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본당

長城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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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광주대교구 소속 본당. 전남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1001 소재. 1937년 10월 4일에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모든 성인의 모후. 관할 구역은 장성읍, 서삼면, 황룡면, 동화면, 삼계면, 삼서면, 진원면, 북하면이며, 관할 공소는 사창. 〔교세〕 1950년 588명, 1954년 831명, 1960년 2,331명, 1965년 2,102명, 1971년 2,118명, 1976년 1,970명, 1980년 2,505명, 1986년 3,177명, 1991년 3,589명, 1996년 2,764명, 2001년 2,922명. 〔역대신부〕 초대 게라티(B.Geraghty, 지) 벨라도(1937. 10~1939.1), 2대 우즈(F. Woods, 우) 프란치스코(1939. 1~1941.4), 3대 스위니(J.Sweeney, 서) 요셉(1941. 4~1944. 3), 4대 김창현(金昌鉉) 바오로(1944. 3~1945. 6), 5대 장옥석(張玉石) 루치오(1945.6~1953.6), , 6대 우즈(1953.6~1960.5), 7대 물라니 (F. Mullaney, 탁) 프란치스코(1960. 7~1963. 6), 8대 도허티(J. Doherty, 홍) 요한(1963. 6~1964. 11), 9대 모리세이(M. Morrisey, 모) 미카엘(1964. 11~1967. 2), 10대 목폴린(B. Mcpolin, 목) 브렌다노(1967. 2~1967. 8), 11대 오순탁(吳舜鐸) 베드로(1967.8~1969.9), 12대 김용배(金容培) 안드레아(1969. 9~1971. 10), 13대 이천수(李淺水)나자로(1971. 10~1975. 11), 14대 고재영(高在榮) 야고버(1975. 11~1978. 1), 15대 김형수(金炯秀) 비오(1978.1~1983. 2), 16대 김승희(金昇熙) 다니엘(1983. 2~1985.6), 17대 최형락(崔炯洛) 바오로(1985. 6~1988. 2), 18대 박성열(朴性烈) 토마스(1988. 2~1992. 2), 제19대 김종걸(金鍾杰) 요한 보스코(1992. 2~1995. 2), 20대 김종남(金鍾南) 로마노(1995. 2~2000. 2), 21대 박창진(朴昶珍) 야고보(2000. 12~현재).
장성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시기는 적어도 1827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1827년 정해박해(丁亥迫害) 때 전라도 곡성, 순창, 임실, 전주 등과 함께 장성 지방의 사람들도 상당수 박해를 받았다. 이후 몇 차례의 박해를 피해 경상도와 충청도 지방의 신자들이 전라도 지방으로 흩어져 교우촌을 형성했다.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때 충청남도 서천 지방 독매에 살던 이 암브로시오의 가족들이 장성 인근 수도(修島, 북이면 백암리)에 살면서 교우촌을 형성하였다. 1882년경 장성의 수도, 만골, 대악, 매남, 입석골, 내인동 등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9세기 후반 파리 외방전교회가 전라도 지역에서 전교 활동을 펼침에 따라 장성 지역에 많은 공소들이 설립되었다. 리우빌(L.L.N. Liouville, 柳達榮) 신부에 의해 1884년 공근이, 점골 등지를 비롯하여 1885년 되야동, 개백이, 무등골 등지에 공소가 마련되었다. 베르모렐(J.Vermorel, 張若瑟) 신부는 1892년 갈재, 풍기, 연소암, 감나무골, 불토골 등지에 공소를 마련하였다. 이후 라크루(M. Lacrouts, 具瑪瑟) 신부가 상목동, 대수동, 백년동, 송정, 등골 등지에 공소를 마련하였다. 1896년 수류(水流) 본당이 설립되면서 장성 지역은 그 관할 구역으로 되었다. 그 후 장성 북부 지역의 공소들은 1903년 설립된 신성리(新成里, 현 시기동) 본당에, 장성 서남부 지역의 공소들은 1908년 설립된 계량(桂良, 현 노안)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공소들을 중심으로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던 장성 지역에서 골롬반회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성당 건설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1934년 골롬반회의 퀸란(T. Quinlan,具仁蘭) 신부를 중심으로 성당 신축 기금을 마련하여 부지를 매입하였다. 이듬해 6월 목조 40여 평의 성당을 신축하고 봉헌식을 가짐으로써 사거리 준본당이 설립되었다. 그 후 1937년 10월 4일 장성 본당이 마련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게라티 신부가 부임하였다. 장성 본당이 설립됨에 따라 사거리 외 30여 개의 공소가 귀속되었다. 1938년 성탄절에 79명이 세례를 받는 등 교세가 확장되어 갔지만 태평양 전쟁과 한국 전쟁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41년12월 사제관에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3대 주임 스위니 신부와 몇몇 신자들이 연행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한국 전쟁 중에는 제구, 제의와 제반 서류가 소실되었고, 장성 본당이 북한군 북부지구 사령부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정상적인 사목 활동을 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한국 전쟁 직후 2대 주임이었던 우즈 신부가 다시 6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본당의 복구 작업이 빠르 게 이루어졌다. 황폐해진 성당 건물을 수리하고, 흩어졌던 신자들을 모으고 구호 양곡을 비롯한 외부의 지원을 얻어 본당 재건에 진력하였다. 1954년 4월 증가하는 교세에 맞추어 성당을 증축하였다. 1958년 사거리 공소가 재건된 것을 시작으로 1958년 호산 공소, 월성리 공소, 용두리 공소가 마련되었다. 1959년과 1960년 각각 사창 공소와 성진원 공소, 삼서 공소가 만들어졌다. 7대 주임 물라니 신부는 1961년 10월 포항 예수 성심 시녀회 분원을 설치하였다. 9대 주임 모리세이 신부의 재임기인 1965년 사거리 공소의 구 성당을 철거하고 새로운 성당이 건설되었다. 공소의 신자가 감소함으로 인해 1966년 호산 공소는 매남으로, 삼서 공소는 성진원으로 옮겼다. 또한 월성리 공소, 용두리 공소는 당시의 어려운 사정 때문에 폐쇄하였다. 또한 모리세이 신부는 지역에 맞는 사목 계획을 수립하고 본당 신부와 교우 간의 대화를 촉진시키기 위해 1966년 본당 운영회를 발족시켰다. 같은 해 6월에는 성모유치원이 설립되었는데 이것은 한국 전쟁 후 운영되던 빈민 아동 수용소 겸 유치원을 정식으로인가받은 것이었다. 12대 김용배 신부 재임기인 1970년 신심 활동과 이웃 돕기 등을 주요 활동으로 하는 프란치스코 3회가 발족되었다. 1971년 젊은 남성 신자들의 모임인 성친계가 조직되었다.
15대 주임 김형수 신부는 부임 직후부터 성당 신축을 계획하여 1979년 성전 신축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기금 마련에 노력하였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 1981년 8월 기공식을 갖고 1982년 6월 새성당의 봉헌식을 가졌다. 17대 주임 최형락 신부는 공소를 순회하면서 정기적인 모임을 개최하여 공소의 활성화와 본당과 공소, 지역과 지역 간의 공동체 정신 함양에 중점을 두었고, 유아 교육의 중요성을 재인식하여 1987년 성모유치원을 2학급으로 증설하였다. 1985년에는 교구장의 방침에 따라 사도회를 사목 위원회로 재편하였고, 1987년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아 기념 행사를 가졌으며, 《장성 천주교 50년사》를 발간하였다. 19대 주임 김종걸 신부는 1992년 교리실과 회의실을 신축하였고, 1994년 예수 성심상을 축성하였으며 1995년 본당 연도회를 발족시켰다. 20대 주임 김종남 신부는 1995년 성모 어린이집을 개설하였고, 1996년 사창 공소의 부지를 매입하였으며, 1997년 공소 활성화 소위원회를 발족시켰다. 1997년 10월에는 본당 설립 60주년을 맞아 다채로운 기념 행사를 가졌다. 21대 주임 박창진 신부는 2002년 4월 정문을 개축하고, 7월 정문 옆 담장을 보수하는 등 본당의 주위 환경을 개선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광주대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대사전》/ 천주교 장성 교회 《장성천주교 五十年史》, 1987/ 천주교 광주대교구, 《광주대교구 50년사》, 빛 고을출판사, 1990. 〔梁仁誠〕
② 원주교구 소속 본당. 강원도 태백시 화광동 167-7 소재. 1961년 8월 12일 상동(上東, 현 폐쇄) 본당에서 분리 ·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요셉. 관할 구역은 태백 시 장성동, 문곡 소도동, 철암동, 구문소동, 경북 봉화군 석포면, 관할 공소는 석포, 철암. 〔교 세] 1967년 828명, 1972년 798명, 1979년 977명, 1985년 1,190명,
1990년 1,610명, 1995년 1,584명, 2001년 1,618명 . 〔역대 신부〕 초대 이영섭(李永燮)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961. 8~1968. 2), 2대 심근섭(沈根燮) 베네딕도(1968. 2~1969. 5), 3대 최창규(崔昌奎) 바르톨로메오(1969.5~1972. 5), 4대 김종태(金鍾泰) 안드레아(1972. 5~1973.11), 5대 이대식(李大植) 야고보(1973. 11~1976. 4), 6대 이흥근(李興根) 마르코(1976. 4~1979. 3), 7대 이병돈(李丙敦) 요한 보스코(1979. 3~1982. 5), 8대 곽호인(郭鎬仁)베드로(1982. 5~1985. 6), 9대 장석윤(張錫潤) 비오(1985.6~1990. 8), 10대 홍랑표(洪朗杓) 펠릭스(1990. 8~1995.2), 11대 조규남(曹奎男) 구니베르토(1995. 2~1999. 2) , 12대 박흥준(朴興雋) 요아킴(1999. 2~2003. 1), 13대 박순신(朴順信)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2003. 1~현재).
장성 지역에 전교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47년 11월 강릉(江陵, 현 임당동) 본당 9대 주임이던 헤이워드(H. Hayward, 오) 신부가 이 지역에서 가을 판공 성사를 집행하면서부터였다. 이후 강릉 본당 관할이던 장성 공소는 1959년 1월 영월 본당 관할하의 상동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상동 본당 관할로 이관되었다. 당시 상동 본당 주임이던 이영섭 신부는 매월 장성 공소를 방문하여 성사 집행을 하였는데, 이러한 이 신부의 사목 활동의 결과로 장성 지역의 교세가 증가하였다. 이에 장성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1960년 4월 대한 석탄 공사 부지에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11월 120평 규모의 성당과 32평의 사제관을 완공하였다. 마침내 1961년 8
월 12일 장성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이영섭 신부가 부임하였으며, 10월에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1962년 3월 대한 석탄 공사와 임대 차를 체결하여 성당 부지 840평을 매입하였고, 8월 본당에 태백 신용 협동 조합을 창립하였다. 1964년 4월에 본당 운영회를 조직하였으며, 1965년 3월 원주교구가 춘천교구로부터 분리 · 설립됨에 따라 장성 본당은 신설된 원주교구에 속하게 되었다. 1966년 10월 황지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어 신자 444명을 새 본당에 이관하였고, 11월에 수녀원을 준공하였다.
2대 주임 심근섭 신부는 1968년 3월 본당 사목회를 발족시켰고, 3대 주임 최창규 신부는 1969년 10월 성당 수리 및 전면 축대 공사를 시행하였으며, 1972년 1월 본당의 자립 예산을 책정하였다. 6대 주임 이흥근 신부는 1977년 2월 풍곡 공소를 황지(黃地) 본당으로 이관시켰고, 같은 해 6월 대현 공소 강당(24평)과 성모상을 건립하였다. 9대 주임 장석윤 신부는 1986년 9월 본당설정 25주년 기념 행사를 거행하였고, 12월에 유치원을 설립하였다. 1987년 9월 성당 부지 141평을 추가로 매입하였고, 1988년 10월 교육관(65평)을 완공하여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10대 주임 홍랑표 신부는 1993년 10월 교육관을 2층으로 증축(75평)하였고, 1994년 5월 수녀원을 증축하고 개보수하여 본당 사무실과 유치원으로 활용하였다. 11대 주임 조규남 신부는 1997년 10월 12일 성당 내부 도색 작업을 실시하였고, 12대 주임 박흥준 신부는 부임 직후인 1999년 3월 24일 7년간 공백 중이던 철암 공소를 재건하였다. 2002년 9월 19일부터 장성 본당은 철암 공소가 그해 여름 태풍으로 피해를 입자 매주 목요일 전 신자가 일주일 동안 마련한 1인분의 쌀과 반찬을 수해 피해를 입은 신자에게 전달하는 '수저 하나 더 놓기 운동' 을 전개하였다. (→ 원주교구)

※ 참고문헌  원주교구 30년사 편찬위원회,《원주교구 30년사》, 천주교 원주교구, 1996. 〔金志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