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집 (1786~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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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청까지 걸어가 옥사한 장성집 요셉(탁희성 작) :

포도청까지 걸어가 옥사한 장성집 요셉(탁희성 작) :

성인.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요셉.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 《기해일기》에는 그의 이름이 장성진으로 나온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한강변 서강에서 살면서 광흥창(廣興倉) 서원(書員)으로 벼슬살이를 했다. 뒤에 아내가 죽고 벼슬자리마저 잃게 되자 천주교를 믿는 이모 집으로 가서 의지하여 살다가 재혼하였다. 그러나 새로 맞이한 아내마저 다시 죽고 남의 약국에서 일을 돌봐 주게 되었다. 30여 세인 이때 그는 천주교 교리를 배워 요셉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한 뒤 얼마 동안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하지만 뒤에 천주가 강생했다는 교리에 대해 회의가 들어 천주교를 버리고 다만 재산을 모으고 세속 향락을 추구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나 교리 지식이 깊은 교우들의 가르침과 권면(勸勉)을 통해 교리에 대한 의혹을 해소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와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세속의 유혹을 효과적으로 피하기 위하여 비신자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 버리고 집에 틀어박혀 굶주림과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도와 진리 탐구에만 열중하였다. 그의 부모들이 걱정이 되어 "네가 벌이를 하러 좀 나간다고 나쁠 것이 무엇이냐"라고 말하자 "제가 전에 지은 죄는 모두 제가 넉넉한 살림을 해 보겠다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같은 모양으로 죄를 짓기보다는 추위로 얼고 굶주림으로 고생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뿐 아니라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의 괴로움을 잘 참아 받음으로써 저는 죽은 뒤에 하늘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1838년 5월에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의 딸도 그에게 교리를 배워 현 베네딕다를 대모로 세워 유 파치피코(余恒德) 신부로부터 로사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신자와 혼인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그는 많은 신자들이 고문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킨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뻐했을 뿐만 아니라 순교하고 싶은 열망이 불타 올라 자수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의 대부가 천주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말려 그만두었으나 얼마 후 그의 사촌의 진술 가운데 그의 이름이 나와 5월에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그가 염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걷기가 어려워 가마에 태워 가려 하였으나 그는 거절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걸어서 포졸들을 따라갔다. 그때 그의 아름다운 성품을 아끼는 이웃과 비신자 친구들이 길에 나와 그를 위로하며 배교하여 자유의 몸이 되라고 권유하였고 포졸들도 그렇게 하라고 재촉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들에게 짧은 이 세상의 삶을 사랑한 나머지 영원한 삶에 들어가는 중대한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천주교의 진리를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이렇게 하느라고 한나절이나 지났다. 결국 그의 믿음이 견고한 것을 확인한 포졸들이 그를 포도청으로 끌고 갔다.
하루가 지나도록 형벌을 가하지 않자 그는 궁금하고 답답하여 다음날 아침 해가 돋을 무렵에 "죽어야 마땅한 사람을 잡아다 놓고는 아무 형벌도 가하지 않고 버려 두느냐" 라고 여러 번 큰소리로 외쳐댔다. 오래 지나지 않아 포도대장이 그를 불러 심문하자 그는 천주교의 교리를 당당하고 명백하게 설명하며 고문을 용감하게 참아받았다. 형리들이 아무리 꾀를 쓰고 포악하게 굴어도 그가 한결같이 신앙을 굳게 지키자 5월 26일 치도곤 25대를 때린 뒤 옥에 가뒀다. 그날 밤 그는 옥에서 5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딸 로사도 이때 체포되었으나 그녀는 배교하고 풀려났다. 그의 시체는 비신자인 그의 매부가 찾아다 장사지냈으나 그 위치는 알 수가 없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기해박해)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중, pp. 416~418/ 《기해일기》, 성 황석두루가서원, 1986, pp. 143~146/ 《기해 · 병오 순교자 목격 증언록》 2권, 회차 2~4, pp. 1a~7a. 〔徐鍾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