판의 비유 이야기(마태25, 31-46)는 이러한 자비 실천의 복음적 모델들로서, 자선의 실천은 미룰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곧바로 실행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예수는 이 자선을 단식과 기도와 더불어 신앙 생활의 중추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교만한 마음이 없는 순수한 자선을 명하였다(마태 6, 1-8). 자선은 하늘에서 보상받을 가치가 있으며(마태 6, 4.20 : 19, 27-29 ; 25, 40 : 루가 12, 33 : 16, 1-9), 베푼 사람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로 만든다(루가 6, 35). 자선을 베풀 때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루가 6, 35) 어떤 청이든 거절함 없이(마태 5, 42 : 루가 6, 30) 오히려 남들이 "바라는 대로" (루가 6, 31) 아낌없이 행해야 한다(마태 10, 8).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이다(마태 26, 11 : 마르 14, 7 ; 요한 12, 8). 비록 자신이 가진 것은 없을지라도(사도 2, 44), 그리스도의 선물을 전달해 주고(사도 3, 6) 궁핍한 사람에게 베풀(에페 4, 28) 의무는 항상 남아 있다.
자선이 근본적 의무인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단순히 그것이 보상받을 가치가 있고 하늘에 보물을 쌓는 행위(루가 12, 21. 33-34)여서가 아니다. 자선은 자기 이익을 셈하는 타산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이 자선의 수령 자라는 사실, 다시 말해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라는 말씀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이 천명되면서 신약에서 자선의 가치는 구약의 경우보다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앙양되었다.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이 자선을 행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자선을 베풀어야 하는 것은(루가 11, 41 : 12, 33 : 18, 22) 자기 재물에 미련을 갖지 않고 온전히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마태 19, 21 : 마르10, 21 : 루가 18, 22),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예수를 본받아 자유로운 자가 되기 위해(2고린 8, 9)마땅히 실천해야 할 일이다.
루가는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의 절반을 떼어 준 세관장 자케오의 이야기(루가 19, 1-10)와 입을 것과 먹을 것을 궁핍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세례자 요한의 충고(루가 3, 11), 그리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말고 돈을 꾸어 주라는 그리스도의 충고를 자선과 연관 짓는다. 또한 바오로가 자기에게 필요한 것뿐 아니라 이웃이 필요로 하는 것까지 마련하기 위해 손수 일하였음을 지적한다(사도 18, 3 : 20, 34-35). 그러나 바오로는 곤궁을 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편견을 깨트리고 교회의 일치와 친교를 위해서도 물질적인 자선을 강조하였다(사도 11, 29 ; 로마15, 25-28 : 갈라 2, 10 : 1고린 16, 1-4 ; 2고린 8-9장).자선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두 교회가 같은 '그리스도의 몸' 에 속하는 지체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를 비롯한 그 밖의 다른 서간들 역시 생계 수단을 소유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람들이 궁핍한 같은 공동체의 신도들을 도와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요구한다(야고 1, 27 : 2, 14-17 ; 1요한 3, 17 ; 1베드 4, 8-10).
[교회의 전통적 이해〕 이웃 사랑의 실천 : 가난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세기를 통해 교회가 지켜온 중요한 특성이다. 실제로 교회는 오랜 세기 동안 가난한 사람 · 고아 · 불구자 · 환자 그리고 다른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조직적으로 봉사하였다. 초대 교회는 깊은 존경심으로 애긍을 행하였고(사도 2, 44-45 ; 4,34-37), 부제들과 과부들을 뽑아 특별히 공동체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게 하였으며(사도 6, 1-6 ; 1디모5, 9-10), 초기 교부 시대에는 빈자 구호소와 환자 수용소를 설치하였다. 교회는 이것을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으로써 이해하였다. 이웃 사랑은 주님의 명시적인 계명으로서 하느님 사랑과 함께 가장 큰 계명(마르 12,28-31)인 동시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명한다.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으면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다(1요한 3, 17). 더욱이 자기가 가진 것을 형제와 나누지 않고서는 성찬의 나눔의 신비에 진정으로 참여할 수 없다(1고린 11, 20-22). 성서는 반복해서 예수가 당신 제자들에게 이웃 사랑을 요구하실 뿐만 아니라(마태 7, 21 ; 25, 31-46 : 루가 10,29-37) 손수 모범을 보여 주신다고 말한다(루가 4, 18-21; 마태 20, 28 : 마르 10, 45 : 요한 13, 12 이하). 사도들 또한 이웃 사랑을 권고하며 구체적인 모범을 보여 준다(1고린 4, 20 : 13, 4-7 : 2고린 8, 9 에페 4, 32-5, 2 : 디도3, 8. 14 : 1요한 3, 16-18 : 야고 2, 14-17).
신학적으로 이웃 사랑은 '다른 사람의 선(善)을 바라는 것' , 곧 '이웃에게 선' 이 되기 위한 의지의 행동이라고 정의된다. 교회는 신학적 반성을 통해 이러한 이웃 사랑의 의무를 명확하게 하면서 그 구체적인 열매로 친절과 자비를 제시하였다. 친절은 어떤 경우든 온전히 이웃을 향하는 마음, 곧 호의와 존경 · 상낭함 · 공손 등과 같은 구체적인 규범들을 통틀어 요약하는 덕(德)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친절은 무엇보다도 이웃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초자연적 의미에서 나온다. 그러나 자비는 이웃의 곤경에 대한 연민과 구제를 표현하는 덕이다. 따라서 그것은 일반적으로 이웃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궁핍한 이들을 향하는 그리스도인의 덕이다. 바오로는 하느님의 사랑을 상기시키면서 이를 권고할 뿐만 아니라(골로 3,12), 예수 자신도 자주 모범을 보이며(마태 15, 32) '진복팔단' 의 행복들 가운데 하나로 제시한다(마태 5, 7). 곤경에 처한 이웃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 또는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고 육적 또는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기에 자비는 곧 영적이고 물질적인 자비를 동시에 포함한다. 자선의 일차적인 의미는 바로 이 물질적인 자비에서 연유하나 반드시 여기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가 우리 모두를 사랑하고 죽으셨기에 이웃 사랑은 정신적 · 물질적으로 필요한 모든 사람을 다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토마스 아퀴나스(12241225-1274)가 아주 간명하게 해석한 바와 같이 "자선이란 근본적으로 자비의 실천이다" (Summa Theologiae, Ila Ilae q. 32. a. 4). 이러한 자선은 이웃 사랑의 더욱 직접적인 표현으로서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그러나 성서에서 제시한 자선의 가치들을 보장 받기 위해서는 자선을 베풀 때 하느님이 보여 준 모범에 따라 실천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무엇보다 우선 지향이 순수해야 한다. 지향은 인간적 행위를 고취하는 혼(魂)과 같은 것이고 인간적 행위에 실질적인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가르친 것처럼 자선은 "남모르게" 베풀어야 한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당신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마태6, 3-4). 다음으로 자선은 자애로운 사랑의 친교가 되어야 한다. 겉치레를 배제하고 잘난 체하는 교만을 멀리하며(마태 6, 1-2), 자신이 마치 자선의 수령자인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진실한 존경과 동정적인 친절로 대접해야 한다. 자선은 또한 이해 관계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루가 6, 35 : 14, 4) 가능한 한 신속하게 도와야 한다(잠언 3, 27-28). 이런 의미에서 자선은 단순히 물질적인 원조만을 뜻하지 않는다. 자선은 오히려 인정 많은 사랑의 지향을 실천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 아낌없는 베풂을 기쁘게 실천하라고 권고한다(로마 12, 8 : 2고린 9, 7)
그러나 자비의 실천인 자선 행위가 자발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자선이 지닌 구원의 가치에 기초하여 자선을 기도와 단식과 함께 신앙의 성숙을 위한 보속으로, 회개의 주요한 형식으로 강조해 왔다. 또한 이웃 사랑의 직접적 표현으로 자선을 베풀의무는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실천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비록 그것이 복음적 요구에 따른 것이라고 해도, 가난한 형제를 돕는 방법과 능력에서 인간은 한계를지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웃이 당하는 가난과 재난은모두 똑같지 않고 정도의 차이가 있기에, 그들을 위한 이웃 사랑에 요구되는 도움과 희생의 정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구체적 상황에서 의무의 범위를 결정하는 양심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만약 이웃의 궁핍이 극단적이고 누군가의 도움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면, 그때의의무는 매우 엄격한 것이 된다. 그러나 필요의 조건이 진실로 극단적이지 않다면, 의무의 범위와 강제의 결정은현명한 판단을 요청한다.
그렇다면 곤경에 처한 이웃을 위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통 어느 정도로 희생해야 하는가? 종래의 도덕률에서는 자기 생활과 지위를 알맞게 영위하고서도 여유가 있는 경우, 여분의 것을 궁핍한 이웃에게 주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경우 자선은 사랑의 의무라기보다 정의의 의무로 여겨졌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은 자선을 중대한 의무로 간주하지 않고 단순히 쓰고 남는 여분의 것을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였다(사목 69항). 교황 요한 23세(1958~1963)는 현대에서 "무엇이 여분의 재산인가를 규정할 때에는 타인의 필요를 척도로 삼아야 한다"(라디오텔레비전 담화,1962.9. 11 ; AAS 54(1962),p682)고 가르쳤다. 오늘날의 윤리 신학도 이 문제를 필요의 중대성에 따라 필요한 도움과 희생의 정도를 극도(extreme) · 중대(grave) · 보통(ordinary) 세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첫째, 이웃이 극도의 필요에 처했을 때는 자신의 큰 불편이나 물질적 희생이 따르더라도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 둘째, 중대한 필요에 처해 있는 이웃에 대해서는 보통의 희생으로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 셋째, 보통의 필요에 처한 사람에게는 보통의 애덕 행위로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재산 능력에 따라 다르다. 재산이 많은 사람은 필요한 사람에게 더 자주 그리고 더 관대하게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
구체적인 실천 덕목들 : 교회의 전통은 복음 묵상을 바탕으로 한 교부들의 자선에 대한 가르침을 토대로 영적 또는 정신적 차원의 자비 실천과 육적 또는 물질적 차원의 자비 실천과 같은 일곱 가지 자선 행위들을 성문화하였다. 교부들은 최후 심판 이야기(마태 25, 31-46)를 해석하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 자선은 바로 그리스도께 행한 것과 같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여기에는 자선을 통해 그리스도의 현존을 본다는 믿음이 강하게 깃들어 있다. 육적인 자비의 실천 곧 자선 행위는 락탄시오(250?~321?)가 마태오 복음에 열거된 '여섯 가지 자선 행위' (25, 35-36)에, 토비트서에 나오는 "죽은 이들을 묻어 주는 일"(1, 17 : 12, 13)을 첨가하여 처음으로 일곱가지 자선 행위를 언급하였다. 즉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일, 집 없는 이에게 머무를 곳을 제공하는 일,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는 일, 병든 이를 돌보아 주는 일, 감옥에 갇힌 이를 찾아 주는 일, 죽은 이를 묻어 주는 일 등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자선 행위들의 목록이 고정되어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상황에 따른 여러 가지 자선 목록들이 존재하였으며, 육적인 차원의 자비 실천과 같은 이름으로 영적 차원의 자비 실천이 함께 언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 25장에 나오는 여섯 가지 자선 행위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거론되었으며, 12세기 말까지는 이 여섯 가지 목록이 고정화되어 나타났다. 일곱 가지 자선 행위의 목록은 12세기 말에 가서야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교회의 자선 활동은 여섯 가지 중심에서 일곱 가지 중심으로 바뀌었다.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이 목록들이 '일곱' 이라는 상징적인 숫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다른 모든 자선 활동의 영역은 여기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렇다고 이 틀이 절대적으로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폭넓게 허용되었다. '일곱' 이라는 자선 행위의 숫자 규정은 '일곱' 성사와도 같이 자선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데 더 큰 역할을 하였다.
이와 함께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당시 신학자들은 또 다른 영적 차원의 자선 행위 목록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적 차원의 목록들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토마스는 원칙적으로는 영적 차원의 자선 행위를 육적인 자선 행위보다 우위에 두지만,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육적인 차원의 자선 행위 실천을 먼저 강조하였다. 영적인 자선 행위는 육적인 자선 행위와의 조화 속에 표명되었으며, 특별히 성직자들과 영적 지도자들의 의무로 요구되었다. 오늘날 전해 오는 영적인 자선 행위의 목록들은 무식한 이를 가르치고, 고민하는 이에게 조언을 주고,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고, 실수하는 이를 교정해 주고, 가해자를 용서해 주고, 나쁜 사람을 참아 주고,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 등이다. 영적인 자비의 실천은 변화가 심한 우리 시대의 경제 · 사회적 조건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다. 또한 육적인 차원의 자선 목록들 가운데 병든 이를 돌보는 일과 갇힌 이를 찾아 주는 일은 영적인 차원의 자선이기도 하다. 이 모든 자선 행위들은 더욱 확대되고 보충되어야 하지만 아직까지도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다.
[현대적 의미]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모든 면에서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는 현대 세계에서 자선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가난의 현대적 양태와 자선의 주 대상인 오늘의 가난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부터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교도권은 교황 회칙과 여러 문헌들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 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사랑' 이란 표현 속에서 이미 그 대상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가난은 물질적 궁핍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궁핍까지 포함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음식, 음료, 의복, 주택, 의료, 직업, 교육 등 참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없고, 재난이나 질병으로 고통을 받으며, 추방을 당하고 옥고를 겪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그들을 찾아 내어 열성적으로 보살피고 위로하며 도와 고통을 덜어 주어야 한다"(평신도 8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8~ )는 회칙 <사회적 관심>(Solicitudo Rei Socialis, 1987. 12.30)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 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사랑' 이라는 말의 의미를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의 실천에서 그 편을 먼저 선택하는 특별한 형태의 우선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 일차적 대상으로 "굶주린 사람들, 곤궁한 사람들, 집 없는 사람들,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더 나은 미래의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배려함에 있어서 특수한 형태의 가난, 즉 기본 인권이 결여된 가난, 특히나 종교 자유의 권리와 경제적 참여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빈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고 강조하였다(42항). 최근의 회칙 <백 주년>(Centesimus Annus, 1991. 5.1)은 이제까지 교회가 펼쳐온 자선 활동의 의미를 피력하면서 오늘의 사회에 "경제적 빈곤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신적인 빈곤이 만연해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이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교회로 하여금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빈곤이 지속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세계로 향하도록 촉구"하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여기에서 거론되고 있는우선적 사랑의 대상은 이른바 제4 세계라 불리는 서구 여러 나라의 "버림받은 이들 · 노인들 · 병자들 · 소비주의에 희생된 이들의 가난"과 "피난민들과 이주민들의 가난"이다(57항).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때, 현대 세계에서 자선은 그리스도인에게 더욱 더 전인적인 투신을 요구한다. 가난의 문제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 문화적 구조의 문제와 깊이 연루된 것이 라면(<사회적 관심> 36~37항), 교회의 모든 자선 활동과 자선 사업도 사회적인 차원에서 재조명되어야 한다. 필요의 정도와 규모가 예전보다 더욱 더 중대해지고 커진 만큼 사랑의 의무도 그에 따라 더욱 "긴박하고 광범위하게" 실천되어야 한다(평신도 8항). 이를 위해서는 가난한 이들의 구제를 위한 그리스도인 개인의 결단만으로는 부족하며,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구제하기 위한 일련의 사회적 활동이 요청된다. 회칙 <사회적 관심>도 "주님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모든 차원에서의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43항). <백 주년>은 교회의 "가난한 이에 대한 사랑은 정의의 추진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며, 자선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함께 기존 사회의 "구조의 변화" 를 사람들에게 요청하고 있다(58항). 현대 사회에서 자선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오늘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사랑을 긴급히 실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4 애긍)
※ 참고문헌 A. Valsecchi, Elemosina, Leando Rossi · Ambrogio Valsecchi eds., Dizionario Enciclopedico di Teologia Morale, Edizioni Paoline, Roma, 1981, pp. 353~3571 M. Rodiriquez, Alms and Alms-giving(in the Bible), (NCE》 1, pp. 328~3291 J.M. Perrin, Alms and Alms- giving(in the Church), (NCE) 1, pp. 329~331/ Charles SJ. White, (ER) 1,pp. 214~216/ C. Wiéner, 광주 가톨릭대학교 옮김, 《성서 신학 사전》,광주 가톨릭대학교, 1984, Pp. 499~501/ K. H. 페쉬케, 김창훈 역,《그리스도교 윤리학 제2권 : 對神 및 對人 倫理》, 분도출판사, 1998, pp.233~266/ 권혁주, <자선(慈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이해>, <사목>263호(2000. 12), pp. 6~271 전달수, <자선의 영성적 의미>, <사목> 263호(2000. 12), pp. 53~61/ 임승필, <자선>, <경향잡지> 92호(2000. 12),pp. 93~98. 〔李 健〕
자선 慈善 [라]eleemosynae [영]almsgi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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