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세례명은 마티아. 관변측 기록에 보이는 장어 둔남(張於屯男)과 같은 인물로 이해된다. 충청도 결성(結城) 덕먹리(지금의 충남 홍성군 은하면 덕실리) 출신인 그는 몹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머슴살이를 하였고 곤궁함을 이기지 못해 떠돌아다니는 광대 패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는 다행히 천주교를 믿게 되자 이내 방탕한 생활과 못된 습관을 버리고 금산군 솔티에 있는 교우의 옹기 가마에서 일하면서 얼마 동안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켰다. 그 후 냉담하여 첩까지 얻게 되었으나 신자의 본분만은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본처가 죽자 첩과 정식으로 혼인하고 다시 매일같이 열심히 기도를 드리며 전날의 허물을 기워 갚고자 보속(補贖) 행위를 끊임없이 하였다.
그는 1811년 4월 조정의 지시로 야기된 박해를 피해 연산 고을 의실의 옹기 가마로 몸을 숨겼으나 거기서 1812년 9월경에 붙잡혀 공주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혹독한 형벌을 용감하게 참아냈지만 굶주림과 목마름 때문에 한때 배교의 뜻을 비치기도 하였다. 이때 함께 옥살이를 하던 황 바오로 등이 그의 나약한 마음을 잡아주었다. 이에 그는 배교한 것을 취소하고 전보다 더 열심히 기도하였다. 그가 형장으로 끌려갈 때 모여든 사람들 이 조소와 욕설을 퍼부었지만 그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그들에게 침착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해 주었다. "당신들은 웃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울어야 할 것입니다. 불쌍한 건 우리 처지가 아니라 당신들의 처지이니까요." 그는 1812년 11월 30일 왕의 명령에 따라 공주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순교할 당시 그의 나이는 59세였다. (⇦ 장어둔남)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중, pp. 43~44/《순교자들의 전기》, 천주교 대전교구, 1991, p. 12/ 《承政院日記》, 순조 17년 10월 15일자. 〔徐鍾泰〕
장대원 (1754~1812)
張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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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