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敎皇
〔라〕Papa · 〔영〕P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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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에게 양들을 맡기는 예수(타브가 베드로 수위권 성당 뜰).
교황이라는 명칭의 원어 'Papa' 는 아버지라는 뜻의 'papas' 에서 유래하였다. 이 용어는 본래 지역 교회의 최 고 장상(주교, 대수도원장, 총주교)을 부르던 말인데 8세기 이후부터 차츰 로마의 주교, 곧 교황에게만 사용되기 시 작하여 그레고리오 7세 교황(1073~1085) 때부터 교황에 게만 독점적으로 부여되었다. 《교황청 연감》(Annuario Pontificio)에서는 교황을 로마 교구의 교구장 주교, 그리 스도의 대리자,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 서방 교회의 최 고 사제, 총대주교, 이탈리아의 수석 대주교, 바티칸 시 국의 원수(元首)로 표현하고 있으며, 실제적으로 세계 주교단의 단장으로서 현세 교회의 통괄적 최고 사목자이 다. 〔교황직의 교리적 내용〕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 :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교회를 순전한 사상 운동으로만 선포 하지 않고 구체적인 공동체로 세웠다. 예수는 교회의 이 념인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열두 사도들을 선택하 여 그들에게 교회를 지도할 권한을 주고 파견하였다(마 태 10, 1-4 ; 마르 16, 15 ; 마태 18, 18 ; 28, 19-20 ; 사도 1, 8). 사도단을 구성할 때에 그들 중에서 시몬을 '베드 로' (반석)라고 개명하여 사도단의 으뜸으로 세웠다. 베 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약속(마태 16, 15-19), 베 드로에게 다른 형제들을 부탁한 것(루가 22, 31-32), 베 드로에게 양들을 맡긴 일(요한 21, 15-17) 등은 분명히 베드로를 사도단의 으뜸으로 세울 의향을 명시하는 것이 다. 초대 교회에서 베드로는 마티아를 사도로 보선하고 (사도 1, 15) 최초로 공개 설교를 하고(사도 2, 14 이하), 유대 원로원에서 사도들의 활동을 변호하고(사도 4, 8 ; 5, 29), 이방인 개종자 문제(사도 10, 24-28)와 구약 율법 의 문제(사도 15, 7-22) 등에 있어서 단장격으로 행세하 였다. 베드로는 예루살렘과 팔레스티나에서 선교하다가 로마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갔는데(사도 12, 17), 역사의 증언에 의하면 42~43년에 로마에 가서 로마 교회를 창 설하였고, 거기서 그의 첫째 편지를 썼으며(1베드 5, 13), 네로의 박해 때인 64년에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그 래서 그의 후계자인 로마의 주교는 당연히 베드로의 권 위와 책임을 계승한 것으로 확신하였고 교회도 그렇게 인정하였다. 1세기 말에 베드로의 3대 후계자 즉 4대 교 황인 성 글레멘스 1세는 멀리 고린토 교회의 분쟁을 조 정하였고, 2세기 초에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와 2 세기 중엽에 리용의 주교 이레네오는 로마의 주교가 전 교회의 으뜸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으며, 2세기 말에 교황 성 빅톨 1세는 동방의 부활 축일 논쟁에 개입 조정 하였고, 3세기 중엽에 성 스데파노 1세 교황은 재세례 (再洗禮)를 금하는 조처를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 주교 들에게 내리고 있다. 이와 같이 교황의 수위권(首位權) 은 이론적으로 정립되기 전에 이미 고대 교회에서 실시 되고 있었고, 그 후 역사적인 기복을 거쳐서 제1차 바티 칸 공의회(1869-1870)에서 신조(信條)로 정의되었고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가 재확인하였다(교회 22 항). 세계 주교단의 단장 : 교황의 수위권이 아무리 확고하 고 강력할지라도 각 지역 주교들의 고유한 사목 권한을 배제하거나 축소하거나 대행하지 않는다. 주교들은 주교 품을 받음으로써 사도들의 후계자가 되고, 위임된 지역 교회의 완전한 사목자가 되며, 로마 교황과 더불어 한 주교단을 이룬다. 베드로가 사도단의 단장이었던 것처럼 교황도 주교단의 단장이며, 따라서 교황을 제외한 주교 단이나 주교단과 유리된 교황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동 22항). 그러므로 주교단 안에서 각 주교들은 그들의 사목권을 교황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고 주교 서품을 통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받기 때문에, 자기에게 위임된 지역 교회(교구) 안에서는 교황의 대리가 아니고 (동 27항), 고유하고 직접적이고 통상적인 사목자이며(동 23항), 세계 교회에 대해서는 교황과 함께 한 주교단으 로서 전반적 최고 사목권의 주체가 된다. 주교단의 단체 성은 세계 공의회에서 잘 나타난다. 공의회의 결의는 단 장인 교황의 동의를 받아서 교회 전체에 대한 보편적 사 목 지침이 되는 것이다. 공의회 밖에서도 세계 주교들의 일치된 결정은 동의를 전제로 하여 교회의 최고 사목권 의 발로로 인정된다(동 22항 ; 주교 4항). 교황도 로마의 주교이기 때문에 다른 주교들과 함께 유일한 주교직에 참여하고 있다. 일찍이 치프리아노는 3 세기에 다음과 같이 주교직의 단일성을 강조하였다. "주 교직은 하나이고 각 주교는 여기에 연대적으로 참여한 다"(De unitate 5). 전체 교황의 수위권은 모든 교회 문제에 대한 완전한 것이고(plena), 주교를 포함한 모든 신자 개 인과 단체에 미치는 보편적인 것이고(univeralis), , 공의회 보다 더 높은 최고의 것이고(suprema), 직책상 당연히 가 지고 있는 통상적인 것이고(ordinaria) 누구를 통하지 않 고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것이고(immediata), 필요하면 언 제 어디서나 발동할 수 있는 자유로운 것이다(libera) 〔직 무〕 교황의 직무도 교회의 직무 내용처럼 진리를 가르치는 예언직(預言職)과 이에 상응하는 교도권(敎導 權), 인간을 성화하는 사제직(司祭職)과 신품권(神品 權), 교회를 다스리는 왕직(王職)과 통치권(統治權)으로 대별하여 생각할 수 있다. 교도권(potestas magisterii) : 구원의 계시 진리를 가르치 는 책임을 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부여받은 주 교들이다" (교회 25항). 주교들의 통상 권위로 가르치는 것을 통상 교도권이라 하고, 주교들이 세계 공의회를 통 하여 가르치는 것과 교황이 교황 직위를 발동하여 가르 치는 것을 장엄 교도권이라 한다. 교황의 통상 교도권 행사는 일반 주교들처럼 공식 설교, 교리 해설, 사목 교 서, 교구 회의 등으로 하고, 또 교황령(敎皇令), 회칙(回 勅) 등 문서로도 하며, 교황청 행정 부서의 율령이나 법 원의 판결같이 간접적으로 행사하기도 한다. 교황의 장 엄 교도권은 세계 공의회를 통하여 행사하기도 하고, 교 황 스스로 '교좌에서의 선언' 에 의하여 행사하기도 한 다. 그런데 교황이 장엄 교도권으로 신앙이나 도덕에 관 한 최종 결정을 하는 경우에는 절대로 그르칠 수 없다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신앙이다. 교황의 이 특은을 무류지 권(無謬之權)이라 한다. 교황이 교좌에서(Ex cathedra) 선 언한 것이 무류하기 위하여 다음 조건이 채워져야 한다. 전체 교회의 최고 목자로서 공식으로 선언한다. 따라서 교황도 로마 교구장의 자격이나 개인 학자의 자격으로 주장하는 것은 무류하지 않다. 계시 진리를 최종적으로 정의하려는 의도를 밝혀야 한다. 따라서 교황의 자격으 로 할지라도 통상적인 지도, 권유, 해설, 반박, 경고 등 은 무류하지 않다. 또한 신앙이나 도덕에 관한 문제에 국한되기 때문에 과학, 예술, 사회, 경제, 정치 기타 문 제에 관한 교황의 선언은 무류하지 않다. 신품권(potestas ordinis) : 교황의 신품권은 다른 주교들 의 신품권과 같다. 모든 주교는 주교품을 받음으로써 완 전한 신품권을 받아서 칠성사를 집전하고 모든 전례를 주관한다. 그래서 어떤 주교가 교황으로 선출되어도 더 큰 신품권을 받는 것이 아니며, 주교 아닌 사람이 교황 으로 선출되면 즉시 주교품을 받아야 로마의 주교가 되 고 세계 교회의 교황이 된다. 교황이 전례의 유효성에 관한 절차나 조건을 정하고, 전례문을 제정하거나 변경 하거나 또는 전례상의 관면이나 제한을 하는 것과 성년 을 선포하고 시성식을 거행하는 행위는 주교보다 더 큰 신품권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며, 다음에 말할 더 큰 교회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황이 집전한 성사나 주교가 집전한 성사나 (자기 권한 내에서) 신부 가 집전한 성사의 객관적 가치는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통치권(potestas jurisdictionis) : 교황의 통치권은 그의 수 위권 때문에 모든 성직자들의 통치권을 능가하고 포괄한 다. 교황의 통치권은 주교를 포함한 모든 신자에게 미치 고, 교회의 사명 수행에 직접 관련되는 모든 사항에 해 당한다. 교황의 통치권은 교회를 지도하기에 필요한 입 법권과 사법권과 행정권을 포함한 것이다. 교황은 이러 한 삼중 통치권을 행사할 때에 여러 가지 보좌 기관(법 원, 행정 부서, 회의 등)을 이용하지만 최종 결정권자는 교 황 자신이다. 그래서 현대 국가의 삼권 분립 제도는 교 회나 교황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교황의 통치권 에 의한 결정 중에서 (장엄 교도권과 직접 결부된 신조 선언이 아닌) 일반 명령이나 지시는 그 자체로서 무류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교황의 지시를 존경과 순명으로 받 아들이면 충분하고, 교회의 현세적 조건(정교 조약, 재산 관리 등)에 대한 교황의 결정은 비판할 수도 있는 것이 다. 〔교황직의 약사(略史)〕 고대 교회 : 초대 교회에서부 터 로마 주교는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위치로 인하여 전 체 교회의 중심 인물이었으므로, 이단자들도 자기네 주 장을 변명하기 위하여 로마로 갔으며(마르치온, 노바시아 노, 몬타누스, 그노시스 이단파의 지도자들), 교부들도 반대 자들의 핍박을 피하여 로마의 보호를 청하였다(아타나시 오 등).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비잔틴(후 에 콘스탄티노플로 개칭)으로 옮긴 후부터 로마의 정치적 비중은 줄어 들었지만 로마 주교의 종교적 권위는 더욱 커졌다. 박해 후에 신학적 사색이 발전하면서 동방에서 논쟁이 분분할 때에 로마 황제들은 여러 번 공의회를 개 최하여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였다. 주로 동방 주교들이 참석하여 결의하였지만 그 결의는 언제나 교황의 명시적 또는 묵시적 동의를 얻어야만 공의회로 인정되었으며, 칼체돈 공의회(451)는 성 레오 1세 교황의 사절들이 사 회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명실공히 교황의 수위권이 확 립된 것이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무렵부터(476) 서유 럽의 정치적 혼란에 즈음하여 교황은 교회뿐 아니라 서 유럽의 수호자로 등장하였고, 게르만 민족을 교화시키고 수도회와 성당을 통하여 로마 문화를 전수하였다. 6세기 말에 성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영국을 개종시키고 로마 주교에 대한 동로마 황제의 압력을 물리치고 중세 유럽 의 형성자가 되었다. 한편 동로마 황제의 후광을 입고 있는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들은 계속하여 로마 교황과 동등한 동방에서의 수위권을 요구하여 사소한 교리 해석 의 차이와 전례의 차이 등을 핑계로 삼아 교황의 수위권 에 도전함으로써 결국 동서 양교회가 분리될 소지를 만들었다. 중세 교회 : 중세는 로마 교황과 신흥 세력인 게르만 민족들과의 관계에서 시작되었다. 게르만 민족들이 개종 하고 교화되면서 서유럽에 많은 왕국이 형성되었고, 교 황은 이들 신생 국가들의 왕권에 교회의 보호를 요청하 게 되었는데, 시초에는 교황이 왕권의 후견인이었다. 그 러나 왕권이 비대해지고 교회를 보호한다는 구실 하에 왕권이 교권에 간섭하게 되자 양자의 충돌이 일어났다. 8세기 프랑크 왕국은 강력해지고 칼 대제는 교황 성 레 오 3세에 의하여 서유럽의 황제로 대관식을 받아서(800) 교회를 옹호함과 동시에 교권에 깊이 간여하였다. 그 동 안에 동프랑크(독일)도 개종하여 오토 대제가 교황 요한 12세에 의하여 황제로 대관되고(962) 소위 신성 로마 제 국을 형성함으로써 교권에 간섭하였다. 이렇게 7~10세 기의 교황들은 정권의 비호와 간섭을 받으면서 수위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였고 10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서 정권의 동요와 경제의 불황으로 사회는 혼란하였으며, 교황권의 약화는 성직자들의 기강 문란과 성직 서임권에 관한 왕권과의 다툼을 초래하여 서유럽 사회와 교회는 암담한 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시기에 편승하여 동방 교 회는 해묵은 수위권 시비로 결국 1054년에 로마 교회와 의 관계를 단절하고 말았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로마 교회는 꾸준히 복음 선포에 힘써서 7세기에 스페인, 8세기에 독일, 9세기에 슬라브 족과 스칸디아비아족, 10세기에 폴란드와 러시아, 11세 기에 유럽의 대부분을 그리스도교화하였다. 동방 교회의 이교(離敎) 후에는 교황의 권위는 서방 교회에 국한되었 다. 11세기에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집요한 투쟁으 로 교권을 왕권에서 해방시켰고, 12~13세기의 교황들 은 여러 번 공의회를 열어서 교회의 개혁과 분리된 동서 방 교회의 재일치를 시도하였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 다. 그러나 12세기부터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의 활 약과 새로 등장한 대학의 노력으로 13세기에는 중세 문 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전성기는 쇠퇴기의 시작이었으니 14세기에 여러 명의 대립 교황들이 출현하 여 소위 서구 대이교(1378~1417) 사태가 벌어져서 교황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다행히 콘스탄츠 공의회(1414~ 1418)로 이교 사태는 수습되었지만 교황의 지위는 약화 되고 때마침 일어난 문예 부흥 사조와 지리상의 대발견 등으로 서유럽의 통일과 정신적 일치의 구심점으로서의 교황의 위치는 결정적으로 흔들리고, 신학의 퇴조와 교 회 생활의 타락은 새로운 사조의 발흥을 소화하지 못한 채로 종교 개혁이라는 정신적 대혁명을 겪게 되었다. 14~15세기의 교황들 중에서 성인으로 시성된 교황이 한 분도 없었다는 사실이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 준다. 근세 교회 : 종교 개혁 운동으로 독일 · 영국 · 북유럽 의 여러 교회들이 로마와 절연하는 와중에서 교황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교회 개혁에 착수하여 트리엔트 공의 회(1545~1563)를 통하여 개혁론자들의 이단을 배격하고 교회를 체계화하고 교회 생활의 모든 분야를 혁신하는 조처를 취하였고, 성 비오 5세, 그레고리오 13세, 식스 토 5세 교황들은 정력적으로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의를 실시하였다. 활력을 다시 찾은 교회는 신생 예수회를 비 롯한 많은 선교 수도회를 통하여 극동 선교에 나섰으며, 로마에 포교성성(布敎聖省)을 설립하여 포교 사업을 지 휘하였다(1622). 17세기에는 프랑스에, 18세기에는 독 일에 국수주의적 교회관이 생겨서 소위 정교 분리 사상 이 강력히 대두되어(갈리아주의, 페브로니우스주의, 요셉주 의) 교황의 수위권은 또 한 번 도전에 직면하였다. 이로 써 속사에 대한 교황의 간섭권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프 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의 승리는 전반적인 교황권의 실 추를 초래하였다. 19세기에는 이탈리아의 통일 기운이 성숙하여 1870년에 근 천년 동안 유지해 온 교황 영토 가 이탈리아에 합병됨으로써 교황의 속권(俗權)은 영구 히 무산되었다. 한편 세계는 점점 민주주의에 심취하고, 과학 만능주 의 · 유물론 등이 성행하면서 유럽 여러 나라들이 교회의 영향력을 벗어나고 있을 때에, 교황의 교권이나마 굳건 히 세우기 위하여 비오 9세 교황은 제 1차 바티칸 공의회 를 소집하였다. 공의회는 신앙의 근본 문제에 대한 오류 를 배척하고,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지권을 신조로 선언 하였다. 공의회 이후로 속권에서 벗어난 위대한 교황들 이 속출하여 교회뿐 아니라 현대의 사회 문제에도 훌륭 한 지침을 제시하였다. 교황 레오 13세는 민주주의를 승 인하고 노동 문제에 빛을 던졌으며, 성 비오 10세는 근 대주의를 단죄하고 전례 운동을 촉진하였다. 베네딕도 15세는 교회법을 개혁하였고(1917), 비오 11세는 공산 주의를 단죄하고 사회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한편 세계의 선교 사업을 크게 촉진하였으며, 바티칸 시국의 독립을 달성하였다(1929). 또 비오 12세는 성모 승천 교 리를 선포하고 동유럽이 공산화되는 고통을 겪었다. 위 대한 교황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점점 탈(脫)그 리스도교화하는 과정에 있는데, 교황 요한 23세는 제2 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여 교회의 쇄신과 개방을 선 언하였다. 공의회 이후로 바오로 6세와 교황 요한 바오 로 2세는 공의회의 정신를 구현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 였고, 교황의 위신은 교회 내에서는 물론 교회 밖에서도 정신적 지도자로서 인정받고 있다. (⇦ 교종 ; → 교회사 ; 교황 칭호 ; 무류권) ※ 참고문헌 K. Rahner · J. Ratzinger, Episkopat und Primat, Freiburg, 1961/ J. Colson, L'Episcopat catholique, Paris 1963/ O. de la Brosse, Le pape et le concile, Paris, 1965/ Y. Congar · J. Dupont, La collégialité épiscopale, Paris, 1966. 〔鄭夏權〕 〔역대 교황표〕 초대 교황 사도 베드로에서 시작하여 그를 계승한 교황들, 즉 로마 주교들의 명단은 이미 2세 기 중엽부터 작성되기 시작하였다. 리용의 이레네오 (Irenaeus)는 180년경에 작성한 로마 주교 명단에 동시대 인인 엘레우테로 교황(174~189)까지를 포함시켰다. 그런 데 이러한 초기의 로마 주교 명단들에는 그들의 재위 연 대가 표시되지 않았다. 그것은 당시의 주된 관심이 역사 보다는 교의의 정통성을 입증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 다. 다시 말해서 교의의 순수성 내지는 정통성을 다름 아 닌 사도적 전승과 계승에서 찾으려 했었다. 그 후 역사에 관심이 생기면서 연대가 첨가되기 시작 하는데 이 작업을 최초로 시도한 사람은 바로 역사가인 에우세비오(Eusebius)이다. 그는 4세기 초에 저술한 《교 회사》에서 28명의 교황 명단과 함께 그들의 즉위 연대를 첨가시켰다. 이러한 연대식 방식은 그 후 계속되면서 실 용적인 목적에서 교황들의 즉위 연월일까지 기록하는 완 전한 역대 교황표가 작성되기에 이르는데, 그 최초의 것 이 리베리오 교황까지 다른 이른바 354년의 <리베리오 교황표>(Catalogus Liberianus)이다. 물론 그 모든 기재 사 항에 역사적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다. 또한 이 무렵부터 교황사의 일환으로, 교황의 이름과 내력, 치세 기간 중에 반포한 법령과 전례 규정 등, 일정한 양식에 의한 전기 형식의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가 편찬되기 시작 한다. 처음에는 매우 간락하였으나 점점 상세해지고 또 15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뒤센(L. Duchesne)은 이러한 연 대 교황표들을 기반으로 하여 새롭고 보다 완전한 연대 교황표(2권, 1886~1892)를 편찬, 간행하였다. 이를 계기로 연대 교황표가 초기 교회사의 중요한 사료로 새삼 알려 지게 되었다. 한편 본연의 교황사의 서술은 19세기부터, 특히 바티 칸의 문서고가 개방되면서부터 그 연구가 확대되어 교황 사의 전집이 나오고 동시에 교황 문서집이 대량으로 간 행되었다. 이러한 많은 연구와 방대한 자료의 간행들은 자연히 역대 교황표를 학문적으로 새로이 검토하게 만들 었고 마침내 1947년 완전히 개정된 공식적인 역대 교황 표가 《교황청 연감》(Annuario Pontificio : 이하 《연감》으로 약칭)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역대 교황표가 완전하며, 또 의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며 교황표에서 역대 교황에 일련 번호를 매기지 않은 것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대립 교황은 〔 〕로 표시하였 다). 실제로 완전한 역대 교황표를 작성한다는 것은 아직 도 자료들이 부분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 다. 특히 많은 교황들의 합법성 여부는 극히 어려운 문제 이다. 역대 교황사의 역사는 교회사상 여러 시기의 많은 교황들의 합법성 문제에 대한 이해가 변천하였음을 보여 준다. 이번 역대 교황표에서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서구 대이교 시기의 피사계 교황인 알렉산델 5세와 요한 23 세를 1946년까지는 합법적인 교황으로 취급하였으나 1947년부터는 대립 교황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 역대 교황표는 원칙적으로 《연감》을 따랐다. 그 러나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일부 교황들에 대해서는 다른 권위 있는 교황표들을 참고하여 약간의 수정을 가 하였다. 교황 대수에 있어서는 《연감》을 따라 현 교황 요 한 바오로 2세를 264대로 간주하였다(번호가 없는 것은 대립 교황). 피사계 두 교황을 합법적인 교황에 포함시켜 현 교황을 266대로 보는 교회사가들도 있다. 특히 독일 교회사가들이 그러하다(Franzen, Bäumer 등). 《연감》은 119 대 그리스도포로 교황을 대립 교황으로 보았고, 또한 138대 보니파시오 7세는 대립 교황으로 아예 명단에서 제외시킴으로써 다른 교황표와 2대의 차이가 나게 된다. 그러나 그 후 베네딕도 9세를 세 번 교황 위에 오른 것 으로 보고 다른 교황표와는 달리 그를 두 번 더 등장시 킴으로써 결국 155대 니콜라오 2세에 와서는 그 대수가 같아진다. 《연감》은 그리스도포로와 보니파시오 7세가 모두 교황위를 빼앗고 교황이 되었다고 하여 대립 교황 으로 간주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2명의 선임 교황을 살 해하고 교황이 된 세르지오 3세도 당연히 대립 교황이어 야 함에도 불구하고 합법적 교황으로 인정되고 있다. 사 실 이 시기는 소위 교황의 암흑 시기(880~1046)여서 교 황들이 멋대로 임명, 파면, 투옥, 살해되었다. 15대 제 피리노까지 물음표(?)를 붙인 것은 그때까지는 재위 기 간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 후로는 연대가 어느 정도 확실해진다. 《연감》은 18대부터 즉위와 사망 연월일까 지 기록하고 있다. 54대 펠릭스 3세까지는 2명을 제외 하고 모두 성인으로 인정되고 있다(s.는 성인, B.는 복자의 약자). ※ 참고문헌 Annuario Pontificio, 1993, Città del Vaticano, 1993/ R. Baumer, Papstliste, 《LThK》 8/A. Franzen, 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 판사, 1982/ P.F. Callaey, Praelectiones Historiae Ecclesiasticae, t. 3, Roma, 1956~1960. 〔崔奭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