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화가. 한국 최초의 성화가(聖畵家). 한국 서양화단의 선구적인 개척자 중 한 사람.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초대 학장. 본관은 인동(仁同). 세례명은 루도비코. 호는 우석(雨石) .
〔생애와 활동〕 장발은 1901년 4월 3일 장기빈(張箕彬, 1878~1959)과 황 루치아(1878~1945) 사이의 3남 4녀중 둘째 아들로 인천에서 태어났다. 부친 장기빈은 1896년에 세례를 받았으며, 외가는 대대로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었다. 장기빈은 서울의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대한 제국 탁지부(度支部, 재무부 격)에서 근무하다가 일본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자 외국인 회사에 들어갔다. 대한 민국 출범 후 부산 세관장으로 복귀해 1950년에 은퇴한 이력을 가진, 외국어에 능하고 개방적인 인물로 3남 4녀를 모두 일본과 유럽에 유학시켰다. 장발보다 두살 위인 맏형 장면(張勉, 1899~1966)은 제2 공화국의 총리직을 수행하였으나, 1961년 5 · 16 군사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정치가인 형의 활동은 장발의 삶에 줄곧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12세 아래인 동생 장극(張剋,1913~ )은 1958~1979년까지 미국 가톨릭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한 세계적인 항공 공학자이다. 누이동생인 장정온(張貞溫, 앙네다, 1906~1950?)은 미국 메리놀 수녀회의 수녀로,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의 초대 원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한편 장발의 부인 서혜련(徐惠蓮)은 백동(현 혜화동) 성당의 가톨릭 여자 청년회장, 경성 가톨릭 부인회 연합회장 등을 지낸 활동적인 인물로 메리놀 수녀회 수녀들의 한국어 공부를 지도하였다. 이러한 가족 배경은 그의 삶 저변에서 정체성과 자의식을 형성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었으며, 그를 한국 최초의 성화가로 활동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장발은 1916년 보성 · 오성 · 중앙고보에서 개최한 연합 학생 미술제에서 수상함으로써 미술에 두각을 나타냈다. 휘문고보 재학시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의 지도를 받았으며, 졸업을 앞둔 1919년 11월에는 고려화회(高麗畵會)의 창립 회원이 되어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익힌 유화의 기초 기법과 화풍으로 현존하는 최초의 작품인 <김대건 신부>(1920)를 제작하였고, 이는 그가 화업을 시작할 무렵부터 성화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지대했음을 보여 준다.
1920년 봄, 장발은 일본 동경 예술대학 서양화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동경 유학시 독일 뮌헨의 그리스도교 미술 협회 회원으로 가입하여 이 협회의 월간지인 《그리스도교 미술》(Die Christilche Kunst)을 구독하였으며, 이를 통해 유럽 현대 종교 미술에 대한 정보를 접하였다. 1921년 선과(選科)를 중퇴한 그는 형 장면이 유학하고 있는 뉴욕으로 건너가 뉴욕 국립디자인학교(New York National Design Academy)에 들어갔다. 1923년 겨울부터 1925년 봄까지 컬럼비아 대학교 사범대학 실용 예술 학부(School of Practical Arts)의 미술학과(Department of Fine Art)에서 5학기 동안 미술(Fine Art)과 역사(History) 분야를 수강하였다. 이곳에서의 수학은 장발이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으로서 미술 교육의 이념 및 체제의 기초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장발은 1925년 형 장면이 학업을 마치자 함께 귀국길에 올랐는데, 이때 로마에서 거행된 '조선 79위 순교 복자 시복식' 을 참관하였다. 그는 1926~1943년까지 휘문고보와 경신고보의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1943년부터는 계성여상을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여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귀국 직후부터 당시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성화를 교회의 제단화를 중심으로 제작하였다. 1925년부터 2년여에 걸쳐 명동 성당 제대 뒤에 설치한 <14사도>, 신의주 성당의 벽화인 <성령 강림>(1928), 평안북도 비현 성당의 <예수 성심상>(1935), 평양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본원의 <복녀 김 골롬바와 아네스 치명>(1940), 서울 가르멜 수녀원의 <성모 영보>(聖母領報, 1945)와 <성모 대관〉(聖母戴冠, 1945) 등을 제작하였다. 또한 1933~1936년 사이에 《가톨릭 청년》의 표지화를 3점 그렸다. 한편 서화 협회전에 1929년 <무희>(舞姬), 1936년 <춘앵무>(春鶯舞) · <성화>(聖畵)를 출품하였고, 1934년과 1937년 목일회전에 참여하였다. 해방 직후 조선 미술 건설 본부에 참가하였고, 해방 기념 미술 전람회에 <청의 소녀>(靑衣少女)와 1점을 출품하는 등 화단의 활동도 병행하였다. 또한 1935년 명륜동으로 이사 후, 백동 성당을 중심으로 활발한 신앙 생활을 하였는데 본당 청년회의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장발은 해방된 해 미 군정 학무국의 학무 과장에 취임하여 서울대학교의 설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946년 8월 22일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령' 에 따라 서울대학교가 설립되자 그는 초대 미술학부장을 거쳐 1953~1961년까지 미술대학 학장으로 재직하였는데 이로써 한국 화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1949년 대한 민국 미술 전람회(大韓民國美術展覽會)의 창설과 운영에도 참여하여 6회에 걸쳐 심사 위원을 담당하였다. 1954년에는 예술원 추천위원, 서울시 문화 위원회 부회장 등 기관 주도의 예술 행정직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이 당시 그는 '대한 미술가 협회' (이하 대한미협)와 갈등을 빚고 미술인이 아니라고 배척을 받아 1955년 대한미협에서 탈퇴하여 '한국 미술가 협회' (이하 한국미협)를 발족시켰다. 서울 미대 교수진 및 출신 작가들과 이미 대한미협에서 제외되었던 서예가들이 제휴, 발족한 한국미협은 대한미협과 갈등의 양상을 보였다. 특히 이 갈등은 1956년 제6회 국전 보이콧 사건으로 비화되었고, 1961년 '한국 미술 협회' 로 통합되기까지 대립과 반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장발은 행정가로서 소용돌이치는 시기를 보내면서도 성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1950년 서울대 동료 화가를 중심으로 '한국 가톨릭 미술가 협회' 를 창설하고, 1954년 미도파 화랑에서 창립전을 개최하였다. 또한 1960년 혜화동 성당 신축을 위한 설계 및 조각의 제작을 총감독하고 지도하였다.
1961년 서울 미대 학장의 임기를 마친 장발은 그 해 이탈리아 특명 전권 대사로 임명을 받아 발령을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제2 공화국이 무너지면서 장발의 이탈리아 행은 취소되고 1964년 교환 교수 자격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도미 이후 장발은 고국과 단절된 채 작품 제작에 몰두했으며, 1976년 신세계 미술관에서 서울대학교 동창회의 후원으로 도미 이후 제작한 추상 작품을 총망라한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장발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된 것은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전시인 "현대 종교 미술전" 으로, 이때 <순교자>를 출품하였다. 또한 같은 해 대한 민국 문화 훈장 무궁화상을 수상하였으며, 1996년에는 제6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으로 선정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김대건 신부> · <골롬바와 아녜스 자매> · <성모대관>과 같이 젊은 시절 제작했던 것과 같은 소재의 성화를 새로운 양식으로 제작하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2001년 5월 10일부터 뉴욕 한국 문화원 갤러리에서 열리는 100수 기념 전시회를 한 달여 앞둔 4월 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100번째 생일을 지내고 선종하였다. 고인의 추모전이 된 이 전시회에는 <오메가> · 〈부귀길창수무강)(富貴吉昌水無疆) · <성모대관> 등 그가 미국으로 건너와 30년 간 그린 회화와 소묘 30점이 전시되었다.
〔작품 경향〕 장발의 작품은 크게 보이론(Beuron) 미술과 나비파(Nabis)의 영향(1920년대~1940년대), 서체적 추상 표현주의(1964년 도미 이후~1970년대), 독자적 성화의 세계(1980년대 후반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보이론 미술은 1920년대 장발의 초기 성화 제작에 영향을 주었다. 장발은 보이론 미술의 특징을 '시대를 초월한 영구성' . '정적인 표현' . '장식성' 의 세 가지로 이해하였다. <14사도> · <성령 강림> · <성녀 김 골롬바와 아녜스> · <김대건 신부>에서 나타나는 정면을 향한 인물들의 엄격할 정도로 정적인 자세와 초월적인 분위기, 채도가 높고 흰 색이 섞인 장식적인 색채는 이러한 보이론의 영향을 잘 반영한다.
한편 <김대건 신부>에서는 나비파의 일원이었던 드니(M. Denis, 1870~1943)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나비파의 절제되고 장식적인 면 분할은 장발의 1930년대 중반 《가톨릭 청년》의 표지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보이론의 화풍에서 벗어나 나비파의 표현 양식이 본격적으로 수용된 작품은 <성모 영보>이다. 초기 제단화가 보이론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엄격한 서구 도상의 형식적 전통에 따르고 있었던 반면, 이 작품에서는 배경에서 고유색과는 상관없는 색점의 붓 자국 등이 작가의 강화된 회화적 표현 욕구를 나타낸다.
장발은 구상성에 기반을 둔 현대적 조형미를 추구하였으며 추상 미술은 공허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1952~1953년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 교환 교수로 있으면서 당시 미국을 휩쓴 추상 표현주의 작품을 접하고 관대한 시각을 갖게 되었다. 1967년 도미 이후에 제작된 그의 추상 작품들은 시대적인 흐름에서는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동양의 전통적인 필묵과 서예를 중시한 그의 사상을 반영하였다. 장발의 작품은 검은 색의 힘차고 굵은 서체적 필선과 뿌리기 · 번지기 · 흘리기 등을 이용한 우연성을 중시하였다. 즉 그는 추상 표현주의의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적인 요소와 서예의 일획론의 정신을 함께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는 갑작스런 정치적 쿠데타로 가족의 운명이 바뀌어 타향에서 지내야 하는 정신적인 고통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표현 방식으로 여겨진다. 1984년 <순교자>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전에 출품한 장발은 이후 초기에 제작하였던 종교적 주제를 재해석하여 표현하였다. 특히 <성모 대관>에서 구도와 전체 구성은 전통적인 서구의 도상을 따르고 있으나, 성부 · 성자 · 성녀의 인물 표현에서 새로운 점이 발견된다. 이는 등장 인물이 모두 한국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는 한국인으로 표현한 것으로, 장발의 성화 가운데 한국 순교자를 제외하고는 전통적인 복장을 한 인물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하면 매우 새로운 시도이다. 또한 비슷한 시기 한복을 입은 <성모자상>을 제작한 것으로 미루어 독자적이고 토착화된 성화 제작에 관심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의 의〕 한국의 근 · 현대 미술사 속에서 장발이 갖는 위치는 양화(洋畵) 도입 초기의 선구적인 미술가로 서양화라는 새로운 매체를 성화라는 주제에서 심화시켰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재능을 '신을 위한 미술' 과 인간을 위한 미술' 에 헌신하고자 한 한국 최초의 성화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구상성에 기반을 둔 현대적 조형미를 끊임없이 탐구한 작가이자 교육자로 사실성에 기반을 둔 서구 미술을 한국적 풍토에 정착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 교육자로서 장발은 개인적 차원에서 사설 강습소를 중심으로 도제식 화풍을 전수하였던 것을, 미술 대학 체제를 구성하는 것으로 발전시켜 한국 미술 교육에 기초를 놓았다. 이처럼 작품보다는 교육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보다 많은 후학들에게 영향을 미친 점과 개인적인 작품 활동에 머무는 다른 미술가들을 연합하여 확대된 한국의 성미술을 구현하고자 했던 점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장면 ; 장정온 ; 한국 가톨릭 미술; 한국 가톨릭 미술가 협회)
※ 참고문헌 조윤경,〈장발의 생애와 작품 활동에 관한 연구 : 가톨릭 성화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00/ 오광수,《한국 현대 미술사》, 열화당, 개정판, 1995/ 박세원, '가톨릭의 거장들 ㅡ 장발' , <가톨릭신문>, 1995. 3. 19/ 이구열, <한국의 가톨릭 미술>, 代韓國美術史研究》, 미진사, 1992/ 방오석, <현대 한국 가톨릭 미술에 관한 연구>, 《교회사 논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鄭恩賑〕
장발 (1901~2001)
張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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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현존하는 장발 최초의 작품인 <김대건 신부> 초상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