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899~ 1966)

張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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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교육가, 제1공화국 국무총리 · 부통령, 제2 공화국 국무총리.
〔생애〕 본관은 인동(仁同). 세례명은 요한. 호는 운석(雲石) 서울 종로구 적선동 외가에서 부산 세관장을 지낸 장기빈(張箕彬,레오)과 황 루치아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 생후 2개월부터 16세까지 인천에서 유 · 소년기를 보냈다. 인천 성당 부설 사립 박문학교(博文學校) 인천 공립 심상소학교 고등과, 수원 농림학교, 서울 중앙기독청년학관 영어과를 거쳐 1921년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단행, 뉴욕 소재 예비 신학교인 베나드 스쿨(Venard School,Clark's Summit, Pa)에서 6개월 동안 영어 연수를 받은 후 맨해튼 대학(Manhattan College)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1925년 졸업 후 귀국 길에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된 '한국 79위 순교자 시복식' 에 한국 천주교 청년회 대표로 참석해 교황을 알현했다. 귀국 후 메리놀 센터(Maryknoll Center) 어학 교수로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등 평양교구에서 교회 일을 돌보았다. 1931년 동성상업학교에 부임해 영어를 가르치다 1936년 교장에 취임, 1947년 말 교단을 떠날 때까지 교단에서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33년 정지용(鄭芝溶)과 이동구(李東九) 등의 문인과 윤형중(尹亨重) · 한기근(韓基根) 신부와 같은 천주교회가 배출한 지성들과 함께 《가톨릭청년》의 창간을 주도했다.
해방 이후 정계에 투신, 1946년 미군정 자문 기관인 민주의원과 입법의원의 의원을 거쳐 1948년에는 무소속으로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 '혼인의 순결과 보호' 에 관한 조항을 제헌 헌법에 규정함으로써 축첩(蓄妾)제를 소멸시키고 여권 신장과 가정과 사회의 건전화를 이루는 도덕적 기반을 닦는 데 기여했으며, 이를 높이 평가한 미국 맨해튼 대학은 같은 해 12월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정부 수립 직후 제3차 유엔 총회 파견 대표단의 수석 대표로 유엔 총회에 참석해 신생 대한 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얻어낸 뒤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을 방문, 교황 비오 12세를 단독 알현해 대한 민국에 대한 정신적 지원을 요청했다. 1949년 초대 주미 대사로 부임, 미국 주재 각국 공관을 방문해 대한 민국에 대한 30여 개국의 승인을 얻어냈고, 대통령 특사로 호주 · 뉴질랜드 · 필리핀 등을 방문해 '태평양 동맹' 의 체결을 모색하는 등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6 · 25 전쟁을 맞아 유엔 안전 보장이사회 긴급 회의에서 북한군의 즉시 철군과 유엔 회원국의 침략자 원조 금지를 규정한 결의안 채택과 유엔군 파병을 이끌어 냈다. 1950년 11월 제2대 국회에서 148대 6표라는 압도적 지지로 제2대 국무총리로 인준되었고 귀국 전인 12월 미국 포담(Fordham)대학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1년 2월 제2대 국무총리로 취임하였으며, 5월에는 교회 발전에 공헌한 공로를 인정받아 성 실베스텔 교황 기사장 훈장(Knight Commander of the Order of St. Sylvester)을 받았다. 1952년 4월 국민 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 제1 공화국의 실정이 거듭되고, 인사 문제를 놓고 이승만(李承晚) 대통령과 갈등이 격화되자 국무총리를 사임하였다. 1952년 5월에는 원내 자유당과 재야 세력이 결속해 국회에서 차기 대통령으로 그를 선출하려했지만 계엄령을 선포하고 등원하는 국회의원을 헌병대로 강제 연행한 부산 정치 파동으로 무산되었다. 1952년 8월의 발췌 개헌과 1954년 11월의 사사 오입 개헌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가 더욱 심화되자 1955년 9월 총리 사임 후 3년 여 동안 <경향신문> 고문 등으로 지내온 재야 생활을 청산하고 민주당 창당을 주도하였다. 1956년 5월 15일 총선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申翼熙)의 갑작스런 죽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당의 이기붕(李起鵬) 후보와 맞서 제4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1956년 9월에는 고령의 대통령 유고시 승계권을 우려한 자유당 핵심부의 사주로 저격당하기도 했다. 1957년 미국 시튼 홀(Seton Hall) 대학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59년 11월 민주당 부통령 후보와 대표 최고위원에 피선되었다. 1960년 조병옥(趙炳玉)의 러닝 메이트로 입후보했으나 3 · 15부정 선거로 낙선되었다. 4 · 19 혁명이 일어나자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기 위해 부통령을 사임하였다.
자유당 독재 정권이 무너진 후 치러진 민 · 참의원 총선거에서 제5대 민의원에 당선, 1960년 8월 19일 민의원 본회의에서 내각 책임제 제2 공화국 국무총리에 인준 되었다. 내각 수반으로서 그는 공채 제도 시행을 통한 관료의 전문화를 꾀하고, 경제제일주의' 에 입각한 경제 개발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자유당 독재 체제하에서 위축되어 있던 이익 집단들과 사회 단체들이 분출하는 이익 추구 욕구에 접해 이를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억누르지 않고 대화와 협력을 통한 자율적 해결을 종용하는 다원적 민주 사회의 확립을 도모해 "민주주의의 황금 시대"를 꽃피웠다. 그러나 신 · 구파의 갈등으로 정국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집권 9개월만에 5 · 16 군사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그 뒤 군사 정권에 의해 정치 활동을 금지 당하고, 이주당(二主黨) 사건으로 투옥되어 사형을 구형 받는 등 박해를 당했다. 정계에서 물러난 이후 신앙 생활에 전념하여 민주당 계열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에게 전교하였다. 1963년 9월 1일에는 교황청 훈장을 받았으며, 1963년 9월 19일에는 한국 프란치스코 제삼회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1966년 4월 16일 프란치스코 제일 회원 특전을 수령하였지만, 두 달 뒤인 6월 4일 지병인 간염 악화로 명륜동 자택에서 향년 67세로 서거, 국민장으로 포천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술〕 그는 일생 동안 꾸준히 집필과 번역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은 문필가이자 신학 이론가 내지는 교회사가이기도 하였다. 《영한 교회 용어집》(The Summarpy of Religious Terms, 1929), 《교부들의 신앙》(1944) 《젬마 갈가니》(1953), 《나는 왜 고통을 받아야 하나》(1962), 《성원선시오》(1964) 등의 역서와 《구도자의 길》(1930), 《조선 천주공교회약사)(1931)와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1964) 같은 저서를 출간하였으며, 《가톨릭 청년》에 <성직자와 독신생활>(1933. 6), <구약성경의 역사적 가치>(1933. 7), <'면죄부' 의 진상>(1934. 3), <조선 가톨릭 신자의 장단점>(1935 9 · 10 합집), <가톨릭 액순이란1~4>(1955.9~1956. 1), <그레건의 십자가상의 그리스도회상>(1961.11), <미사 전례의 사적 소고>(1965. 10), <성프란치스코 재속 3회>(1965.11) 등과 같은 신학이나 교회사 관계 글을 기고하였다. 또한 그는 정계 진출 이후 <아세아를 위하여 고민하는 대한 민국>(1949), <부통령 당선과 나의 포부>(1956), <아시아를 위한 한국의 고투>(1954), <부통령 당선에 감격하여 나의 소신을 피력한다>(1956) 등과 같은 글도 남겼다.
[평가] 그의 치적이나 사상을 논함에 있어 정치가로서 그의 어떠한 결함이 5 · 16 군사 쿠데타를 촉발하게 하였는가라는 결과론적 인식 틀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지배 적이다. 따라서 그가 1948년 정계 진출이후 보여 준 많은 업적-한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과 한국 전쟁시 유엔군 참전을 이끌어 낸 외교적 성과 및 민주당 창당 이후 야당 지도자로서 보여 준 반독재 투쟁 등-에도 불구하고 종래 정치가로서의 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러나 최근 민주화의 진전과 더불어 그가 다원화된 시민 사회의 확립, 민간 주도형 경제 건설, 관용과 대화의 정신, 합리적 통일 방향의 제시, 국제 사회에서의 위상 제고 등을 보편적인 방향과 원칙하에서 실천하려 한 이상적 · 선각적 정치가였다는 견해들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현재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바가 오랜 권위주의 정부의 통치의 유산을 탈피해 다원적 시민 사회, 민간 자율의 경제 구조, 화해와 관용의 정신을 통한 국민 통합에 있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정신사적 차원에서 이러한 제도와 가치들을 한국사상 최초로 실천하려 했던 정치가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 장발 ; 장익 ; 장정온)
※ 참고문헌  Sungjoo Han, The Failure ofDemocracy in South Korea,Berkeley · Los Angeles · Lond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4/ 한승주, 《제2 공화국과 한국의 민주주의》, 종로서적, 1983/ 이용원, 《제2 공화국과 장면》, 범우사, 1999/ ㅡ, 《건국 · 외교 · 민주의 선구자장면》, 분도출판사, 1999/ 허동현, <張勉의 治績과 政治思想에 관한研究>,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3, 1999. 〔許東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