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련 본당

長連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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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서부리 소재. 1939년 5월 장련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가 1950년 6월 폐쇄되었다. 〔역대 신부〕 초대 안학만(安學滿) 루가(1939.5~1942. 1), 2대 신윤철(申允鐵) 베드로(1948. 9~1950.6) .
장련 지방을 처음으로 방문한 선교사는 1883년 우리나라에 입국하여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지역의 포교를 맡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푸아넬(V.Poisnel, 朴道行) 신부였으며, 처음으로 설립된 공소는 금복리(今卜里) 공소였다. 푸아넬 신부 후임으로 장련 지방에서 전교 활동을 전개한 선교사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의 담당 신부로 임명된 쿠데르(Couderc, 具瑪瑟) 신부였다. 꾸데르 신부는 전교 활동을 수행하면서 율리(栗里)와 학동(鶴洞)의 중간 동네인 종골에 공소를 신설하였다. 이 지역에서 활동한 세 번째 선교사는 1887년 2월에 입국하여 황해도 선교사로 임명된 로(Rault, 盧若望) 신부였다. 로 신부는 장련 금복이에 정착하여 그곳을 그의 전교 거점으로 삼고, 18개월 동안 50여 명에게 성사를 주면서 구월산주위에 4개의 교우촌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1891년 장련 교우촌이 해체되면서, 1891 ~1895년에는 이도면 고정리 공소가 유일한 공소로 존재하였다.
1896년 빌렘(Wilhelm, 洪) 신부에 의해 매화동(玫花洞) 본당이 설립되자, 장련 지방은 매화동 본당 관할이 되었으며, 1902년부터는 은율 본당 소속이 되었다가 1905년 은율 본당이 장연(長淵) 본당 소속 공소로 격하되자 다시 매화동 본당 관할이 되었다. 1914년 은율 공소가 본당으로 재승격되자 장련 지방은 다시 은율 본당 관할이 되었으며 신자들의 활발한 전교 활동으로 인해, 1937년경에는 신자수 250여 명, 예비 신자수 30여 명에 이르는 큰 공소로 발전하였다. 신자수가 증가하자, 공소 신자들은 장차 본당으로 승격될 것에 대비하여 성당으로 사용할 새 공소를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1937년 7월 공사를 시작하여 같은 해 말 89평 규모의 3층 연와조건물을 완공하였다.
1939년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안학만 신부가 부임하였다. 안학만 신부는 만주(滿洲)지역에서 총상을 입어 몸이 불편하였으나, 본당의 가톨릭 청소년단을 '돈 보스코 청소년단' 으로 재정비하는 등 청소년 사목에 주력하면서 활발한 사목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기틀을 잡아가는 듯 보였던 본당은 1942년 2월 안학만 신부가 전임된 뒤 후임 신부가 부임하지 못하여 다시 은율 본당 관할 공소로 격하되었다. 1948년 9월, 연길 교구 소속 신부인 신윤철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공소는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24일,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 신윤철 신부는 장련 내무서로 강제 연행, 구금되었다가 어디론가 끌려가 공산군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장련 본당은 그때부터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 침묵의 교회)
※ 참고문헌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황해도 천주교회사》,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84.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