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의지에 바탕을 둔,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이것을 하거나 또는 저것을 하는 능력이고, 스스로 숙고해서 행동하는 능력이다. 인간은 진리와 선 안에서 자유를 통하여 성장하고 성숙한다. 자유는 최종 선인 하느님께 결정적으로 정착하기까지는 선과 악 사이의 선택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인간 행위의 자발성에 따라 자기 행동에 대하여 책임지도록 한다.
I. 성서에서의 자유
자유 개념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사용된 의미에 차이가 있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이 인간 역사에 개입하여 당신 백성을 해방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인간이 자유를 누리게 되는 구원론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
〔구약성서〕 자유라는 개념은 그리스에서 오랫동안 발전되어온 것으로, 본래 고대 그리스의 자유 도시(Polis)에 사는 자유 시민이 누렸던 정치적 자유 개념을 나타낸다. 따라서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그리스의 가치인 자유라는 개념에 정확히 일치하는 낱말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옮긴 칠십인역 성서를 살펴봄으로써, 구약성서에 나타난 자유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칠십인역에서 '자유' 를 뜻하는 그리스어 명사 '엘레우테리아' (Ελευθερία)는 히브리어 '후프샤' (הופשה, 레위19, 20)를 옮긴 것으로, 종살이에서 해방된 상태를 뜻한다. 또한 '자유로운' 과 '자유인' 을 뜻하는 그리스어 '엘레우테로스' (Ελεύθερος)는 히브리어 '하프쉬' (קָשֶׁה)와 '호르' (הור)를 옮긴 것이다. '하프쉬' 는 남녀 종을 칠 년째 되는 해에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거나, 상해를 입었을 때 풀어 주는 경우에 사용되었다(출애 21, 2. 5. 26-27; 신명 15, 12-18 ; 욥기 3, 19 : 예레 34, 8-17). 이와 달리 '호르' 는 종살이에 매여 있지 않은, 그래서 억압받지 않는 자유인을 뜻한다. 본래 귀족이라는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여, 공동 번역에서는 고관, 유지, 관리 등으로 번역되었다(1열왕 21, 8. 11 : 이사 34, 12 : 예레 27, 20; 39, 6 ; 집회 10, 17 ; 느헤 2, 16 ; 4, 8 ; 6, 17 ; 7, 5 ;13, 5. 7. 17). 또한 '드로르' (דרור)도 희년이나 안식년에 해방을 선포할 때 쓰인 낱말로 '자유' 를 뜻한다(레위15, 10 ; 예레 34, 8. 15. 17 ; 이사 61, 1).
앞에서 살펴본 '자유' 란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들은 모두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의미, 곧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사회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한 당시 빚을 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빚 갚을 길이 없어 노예가 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빚이 탕감되면 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구약 시대의 자유 개념은 경제적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구약성서에서 보여 준 이러한 자유 개념은 출애급이라는 하느님의 해방 사건과 구원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신명기 15장 12~15절에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인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었듯이, 히브리 남녀 종을 해방하라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예레 34, 8-22 참조).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구원사적 측면에서 출애급을 언급할 때, '몸값을 치르고 자유의 몸이 되다, 해방하다' 라는 의미의 '파다' (פָּדָה, 신명 7, 8 ; 9, 26 ; 시편 78, 42)와 '친척 · 구원자처럼 행동하다. 속량하다' 라는 의미의 '가알' (גָּאַל, 출애 6, 6 ; 시편 74, 2 ; 77, 15)이 라는 동사를 사용하였다. 두 동사는 언제나 하느님이 주체가 되어 행동함을 보여 준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출애20, 2).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해내신 해방자, 곧 '고엘' (גֹּאֶל)로서 당신 백성을 해방한 것이다(이사 41, 14 : 43, 14 ; 44, 6. 24 ; 47, 4 ; 시편 18,15 ; 77, 35 ; 예레 50, 34). 따라서 구약성서에 나타난 자유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베풀어 준 해방으로 이해해도 좋다.
〔신약성서〕 자유 개념은 본래의 의미인 정치적 개념을 비롯해서 개인의 내적인 자유, 스토아 학파가 주장하는 현자만이 자유롭다는 정신적 자유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기원전 180년경에 쓰인 집회서 10장 25절의 "자유민이 지혜로운 종을 섬겨도"에는 헬레니즘의 그리스적 자유개념이 반영되어 있다. 외적인 신분에서 드러나는 자유가 소중하다고는 하지만 종에게 있는 내적 지혜와 비교해 볼 때, 한낱 상대적인 가치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약성서가 헬레니즘의 그리스적 자유 개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알아 보기 전에, '자유' 와 관련된 낱말이 어떤 형태로 얼마나 쓰였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자유' 를 뜻하는 '엘레우테리아' 는 신약 성서에 11번 나오고(갈라 2, 4 ; 5, 1. 13 ; 1고린 10, 29 ; 2고린 3, 17 ; 로마 8, 21 ; 야고 1, 25 ; 2, 12 ; 1베드 2, 16 ; 2베드 2, 19),'자유롭게 하다' 라는 뜻의 동사 '엘레우테로오' ('ἐλευθε-ρόω)는 신약성서에 7번 언급된다(갈라 5, 1 ; 로마 6, 18.22 ; 8, 2. 21 ; 요한 8, 32. 36). 그리고 '자유로운' 과 '자유인' 을 뜻하는 낱말 '엘레우테로스' 는 23번이나 신약성서에 나오는데, 바오로 친서에만 14번(갈라 3, 28 ; 4,22. 23. 26. 30. 31 ; 1고린 7. 21. 22. 39 ; 9, 1. 19 ; 12,13 ; 로마 6, 20 ; 7, 3) 쓰이고 있다.
바오로 서한 :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으로 드러난 효과들을 자신이 직접 쓴 편지들에서 두루 펼쳐 보이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자유이다. 바오로는 자유와 더불어 하느님의 의로움〔義化〕, 화해, 속량을 구원 효과로 보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자유에 이르는 길은 죄(로마 6, 18-23 ; 요한 8, 31-36)와 율법(로마 7, 3 이하 ; 갈라 2, 4 ; 4, 21-31 ; 5, 1. 13)과 죽음(로마 6, 21 이하 ; 8, 21)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길이라 하였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에서 벗어난 자유이다. 바오로에 따르면 자유는 의화론과 관련된다. 그래서 인간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가릴 것 없이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구원될 수 없고, 오직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담이 죄를 지어 온 인류에게 죄와 죽음이 닥쳤지만(로마 5, 12-14),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온 인류는 의로움과 생명이 훨씬 더 넘쳐나게 되었다(로마 5, 15-21). 그래서 하느님의 의로움을 받게된 사람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이미 이러한 자유를 누리기 시작했다. 불법을 일삼는 죄의 종으로서 죽음에 처해 있던 인간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게 되었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기 때문이다(로마 6, 6). 결국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유를누리게 되는 것이다.
둘째, 하느님의 의로움을 받게 된 그리스도인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된다. 하느님의 뜻을 나타내는 율법은 거룩하고 좋은 것(로마 7, 12)으로 영적인 것이다(로마 7, 14). 그러나 율법이나 계명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죄의식을 불러일으켜(로마 3, 20 ; 4, 15 ; 7, 7-25),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죄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영적인 율법을 배척하고 하느님을 멀리한다. 육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로마7, 14). 하지만 죄의 속박에서 풀려난 이는 더 이상 율법에 매이지 않고 영의 이끄심으로(갈라 5, 5. 18), 그리고 그리스도가 몸소 보여 준(갈라 2, 20) 길을 따라 살고자 한다.
셋째, 죄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로 완결된다. 그 까닭은 "죄의 보수는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영원한 생명" (로마 6, 23)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기 전까지 불결하고 불법을 일삼는 죄의 종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생명을 주는 영" (로마 8,2), 곧 예수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켜 세운 하느님의 영(로마 8, 2. 9. 11),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1고린 15, 45; 2고린 3, 17)을 통해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세례를 통해 이미 자유를 얻은 그리스도인은 이제 "내자유"(1고린 10, 29), "우리의 자유" (갈라 2, 4)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자유를 누리도록 부름받은 이들이다(갈라 5, 13). 또한 하느님의 자녀들이다(로마 8, 21 ; 갈라 4, 30-31). 그러나 "하느님 자녀들의 영광과 자유"(로마 8, 21)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때(필립 1,12-26 ; 2고린 5, 1-10) 완전한 자유를 누릴 것이다. 이완전한 자유를 바오로는 "영광" (2고린 3, 18)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렇다면 자유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바오로는 주님이 율법에 매여 있던 이들을 값을 치르고 사들인 만큼 그들은 그리스도의 노예이므로, 부르심 받았을 때의 처지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고 한다(1고린7, 22-24). 곧 그리스도의 노예 또는 주님의 자유인이 된만큼, 종이든 자유인이든 "값을 치르고 사들인" 지금에는 사회적 신분이 그렇게 문제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오로지 그분께만 순명해야 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이제 그들이 매여 있어야 할법은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법"(갈라 6, 2 ; 1고린 9,21), "영의 법"로마 8, 2), "믿음의 법"로마 3, 27)이기 때문이다. 이 법은 사랑으로 요약된다(로마 13, 8-10). 하느님의 영,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죄와 율법과 죽음에서 자유롭게 된 그리스도인은 두 분의 영에 힘입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한다. 바오로는 여러 차례 이웃 사랑을 강조한 바 있다(사도 18, 24-28 ; 갈라 5,13-14 6, 2).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기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는 방종이 아니다. 죄와 율법과 죽음의 종살이에서 풀려난 그리스도인은 영의 이끄심에 따라(갈라 5, 16-26)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1고린 9, 19 ; 갈라 5, 13) 참된 의로움을 행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내적인 자유이다.
복음서 : 공관 복음서에서 단 한 번만(마태 17, 26) '자유로운' 이란 의미의 '엘레우테로스' 란 형용사가 사용되었다. "성전세 대담"(마태 17, 24-27)은 서기 70년 8월 29일 성전이 불타기 전에 생겼을 것으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임금이 자신의 자녀인 왕자들로부터 성전세를 거두어 들이지 않듯이 하느님도 당신의 사랑하는아들인 예수, 아들들인 제자들로부터는 성전세를 거두어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들은 자유롭다 (요한 8, 31-39 ; 갈라 4, 21 ; 로마 8, 21). 하지만 남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으므로 성전세는 바쳐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롭다' 는 말은 성전세를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경제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자유에 관한 상반된 견해가 드러나는 부분도 있다(요한 8, 32-36). 유대인들은 "당신들이 내 말 속에 머물러 있으면 참으로 내 제자들입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는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31-32절)라고 한 예수의 참된 자유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반문한다.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이미 자유를 누리고 있는데, 무슨 자유가 또 필요하겠느냐고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33절). 예수의 말씀은 구원을 계시하는 말씀이며, 진리는 예수의 구원 계시를 가리킨다(요한 8, 40 ; 18, 37). 나아가 계시자인 예수 자신을 뜻한다(요한 8, 36 ; 14, 6).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말씀을 익히고 지키면 그 말씀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게됨은 물론, 계시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 알게 되리라는 말이다. 그러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요한 14,6)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을 죄(요한 8, 34-36)와 죽음에서(요한 11, 25) 자유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상상하는 자유는 참된 자유를 속이는 것이며, 유일한 아들만이 죄의 종인 그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오직 그분만이 그분의 말씀만이 참으로 자유롭다(요한8, 36).
다른 서간문 : 야고보서는 "자유의 완전한 법"(1, 25)과 "자유의 법" (2, 12)을 언급하고 있는데, 바오로의 자유에 관한 입장과는 다르다. 이들 법은 행동의 기준이며 (1, 25) 동시에 앞으로 있을 심판의 기준으로써(2, 12)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지켜져야 하는 하느님의 법이다. 다시 말하면 이웃 사랑의 계명뿐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 기초한 그리스도교의 윤리법 전체를 가리킨다. 야고보서의 저자는 바오로와 달리 율법을 높이 평가하여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참다운 자유를 준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율법주의에 빠진 것이 아니라 예수의 율법 해석을 받아들인 것으로, 사랑의 계명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야고 1, 26-27 ; 2, 8).
한편 고린토 교회에서는 그노시스주의자들이 "나는 무엇이나 할 자유가 있습니다" (1고린 6, 12)라는 바오로의 말을 왜곡하여 자신들의 구호로 내세웠고, 베드로서의 저자도 그리스도인이 자유를 남용하는 문제에 대해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1베드 2, 16 ; 2베드 2, 19).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아마 그노시스주의자들이었을텐데, 그들은 자유를 제멋대로 살 수 있는 것으로 곡해하였다. 이에 대해 저자는 자유에 관한 가르침을 왜곡하는 이들은 "멸망의 종" (2베드 2, 19)이 된다는, 실제로 멸망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 고 하였다.
※ 참고문헌 F. S. Jones, 《ABD》 2, pp. 855~859/ K. Niederwimmer,《EDNT》 1, pp. 431~434/ H. Schlier, 《TDNT》 2, pp. 487~502/ K. Berger,《SM》 2 pp. 349~3521 J. Marsh, 《IDB》 4, pp.122~123/ B. Haering, 《NCE》6, pp. 106~ 107/ L. Roy, 《성서신학사전》, pp. 501~504/ J. A. Fitzmyer,Romans, 《AB》 33, Garden City, N. Y., Doubleday, 1993/ J. A. 피츠마이어, 《바오로의 신학》, 분도출판사, 1973/ 정양모, 《바울로 친서 이야기》, 성서와 함께, 1997/ 一, 《요한 복음 이야기》, 성서와 함께,2002/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 2001. [李妍受]
Ⅱ. 철학에서의 자유
〔개념의 변천〕 자유라는 낱말은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아득한 옛날부터 일상 언어로, 그리고 매우 다의적(多義的)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 말은 시대와 장소와 분야에 따라, 특히 철학자들에 의해서 많은 개념의 변천이 있었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 방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인간은 소극적으로는 '···로부터의 자유' , 즉 억압이나 지배로부터 해방되는 자유와, 적극적으로는 '···을 하는 자유 , 즉 창조적인 자기 결정을 하는 자유라는 이중의 의미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 두보(杜甫, 712~770)가 "송객봉춘가자유"(送客逢春可自由)라고 읊은 시구에서 자유(自由)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였다. 이 말은 방해가 없는 상태, 즉 마음대로라는 상태를 가리키는 소극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동양 고전에서는 학자들이 자유의 의미를 논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거주 · 언론 · 집회 · 결사(結社) · 신앙및 양심의 자유 등과 같은 법적 · 정치적 의미와 인간 본성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철학적 해석은 서양 근세 이후 주로 활발히 논의되어 왔다.
'자유' 란 개념은 철학사 전반에 걸쳐서 찾아야 할 정도로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게 논구되어 왔는데, 이를 세가지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자유는 인간과 인간의 환경과의 표면적 관계와 관련되며, 인간이 원하는것을 행할 때 소극적으로 할 수 있는 것과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자유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동과의-인간의 특정한 선천적 또는 유전적-관계를 의미한다. 인간의 행동은 그 관계에 의하여 무의도적인 행동과 구별된다. 즉 자유는 특별한 의미에서 의욕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자유는 인간학의 기본이며, 인간 자신이 달리 못하고 꼭 그렇게만 의욕하는 것의 원천이다. 즉 자유는 자유 의지이며, 의도적 자유이거나 초월적 자유이다.
서양의 고대 철학에서 자유란 자유가 없는 노예에 반해서 자유인이 누리는 신분을 의미했으며, 또 운명이나 자연의 인과 법칙, 외부로부터의 강제에 의해 구속을 받지 않는 외적 자유를 주로 문제삼았다. 교부 시대에 자유는 그리스 철학의 전통과 성서의 가르침과의 조정에 의해 해석되었다. 구약성서는 야훼 하느님의 완전한 자유와 해방자로서의 하느님에 관해서 언급할 뿐, 인간의 자유 자체를 문제삼지 않았다. 그러나 계명 · 죄와 벌 · 회개 · 순명 · 타락 등의 언급은 이미 인간의 결단의 자유, 자유의 경험을 전제로 하고 있다.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의 자유에 대한 이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의 자유의 역사(役事)가 예수에 의해서 완성된다고 말하며, 자유는 종말론의 대상이 된다.
초대 그리스도교 사상은 자유를 두 개의 큰 흐름으로 나누어 놓았다. 하나는 에리우제나(Johaness Scotus Eriugena,800/815?~877)로부터 쿠사의 니콜라오(Nicolaus Cusanus,1401~1464)에 이르는데, 동방 교회의 신비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여기서 자유란 하느님의 인내에 의하여 '신적인 것' 의 조건과 충족을 의미한다. 다른 흐름은 아우구스티노(354~430)를 정점으로 하여 오컴(W. of Oc-kham, 1285~1349)을 거쳐 루터(M.Luther, 1483~1546) 등의 프로테스탄트에 이르는데, 자연과 은총의 근본 긴장을 자유로 보았다.
중세에는 대체로 교부들의 영향을 받아, 신학적 관점에서 자유가 논의되었다. 스콜라 철학 말기에 점차적으로 철학적 · 윤리학적 ·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자유 문제가 논의되었으나, 신학의 확고한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개별적인 면에선 상이한 점들이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신학의 입장을 준수하였다. 그 중요한 주장은 첫째, 자유의 개념을 발전시키는 자는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천사, 성인에게까지 해당되며, 둘째, 그리스도가 죄를 지을 수 없음은 그가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인간에게는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며, 악을 행할 자유도 주어진다. 넷째, 의지의 자유란 이성의 올바른 실행에 대한 선택 행위의 필연적 구속으로 지양되지는 않는다. 다섯째, 하느님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원천이다. 토마스 아퀴나스(1224/125~1274)는 '외부의 강요로부터의 자유' (libertasa coactione)와 '내면적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 (libertas anecessitate)를 구별하였다. 그리고 전자를 인간의 자유의 본질로 보았다. 자유의 문제에서도 이성이 우위에 있는 지, 아니면 의지가 우위에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사이에서 벌어졌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 휴머니즘은 자유를 인간의 자기 원인성으로, 또 인간 인격성의 발전이 방해되지 않는 상태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는 자연 과학이 발달하면서 자연의 인과율에 대한 관찰이 점점 깊어지자 점차 퇴색하였다. 또한 칼뱅주의자들의 열광적인 예정설은 인간의 창조적 자유와 의도적 자유에 찬물을 끼얹졌다.
근세의 독일 철학자, 예컨대 독일 관념론자, 생철학자들은 대체로 자유를 인간의 본질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고, 자유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라이프니츠(G.W Leib-niz, 1646~1716)는 "자유는 이성에 의해서 많이 다루어질 수록 점점 더 커지고, 열정(감정)에 의해서 다루어질수록 부자유가 더욱더 커진다" 라고 말하였다. 칸트(I. Kant,1724~1804)는 17~18세기의 자유의 논쟁을 일단 이론적으로 결합시켰다. 그는 심리적 자유 또는 비교적 자유와 선험적 자유 또는 우주론적 오성(悟性)의 자유를 구분하였다. 그는 감성의 충동 욕구로부터의 의도적 독립을 소극적 자유로, 순수 이성의 능력으로서 그 자체로 실천적인 것을 적극적 자유로 보았다. 칸트나 피히테(J.G. Fichte,1762~1814)에게서 자유는 도덕 법칙의 도구로 되었다.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에서 자의로서의 선험적 자유는 도덕 법칙과 마찬가지로 절대 의지의 현상이다. 독일 관념론에서 자유 문제의 해결은 결정론과 비(非)결정론의 피안에 놓여 있다. "행위가 존재의 내적 필연성에 따른다면, 이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근원적 행위이며, 따라서 자유롭다" 라고 셀링(F.WJ. von Schelling, 1775~1854)은 말하였다. 결국 관념론의 자유 개념은 헤겔(J.W.F. Hegel,1770~1831)에 이르기까지 형식적 개념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형식적 자유 개념을 반박하면서 쇼펜하우어(A.Schopenhauer, 1788~1860)와 니체(F. Nietzsche, 1844~1900)는 행동의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니체는 도덕의 모든 역사는 자유 의지의 오류에 근거한다고 말하였다. 또한 포이어바흐(L. Feuerbach, 1804~1872)는 "자유 의지란 공허한 동어 반복에 불과하다" 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자유의 개념을 행위의 자유로 환원시켰다. 그들에게 자유는 외부의 강제로부터 벗어나는 소극적 자유를 의미할 뿐이었다. 홉스(T.Hobbes, 1588~1670)는 육체가 움직일 때 물리적 제약(압력)을 받지 않는 것을 자유라고 했으며, "인간은 더욱 넓은 공간에서 활동할 수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더 자유롭다" 라고 말하였다. 홉스뿐만 아니라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정치적인 면에서 주로 자유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스피노자(B. de Spinoza, 1632~1677)도 자유를 외부의 강제로부터의 자유로 이해했는데, 엄격히 말해서 하느님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하느님은 자기 본질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존재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자유롭고, 인간은 외부에서 오는 충동이나 욕망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부자유스럽다. 그러나 불분명한 관념이 분명한 관념, 즉 합리적인 하느님 사랑으로 인도되면, 인간도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자유를 하나의 허구(虛構)로 보고, 인간은 경제적 사정과 계급 투쟁이 큰 역할을 하는 사회의 상황과 충동의 제약을 받으면서 행동하고 생각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와 사르트르(J.-P. Sartre, 1905~1980)는 자유를 철학의 근본 문제로 보았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자유는 인간의 어떤 특징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인 본성에 선행하는 '실존'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자가 탈존(脫存)하는-숨은 상태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현존재가 본래적인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보았다. 겔렌(A. Gehlen)은 실제적 자유와 자유 문제의 해결은 반복되는 필연성과 자기 자신을 자유 의지로 긍정하면서 사변(思辨)을 지양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나의 의지의 규정은 나의 본질을 인정하는 것과 꼭 같은 것이며, "반성에 대한 반성이야말로 자유 그 자체이다"라고 말하였다. 최근에는 인간학 학자들이 자유를 인간의 근본 문제로 보고 이를 해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현대 가톨릭 사상에서의 의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자유의 문제에 정면으로 다가섰다. <사목헌장>(Gaudium et spes)은 17항에서 '자유의 우월성' 을적시하였다. 이 항의 요지는 "인간의 도덕 행위는 자유로운 것이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 조항은 "오로지 자유로이 인간은 선을 지향할 수 있다" 라고 시작한다. 이어서 "현대인은 자유를 중시하고 또 열렬히 추구한다. 참으로 옳다. 그러나 자주 그릇된 방법으로 자유를 옹호한다. 자신을 즐겁게만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악이라도 할 수 있다는 방종까지도 자유라고 옹호한다. 그러나 참 자유는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 모습의 탁월한 표징이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맡겨 두고자하셨다. 그것은 인간이 자유 의지로 자신의 창조주를 찾아 그분을 따르며 자유로이 충만하고 복된 완전성에 이르도록 바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행동하도록 요구한다. 곧맹목적인 내부 충동이나 순전한 외적 강박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적 동기와 권고에 따라 인격적으로 행동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온갖 욕정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선을 선택하여 자기 목적을 추구하고 적절한 도움을 받아 효과적으로 슬기롭게 행동할 때에 인간은 이러한 존엄성을 얻는다. 그러나 죄로 손상된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지향을 완전히 실현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저마다 자기가 한 선악에 따라 하느님의 법정에서 자기 일생에 대한 셈을 치러야 할 것이다."현대인은 자유를 매우 강하게 의식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현대인의 특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는 규칙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젊은 사람들이 도덕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태도 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자유란 자신의 생활과 행동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며, 자유라는 표현으로써 도덕률로부터 완전한 해방과 독립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이와 같은 의미의 자유를 부정한다. 자유로 말미암아 죄로 유혹하는 내적 · 외적인 영향으로부터 지배되지 않을 것을 가리킨다. 많은 현대인들은 자유란 자기 자신이 도덕률까지도 정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가령 사르트르는 인간 활동의 목적은 자유 추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자유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고독하고 세계와 타인으로부터 고립되게 만든다. 그래서 인간은 좌절과 혐오에 휩싸이고 단순하고 무익한 감정에 빠지고 만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행위가 본인의 무의식 안에서 생리학적(물리 · 화학적)으로 '리비도' 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므로, 실제로 자유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욕이 어느 정도 인간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할지라도,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자유는 본래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선을 향해 나아갈 결심을 하고 자신이 불리고 또 도달할 수 있는 영적 자유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유의 문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이 공표된 이후에도 1984년 해방 신학의 일부 측면에 관한 신앙 교리성 훈령 <자유의 전갈>(Libertatis Nuntius) , 1986년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신앙 교리성 훈령 <자유의 자각>(Libertatis Conscienta), 199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백 주년>(Centisimus Annus) 등에서 다루어졌다. 그러나 가톨릭에서 설명하는 자유의 근본 취지를 알고 싶은 사람은 <사목 헌장> 17항을 음미하는 것이 첩경일 것이다. (→ 자유 의지 ; 자유주의 ; 책임)
※ 참고문헌 Henricus van Straelen S.V.D. · Franciscus K. Hama·Leo Elders S.V.D., Constitutiones Decreta Declarationes Concil Ⅱ Oecumenici Vaticani Secundi(현석호 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해설 총서》, 성바오로출판사, 1982)/ D.M. Peter, Personne et personali-sation, Divus Thomas, Piac, 1949/ J.-P. Sartre, L'existentialisme est unhumanisme, Paris, EA, 1946, pp. 78. 82/ 一, Etre et néant, Paris, EA, 1943, pp. 638~642/ A. Dondeyne, Liberté et verite, Liberté et vérité,Louvain, 1954, pp. 39~70/ O. Michel, Der antike und christliche Freiheitbegrif, Universitas I, 1946, pp. 1~17/ Laporte, La conscience de la liberté, Paris, 1947/ HJ. Sandkühler, Freiheit und Wirklichkeit, 1968/ .Messer, Das Problem der Willens-Freiheit, 1911/ F. Medicus, Die Freihiet des Willens und ihre Grenzen, 1926/ H. Reiner, Freiheit, Wollen und Aktivität, Phänomenol, Untersuch. in Richtung auf das Problem des Willens-Freiheit, 1927/ G. Siewerth, Die Freiheit und das Gute, 1959/ J. de Finance, Existence et liberté, Paris · Lyon, 1955/ M. Polanyi, The logic of the liberty, Chicago, 1951/ S. Hook, The paradoxes of fredom, LosAngeles, 1962/ MJ. Adler, The idea offreedom 1 · 2, New York, 1958, 1959/ R. Garaudy, Die Freiheit als Philos und hist. Kategorie, dtsch. 1959/H. Daudin, La liberté de la volonté. Signigication des doctrines classiques, Paris, 1950. 〔秦教勳〕
Ⅲ. 윤리 신학에서의 자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진리의 광채>(VeritatisSplendor, 1993.8.6)에서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진리의 위기 상황에 대해 언급하였다. "일부의 현대 사조는 자유를 절대적인 것으로까지 격상시켜, 모든 가치의 원천이 되게 하였습니다 ··· 진리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들은 사라지고, 성실성과 진실성 그리고 편한 마음이라는 기준에 그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일부 진리는 윤리적 판단의 주관적 사고에 적응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32항).
현대 사회의 문화에서는 진리와 참된 가치, 그리고 자유사이의 본질적인 유대가 사라져 가고 있고, 그 결과 인간 삶에 있어서의 윤리적 가치들은 점차 상대적인 가치로 변화하면서 진리의 절대성과 진리 안에서의 구원이라는 확신은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염려하고 있는 것처럼 자유와 진리 사이의 본질적인 결합이 존중되지 않는다면, 모든 형태의 전통이나 권위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의 욕망이 자유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인간 자신이 모든 선택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준으로 등장하고 말 것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가 이미 그 길에 들어섰다고 해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이는 인간 삶에 있어서 심한 왜곡 현상이 아닐수 없다. 인간의 생명이 인간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죽음으로 선고되고 또 선택될 수 있다는 적지 않은 사람들의 인식은 가치 질서의 붕괴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또한 왜곡된 자유에 의해서 모든 것이 협상 가능하고, 모든 것에 대해서 흥정할 수 있는 현실이 기정 사실화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오래 지속되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 곧 안락사가 마치 인간의 품위를 유지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나 삶의 질이나 경제적 효율성 때문에 낙태는 불가피하다는 생각 등 현대 사회에 만연된 죽음의 문화는 실제로는 거짓된 자유의 결과이며 참된 인간성을 기만하는 행위일 뿐이다. 그런 식의 자유는 곧 타인 위에 군림하는 자유이며, 이는 참된 자유의 죽음일 수밖에 없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행사되는 자유는 필연적으로 죽음의 문화를 가져오는 오염된 자유이며, 이 오염된 자유에 의해서 선과 악의 결정 권한이 참된 진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한 개인이나 사회적 집단에 부여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자유는 어떤 가치나 선까지도 창조할 수 있고, 진리보다도 더 윗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곧 진리 자체가 인간의 자유로부터 파생된 것쯤으로 생각하게 되고, 자유는 윤리적 자율성을 주장하면서 이 윤리적 자율성이 인간 삶의 질서를 가늠하는 가장 큰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오염된 자유 · 거짓된 자유 · 참된 자유의 죽음 · 윤리적 자율성이라는 거창한 개념들이 주도하고 있는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유의 이름으로 신이 거부되며, 자율권의 행사라는 미명으로 하느님보다는 인간 이성이 윤리적 진리의 원천으로 간주되는 현대 사회는 실로 교황이 염려하듯이 진리 · 선 · 자유 사이에 있는 본질적인 유대가 사라져 버렸다. 그러므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는 현대 인간의 자아 파괴, 사회의 질서 붕괴라는 비극적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진리와 선 그리고 자유 사이의 본질적인 유대를 찾는 일이다. 하느님이 중심이 되는 윤리적 가치의 변함없는 절대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청되는 시기이다. 인간 자유의 참된 의미가 무엇이며, 무엇이 인간의 자율성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는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한 시대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로서의 자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현대의 일부 사조가 인간의 자유를 절대화시킴으로써 초월자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게 하고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염려하였다(<진리의 광채> 31항). 윤리적 판단을 위한 기준에서도 인간의 자유가 절대화되어 결국 선악의 기준을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이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특권을 개인의 양심에 허용하려는 경향이 윤리분야에까지 침투한 상황이다. 이러한 현실이 요구하는 것은 인간 자유의 올바른 이해이다. 칸트는 자유의 인과 성을 인정하고 이성이 자기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라고 정의했지만, 과연 인간 이성에게 그 모든 권한을 넘겨줄 수 있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인간의 자유를 단순히 외적 강제나 외적 구속으로부터 독립된 상태로서 자기의 이성이나 본성에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때, 실상 자유는 윤리적 판단에 있어서까지 독자적인 영역을 차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를 이렇게 단순하게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자유는 인간 실재의 한 영역을 차지하는 매우 함축적이고도 풍부한 개념이다. 따라서 자유는 매우 복합적인 개념이다. 또한 자유는 인간의 행동 안에서 특별한 양식으로 경험되고 대두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곧 자유는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로서의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이 자유가 가지는 윤리적 차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에 대해 상세하게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 실존의 양식인 자유 : 자유는 서로 긴장 관계에 있는 몇 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자유란 이 긴장의 요소들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 정의되어질 수 없는 개념이며, 따라서 자유는 다음의 삼중적 긴장 관계 안으로 들어갈 때 이해가 가능하다.
첫째, 자유를 갖는다는 것과 자유로운 것 사이의 긴장관계이다. 자유를 갖는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자유로운가 하는 점이다. 자유란 무엇보다도 인간 실존에서 하나의 존재 양식이며,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귀중한 한 양식이다. 자유롭다는 사실은 '자유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우선적으로 제기한다. 예를 들면, 종교의 자유 · 윤리적 삶의 자유 · 사상의 자유 · 경제적 자유 · 정치적 자유 등이다. 그렇지만 역으로 말하자면, 자유롭다는 것은 또한 하나의 추상적 개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둘째, 자유란 외부에서부터 주어지는 어떤 선물이나 개념으로 이해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즉 자유는 어떤 사회에서 특별히 허가하는 형태로서 따라오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고유한 의미로서의 자유가 지닌 인간의 내면에서부터 솟아나는 어떠한 요구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즉 사회 안에서 그 사회가 요구하는 책임감과 함께 나타나는 자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구조로서의 자유는 무한하다. 그렇지만 그 자유는 제한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인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는 여러 가지 다양한 자유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 안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셋째, 자유란 선물이며 동시에 과제이다. 자유란 일종의 인간적 선물이며 또한 그리스도적 선물이다. 그렇지만 자유란 동시에 의무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 둘을 다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야만 하며, 따라서 자유란 자유롭게 되는 것이며, 끊임없이 자유로워질 의무를 부여한다.
자유의 이러한 두 가지 범주는 스콜라 학자들이 자유에 대해서 내렸던, 즉 '외부의 강요로부터의 자유' (libertas acoactione)와 '내적인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 (libertas anecessitate)라는 정의에서 다시 취할 수 있다. 다시 정의하자면,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속박될 수 없는 것,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 즉 정체되어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닌 활발한 움직임이다. 따라서 결정을 위해서 무엇인 가를 하는 것이며, 결정하는 데 있어서 그것을 초월하거나 혹은 극복하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유란 어떤 행동 이상으로 행동을 하도록 하는 일종의 행동 양식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서 그리고 동시에 자유를 가지고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다.
넷째, 자유에는 '무엇의 자유' · '무엇을 위한 자유'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가 있다. 이는 곧 어떤 동일한 현실에 대해서 변증법적인 동기를 갖는 것을 말한다. 소유격으로서의 자유가 지니는 의미는 실존적 양식의 철학에서 하나의 커다란 수용을 의미하며, 여격으로서의 자유가 지니는 의미는 마르크스주의적 철학에서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인간됨의 구성 요소인 자유 : 인간은 내면 안에 자유라고 하는 구조를 갖는다. "자유는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본질적인 소유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자유는 인간적 행위나 의지를 특징지을 뿐만 아니라 이 자유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인간 본성은 반드시 자유로워야 한다는 당위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S.Th., I,q82, a.1c.) .
자유는 인간에게 실존적인 힘을 부여하며, 인간의 자유는 인간됨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가능하게 하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자의식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할 수도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자유에 관한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자유를 실존적인 개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자유에 관한 정의를 통해서 자유란 매여 있는 것들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으며, 동시에 자유란 결정의 측면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개방성' 이라는 자유의 개념은 그 자체로 책임감과 자율성의 개념을 함께 끌어들인다. 따라서 자유의 이러한 개념과 함께 무엇보다도 먼저 일종의 무한적인 특성인 자유를 지닌 '인간으로서의 나' 라는 구조적 특징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구조로서의 자유는 인간 조건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며 인간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다. 여기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조건을 분석해 보는 일일 것이다. 특별히 이 부분은 심리학의 인간 심리 분석적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다음 몇 가지 점에 있어서 인간의 조건을 분석해 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실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 실존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유로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자유는 인간 실존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이며,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자의식과 자신에게 독립적으로 부여된 자유의 개념 차이에 따라 인간 실존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셋째, 자유는 발전적인 경향을 가진다. 그렇지만 동시에 자유는 자유로움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될 때 퇴보의 경향도 있다. 자유의 이러한 경향들 사이의 긴장을 통해서 인간적 삶이 체계화 된다.
그리스도교적 개념인 자유 : 자유는 그리스도교적 개념이다. 자유의 인간적 개념은 그리스도인에게 맡겨진 메시지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고 있으며, 곧 자유는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을 구성하는 기본적 요소이다.
신학적 의미에서의 자유란 신약성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하느님 구원 행위의 효과를 조명하고 설명하는 여러 개념들 중의 하나이다. 믿는 자들, 곧 자유를 누리도록 조건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의 자유는 어떤 특별한 전망으로부터 나타나는 구원의 실제적인 소유 상태 안에서 드러나는 자유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구원론적인 의미를 갖는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자유 안에서 사는 생활로 정의하였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갈라 5, 13). 즉 바오로는 자유를 구원론 · 그리스도론적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죄의 종살이(로마 6, 11. 18. 22 : 8, 2), 죽음의 속박(로마 6, 16-23), 율법의 굴레(갈라 4, 21-31)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는 모든 피조물에게 퍼져 나가는 자유이다. "그것은 피조물 자신도 부패의 종살이로부터 하느님 자녀들의 영광과 자유를 위해 해방되리라는 (희망입니다)" (로마 8, 21). 그렇지만 사도 바오로에게 자유란 어떤 절대적인 가치는 아니다. 사랑 때문에, 걸림돌(scan-dal)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복음으로 모든 이를 수용하기 위해서라도 경우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도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 한편 자유는 사도 바오로가 의도하는 바와 같이, 자유 방임이나 한계 없는 자유 의지도 아니다(갈라 5, 3 ; 1고린 6, 12-14 ; 10, 23-25 ; 로마 6, 15). 자유란 새로운끈을 맺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차원에서의 자유이다(로마6, 16-23). 곧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또 하나의 다른 위대한 가치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 위대한 가치는 사랑이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이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말고 오히려 여러분은 서로 사랑으로 남을 섬기시오. 실상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는 한마디 말씀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으려 한다면 피차 멸망하게될 것이니 조심하시오"(갈라 5, 13-15).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종이 되는 자유이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은 바로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라' 는 한마디 계명으로 요약되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사가도 자유에 관해 심오한 가르침을 제공한다. "진리는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요한 8,32). 예수가 유대인들과 대화하는 내용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유대인들이 고집하는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고,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유만이 진실된 자유라는 것을 가르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요한에 의하면, 자유의 획득을 위한 기본적인 자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것이다(요한 8, 31). 이러한 진리를 아는 사람만이 진리에 의해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불신의 죄가 유대인들로하여금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지 못하게 가로막은 장애가되었고, 그들은 결국 종의 상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요한 복음사가의 가르침이다.
야고보서는 '자유의 완전한 법' 에 대해서 언급하였다(야고 1, 25 ; 2, 12). 이 표현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의 법에 따라 생활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베드로 1서는 그리스도 신자들을 자유에게로 불린 사람이라고 언급하면서, 악을 행하는 구실로 자유가 남용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1베드 2, 13-16).
이상과 같이 인간의 자유는 어떠한 속박이나 제한도인정하지 않는 의미의 자유 개념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왜냐하면 인간은 유한한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인간은 분명히 어떤 제약을 받고 있는 존재이며 또한 상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도 절대적인 자유가 아니라 상대적이고 조건지워진 자유이다. 그리고 인간의 유한한 본질에 의해,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있는 인간의 자유는 이미 제한된 자유일 수밖에 없다. 곧 인간의 행위는 구체적인 각각의 상황에서 제한된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결단을 내리는 행위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그러한 결단에 이미 가치의 규범이 주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제한된 자유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는 가치와 선을 추구함으로써 발생하는 자기 발전을 향해 나아가며,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궁극적으로 선과 가치의 최종 목적인 하느님께 예속되면서 참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자 율〕 인간의 자유가 진리보다 우위에 놓인 현대 사조에서 진리가 인간 자유의 창조물처럼 여겨지면서 인간의 자유는 윤리적 절대성을 주장하고 윤리적 자율성은 절대 주권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는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윤리 규범과 인간 자율성의 관계에 관한 확고한 시각은 그것이 인간의 완전한 자치권에 맡겨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진리의 광채> 35~36항). 곧 인간 이성은 명백하게 신적 지혜에 대한 의존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 이성과 윤리적 진리를 위한 효과적 수단으로서의 하느님의 계시는 서로 긴밀하게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의미 : '자율' 은 칸트 윤리학의 중심 개념이다. 칸트에의하면, 종래의 윤리학은 도덕률을 신의 의지나 행복을 구하는 자연적 충동, 이타적인 도덕적 감각 그리고 자기의 완전성에의 요구 등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 또한, 의지를 규정하는 법칙은 의욕의 대상에서 주어지는 타율인데 반하여, 자율은 의지 자체가 자기 자신에 대한 법칙인 의지의 성질이며 구조라고 하였다. 따라서 칸트는 《실천이성 비판》에서 "의지의 자율은 모든 도덕률과 여기에 따르는 모든 의무의 유일한 원리가 되며 ··· 그러므로 도덕률이란 순수 실천 이성의 자율성, 즉 자유의 자율성을 표현할 뿐이며, 자율은 그 자체로 모든 준칙의 형식적 조건이고, 이 준칙에 의거하여 자율은 오로지 최상의 실천 법칙과 일치할 수 있다" 라고 주장하였다. 자율에 관한 칸트의 이러한 주장은 사실상 윤리적인 의지를 하느님께 맡기는 가톨릭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과는 상반된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의지의 자율이 모든 도덕률의 유일한 원리가 된다면, 절대성을 요구하는 모든 윤리적 자율성은 결국 허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율(Autonomia)이란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자아' 를 의미하는 '아우토' (αυτο)와 '다스리다' 의 '노모스' (νο-μος)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자율 · 자치 · 자결' 등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이 개념의 핵심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주인이 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가 법의 주인이 되며, 규칙의 주인이 되면서 타인에게 예속되지 않을 뿐더러, 타인에 의해 조정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곧 자율적으로 행위한다는 것은 외적 제약으로부터의 자유와 함께 자신의 의지대로 행위하고, 스스로 선택한 목표에 따라 행위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의 자율 개념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율적 행위란 결국 어떠한 외적 강제도 개입되지 않는 행위자 스스로의 결정에 의한 행위이다. 또한, 행위자 자신의 욕망이나 충동까지도 전혀 개입되지 않는,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곧 자율적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를 위해 스스로 법을 처방하는 입법자가 되며, 따라서 타자에 의한 강요에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행위이어야만 자율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계 : 자율 개념에서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은 독립성, 선택의 자유, 외적 강제로부터의 자유 등이다. 곧 자율성의 존중은 타자로부터의 절대 독립을 의미하며, 이의미에 있어서 타자란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외적 요인을 총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율적으로 행위한다는 의미를 과연 자발적이고 독립적이며, 외적 강제로부터 자유롭고, 또한 온전히 행위자 스스로에 의해 결정된 행위이며, 순수하게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행위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인간의 행위는 그 행위의 주체자가 속해 있는 사회와 인간 관계에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주변 환경이나 여건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이 인간의 행위이기 때문에, 인간 행위를 순수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순수성에 입각하여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행위 안에 비합리적 영역이 반드시 함께 자리잡고 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행위는 어떠한 측면으로든 직접 · 간접적으로 사회와의 연관성을 드러내고 있기에 사회와 결코 독립적일 수 없다. 따라서 행위자의 결정은 그 사회와의 연관성 때문에라도 사회적 통제가 필요하다. 인간은 사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유기적 존재이며, 이는 구조적 · 기능적으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유기적 실재란 그 실재 안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요소들이 전체 실재와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으며, 또한 전체 실재 역시 각각의 요소들과 상호 긴밀한 협조 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인간 행위에 있어서의 자유의 제한은 이따금 불가피할 수밖에 없으며, 인간의 행위가 자율에 맡겨져 있다 하더라도 그 행위가 반드시 자발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윤리 규범과 윤리적 자율성 : 윤리적 자율성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교 윤리 규범의 문제와 관련된다. 페쉬케(K.H. Peschke) 신부에 의하면, 그리스도교 윤리학에서 가르치는 윤리 규범 역시 인간의 이성에 의지하면서 이를 기초로 설명되어 왔고, 따라서 윤리 규범 역시 이성적 정당성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적 정당성의 문제는 오해의 여지가 많이 있다. 페쉬케 신부는 이 문제에 관해 아우어(A. Auer교수의 《윤리의 자율성과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책을 인용하였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윤리 규범에서의 자율성 문제는 규범 그 자체보다 오히려 규범의 적용에 관계된다. 예들 들어 어떤 윤리 규범을 구체적으로 사회 윤리에 적용하려고 할 때, 신학적 인식 자체는 사회 윤리와 관련된 사회적 혹은 경제적 윤리의 어떤 구체적 지침을 연역해 낼 수 없다. 오히려 이를 위해서는 사실에 관한 인식과 경험과 판단 능력 그리고 상상력이 요구된다. 이렇게 볼 때 윤리 규범에 있어서의 이성적 정당성이라는 말 자체는 윤리적 자율성이라는 개념보다 윤리적 제 문제들에 관해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갖는 다른 여러 단체들의 최소한의 합의 차원이라든가 혹은 신앙인들을 통해서 더 넓게 그리고 더 깊게 고찰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페쉬케 신부는 좁은 의미에서 윤리적 자율성이란 "인간이 하느님의 법과 뜻을 포함하여 인간에게 외적으로 부과되는 모든 도덕률에서 독립한다"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런 의미에서 자율적인 인간은 자기 자신의 권위에 따라 도덕률을 만들고 자신의 인격과 가치에 대해서만 책임을 갖는다면, 이러한 의미의 윤리적 자율성은 결코 그리스도교 윤리의 가르침이 될 수 없다고 단정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 페쉬케 신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인간은 어떤 점에서 자기 존재의 창조자로서 자신의 윤리 규범의 자율적 창조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창조된 구조와 목적에 따라야 한다. 윤리 원칙은 인간의 실재성과 목적이 요구하는 것이므로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윤리 규범이라든가 윤리 원칙은 인간에게 임무와 목적을 맡긴 최고의 실재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으며,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교 윤리학에서 말하는 윤리 규범은 인간적 자율에 맡겨져 있기보다는 신율(神律, Autonomia teono-ma)에 맡겨져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윤리적 자율성과 회칙 <진리의 광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현대 사조에서 드러나는 현대인들의 자유 행사와 관련하여 염려하는 것처럼, 현대 윤리 신학의 어떤 주장들은 윤리법과 인간 본성과 양심에 대한 자유의 관계에 있어서 진리에 대한 의존성을 약화시키거나 심지어 부정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진리의 광채> 34항). 세상 사물에 대한 윤리적 질문은 인간의 자유 문제와 떼어놓을 수 없는 문제이며, 이 자유는 절대적으로 진리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강조하는 핵심이다.
인간적 가치와 객관적 윤리 질서 : 회칙 <진리의 광채>는 인간 행위에 대한 윤리적 결정, 좀 더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입각한 윤리적 결정에 대해 다음의 몇 가지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첫째, 윤리적 결정은 인간적 가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보다는 하느님께 기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하느님의 계명이나 명령에 의해 윤리적 결정이 이루어져야지 순수하게 인간적인 판단에서 윤리적 결정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윤리적 행위가 윤리적 가치나 선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할 때, 그 판단의 근거에 대한 물음은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기원을 찾을 수 있기때문이다.
둘째, 하느님의 계명이나 명령에 기원을 둔 윤리 질서가 부여되는 상대자는 본성적 조건으로서 자유를 지닌 인간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적 명령을 받아들이는 상대는 인간적 자유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에 있어서 그 행위를 하는 주체로서의 자유와 하느님의 명령 사이에는 끊임없이 긴장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회칙 <진리의 광채>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하느님의 법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배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유를 보호하고 촉진합니다"(35항). 곧 회칙 <진리의 광채>가 바라보는 시각에서 인간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의 법을 통해 보호되며 따라서 윤리적 판단에 관한 문제는 '자유와 법' 사이의 긴장이라는 틀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로부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추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우선 윤리적 자율성(Autonomia moralis)이 '절대 주권' 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황이 염려하는 것처럼 윤리적 가치들을 창조할 수 있고, 개인이나사회적 집단에게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결정할 권한을 부여하는 윤리적 혹은 철학적 지침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과 신앙의 관계로서 좁게는 신학의 영역에서 드러나는 문제이고, 신학및 윤리적 반성에서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회칙 <진리의 광채>는 이렇게 언급한다. "가톨릭 윤리 신학이 신법을 거슬러 인간 자유를 확립하려 하거나 윤리 규범에 궁극적인 종교적 토대의 존재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시도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상황은 이 문제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물질 세계 곧 '세상사' 에 대한 윤리 규범을 확립하는 데 있어서 이성과 신앙의 역할을 완전히 재고하는 입장" (36항)에까지 이른 것이다.
셋째, 회칙 <진리의 광채>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그리스도교 윤리의 고유성에 대한 것이다. 회칙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두에게 유효하고 한결같은 특수하고도 결정적인 윤리적 내용이 하느님의 계시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일종의 권고나 잔소리에 불과하며 자율적인 이성만이 역사적 상황에 적용하여 참으로 객관적인 규범적 지침을 마련할 수 있는 과업을 맡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들은 자율성은, 이른바 인간적 선에 관한 특별한 윤리 규범들에 대해 교회와 그 교도권이 갖는 고유한 교리적 권한을 자연스럽게 부정하게 됩니다"(37항).사실상 상당수의 가톨릭 윤리 신학자들은 하느님의 계시가 그리스도교 윤리의 초월적인 동인(動因)을 제공하고, 인간 이성은 단순히 중개 역할만 한다고 생각한다.하지만 동시에 교도권의 윤리적 권한이라든가 객관적 윤리 규범에 대한 오해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신앙과 이성이라는 두 요소는 그리스도교 윤리의 내용을 구성한다. 곧 계시는 신앙의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전달 방법에 있어서는 항상 인간적 이성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한편으로 계시 안에는 인간 이성이 따를 수 있는 구체적인 규범들이 들어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윤리 규범의 내용은 그리스도교적 초월의 형태와 인간적 이성이 함께하는 신앙의 중개 형태를 함께 유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윤리 규범은 이러한 구조가 반드시 고려되면서 해석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윤리 분야에서 교회와 교도권이 갖는 권한에 대해서 간단한 언급을 할 수 있겠다. 윤리적 자율성이 절대적 자율성의 개념으로 드러나고, 또 그것이 구원 질서와의 관계에 있어서 윤리 질서로부터의 전적인 해방으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자연히 회칙 <진리의 광채>가 지적하는 바와 같다. 즉 "이른바 인간적 선에 관한 특별한 윤리 규범들에 대해 교회와 그 교도권이 갖는 고유한 교리적 권한을 자연스럽게 부정하게 된다. 그러한 규범이 계시의 고유한 내용의 일부일 수도 없고, 그 자체로 구원에 아무런 상관도 없다"(37항)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여기서 논쟁이 되는 것은 교도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입하는가보다는 신자들에게 얼마만큼의 의무를 부과 하느냐의 문제이다. 곧 의무 부과의 정도에 따라 규범에 대해서 교도권의 요구에 대한 부정으로 드러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윤리 규범이 그것을 언급하는 교도권의 성격이나 형태, 또한 복음의 내용에 얼마만큼이나 근접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등급의 의무가 부과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교회 25항). 그렇지만 신학자들 사이의 공통된 의견들 중 하나는 무류성으로부터 주어지는 신자들의 의무는 전적으로 세속적인 현실과 밀착되어 있는 윤리의 구체적 내용들의 구석구석을 따지면서 부과된다거나 혹은 인간 이성에 기초를 둔 인간적 합리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윤리적 판단의 기초에 관한 언급에서 윤리는 하느님의 '금지' (창세 2, 16-17)로부터 생겨난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가 있으며, 타율(他律)이라는 이러한 흔적은 인간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완성되고, 인간측의 자유롭고도 의식적인 실천으로부터 취해져야만 하는 현실로부터 주어진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극복되어야만 할 것이다.
동참적인 신율 : '윤리적 자율성' · '이성의 자율' 등이 의미하는 내용이 인간적 조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윤리적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가의 문제가 대두된다.
<진리의 광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인용하면서 첫째, 자율성의 개념을 언급하는 가운데 다음의 두 가지 지평, 곧 "지상 사물의 자율성"과 "인간 자체도 스스로의 보살핌과 책임에 맡겨져 있다" 라는 의미로서의 '인간의자율성' 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공의회의<사목 헌장>과 <진리의 광채>가 서로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보다는, 이 단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그 관점이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곧 <사목 헌장>은 자율성의 개념을 긍정적인 의미의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는 반면, <진리의 광채>는 "자율성의 잘못된 개념"은 결국 "인간 자신과 관련한 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자율성 개념이 잘못 사용됨으로써 나타날 수 있는 부정적인 현상에 대한 조심스런 표현을 보여 주고 있다.
둘째, <진리의 광채> 40항은 참된 윤리적 자율성은 인간학적 자율성에서부터 진행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에 대한 설명을 위해 토마스 아퀴나스(1224/1225~1274)의 《신학 대전》을 인용하였다. 곧 토마스가 강조하는 것은 객관적 윤리 질서(윤리법 혹은 도덕률)를 위해서는 인간 인격의 자유롭고도 의식적인 행위가 요구된다는 점이다. 이에 교황은 "윤리법은 동시에 인간의 고유한 법이 되며" 따라서 "실천 이성의 올바른 자율성"의 의미가 깊이 숙고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40항)
셋째, 교황은 실천 이성의 자율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인간 이성이 객관적 윤리 질서에 열려 있어야 하는데, 그 객관적 윤리 질서는 동시에 자율적 조건 안에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두 가지 유혹이 생겨나기 쉬운데, 그것은 인간 이성이 객관적 윤리 질서와는 별개의 것으로 머무르면서도 윤리적 가치나 규범을 창조할 수 있다는 유혹과 타율의 유혹이다. 넷째, 결국 그리스도교 윤리에서 윤리적 자율성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신율적 자율성(Autonomia teonoma)의 범주 안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다. <진리의 광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많은 신학자들의 신학적 및 윤리 신학적 반성의 결과로 이끌어낸 신율적 자율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반면, 명사인 '신율' (teonomia)과 형용사인 '동참적인 신율' (teonomia partecipata)이라는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교황의 이러한 용어의 사용은 "하느님의 법에 인간이 자유롭게 복종함으로써 인간 이성과 인간 의지가 하느님의 지혜와 섭리에 동참하게 된다는 점에서 테오노미아(theonominia, 神律) 또는 동참적인 테오노미아(theonomimia partecipata)라는 말을 사용하는" (41항) 몇몇 윤리 신학자들의 의견을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진리의 광채> 35~37항에서는 인간적 자율성이 지니는 한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언급하였다. 반면 38~41항에서는 비교적 명백하고도 긍정적으로 언급되면서 적어도 인간학적 자율성이 부분적으로는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진리의 광채>가 가르치고 있는 자율성의 개념을 윤리 신학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다음의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교회의 교도권은 '자율' · '타율' · '신율'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현대의 윤리적 문화를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 폐쇄된 개념으로 단정하지는 않는다. 둘째, 도덕률의 준수를 위해서 인간 인격의 자유롭고도 의식적인 행위가 필수적이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언급은 여기서도 매우 유익하고 또 유효하다. 왜냐하면 윤리성을 부여하는 인간적 행위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공헌은 신학적 · 윤리적 전통에서 가장 권위있고 또 긍정적인 방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인간적 자율성에서 출발하여 윤리법을 수용하는 것, 인간적 합리성을 가지고 신앙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 자체로 윤리적 가치를 갖는 것이며, 이는 인간적 자율성의 존중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셋째, 인간 이성의 자율을 성서적 계시의 측면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그것은 타율을 명백히 거부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타율은 또한 자율을 그 자체로 일종의 소외나 고립으로 이해하게 된다. 넷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강조하는 '실천 이성의 자율성' 을 수용해야 한다는 의미는 신율의 범주 안에서 이해되는 자율성이다.
〔신앙인과 자유〕 자유의 의미는 단순히 어떠한 외적인 요인으로부터 제한되거나 속박될 수 없는 상태라든가 어떤 사회로부터 특별히 허가되는 형태로서의 자유로움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인간 내면에서부터 솟아나는 인간됨의 요구와 함께 그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가 요구하는 책임감을 함께 드러내는 자유로서, 인간 자신과 인간 삶이 추구하는 가치의 실현을 위한 기초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가치는 초자연적인 실재로서의 하느님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행위는 최고 가치로서의 하느님을 향하는 행위이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을 위한 윤리 규범으로서의 질서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 질서는 참된 진리를 향하고 온갖 거짓과 죄, 율법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해방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참된 진리이시며 윤리 질서의 최고 규범인 하느님과의 통교를 벗어나서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명백히 하느님 안에서의 자유이며, 진리 안에서의 자유일 수 밖에 없다. 이 자유를 통해 인간은 선과 가치의 최종 목적인 하느님과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자유는 칸트 식의 순수 의지 측면에서의 자율과는 거리가 있다. 곧 자유를 자율과 같이 이해해서는 안 된다. 자율 개념이 의미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의 주인이 되고, 스스로가 법과 규칙의 주인이 되면서, 또한 타인에게 예속되거나 타인에 의해 조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가질 때, 자율적으로 행위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라든가 또 하느님까지도 포함시키는 타율을 철저하게 배격한다는 것이다. 자율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윤리 분야에도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고, 이는 윤리 규범에서 윤리적 가치들을 창조할 수 있는 절대 주권으로서의 윤리적 자율성을 주장하는 형태까지 생겨났다.
가톨릭 윤리 신학은 윤리 규범에서 신앙과 이성의 역할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서 신앙의 수용은 사실상 인간적 자율성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적 합리성으로써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 윤리적 가치를 갖는다고 볼 때, 신앙을 위한 인간 이성의 자율성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또한 자율성의 역할은 신앙의 실천적 적용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곧 그리스도교 신학이나 신앙이 사회의 삶에 적용되기 위해 요구되는 구체적 사실에 대한 인식과 경험 그리고 판단 능력과도 같은 이성의 역할은 신앙에 있어서 결코 배제되어서는 안 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윤리에서 인간 이성의 자율을 살펴볼 때단순히 타율을 거부하는 것으로만 인식되어서도 안 된다. 신앙과 밀접히 협조하는 또 하나의 요소로서 실천 이성의 자율성은 그리스도교 윤리에서 반드시 수용되어야하며, 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언급하는 것처럼 '신율' 의 범주 안에서 이해되는 자율성이어야 한다. 따라서 윤리 규범은 정확히 말해서 이성적 자율보다는 신율에 맡겨져 있다. (⇦ 자율)
※ 참고문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 요한 바오로 2세,회칙 <진리의 광채>, 1993/ 요한 바오로 2세, , 회칙 <생명의 복음>,1995/ 《세계 철학 대사전》, 교육출판공사, 19802, pp. 934~935/ AlfonsoAuer, Autonome Moral und christlicher Glaube, Diusseldor, 1971/Marciano Vidal, L'atteggiamento morale Ⅰ, fondamentale, Assisi,1976/ Marciano Vidal, Manuale l'etica teologica I, Morale fondamentale,Assisi, 1994/ Richard Lindley, Autonomy : Issue in political theory, London,1986/ Susan Mendus, Toloration the Limits ofLiberalism, Macmillan, 1989/에메리히 코레트, 안명옥 역 《인간이란 무엇인가? 철학적 인간학의기본 개요》, 성바오로, 1994/ K.H. 페쉬케, 김 창훈 역,《그리스도교 윤리학 1,기초 윤리 신학》, 분도출판사, 1991. [李東益]
자유 自 由 〔히〕חֻפְשָׁה 〔그〕ἐλευθερία 〔라〕libertas 〔영〕freedom, liberty
Ⅰ. 성서에서의 자유 · Ⅱ. 철학에서의 자유 · Ⅲ. 윤리 신학에서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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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유를 누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