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

長老敎

〔라〕Presbyteriani · 〔영〕Presbyt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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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언더우드 목사의 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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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언더우드 목사의 집) .

프로테스탄트 교파 중의 하나. 16세기 종교 개혁이 진행되는 동안 스위스와 라인 지방의 종교 개혁자들이 발전시킨 교회.
〔특징과 조직〕 장로교는 종교 개혁 당시 칼뱅(J. Calvin,1509~1564)의 개혁 정신을 모체로 하는 개혁 교회(Re-fomed Church)의 한 지파이다. 장로교의 핵심적인 주장은 '신적인 섭리와 주권' 에 대한 확고한 고백에 있으며, 이는 '오직 하느님께만 영광' (Soli Deo Gloria)라는 칼뱅의 대명제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장로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와 《교리 문답》을 신앙의 표준으로 삼고 있다. 성서의 권위를 교회와 전통의 권위 위에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인간의 전적인 타락' 과 '하느님의 은총과 예정' 에 근거한 신의 절대 주권을 강조한다.
장로(長老)들에 의한 정치를 통해서 가시적인 통일성을 실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으며, 신정 정치(神政政治)의 이상을 지향하고 있다. 교회 정치의 유형에 있어서, 회중 제도와 감독 제도의 중간 형태에 해당한다. 장로들의 협의체인 장로회는 대의 민주주의(代議民主主義)의 이상을 지향하고 있다. 신자들에 의해서 선출된 장로가 목사와 함께 교회의 치리(治理)를 담당한다.
〔한국에 전래된 장로교〕 한국에 전래된 장로교의 흐름을 결정지은 것은 미국의 남장로교회와 북장로교회, 캐나다 연합장로교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회 등이다. 이 중에서도 미국의 남북 장로교회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남북 장로교회는 남북 전쟁을 계기로 양분되었다. 남북 전쟁에 대한 정치적 견해를 둘러싸고, 미국장로교회 구파는 노예 제도를 비난하면서 북부의 견해를 지지하였으며, 신파는 미국 장로교회에서 탈퇴하여 미국 남부동맹 장로교회를 결성하였다. 대체로, 남장로교회는 종교 · 정치 ·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반면 북장로교회는 교리와 예배 관습에 있어서는 보수적이었지만, 노예 폐지 운동 등의 개혁 운동에 참여하는 등 정치 ·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흐름을 취하였다.
역사 : 한국에 대한 장로교의 선교 활동은 영국 및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만주에서 활동한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의 선교사 로스(J. Ross)와 매킨타이어(J. Mcintyre)가 주도한 성서 한글 번역에 참여한 일단의 한국인들(이응찬 · 백홍준 · 서상륜 등)이 한 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장로교인이 되었다. 이들에 의해 '소래 교회' 로 대표되는 자생적 교회들이 선교사 입국 이전에 설립되었다.
한국 장로교의 역사는 미국 장로교회의 선교 활동을 통해서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1884년 북장로회 소속의 의료 선교사 알렌(H.N. Allen, 安連)이 입국하여 의료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1885년 부활절에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G. Underwood)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와 함께 입국함으로써, 본격적인 장로교 선교 활동이 시작되었다.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회가 선교 활동을 펼치기 시작하였으며, 1889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1889년부터는 캐나다 장로회가 한국 선교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들 4개 선교부는 연합적인 선교 정책을 펼쳤는데, 그러한 결정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선교 구역 분할 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4개 선교부의 분포에 영향을 미쳤다. 북장로회는 서북 지방, 남장로회는 호남 지방,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는 경남 지방, 캐나다 장로회는 관북 지방과 간도에서 각각 중심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 4개 선교부는 구체적인 선교 활동 과정에서도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여, 신학 교육 · 교육 선교 · 문서 선교 등의 분야에서 공조 체제를 이루었다. '장로교 공의회' 를 조직하여 상호 협조 체제를 공고히 하였으며, 1901년에는 4개 선교부 연합장로교 신학교(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07년에 평양 장로회신학교 첫 졸업생 7명이 배출되어 목사 안수를 받았고, 같은 해에 전국 단일 노회인 독노회(獨老會)가 조직되어 선교의 체계가 정비되었다. 독노회 조직은 다양한 흐름의 장로회가 하나의 조직으로 수렴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는 일이었다. 계속되는 교세 성장과 함께, 1912년부터는 총회와 7개 노회로 조직이 확대되었다. 장로교는 교육 및 의료 선교 활동을 통해서 학교와 병원으로 상징되는 '근대' 문명의 전파에 상당한 공헌을 하였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 운동과 민중 계몽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제 말기에 이르러서는 일제의 종교 탄압 및 회유 정책에 말려들어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 으로 통폐합되는 등의 수난을 겪었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장로교는 교단적 차원에서 신사 참배를 가결하는 등 정체성 혼란의 길을 걷기도 하였다.
장로교는 민족 해방과 함께 정체성 검증의 절차를 거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체성 검증이 철저한 내적 반성으로 이어지기보다는, 교단 분립으로 귀결되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나타냈다. 1951년 신사 참배에 대한 회개 문제를 둘러싼 대립으로 인하여 '경남 법통노회' (慶南法統老會)가 분리되어 '고신파' (高神派)를 형성하였다. 1953년에는 성서에 대한 고등 비평 · 역사 비평 등의 문제를 둘러싼 사상 대립으로 '조신파' (朝神派)가 분리되었다(현재 한국기독교장로회). 1959년에는 세계 교회 협의회(WCC) 가입 문제를 둘러싸고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측' 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이 각각 분립하였다. 이러한 장로교의 교단 분립이 고려신학교(현재 고신대), 조선신학교(현재 한신대), 총회신학교(현재 총신대), 장로회신학교(현재 장신대) 등 신학 교육 기관을 정점으로 한 것이었음을 전제할 때, 장로교의 일치는 신학 교육의 일치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현황 : 장로교는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중심 교단 가운데 하나로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장로교는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여러 교파 가운데 최대의 흐름을 형성할 만큼 빠른 속도의 성장을 이루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의 이면에는 장로교단의 분열이라는 역기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문화부에서 발간한 1994년 연감의 '종교 통계' 에 의하면, 문화부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장로교 교단만도 40개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장로교단이 존재하고 있다. 장로교단의 분열은 이른바 '복음주의' 를 주창하는 보수적 경향에서 보다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에 이르러, 장로 교단의 분열상은 교세 성장의 주요 장애 요인 가운데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 활발해지고 있는 교회 일치 운동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장로교단 범위 내에서의 교회 일치 운동은 '한국 장로교 협의회' 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교단장의 교류, 강단 교류, 공동 프로그램 운영 등을 통하여 구체화되고 있다.
오늘날, 장로교는 양적 규모에 있어서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장로교단은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5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92년 기준으로, 세계 50대 교회 가운데 23개가 한국 교회이며, 그중에서 7개가 장로교회로 조사된 바 있다. 최근, 장로교가 이러한 양적 규모에 걸맞은 질적인 변화에 도달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반성적 성찰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 녹스 ; 예정설 ; 프로테스탄티즘)
※ 참고문헌  민경배, 《신개정판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출판부, 1993/ 니젤, 이종성 · 김항안 역,《비교 교회론》,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이상훈, <한국 장로교에 대한 역사적 · 신학적고찰>, 《한국 개신교 주요교파 연구(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한국교회백주년준이위원회사료분과위원회, ,《대한예수교장로회백년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1984/ 한국기독교역사연구회, 《한국기독교의 역사(Ⅰ · Ⅱ)》, 기독교문사, 1989 · 1991/ 한국기독교장로회역사편찬위원회, 《한국기독교 100년사》, 한국기 독교장로회, 1992.
〔申光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