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박해(己亥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베드로. 서울의 중인 집안 후손인 그에게 천주교를 가르쳐 준 사람은 양근(陽根) 한감개의 권씨, 즉 권철신(權哲身) · 일신(日身) 형제였다. 그는 권씨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인하여 신앙에 대한 열정이 식어 비신자처럼 살았다. 그러다가 1828년에 이르러 은총의 충동과 신자들의 권면(勸勉)에 힘입어 마침내 다시 신앙을 회복하였다. 그는 비신자인 부모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위패를 불사르고 향교(鄕校)의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지우게 하였으며 무절제로 흐르기 쉬운 경향을 고치기 위하여 술을 완전히 끊었고 끊임없이 자기의 거세고 격렬한 성격을 쳐 이기려고 노력하였다. 서양 선교사들에게 성사를 받고 난 뒤부터 그의 착한 결심은 더욱 굳어졌으며 한시도 본분을 충실히 지키지 않은 때가 없었다.
이와 같이 그가 신앙을 다시 회복한 데에는 그의 아내 손 막달레나의 기도도 큰 힘이 되었다. 1801년에 서울에서 순교한 회장 손경윤(孫敬允, 제르바시오)의 딸인 그의 아내는 남편이 신자의 본분을 버리고 살 때에 남편의 눈을 뜨게 하여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주야로 천주께 빌었다. 이러한 간절한 기도 끝에 남편이 마침내 회개하자 그녀는 말할 수 없이 기뻐하였다.
이 부부는 1839년 9월에 두 아들과 함께 붙잡혀 양근 관아로 끌려갔다. 관장이 여러 차례 고문을 가하여 그들을 배교시키고자 하였으나 남편 장사광은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아내 손 막달레나도 잠시 약해지려 하다가 이내 다시 힘을 내어 신앙을 굳게 지켰다. 그러자 관장은 일찍이 들어 본 일이 없을 정도의 잔악성을 극도로 발휘하여 그들이 보는 앞에서 두 자녀를 죽이겠다고 위협하였고 또 실제로 아이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바라본 부모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러나 전능한 은총이 이 부부를 구원하였으니 장사광은 "자녀를 사랑함은 사람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이며 우리 아이들의 괴로움은 내 자신의 괴로움보다 백 배나 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천주님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천만 번 못하겠습니다"라고 부르짖었다.
이러한 심문 내용을 양근 관장이 감사(監司)에 보고하자 감사는 더 시험하라고 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부부는 열 번도 더 고문을 당하였다. 거듭되는 고문으로 두 아들은 마침내 배교하고 풀려났지만 그들은 끝내 신앙을 굳게 간직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옥에 남아 있었다. 관장은 고문 대신 굶주림으로 부부를 굴복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어떠한 음식도 주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부부는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도 전보다 더 힘차게 관장에게 저항하였다. 마침내 장사광과 손 막달레나는 12월 18일과 22일에 각각 숨을 거두고 말았다. 순교할 당시 장사광은 53세였으며, 손 막달레나는 56세였다. (→ 기해박해)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중, pp. 503~504. 〔徐鍾泰〕
장사광 (1787~1839)
張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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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