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의지 自由意志 〔라〕Liberum arbitrium 〔영〕free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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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는 자유 의지로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었다.

아담과 하와는 자유 의지로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었다.

어떤 대상 혹은 상황이 인간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을 스스로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자발적인 행위. 자연이나 사회의 유형무형한 제약에서 벗어나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의 힘이나 능력. 이는 인간이 인격체임을 유지하고 피조물들 가운데서 인간이 갖는 유일한 존엄성을 드러내는 토대가 된다. 온갖 형태의 결정론(決定論,de-terminismus)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유 의지를 부정한다.
〔기원과 발전〕 고대 그리스 전통 : 고대 그리스인들은 일반적으로 무생물을 포함해 인류와 신들 모두가 자신의 운명에 순응해 왔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사물의 질서(상태)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으며, 우주와의 조화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자유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각은 형이상학적 토대보다는 정치적인 상황 안에서 더욱 부각되었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사람은 노예와 달리 계급상 자신 위에 군림하는 누군가에 의해 규제 받지 않고 정치적 질서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이러한 사유 속에서 일부 철학자들은 인간이 지닌 선택의 자유에 대해 암시적으로 표현하였다.
소크라테스(기원전 470/469~399) 이전의 피타고라스학파(Pythagreanism)는 자유와 결정론이 동시에 주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영혼 재생' (Metempsycho-sis)이라는 이론을 토대로 인간의 현재 삶의 모습은 그가 앞서 행하였던 행위들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그들은 우주 내의 모든 사물들은 다른 무엇들과 연관되어 있고, 무엇인가는 이런 인간의 상황을 조정할 수 있는 근본 열쇠라고 주장했다. 반면 소피스트들은 명확한 논리적 논쟁을 통해 인간 삶의 흐름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은 자신이 선행했던 행위에 대해 숙고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주장은 비록 자유에 의한 행위의 결과가 운명에 굴복될 지라도, 인간 안에 어느 정도의 자유 선택이 있다고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시작된 인간의 자유에 대한 고대 그리스적 통찰은 점차 개인의 주관적 자유에 대한 정치적 개념에서 경험적 개념으로 옮겨졌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철학자들 중에서 처음으로내적 자기 통제(self-control)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그가 가르쳤던 새로운 법의 이해는 외적인 권위에서 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에게 가지는 '통제력' (ἐγκράτεια)에 기초하였다. 이러한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플라톤(기원전 428/427~348/347)은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통제력' 에 대한 의미를 확대하여 《국가론》을 저술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83~322/321)는 자유와 자유 의지의 두 개념을 명백히 논의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입장과 달리 경험을 통해 선한 인간은 여전히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를 분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스토아 학파는 유물론적 범신론(materialistic-pantheism)을 토대로 우주 내의 모든 변화들이 철저한 법칙들 안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하면서 선택의 자유를 부정했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이 의지적으로 우주의 법칙들을 수용할 수 있다면 '자유롭다' 고 말했다. 한편 신플라톤 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플로티노스(204/205-270)는 인간의 정신은 물질 세계 안에 포함되지 않기에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교부 시대와 중세 : 그리스도교 사상이 전파되면서'자유 의지' 는 더욱 면밀히 연구되기 시작했다. 특히 두가지 가르침이 이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첫째는 인간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다음 계명에 따라 살아가도록 명을 받았고, 인간은 그러한 하느님의 명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여부에 따라 영원한 생명 혹은 영벌을 약속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 속에는 인간이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둘째는 최초의 인간이 원죄를 범했으므로 그 결과 인간은 반드시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교부들과 중세의 사상가들은 자유 의지의 존재를 증명하기보다는 자유와 이성과의 관계 그리고 자유안에 내포된 신적 의미 등 자유의 근거를 확립하는 것에관심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교회 학자인 에프렘(306?~373)은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에 자유를 가지며, 그러한 자유는 인간의 지성과 의지 안에 뿌리를 두고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교부들은 인간의 운명이 우주의 힘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는 이교도들의 주장을 반박하며 인간의 '자유 의지' 에 대해 역설했다.
① 아우구스티노와 안셀모 : 아우구스티노(354~430)는 자유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을 남긴 가장 대표적인교부이다. 그의 주된 관심은 하느님의 예정과 우연적인 사건들 사이의 관계 속에 인간의 자유를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자유 의지의 존재와 인간이 취해야 할 하느님 은총의 필요성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이를 통해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각 사람의 의지가 무한하게 많은 행위의 동기들과 부합될 것을 아신다고 단언했다. 아우구스티노의 저작들이 소개되기 전까지 '자유' (libertas)라는 용어는 물리적 강요에 반대하는 '자유' 혹은 '의지의 자유' 를 의미했다. 그러나 안셀모(1033~1109)는 자유에 대한 논의에 착수할 때, 악하거나 선한 것을 선택하는 힘(aribitrium)과 인간의 본성에 따라 실제로 선한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 힘(libertas)으로 구분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선택의 자유가 단지 선과 악을 선택하기 위한 능력이기 보다는 의지의 올바름을 유지하기 위한 능력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② 토마스 아퀴나스 : 토마스 아퀴나스(1224/125~1274)는 인간이 유한한 대상에 대해서는 자유롭지만 무한한 존재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이는 한편으로 유한한 대상 혹은 상황과 마주친 인간은 그것을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만일 인간이 그의 지성에 인식되는 무한한 존재에 직접적으로 직면하게 된다면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간은 현세의 삶 속에서 무한한 존재에 직접적으로 직면할 수 없다. 하느님의 예지와 인간 선택의 우연성에 대해 토마스는 인간은 시간 안에서 존재하고 하느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것과 과거 · 현재 · 미래가 신적 정신(Divine Mind) 안에서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느님의 전능한 예지 안에서 하느님은 우주 내에서 이미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모든 사건들에 실재성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모든 것을 섭리하는 하느님이 또한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어떻게 인간의 자유가 이러한 하느님의 활동 안에서 조화를 이를 수 있는가? 라는 문제를 대두시켰다.
스콜라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 : 앞서 제기된 문제를 풀기 위해 가톨릭 철학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에서 두 가지 주된 입장이 정식화되었다. 이 두 입장은 모두 토마스아퀴나스의 가르침을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서 각각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했고, 루터(M. Luther, 1483~1546)와 칼뱅(J. Calvin, 1509~1564)의 입장에 대해 답하면서 발전하였다.
① 도미니코회와 예수회 : 도미니코회 신학자들은 하느님이 피조물이 행하는 모든 행위의 근원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자유롭게 선택하려는 행위에 대한 제1 원인이라는 것을 우선적으로 가르쳤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를 결정하는 하느님의 행위는 이미 계획한 피조물의 본성과 일치한다. 하느님은 인간 이외의 다른 피조물들의 목적을 필연성에 부합하도록 계획한 반면, 인간은 특정한 대상(목표)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로 계획하였다. 이러한 하느님의 예정은 그의 전지전능한 능력 안에서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도미니코회 신학자들은 창조적 실제인 신적 지혜가 인간의 의지보다 논리적인 우위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반면 몰리나(L. de Molina,1535~1600)를 중심으로 한 수회 학파는 도미코회 신학자들과 다른 두 가지 측면을 주장했다. 첫째, 그들은 신적 예정에 주목하는 대신 하느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관계를 자유 의지와 신적 능력의 '협력'(Cooperatio)이라는 측면에서 보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둘째, 필수적인 조건, 즉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지 않는 의지의 행위들이 충족된다면 자유로운 존재가 선택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하느님의 인식은 예정 혹은 하느님의 뜻에 논리적으로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② 종교 개혁 : 종교 개혁 과정 중의 논쟁들 가운데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 사이에서 자유 의지에 대한 서로 다른 첨예한 관점이 있었다. 루터와 칼뱅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신약성서의 내용(로마 8, 29-30 : 에페 1, 5)을 근거로 의지의 자유를 강력하게 부정했다. 루터는 인간은 결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극복할 힘을 가질 수 없기에,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예정되어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자유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원죄 이후에 인간이 소유한 자유는 자신의 노력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한편 칼뱅의 자유 의지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루터의 주장보다 더욱 심한 것이었다. 그는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하지 않으면, 선한 행위를 행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 안에는 거부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런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근대의 변화와 발전〕 결정론 : 인간 행위에는 자유로운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와는 달리, 아무런 자유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결정론이라고 한다. 16세기 이후 우주 안의 수많은 운동 법칙들이 발견되면서 몇몇 철학자들은 인간 행위의 영역에 대한 물리적 결정론을 확대하려고 시도했다. 결정론이 자연의 움직임에 적용될 때, 외부 세계를 거대한 기계론적 체계 혹은 기계 자체로 이해하게 된다. 결정론자들은 세계의 부분들이 결정적인 종말이나 목적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물질적 본성을 지닌 존재의 정상적 기능들은 그것들이 그런 것으로 존재하도록 필연적으로 그렇게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정론의 한 형식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들은 물리적 자연 법칙의 필연적 결과라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인간은 자연의 부분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활동은 자연 법칙을 따른다. 홉스(T. Hobbes, 1588~1679)는 인간은 물체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이 지닌 오성과 이성은 감각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인간은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감각의 기계적인 장치에 사로잡혀 있을 뿐, 근본적으로 자유롭지 못하 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는 단지 각자 추구하는 최종의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의 과정 속에서 마주치는 대상 혹은 상황들과 조화를 이루어 나아가기 위한 감정의 작용과 반작용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B.de Spinoza, 1632~1677)는 하느님이 자유의 원인이고, 모든 인간의 행위들은 하느님의 엄격한 결정에 종속된다고 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의 예정설을 따르는 입장을 보였다. 그리고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 1788~1860)는 어떤 사건이 일어난 후에 인간의 의지 행위들이 잇따른다고 보고, 인간은 자신의 미래 행위를 예측 불가능하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인간은 단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할 뿐이라고 말했다.
흄(D. Hume, 1711~1776)과 셸링(F.WJ vonSchelling, 1775~1854)은 조심스럽게 결정론자로 특징지어진다. 왜냐하면 이들의 사상 안에 결정론과 자유라는 양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흄은 인간의 행위는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면서도 인간의 행동은 자유롭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인간의 선택은 가능한 많은 어떤 물리적 작용으로 강요된다고 주장했다. 즉 선택의 행위는 선행하는 감각들 혹은 동기들뿐만 아니라 성격에 의해 뚜렷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 선택을 하며 나간다고 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흄은 인간의 자유를 언급했던 것이다. 또한 셀링은 인간의 선택 행위가 예측 가능한 동시에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즉 인간 스스로가 선택을 하지만 그 선택들은 이전에 했던 선택들의 결과로 변화된 성격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셀링에게 자유는 근본적으로 선과 악 사이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자유 의지의 옹호 : '자유 의지' 를 지지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다양한 입장들이 있다. 프랑스 오라토리오회 소속의 신부였던 말브랑슈(N. Malebranche, 1638~1715)는 만일 인간의 상태가 온전히 인과 관계에 의해 규정 된다면 어떤 행위들에 따르는 인간의 책임은 부정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과 관계에 따른 인간의 행위를 부정한 그는 종교와 도덕도 인간이 자유롭지 않다면 무의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라이프니츠(G.W. Leibniz, 1646~1716)는 자유에 대한 그의 이론이 결말에는 결정론 형태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자유를 인정했다. 또한 자유 행위들은 최고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한 최선의 판단을 해야 하는 이성에 의해 동기화된다고 보았다.
다른 몇몇 철학자들은 주어진 실재로서 의지의 자유를 인정했지만, 이를 주장하려는 시도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예를 들어 파스칼(B.Pascal, 1623~1662)은 참된 의미의 자유는 단지 종교적 경험에 의해서 알려질 수 있다고 하였고, 칸트(I. Kant, 1724~ 1804)는 자유가 학문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실존주의자들도 자신들의 철학적 입장을 위한 토대로 자유로운 선택을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야스퍼스(K. Jaspers, 1883~1969)는 각 인간은 자신의 이전 상태를 능가하려는 독특한 존재이고, 또한 자유를 실천하는 진보에 따라 새로운 존재의 상태로 놓여진다고 주장했다.
〔철학적 분석〕 자유 의지 개념의 역사적 발전은 이 개념에 대한 사상의 흐름뿐만 아니라, 인간 자유의 실재성을 분석하기 위해 시도되는 과정에서 자유 의지의 구분과 정의의 필요성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것의 조화를 추구했던 스콜라 철학자들은 자발성(voluntarity)과 그것이 주제화되어 나타난 다양한 영향들과 관련된 개념들로부터 구분되는 자유의 발전된 개념을 갖게 되었다. '자유의지' 라는 용어는 라틴어 '리베룸 아르비트리움' (Liber-um arbitrium)을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더욱 정확한 번역은 '자유 의사' , '자유 선택' 혹은 '자유 결정'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 의지' 라고 하는 이유는 이 표현이 모든 '자발적 행위' 가 행위의 숙고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유 행위로 해석되어 왔기 때문이다.
자발성 : 이는 자유롭게 의지된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행위가 항상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수행되는 자유로운 행위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습관들처럼 깊이 스며들어서 이루어진 행위들은 아마 과거의 어느 때인가 의지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선 선택의 행위로부터 결과된 어떠한 행위들도 또한 자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히 자유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또한 '자발성' 과 습관들처럼 '숙고되지 않은 행위들' 과의 혼을 피하기 위해 '자유 의지' 는 어떤 대상에 대한 이끌림에의해 그것을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제한으로써, 추구하는 가치를 얻고자 하는 목표를 지닌 한 인간에 의해 소유되는 자유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분명히 자유 의지에 대한 더 나은 해명을 요구한다. 실제적이고 매혹적인 어떤 대상을 선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리고 의지는 대상이 선한 것으로 인식될 때 그것에 끌릴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인간 의지는 보편적 선에 따라 지성적으로 인식된 목표를 향한 인간 본성 안에 뚜렷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즉 토마스는 선택의 자유를 특정한 선으로 인식된 대상들을 선택하는 행위로 간주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선택이 그러한 특정한 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요구되고 이끌려진 행위들 : 이러한 행위들은 의지 자체의 원의 혹은 선택의 행위들을 변화시킨다. 또한 의지에 따라 무엇을 바라거나 선택하지만 또 다른 힘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앞서 달리기 시작한 어떤사람보다 더 빨리 달리기를 바라는 운동 선수가 있다면, 그의 바람은 이끌려진 행위이다. 그러나 의지만으로는 그가 추구하는 결과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의 바람은 단지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이룩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 그는 목표를 추구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유가 있는 반면,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필연적인 자유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방종 : 의지의 자유를 방종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방종은 선택하는 사람의 본성을 충족시킬 수 없는 어떤 대상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방종에 상반되는 것으로서의 자유는 인간 개인의 본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선들을 외부로부터 혹은 내부로부터 강요 없이 추구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이다.
무의식 : 의지의 선택에 영향을 주는 정신의 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분명히 지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식의 지평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인식의 지평 바깥에 있는 무의식도 또한 선택의 행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인간은 무의식의 영향으로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을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선택의 행위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유로운 선택 행위는 그 자체로 의식적인 판단이 기초가 되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이 주장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만일 이러한 신념이 혼동된다면, 의식의 어떤 요소도 믿음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자유 의지와 은총〕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은 하느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신앙인들의 근본적인 믿음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신비'(Mystery)이다. 가톨릭 교회는 신학자들이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하느님의 은총 사이의 양립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인정하면서도 그 둘의 조화를 가르쳐 왔다.
은총의 우위성 : 가톨릭 교회는 자유 행위가 하느님의 자비로운 선물인 은총에 의해서 시작되고 유지되며 완성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자유 행위도 구원에 이를 수 있는 행위가 될 수 없다는 은총의 우위성을 믿는다. 은총의 우위성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의 의미를 파괴하는 것이다(요한 6, 4 ; 15, 5 ; 필립 2, 13 ; 2고린 3, 5 ; 로마 11, 6). 중세에 유명론이 대두되자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가르침을 통해 펠라지우스주의(Pelagianismus)가 대중화된 신심과 설교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영향에 맞서 종교 개혁자들은 은총의 절대적인 우위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가 말했던 것처럼 은총과 인간의 자유 행위 사이의 상호 관계에 대한 주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종교 개혁을 주도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하느님의 은총이 서로 조화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 라, 오직 다른 하나에 대해 대립하여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가톨릭의 입장 : 가톨릭 신학은 인간의 모든 초자연적 행위가 인간의 자유 의지와 하느님 은총의 산물이라는 가르침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관계는 각각 따로 작용하는 서로 다른 독립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동의는 은총의 선물 자체이다. 또한 은총의 협력에 대해서 말할 때, 이 협력은 하느님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오직 하느님의 자유만이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자유이며, 인간의 자유는 피조물의 자유로 하느님의 절대적 자유 안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의존이 인간의 자유를 빼앗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 자유에 대한 신적 원인성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의 범주를 초월하는 것으로 인간의 본성들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방법들 속에서 그들 자신의 행동에 작은 원인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한편 자유 의지를 가지지 않는 다른 존재들은 이미 결정된 실재성을 향해 움직인다. 반면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자유롭게 행위하며 그 행위에 따른 책임을 진다. 그러나 은총의 작용을 거부할 수는 없다. 따라서 결국 이 둘사이의 관계는 신비로 이해해야 한다.
〔자유 의지와 예정〕 종교적인 입장에서 신적 결정론은 하느님이 전지전능한 까닭에 발생하는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고, 생겨나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하느님의 능력에 비추어 보면 하느님은 인간 역사 과정에서 어떤 인간이 취하게 될 모든 선택을 예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행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예지와 결정에 의해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예정은 하느님이 인간의 구원을 미리 정하셨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예정에 관한 문제는 교회 안에서 매우 복잡하게 논의되어 왔다. 특히 아우구스티노는 '예정'을 하느님의 자유에 따른 신적인 주도권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 의지 사이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려는 그의 노력은 하느님의 은총 없이 인간의 자유는 무가치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De gratia etlibero arbitrio, 2. 2).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를 모두 긍정했다. 즉 한편으로는 창조주 하느님은 유한한 피조물들과 달리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 무한한 존재이며, 영원으로부터 어떠한 행위를 가지고 계셨으므로 피조물의 유한한 본성이 하느님으로부터 기인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자유롭지 않다면 조언과 권고, 그리고 금지와 보상, 처벌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므로 인간은 자유롭다고 말했다. 이 두 가지 믿음을 조화시키기 위해 토마스는 존재론적 원리를 이용해 제1 원인과 2차적 원인을 구별하였다. 즉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제1 원인과 함께 2차적 원인도 필요하다. 제1 원인은 모든 피조물에게 존재와 행위를 부여하는 하느님이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의 근원적 원인은 하느님께 의존한다. 그러나 토마스는 인간의 행위에도 독자적인 인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즉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에 의해 필연성을 가지지만, 하느님의 협력 안에서 활동하는 인간의 행위도 실제로 2차적 원인이 된다(S.Th. I a, q.83, a.1ad3).
루터는 하느님의 예정이 인간의 자유와 모순된다고 주장했다. 즉 자유 의지는 오직 하느님에게만 존재하며, 만약 자유 의지가 인간에게 적용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물건들을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을 권리에만 한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루터는 인간이 구원되거나 구원되지 못하는 상황은 하느님의 의지 혹은 사탄의 의지에 좌우된다고 믿었다. 또한 바이우스(M. Baius,1513~1589)는 은총 없이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고, 오직 죄만 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에 반대하여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아담의 죄로 인간이 처음의 깨끗한 본성을 손상받았다 하더라도 인간 의지는 여전히 자유롭다고 하였다. 또한 실제적인 은총의 영향하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는 하느님의 은총에 동의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고 선언했다(DS 1521, 1544).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가톨릭 신학자들간에 다시 하느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에 관련된 논쟁이 제기되었다. 즉 몰리나를 중심으로 한 예수회 학파와 바녜스(D. Bàñez, 1528~1604)를 중심으로 한 도미니코회 학파 간에 일어난 은총 논쟁이다. 일반적으로 예수회 학파는 인간의 자유에 고도로 가능한 공간을 부여하여, 충족 은총(gratia sufficiens)은 인간의 동의를 통해서 효능 은총(gratia efficax)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반(半)펠라지우스주의(Semi-Pelagianismus)의 오류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몰리나는 '중도 인식' (中途認識, scientia media)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인간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졌고, 어떠한 조건이 충족된다면, 어떻게 행동할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도미니코회 학파는 하느님은 인간이 자유롭게 행동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교회는 양쪽 모두를 단죄하지 않고 다만 양편의 극단적인 주장들만 배격하였다. 즉 모든 일이 인간의 자유에 의해서 좌우되기에 하느님은 다만 자율적으로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인간을 돕고 지원하는 역할만 한다는 주장이 배격되었다. 또 모든 일이 하느님에 의해 좌우되기에 인간의 자유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다는 주장도 배격되었다. 결국 이 논쟁을 통해 하느님의 자유로운 예정과 인간의 자유 의지 모두를 고수하는 것이 성서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 되었다.
〔교리서의 가르침〕 1997년 8월에 라틴어 표준판이 발표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 관련된 내용들이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인간은 그 영혼과 지성과 의지의 능력에 힘입어 '하느님 모습의 탁월한 표징' 인 자유를 받았다"(705항)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자유는 "이성과 의지에 바탕을 둔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며, 이것을 하거나 또는 저것을 하는 능력이고, 이처럼 스스로 숙고해서 행동하는 능력이다. 각 사람은 자유 의지에 따라 자신의 삶을 이루어 나간다. 인간은 진리와 선 안에서 자유를 통하여 성장하고 성숙한다. 자유는 우리의 행복이신 하느님을 향할 때 완전하게 된다"(1731항). 이 주장을 통하여 교회는 어떠한 결정론의 입장이든 명백하게 배격한다. 또한 교회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넣어 주신 진리와 선을 분별하는 능력과 맞을 때, 그리스도의 은총은 우리의 자유와 전혀 배치되지 않는다"(1742항)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자유로운 주도(主導)는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요구한다" (2002항)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인간의 자유 의지가 하느님의 뜻에 부합될 때, 상존 은총(常存恩 寵, gratia habitualis)이 주어진다고 하였다. 나아가 "은총의 활동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도적으로 먼저 인간을 준비시키시어 인간이 자유롭게 은총에 따르도록 마련하신다. 은총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심오한 갈망을 충족시킨다. 은총은 인간이 자유로이 은총에 협력하도록 초대하고 그 자유를 완성시켜 준다" (2022항). 결국 하느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 의지는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며, 인간 완성을 위해 자유 의지의 올바른 사용을 강조하고 있다. (⇦결정론 ; → 몰리나주의 ; 은총론 ; 의지 ;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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