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리아 Zacharias(?~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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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출신으로는 마지막 교황인 자카리아.

그리스 출신으로는 마지막 교황인 자카리아.

성인. 교황(741~752) 그리스 출신으로는 마지막 교황. 축일은 3월 15일.
741년 12월 3일 교황이 된 그의 이전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칼라브리아(Calabria)에 사는 그리스인 폴리크로니오(Plychronius)의 아들이라는 것과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부제였다는 것, 교양과 학식을 겸비한 인물이었다는 것뿐이다.
〔업 적〕 그는 재임 기간 동안 성직자들과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많은 자선 활동을 하였다. 또한 롬바르디아, 프랑크 왕국,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로운 외교 관계을 위해 전념하였다. 그는 교황 선출 소식을 황제에게 보고하여 황제의 승인을 기다린 마지막 교황이었다. 그로 인해 교황은 동로마 제국 황제로부터 호감을 얻었다. 롬바르드족과의 관계 : 자카리아가 교황에 즉위할 당시 롬바르드족이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정치적 긴장 관계는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롬바르드족의 왕인 리우트프란트(Liudprand, 712-744)는 이전의 정복 정책을 다시 펼치면서 이탈리아 전체를 굴복시키려 하였다.
역대 교황들은 동로마 제국에 도움을 청하였으나, 계속되는 무슬림들의 공격으로 도움을 줄 수 없었다. 특히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5세(741~775)는 자신의 아버지인 레오 3세(717~741) 황제가 교황들로부터 탈취한 이탈리아 내의 영토를 계속 보유하고 있었기에 교황청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동로마 제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이탈리아인들은 물론 성화상 공경 금지 칙령에 항거하는 집단들과의 전쟁도 계속 수행하고 있었다. 한편 국가적 이익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프랑크 왕국의 궁정 집사인 카를 마르텔(Karl Martell, 688?~741)은 교황 그레고리오 3세(731~741)의 지원 요청에도 불구하고 리우트프란트 왕의 이탈리아 공격과 로마 점령 사건을 방관하고 있었다. 독일의 사도인 보니파시오(675.754)에 의해 체결된 로마와 프랑크 왕국 사이에 체결된 동맹보다는 롬바르드족과의 동맹을 더 중요하게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잡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황은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먼저 교황은 전임 교황인 그레고리오 3세의 정책을 변경하여 리우트프란트 왕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고자 로마 인근에 위치한 스폴레토의 공작 트라사문트(Trasamund of Spoleto)와의 동맹을 단절하였다. 교황은 리우트프란트 왕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선물을 바치는 한편, 직접 왕을 접견하여 공동으로 스폴레토 공작령을 공격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왕은 교황과 동맹을 맺었고, 교황과 왕의 연합군은 스폴레토 공작령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왕은 교황과의 약속 이행을 미루면서 자신이 점령한 도시들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교황은 742년 봄에 개인적으로 테르니(Treni)에서 왕을 만나 4개의 도시와 빼앗은 모든 재산을 교회에 반환 하도록 권유하였다. 또한 수많은 성직자들을 동원하여 끈질기게 항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협상을 통해 각종 약속과 조약의 이행을 촉구하였다. 그 결과 왕은 자신이 점령하였던 도시들을 교황에게 반납하였으며, 그 도시들에서 탈취한 재산 역시 교황청에 증여하였다. 또한 교황청과 향후 20년간의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으로 로마의 공작령, 즉 로마 시와 캄파냐(Compagna), 마리티마(Maritima)와 로마 시 이외의 일부 지역에서 교황은 고유한 통치자가 되었으며, 모든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그리고 743년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라벤나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도록 하였으며, 화해 정책을 통해 롬바르드족과의 평화 관계를 유지하였다.
성화상 논쟁 : 성화상 파괴 운동은 콘스탄티누스 5세 황제 때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자카리아 교황은 선출 직후 특사를 콘스탄티노플 교회와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파견하였다. 그를 통해 교황은 자신의 선출 소식을 전하면서 성화상 공경에 대한 황제의 입장을 선회하도록 권고하였다. 이 시기에 교황 특사는 성화상 공경을 옹호하지만 사라센족과 싸우는 황제의 폐위를 모의한 황제의 매부 아트라바스두스(Atrabasdus)가 쓴 편지들을 받지 않았다. 이 편지들은 황제가 왕권을 회복한 743년 11월에 전달되었으며, 황제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두개의 큰 토지를 교황에게 선물하였다. 프랑크 왕국과의 관계 : 교황이 즉위할 당시 이탈리아 내에서는 교황청의 권위가 강화되고 있었고, 독일의 사도라 불리는 보니파시오의 선교 활동이 유럽 교회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교황이 즉위하자 보니파시오는 교황에게 충성과 순명을 서약하였으며, 독일에서 개종시킨 신자들을 교황에게 복종시킬 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교황은 742년 보니파시오를 전 프랑크 왕국의 교황 사절로 임명하여 프랑크 교회 개혁 사업의 책임을 맡겼다. 또한 그에게 독일 내에서의 교구 설립을 허가하였으며, 이후 보니파시오와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교회의 규율과 윤리적 생활을 장려하고 교황권을 확대시켜 나갔다. 교황은 사망할 때까지 보니파시오와 프랑크인 주교, 통치자들과 화합을 이루었으며, 교회적이고 윤리적인 교육과 지침으로 양성하면서 프랑크 왕국 내에서 교황의 통치권을 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보니파시오는 자신이 임명한 주교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줄 것을 교황에게 요청하였으며, 이들을 742년 4월 프랑크 왕국의 교회 회의에 참석시켰다. 교황은 이를 수락하였으며, 여러 명의 여자와 결혼하였거나 여성 수도자들과 부정한 관계를 맺고 있던 성직자들의 성무 집행 정지를 권고하였다. 또한 교황은 교회 회의 참석자들에게 서한을 보내 각종 성적 일탈 행위를 금지하라고 지시하였으며, 성직자들이 각종 물건들을 성물로 속여 판매하는 행위를 중단하라고 촉구하였다.
교황은 743년에 개최된 로마 교회 회의를 통해 프랑크 왕국 교회 회의의 법령을 승인하였고, 전임 교황에게 프랑크인들이 제기한 혼인 장애와 관련된 답변을 처리하였다. 또한 교황은 745년의 교회 회의에서 보니파시오가 이전에 프랑크 교회 회의에서 아달베르트와 글레멘스라는 이단자들에게 내린 유죄 판결을 확정하였다. 이 교회 회의에서 교황은 복음의 원칙들을 준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과 정신을 무시하면서 신자들을 전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로마의 주교들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교황의 또 다른 정치적 업적은 프랑크 왕국에서 교회를 조직하고 개혁하는 일에 전념하였던 보니파시오와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프랑크 왕국에 대한 교황권을 강화하였다. 743년 메로빙거 왕조 최후의 왕인 힐데리히 3세가 등극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실권자는 카를 마르텔의 아들들인 카를만(741~747)과 피핀(741~768)이었다. 747년 카를만이 통치를 단념하고 몬테 카시노의 수도자가 되자 유일한 지배자가 된 피핀은 메로빙거 왕조를 폐지하고 직접 왕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사실상 그는 광범위한 반란을 진압하고,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 이슬람을 내쫓는 등 실권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게르만 왕권의 강한 종교성을 고정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계획이 정당함을 인정해 주고 궁정 집사라는 출신을 영적인 도유로 보충해 줄 더 높은 권위를 필요로 하였다. 즉 교황의 권위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751년 피핀은 교황에게 왕의 칭호를 받을 만한 자가 권력을 지닌 자, 즉 자기 자신인지 아니면 메로빙거의 왕인지를 질문하였다. 당시 롬바르드족의 위협으로 어려운 상황에처해 있던 교황은 피핀에게 유리한 결론을 내려 주었다.결국 교황의 암묵적인 동의를 받은 피핀은 수아송(Soi-ssons)의 왕국 회의(751~752)에 가서 자신을 프랑크 왕으로 선출토록 하였다. 이에 교황은 프랑크인 대주교에게 피핀을 왕으로 도유하도록 하였다. 이 사건은 "유럽사의 획기적인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지금까지의 수 많은 긴장 관계에도 불구하고 줄곧 동로마 제국을 지향해 온 교황권이 프랑크 왕국으로 대표되던 유럽으로 완전히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평 가〕 그는 11년간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교황권을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교회 및 성직자의 윤리를 쇄신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의 《대화》(Dialogues)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였는데, 이 책은 동방에서 널리 읽혔다. 752년 3월 15일에 세상을 떠난 교황의 유해는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 롬바르드족 ; 보니파시오)
※ 참고문헌  Histoire des Papes, Administration de Librairie, 1842, t.Ⅱ, pp. 203~208/ Gaston Castella, Histoire des Papes, Zurich, Fraumunster,1944/ Daniel Rivière, 최갑수 역, 《프랑스의 역사》, 까치, 1995/ R.Fisher-Wollpert, Lexikon der Päpste, Verlag Fridrich Pustet, 1985(안명옥역, 《교황 사전》,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1)/ A.Franzen, KleineKirchengeschichete, Herder, Freiburg im Breisgau, 2000(최석우 역, 《세계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K. Bihlmeyer · H. Tüchle, Kirchen-geschichte, trans. by V.C. Mills · F.J. Muller, Newmanpress, Wester-minster, 1966/ M.C. McCarthy, 《NCE》 14, 2003, p. 904. [邊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