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후기에 철학의 예비 학문으로 간주되었던 학문들에 부여된 이름.
이 학문들은 '자유롭게 태어난 인간들에게 가치가 있는 활동 형태' (L.A. Seneca)라는 의미에서 '자유 학예' 라는 이름을 얻었다. 육체적인 노력을 경감하는 데 필요하고 노예들에게 제한되어 있던 '기계 기술' (artes mechanicae)또는 '노예적 기술' ([artes] serviles)과 대조된 명칭이다. 이 학문들은 일반적으로 일곱 개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었고, 3학과(trivium : 문법학, 수사학, 논리학)와 4학과(quadrivium : 대수학, 기하학, 음악학, 천문학)로 구분되었다. 이런 구분은 중세 초기의 학교 제도에도 그대로 도입되어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성서 연구를 돕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서 다양한 학교에서 널리 교육되었다. 그렇지만 자유 학예는 12세기에 들어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83~323/321)가 재발견되고, 알려진 모든 학문을 정리하고 규정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명확해지면서 점차 그 형태가 변화되었다. 현대에 와서도 '인문학부' 라는 명칭이 사용되지만, 이 용어는 훨씬 더 포괄적으로 일반적인 인문 교육 전반을 의미하게 되었다.
〔형성과 변화〕 '자유 학예' 체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확실히 밝힐 수는 없다. 아마도 견고한 지성 교육의 기초 교육 과정을 마련하려던 의도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사실 매우 이른 시기에 힌두교와 이집트에서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일련의 기초 학문들을 교육했다.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8세기에 체육과 '음악' 등의 기초 교육이 의무로 지정되어 있었다. 기원전 5세기경에는 이 기초 교육이 제논(Zenon of Elea, 기원전 495?~430?)에게서 유래했다고 알려진 쟁론술을 포함해 문법학, 대수학, 기하학, 음악과 천문학 공부를 포괄하게 되었다. 이 '초등 학교는 젊은 아테네 시민들이 더 상위의 철학 학교를 방문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 주었다. 소피스트로 기원전 5세기경 활동한 히피아스(Hippias of Elis)는 모든 학예에 대해 폭 넓은 교육을 받은 공공 연설가의 가치에 대해서 강조했다.
일곱 가지 학예는 때에 따라서 함께 언급되는 다른 학예들과 함께 '일반 교육' (ἐκλεκτός παιδεία)라고 불렸다. 이런 교육 관습은 이론적으로 철학의 상이한 학파들에 의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되었다. 그래서 수사학자였던 이소크라데스(Isocrates, 기원전 436~338)는 이 학예들을 시민이 되기 위한 최고의 준비라고 옹호했다. 왜냐하면 시민들은 다른 이들을 이끌 때 설득의 기술(수사학)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 기술은 폭 넓은 교육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기원전 470/469~399)와 플라톤(기원전 428/427~348/347)은 소피스트적인 입장을 강하게 반대했다. 플라톤-특히 《국가》 제7권과 《법률》 제7권에서-은오직 속견(俗見)으로만 이끄는 시학과 수사학의 가치를 최소화했고, 학문의 영역으로 이끄는 첫 발걸음으로 수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런 학예들은 참된 지혜 또는 철학을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았고, 철학은 변증술을 가지고 추구되지만 모든 방법을 넘어서서 직관적인 지혜를 가지고 포착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소피스트들을 반대했지만, 플라톤이 수학에 부여한 만큼의 교육적 중요성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엄격한 학문적 지식이 확증될 수 있는 논리학에 핵심적인 역할을 부여했다. 그리스 철학자들 중 회의론자들도 자유 학예의 가치를 최소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감각 지식을 인식론적으로 방어한 에피쿠로스학파와는 달리 스토아 학파는 문법학과 논리학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로마의 학자 바로(M.T. Varro, 기원전 116~27)는 현재 소실된 작품 《학문에 대한 9권의 책》(Disciplinarum libri Ⅸ)에서 자유 학예를 조직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이 책에서 문법학, 수사학, 변증론,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학, 의학과 건축학 등 아홉가지 기초 학문들의 본성과 대상을 설명했다.
자유 학예의 숫자는 오랜 동안 증감을 거듭한 결과, 스토아적 경향을 지닌 학자로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활동한 카펠라(M.MF. Capella)에 의해 최종적으로 일곱으로 확정되었다. 그는 420년경 《아홉 권의 사튀리콘》(Satyricon libri Ⅸ)을 저술했는데, 이 책에서 자유 학예를 다루면서 바로의 체계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의학과 건축학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 이후 '일곱 학예' (septemartes)에 대해서만 말하게 되었다.
이런 연구는 동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교육의 대상으로 지속되었고, 우연한 기회에 이슬람 세계에 전파되었다. 이슬람 학자들은 수학 분야에서 약간의 발전을 이룩하였지만, 그외 주목할 만한 발전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는 뛰어난 수사학자였던 아우구스티노(354~430)가 이 학예들이 좋은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 학문들이 성서를 연구하기 위한 준비로서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학예들에 대한 백과 사전을 시작했지만 완성하지는 못했다. 이 학문들에 대한 그의 생각은 저서 《질서론》(De ordine)과 《음악론》(De musica)에서 근본적으로 플라톤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언어, 음악과 수학 안에서 발견되는 질서는 하느님 안에 존재하는 완전한 질서에 대한 반영이다. 하느님에 대한 이런 감각적인 반성은 초심자(初心者) 하느님에 대한 참된 직관으로 이끈다고 하였다.
이 학예들을 통해 그리스인들이 이룬 성과가 정확하게 서방에 전달된 것은 보에시우스(A.M.T.S. Boetius, 470/475?~524)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는 비록 부분적으로만 성공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기원전 30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에우클레이데스(Eucleides)의 중요한 그리스어 작품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려고 시도했다. 5~8세기에 이 번역들은 학예들을 매우 압축해 놓은 다양한 입문서들과 함께수도원 학교에서 성서 연구를 준비시키는 과정에서 사용되었다. 알쿠이노(Alcuimus, 7321735?~804)와 카롤링거 왕조 시기에 이 학예들이 실제로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뚜렷한 도약이 이루어진 것은 12세기경 아벨라르(P. Abélard, 1079~1142)와 샤르트르의 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생 빅토르의 후고(Hugues de Saint Victor, 1096~1141)가 저술한 《디다스칼리콘》(Didascalicon)과 살리스버리의 요한(John of Salisbury, 1110?~1180)의 《메탈로지콘》(Metalogicon)인데, 이 두 작품은 아우구스티노적인 틀을 지니고 있었다. 13세기에 새로 설립된 대학들에서 이 학예들에 대한 연구가 인문학부를 통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인문학부는 학생들을 법학, 의학, 신학과 같은 상위 학부나 최종 교육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전통적인 플라톤-아우구스티노적인 학문관은 오랜 기간 동안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고, 이것은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17?~1274)의 《모든 학문의 신학적 환원》에 세련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체 작품들이 소개되면서 중세에는 새로운 철학 개념이 주어졌다. 이 철학은 자유 학예와 구분되는 것으로 자유 학예와 신학 연구의 중간 기능을 담당했다. 이런 견해는 알베르토(Albertus Magnus, 1200~1280)와 토마스 아퀴스( 1224/1225~1274) ,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른 후기 스콜라 철학자들에게서 발견된다.
[내 용] 일곱 자유 학예는 시초에 상당히 임의적으로수집되고 구분되었지만, 스콜라 철학의 융성기에 이르러서 구분의 근거와 자유 학예의 역할에 대한 반성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든 학문은 사태(사물)에 대한 것과 표징에 대한 것이다"(《그리스도교 교양》 Ⅰ, 2)라는 아우구스티노의 구분에 따라 7 자유 학예' 의 3학과를 우리가 실제를 인식하고 표현할 때 필요한 '언어 관련 학예' (artes ser-mocinales)로, 4학과는 사태적인 측면을 다루어야 하는 '실제 관련 학예' (artesreales)라고 생각했다.
모든 학문을 구분하는 기준을 일곱 자유 학예에 적용하려는 시도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제기되었다. "스콜라 철학자들의 관점에 따르면, '자유 학예' 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소개 이후 도입된 모든 학문(scientia)을 포괄하는 철학(philosophia) 개념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하기 위해 먼저 '기술' (학예, ars)이란 용어에 대해서 숙고했다. '기술' 은 엄격한 의미에서 '어떤 것을 만들기 위한 올바른 판단' (recta ratio factiblum)이며, 여기서 만들다' (facere)가 의미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물질적인 작품의 생산을 뜻한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런 정의는 오직 생산 기술(artes mechanicae)에만 적용된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자유 학예' 도 유비적인 의미에서는 '기술' 이라불릴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앎뿐만 아니라, 동일한 이성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결과되는, 삼단 논법의 구성,담론의 구성, 셈, 측량, 멜로디 편집, 별 등의 운행 계산 등 일종의 업적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다른 학문들은 혹은 작업을 소유하지 못하고 지식으로 한정되거나 아니면 물체들에 관련된 작업을 하기에 '자유학예' 라고 불릴 수 없다"(《삼위 일체론 주해》 5, 1, ad3). 이렇게 '기술' 로 이해된 모든 학예는 무엇보다도 상위 학문들을 위한 도구이다. 상위 학문들은 실재 대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논리학과 다르고, 이상적으로가 아니라 그들이 실존하는 조건에서 실재를 다룬다는 점에서 수학과도 다르다. 토마스는 이 실재 학문들에 자연학, 윤리학, 신학이 속한다고 보았고, 신학을 자연 신학 또는 형이상학과 계시 신학으로 구분했다. 실제적으로 학생들은 상위 학부에서 배우는 실재 학문들을 탐구하기 이전에 기초 과정에서 '학예들' 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론적인 관점에서 자유 학예들을 고찰할 때이 중에서 많은 것은 기술일 뿐만 아니라 참된 학문이며, 따라서 이 학예들은 '철학의 부분들' 인 것처럼 보이기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에 따르면 이 긴장 관계는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다. 첫째, 자유 학예들이 정신적인 작품을 생산한다는 측면에서는 '기술' 로서 상위 학문을 위한 도구일 뿐이지만, 때로는 생산된 작품의 참된 가치를 증명하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작업을 하는 학문이라고도 불릴 수 있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학문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철학' 은 작업과 체계화의 특정 정도에 도달한 '전체' 지식을 뜻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지식을 '근거들을 통한 사물들의 인식' 이라고 정의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자유 학예에 속하는 개별 학문들도 보편 학문인 철학의 일부일 수 있다. 둘째, 자유 학예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내용들 사이의 관련성은 쉽게 확정 지을 수 있다. '3학과' 의 최고 단계인 논리학은 철학의 첫째 단계이기도 하다. '4학과' 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이론 철학의 한 부분인 수학과 뚜렷한 유사성을 나타낸다. 끝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3학과' 의한 부분인 수사학과 실천 철학의 분과인 정치학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학문 이론을 따르는 토마스에게는 자유 학예들이 한편으로는 상위 학문을 위한 도구이면서도 개별 학문으로서 학문의 전체 체계에서 특정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이론적인 가능성이 열려있었다. 물론 실천적으로는 상위 학문들을 연구하기 위한 기초 교육으로서의 기능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많은 학자들은 바로 이 기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영향 및 의의〕 자유 학예 교육의 이상은 논리학과 변증법이 다른 학예들을 무시할 정도로 주도권을 쥐는 경향이 나타났던 중세 대학들에서 실제로 실현되지 못했다. 14세기 유명론은 논리주의를 심각한 극단까지 몰아갔다. 이에 대한 강한 반발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문법학과 수사학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되돌아섰다. 그들은 소위 '전통적인 고전 교육' 을 발전시켰고, 이것이 기초 교육은 주도했지만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결정적으로 파괴시키지는 못했다.
매우 중요한 변화는 16~17세기에 수학이 발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변화는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가 수학적인 연역법을 모든 지식의 보편적인 방법으로 도입하자고 제안한 데서 정점에 도달했다. 이런 시도는 그 플라톤적인 성격 때문에 베이컨(F. Bacon, 1561~1626)과 같은 사상가들이 제안한 아리스토텔레스적 귀납법 전통의 잔재와 날카롭게 충돌하였다. 뉴턴(I. Newton,1642~1727)이 이러한 충돌을 무마하기 위한 일종의 화해 방법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연역적 수학 이론이 관찰과실험 안에서 확인되는 '과학적 방법' 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하지만 '과학적 방법' 의 비인격적이고 객관적인 접근 방식에 반발해서, 역사 사건들을 인간이 지닌 고유한 내적 경향들의 진화와 표현으로 바라보려는 '역사적 방법'이 발전했다. 이 방법은 무엇보다도 예술, 철학, 신학,역사, 윤리학과 정치학 등의 '인문학' 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이런 학문적인 방법론의 분열과 긴장 관계는 이후 서구 사상에서 나타나는 깊은 분열들, 즉 과학에서 훈련 받은 이들과 인문학에서 훈련받은 이들 사이의 분열, 객관적 관점과 주관적 관점의 분열, 20세기의 주도적인 두 가지 철학 경향인 실증주의와 실존 철학의 분열 등에서 계속 나타났다.
현대에 와서 자유 학예는 더 이상 초기의 일곱 가지 개별 학문들에 국한된 형태로 남아 있지 않고, 남아 있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공통적인 자유 학예를 바탕으로 다양한 학문들이 유기적으로 발전해 갔던 고대와 중세의 학문 체계는 현대인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다. 중세 대학의 설립기에 일곱 자유 학예의 틀이 새롭게 소개된 학문들을 수용하면서도 그 관련성을유지했듯이, 새롭게 등장하는 다양한 학문들을 연구하는데 기초적인 교육을 제시하는 인문학부나 교양 과정의 역할은 현대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더욱이 동서양 문화의 조화 있는 발전이 절실한 21세기에는 서구 전통을 넘어서는 동양의 다양한 학문들의 전통도 '자유 학예' 로 상징되는 기초 교육에서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일곱 자유 학예가 중세 시대 성서 연구 및 신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듯이 새롭게 발전하는 현대의 '자유 학예' 인 인문 교육 과정은 파편화된 개별 학문 분야들을 포괄적인 관점에서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상호 교류를 통해 조화 있게 발전해 나가는 초석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 스콜라학)
※ 참고문헌 박승찬, <중세 언어 철학의 발전 - 스콜라 철학 융성기의 혁신을 중심으로>, 《중세 철학》 6 ,2000, pp. 125~151/ B.M.Ashley, 《NCE》 8, pp. 696~699/ M. Dreyer, 《LThK》 1,p. 1046/ D. Illmer, 《TRE》 1, pp. 156~171/ H.M. Klinkenberg, Historisches Worterbuch der Philosophie Ⅰ, pp. 531~535/ J.H.J. Schneider, Wissenschaftseinteilung und institutionelle Folgen, MJ.F.M. Hoenen · J.H.J. Schneider · G. Wieland eds., Philosophy and Learning : Universities in the Middle Ages, Leiden Brill, 1995, pp. 63~1221 F. van Steenberghen · Fernand Van, Die Philosophie im 13. Jahrhundert, Herausgegeben von Max A. Roesle, München · Paderborn · Wien, Ferdinand Schöningh, 19771 J.A. Weisheipl, Classification of the Sciences in Medieval Thought, Mediaeval Studies 27, 1965, pp. 54~91. [朴勝燦]
자유 학예 自由學藝 〔라〕artes liberales 〔영〕liber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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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자유 학예는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아테네 학원>, 라파엘 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