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인간에 의하여 변형된 세계, 즉 '문화' (culture)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 또는 인간을 포함한 감각으로 인식되는 대상 세계 전체.
[어원과 의미〕 '자연' 은 세계의 일부로서 그 속에 포함되기도 하지만 세계와 동일하게 간주되기도 한다. 즉 넓은 의미에서 '우주 전체' 를 의미하며, 좁은 의미로는 '인간을 포함한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계' 또는 '인간 삶의 영역 안에서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제한된 세계'를 뜻한다. 이렇듯 역사와 문화에 따라 자연의 의미는 다양하게 표현되어 왔으며, 다양한 문화 안에서 자연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자연은 첫째, 자연 과학 또는 생물 과학의 연구 대상을 의미한다.둘째, 모든 존재의 본질을 의미한다. 셋째, 인간의 자연 환경과 그 안에 포함된 인간 이외의 모든 생명체를 의미한다. 넷째, 인간까지도 포함하는 전체 우주를 의미한다.
자연이란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뛰시스' (Фㅇㅇㅇ에는 신약성서에서 '존재의 본질' 이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로마 11, 21. 24 : 갈라 2, 15 : 에페 2, 3). 즉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구조나 체질을 의미한다. '뛰시스' 는 '됨' (becoming)을 의미하는 동사 '뛰오' (0000)로부터 유래되었으며, 그 어근 '휘' (Фㅇ)는 '있음' (being)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원적으로 '뛰시스'는 '있음' 또는 '됨' 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의미에 대해 고대부터 현대까지 많은 철학자들이 논의하였다. 그런데 이 용어는 그리스 철학에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우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하는 힘으로 사물의 '본성' (本性)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다른 하나는 모든 자연적 존재의 총체 또는 존재 자체라는 의미로 '우주' 또는 '세계' 를 뜻하는 그리스어 '코스모스' (koopos)와 거의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자연이란 의미를 지닌 영어 '네이처' (nature)는 '태어나다 란 의미의 라틴어 동사 '나식' (nasci)와 '탄생, 타고난 성격, 타고난 힘, 생명력' 을 뜻하는 명사 '나투라' (natura)에서 유래하였다. 이 단어는 13세기경 '생명력'과 '활력' 이라는 의미가 첨가되었으며, 14세기에 들어와 타고난 성질 또는 본질, 즉 '천성' 을 뜻하게 되었다. 이것을 기초로 '어떤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는 고유한 힘' 과 '세계를 창조하고 자연을 만들어 낸 신(神)의 힘'이라는 뜻이 포함되었다. 16세기부터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 즉 '인간성' 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17세기에 이르러 처음으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자연 개념인 '물질 세계, 지구의 형태, 자연계' 라는 의미가 추가되었다.
한자 '자연' (自然)의 의미는 '저절로 그러함' 이며, 사물의 총체라는 의미는 없다. 사물의 총체라는 의미로는 '천지' (天地)와 '천연' (天然) 등의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 용어에서 '자' (自)는 있는 그대로' 라는 뜻으로, 외부의 힘이나 인위(人爲)에 의하지 않는 본래적으로 있는 모습을 지칭한다. 결국 그리스어 '뛰시스' 의 첫 번째 의미처럼 사물의 본성(本性)이라는 뜻을 지닌다. 그러나 자연계(自然界)라고 할 때는 '뛰시스' 의 두 번째 의미에 해당되어 인간에 대립하는 '객관적 세계' 를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 '자연' 은 천지 만물의 끊임없는 생성 · 변화에 대한 상태나 원리에 대한 설명으로 '스스로 그러함' 또는 '저절로 그러함'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는 자신의 존재를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는 자발성(spontaneity)과 자기 충족성(充足性)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명(生命)의 본질적인 모습을 형용한 개념이다. 우리말 사전에 나타난 자연의 사전적(辭典的) 정의는 우주 또는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사물이나 현상 또는 인간 세계와 독립하여 존재하는 우주 질서와 현상' 이다. 이러한의미에는 한자와 영어의 의미가 혼합되어 있다.
'자연' 을 뜻하는 그리스어와 영어가 '자연' 과 '본성'이라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음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은 포괄적 개념으로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단 하나로 통합하여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개념의 발전] 고대 : 서양의 '자연' 이란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83~322/321)의 철학에 기초한 '목적론적 자연관' 에 의해 발전되었다.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자연 만물이 자발적으로 성장하는 원인이 그 자체 안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플라톤(기원전 428/427~348)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 세계 안에 그 운동의 원인이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원인은 만물의 진정한 본질인 초경험적 '이데아' (Idea) 세계에 따로 실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인간의 오감(五感)으로 파악되는 자연 세계는 가변적이고 유한한 것이므로 실재하지 않는 것이며, 가장 근원적인 존재는 불변하고 영원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푸시스' 를 '자체 안에 운동의 원리를 가지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 로 보았다. 그리고 그 특성을 스스로 창조하는 행위(autopoiesis)로 보았다. 그는 '푸시스' 운동의 원인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 세계 속에서 찾았으며, 창조하고 통치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지닌 전 우주를 지칭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성적 영혼을 가진 인간을 인간 이외의 자연적 존재와 구분하고, 그 자연적 존재들이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인간의 자연 의존성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후 이러한 영향으로 자연과 그 외의 많은 실체, 즉 은총 · 초자연 · 역사 · 인간 · 문화 등을 구분하는 이분법이 서구 전통의 특징으로 비춰졌다.
한편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자연' 을 언급할 때 '뛰시스 보다 '창조' 라는 의미의 '크티시스' (kriong)라는 말을 선호했다. 신약성서는 창조된 질서에 관해 말할 때 언제나 삼위(三位) 중 제2위(성자) 안에 그 질서가 통합되고 유지되며, 제2위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하였다(요한 1, 1-18 : 골로 1, 15-20 : 히브 11, 3). 또한 성서 전통은 창조 세계의 출발점이 하느님 안에 있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 없이 세계는 결코 현재도 미래도 없다고 단정하였다. 동방 교부들은 이 전통을 계승하였다. 바실리오(Basilius, 329~379)는 《6일 창조에 관한 강론》(Hexaemeron)에 수록된 9개의 강론에서 "세계는 때가 되어 저절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말씀으로 시작된 것이다·····천지 창조의 엿새는 24시간으로 된 날들이 아니라, 기나긴 세월이다"라고 말했다.
니사의 그레고리오(Gregomius Nyssenus, 335?~395?)는 창조 세계를 논하는 데 있어서 더욱 철학적이다. 그에 의하면 시 · 공간의 외연(外延)과 끊임없는 변화가 창조 세계의 특징이며, 이것이 창조주와 구별되는 점이다. 참여에 의한 연속성이 있는 동시에 초월에 의한 불연속성도 있고, 하느님과 세계 사이의 외연도 있다. 그리고 창조 세계는 시 · 공간의 과정, 즉 생명을 통하여 이것에서 저것으로 옮겨 다니는 질서 정연하고 연속적인 과정인 것이다. 생명은 시원(始原)에서 완성에 이르는 과정의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그 과정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생명의 진화를 통해서이다. 또한 더 나은 선(善)을 바라는 인간의 열망과 선을 이루어 갈 수 있는 인간의 자유로운 창조성은 세계를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요인이다.
중세 : 이 시기의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통해 하느님의 창조를 설명하였다. 그들에게 자연 세계는 '하느님 의지' 의 표현이며 성서와 같이 '하느님계시' 가 적혀 있는 또 하나의 '하느님의 책' 으로 이해되었다. 자연은 생성하는 힘을 가진 자율적 존재로서의 고유성과 법칙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목적론적 체계 안에서 인간 이외의 자연적 존재들은 단지 인간을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12241225-1274)에 게 '자연' 은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는 '자연의 자율 운동' 은 하느님께서 부여한 것이며, '자연의 원리' 를 탐구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으로 보았다.
한편 비잔틴 전통에서 막시모(580~662)는 '자연' 이란 단어를 '어떤 집단의 실체들을 이루는 구성적 본질' 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는 포괄적 의미의 '자연'을 의미할 때 '창조' (kiong)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연의 본래적 통일성은 그 공통된 기원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 기원은 비존재(non-being)에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하나로 묶어 주는 '로고스''로 (Logos)의 창조적 힘에도 있는 것이다. 자연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분 안에서 성취된 하나의 종말론적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동시에 지닌 분인데, 그분은 승천한 자신의 육신을 천상, 즉 영원한 영역으로 가지고 가셨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막시모는 창조를 구원과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근대 : 16세기까지 서양에서는 자연을 유기체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즉 자연은 살아 있는 만물의 생성 · 성장 과정을 의미하였고, '발생' (genesis)과 동의어적으로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갈릴레이(G. Galilei, 1564~1642)와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 뉴턴(I. Newton,1642~1727)에 의해 확립된 근대 과학은 자연에 부여되어 있던 자체적 생명 자율성을 부정하고 기계론적 세계관을 제공하였다. 결국 자연은 자연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로서 인간 목적을 위해 인간에 의하여 조작될 수 있는 수동적인 물질로 전락하였다. 그들은 자연 세계에 대하여 철저하게 기계론을 주장하였지만, 운동의 제1 원인으로서 하느님을 설명하였다. 즉 초월적인 하느님에 의하여 창조되어 운동과 법칙이 부여된 자연 세계는 자율적으로 운동 · 발전하며, 거기에는 어떠한 정신적인 것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계론이 가능하였다. 인간의 몸 역시 기계적 체계로 간주되었다. 기계로서의 인간이 자연과 다른 것은 '정신' 이라는 실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인간의 몸은 정신과 상호 작용한다. 인간의 몸을 포함한 자연 세계는 초자연적 정신 세계와 분리되어 객관화되었고, 자연은 법칙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 법칙은 경험적 방법에 의하여 발견될 수 있는 것이었다.
한편 베이컨(F. Bacon, 1561~1626)에게 있어 '지식' 은 자연을 지배하는 힘이었으며, 그는 자연에 대한 실험을 통해서 자연을 통제하는 방법을 제안하였다. 칸트(I. Kant, 1724~1804)는 자연 법칙이 자연 자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주체의 고유한 인식 능력에 의하여 구성될 뿐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근대 과학이 온전히 기계론에 의해서 주도된 것은 아니었다. 베르그송(H. Berg-son, 1859~1941)은 자연을 기계가 아닌 '계속적으로 창조되는 전체' 로 보았고, 화이트해드(A.N. Whitehead, 1861~1947)는 우주를 모든 차원에서 친밀하게 상호 연결되고 완전을 위하여 '진화하는 과정에 있는 우주' 로 보았다.
현대 : 현대 과학은 '우주' 가 시간적으로 생성 · 발전하는 과정(time-develomemental process)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우주는 일회적인 창조로 완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있는 우주, 자기 조직하는 우주 (self-organizing universe)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근대 과학에서 '자연' 은 종종 창조주나 인간 정신과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실체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더 이상 세계라는 것을 객관적 존재로 가정할 수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현상 세계는 인간의 의식과 경험 속에서 나타나는 어떤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인간 정신과 세계 속에서 작용하는 에너지 파로 구성된다는 입장이다. 현대 과학은 창조주를 언급하지 않고서도 이런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과학 자체에는 하느님과 인간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개념의 기반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을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로서 자연에 대한 개념은 그것이 인간을 포함하든 배제하든 오도되고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태초부터 완성에 이르는 하느님의 길을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시작과 하나의 운명적인 길을 갖는 역동적인 창조 세계의 질서를 알고 있을 뿐이다. 무(無)에서 창조된 창조 세계는 본래 이를 구성하는 힘이자 현재를 지탱하는 힘인 하느님의 창조적 말씀을 지니고 있다. 창조 세계의 완성된 통일체는 종말론적이며, 이러한 완성된 통일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한다. 그는 만물을 자기 안에서 이미 하나되게 한 분이며, 그것들을 유일한 친교 제물로 하느님께 드리는 분이다.
〔동양의 자연관) 서아시아 전통은 '세계' 와 '초월적 신(神)'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격을 설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힌두교와 도교는 일반적으로 세계가 하느님이고 하느님이 세계라고 간주하는 서양의 중세 스콜라 신학과 비슷한 정서를 지니고 있다.
불교는 신(神)에 관한 질문을 일체 거부한다. '모든 사물' 은 여타의 모든 사물에 의존하고 역동적 변화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세계와 인간은 상호 연관되고 상호작용하는 두 실체이다. 따라서 불교의 인연설(因緣說)과 연기설(緣起說)은 모든 사물을 함께 연계시키면서 초월(超越)이라는 단절을 피해간다. 한편 인도 철학의 6파정통 체계 중 하나인 상키아 학파(Samkhya)는 이원론적이다. 그래서 자연(prackrt)은 인격(purusha)과 상반된 개념이다. 이는 비포괄적 자연관이다. 그로 인해 자연을 자체의 의식이나 목적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상호 작용하는 다양한 질료(gunas)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이러한 입장과 반대로 인도의 철학자 상카라(Sankara, 700?~750?)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발전시켰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은 인간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브라만(Blaman) , 즉 절대자체이다.
중국 도교(道敎)의 자연 개념은 '유기체적(有機體的) 자연관' 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도교에서는 자연을 생명적 유기체로 보고, 세계를 변화와 생성의관점에서 이해하였다. 이는 기(氣)에 대한 사유로 나타났다. 음양(陰陽)은 자연의 규칙적 주기를 정식화한 것이며, 오행(五行)은 자연 안의 계기들이 협력과 투쟁에 의하여 상호 작용하는 방식을 정식화한 것이다. 자연이라는 유기체의 내부 요소와 조직들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상호 영향을 미치며, 이 과정에서 상호 억제와 상호 촉진에 의한 동적 균형을 유지한다. 이와 같은 원리에 기초한 '음양 오행설' 에서 각각의 유기적 단위는 독립성과 종속성을 동시에 갖는다. 따라서 자연이라는 전체에서 볼 때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전체인 자연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존재이다. 결국 도교는 서로 반대되지만 보충적인 원리인 음양이 신(神)과 세계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현실을 이룬다고 본다.
[그리스도교의 자연관] 창조물로서의 자연 : 고대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자연은 이질적인 개념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연을 '하나의 독립된 실재인 물질 세계' 로 이해 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구약성서에는 그리스어 '뛰시스' 가 지닌 의미의 히브리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자연이란 의미로 사용된 보다 적합한 단어는 "창조물" 이다. 따라서 '창조' 개념이 문제가 된다. 자연은 창조된 세계, 즉 창조물일 뿐이다. 자연은 결코 하느님이 아니며, 하느님은 자연을 초월하는 분이다. 창조주와 창조물은 질적으로 다르다. 창조물인 자연은 창조주 하느님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으며, 하느님은 창조주로서 창조물과는 독립된 초월자이다. 지혜서와 마카베오서에 몇 차례 언급된 '뛰시스' 는 대체적으로 '인간 본성' 이나 '인간이 지닌 능력' 을 뜻하며, 간혹 '하느님이 창조한 것 중 아직 타락하지 않은 원상태' 를 "자연적"이라고 표현하였다.
4세기경 그리스도교는 당대의 주장들에 대응하면서 '무로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 교리를 정립하였다. 창조주 하느님이 무에서 유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 즉 비인격적 실체에 의한 우주 생성이 아니라 인격신의 의지에 의한 우주 창조라는 것이다. 성서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 세계가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며, 세계는 그 존재 근거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지 않다' 라고 분명히 말한다.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의 근저에는 인식 주체인 인간의 허무성(虛無性)과 의존성(依存性)의 체험이 있다. 그리스도교는 세계가 유한하고 불확실하며 이는 허무로 체험되기 때문에 "무로부터"라고 고백하며, 이러한 유한하고 불확실한 존재 또한 주어진 존재라는 의미에서 "창조"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무로부터의 창조' 는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즉 '계속되는 창조' (creatio con-tinua)이며, 현재도 미래도 세계는 하느님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이다. 계속되는 창조는 현대의 진화적 우주론과 양립될 수 있으며, 하느님은 지금도 여전히 자연에서 일어나는 과정들을 통하여 창조하고 있다는 것으로 간주된다. 즉 그리스도교의 창조는 하느님의 질서가 세계를 끊임없이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의 인간 중심적 자연관 :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자연을 인간 활동의 배경으로 생각하였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초기에 플라톤 철학의 경향을 가지고있었지만,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정초되었다. 그가 확립한 그리스도교 자연관의 근저에는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인간은 신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목적론이 있다. 하느님은 모든 존재의 궁극적 목적이며, 하느님과 자연의 중간에 있는 인간은 하느님을 섬기는 동시에 자연을 다스린다.그래서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중심' (theocentric)의 신앙 속에 자연에 대한 '인간 중심주의' (anthropocentism)를 표방한다. 창조물인 인간과 자연은 동등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연보다 우위에 있도록 창조되었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우위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 '하느님의 모상' (ImagoDei)이다(창세 1, 27). 하느님의 모상은 모든 창조물 가운데서 인간에게만 해당된다. 하느님을 반영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인간은 질적으로 자연과 다르며 자연보다 우월하다. 자연의 우위에 있는 인간은 다른 창조물을 지배할 수 있으며, 그 특권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고 본다(창세 1, 28). 그리스도교 안에서 전승되어 온 이러한 사상에 의하여 자연의 정복이 정당화되었다. 즉 자연은 수동적인 것으로 이해되었고, 인간에 의하여 조작되어도 무방하다고 생각되었다.
생태계 위기와 그리스도교 : 생태계의 위기는 인간만이 선택되었다는 인간중심주의의 결과이다. 그리고 성서와 그리스도교가 현대의 생태계 위기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논의들은 대부분 그리스도교의 인간 중심적 세계관으로부터 전개된다. 그 논의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자주 인용되는 성서 구절들(창세 1, 26-30 : 9, 1-3 ; 시편 8, 4-8)에서 세계는 주로 인류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묘사되어 있으며, 특히 주목되는 단어는 '다스리다' 로 번역된 '라다흐' (П巾)과 '정복' 의 의미인 '카바스' (の그?)이다. 즉 하느님은 자신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기를 촉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 모상을 간직하고 있음을 기억한다면 창세기의 '라다흐' 와 '카바스'스' 의 의미는 왜곡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은 창조된 질서의 아름다움을 긍정적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며, 시편의 다른 부분들은 살아 있는 자연 세계의 풍요로운 다양성을 찬양하고 있다(시편 96, 11-13 : 148, 1-13). 마태오 복음(6, 26-33)에서 예수의 말씀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흡사하다. 예수는 하느님의 창조를 찬양하며, 작은 들풀까지도 예찬한다. 우리 시대는 생물 유전자를 조작하여 유전자 변형 생물체까지 만들어내고 있지만, 그것은 조작이지 창조가 아니다. 인간은 아직도 들풀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창조하지 못한다.
또한 성서는 분명히 지구가 '땅 위의 모든 생물' (창세 9, 16-17), 즉 모든 창조물들에게 주어진 선물(지혜 1, 7 ; 6, 7)이며, 인간은 '그것을 다스리며 지킬 것' (창세 2. 15)을 요청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성서에서 불의는 모든 창조물에게 고통을 초래하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인간이 어떻게 자연이나 다른 생물들을 취급해야 하는지보여 주고 있다(신명 20, 19-20 : 레위 25, 1-7). 그러나 인간의 오만은 인간을 자연에서 소외시켰다(창세 3-4 : 6-9 ; 11장). 노아 이야기에서 세계의 새로운 시작은 인
간을 자연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에서 출발한다. 인류의 죄악은 땅을 황폐화 시켰다. 욥은 인간이 하느님 지혜를 저버림으로써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음을 한탄하였고(읍기 28, 5-9 ; 28, 12 : 28, 28 ; 32, 7), 이사야는 우주가 의인들 편에 서 있는 용사(이사 16, 17)와 같이 구원의 표가 되기도 하고 죄악에 대한 경고(이사 16, 6)가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자연에 대한 현대의 논의] 현대 신학은 환경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소홀히 여겨져 온 신학적 강조점을 재발견하고 있다. 가장 유익한 결실은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자연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을 그 자체로 본래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신학적 기초를 제공해 준다. 이와 유사하게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에서 나온 신 중심적 자연 이해는 하느님 보시기에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존중되고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모든 창조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사고는 자연계를 인간 활동을 위한 단순한 배경에불과한 것으로 취급하거나 인간을 도덕적 가치를 지닌 유일한 존재로 간주해 온 기존의 그리스도교적 전통과는 근본적으로 출발을 달리한다. 나아가 현재의 상황을 놓고 볼 때, 인간이 생존해 나가기 위해서는 자연의 질서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신학에서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완성한다고 논의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태학적 지혜는 보통 어떻게 자연과 대항할까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어떻게 자연의 결실과 더불어 움직일 것인가를 배우는 데에 있다.
한편 일부 현대 신학자들은 자연을 통하여 얻는 하느님에 관한 지식은 부분적일 뿐이며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계시 없이는 하느님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생태계 위기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 신학이 그동안 소홀하였던 자연 안에서 하느님 계시를 찾고, 현대 과학적 증거로부터 유도된 '자연 신학' (natural theology)과 '자연의 신학' (theology of nature)을 제안한다. '자연 신학' 은 오랫동안 과학을 바탕으로 자연에서 하느님 현존에 대한 증명이나 암시적 증거를 찾고자 노력해 왔으며, 과학이 하느님 설계의 증거를 깨닫게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 신학자들은 자연에 내재한 설계의 증거로부터 하느님 현존이 유추될 수 있다고 보며, 많은 자연 신학자들이 현대 과학으로부터 이론화된 우주론적 인간 원리(cosmological anthropic principle)를 사용하여 하느님 현존을 증명하고 있다. 이에 비해 '자연의 신학' 은 전통 안에서의 신학적 주장을 과학을 통해 재확인하려 한다. 자연의 신학은 신학의 중요한 근거는 과학 밖에 있지만 과학 이론이 특정 교리, 특히 창조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교리를 재정립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자연 신학자들은 과학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지만, 자연의 신학자들은 과학이 아닌 종교적 감성과 역사적 계시를 바탕으로 한 종교적 전통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자연 신학은 화이트헤드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에 의하여 과정신학(processtheology)으로 보다 발전하였다. (⇨ 피조물 ; 창조물 ; → 과정신학 ; 이신론 ; 창조)
※ 참고문헌 K. Soper, What Is Nature?, Oxford, Blackwell, 1995, pp. 1~14/ S.O. Brennan · MJ. Dorenkemper, (NCE》 10, PP. 276~2801 JHJ. Schneider u.a., 《LThK》 7, 1998, PP. 662~6671 I. Bradley, God is Green : Christicmity and Enviromment, London, Darton, Longman and Todd, 1990, pp. 1~11/ D. Christiansen, SJ. . Walter Grazer e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 Catholic Theology and the Enviromment, Washington D.C. : United States Catholic Conference, 1996. Pp. 233~2431 A. Ganoczy, Natur Lexikon der katholischen Dogmatik, Hg. v. W. Beinert, Freiburg : Herder, 1987, PP. 390~392/ L.S. Rouner ed., On Nature, Boston University Studies in Philosophy and Religion Volume six, University of Nortre Dame Press, 1984/ R.R. Ruether, The Biblical Vision of the Ecological Crisis, ed. by M.H. Mackinnon and M. Mcintyre, Shed and Ward Kansas city, 1995/ D. Kinsley, Ecology and Religion : Ecological Spirituality in Cross10- Cultural Perspective, Prentice Hall, 1995/ J. Splett · J. Alfaro, (SM) 3, pp. 675~683. 〔柳京村〕
자연 自然 (라〕natura 〔영〕nature
글자 크기
10권

1 / 2
현대 과학은 우주를 일회적 창조가 아닌 생성 · 변화의 과정이라고 여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