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연 본당

長淵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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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 읍서리 116 소재. 1898년 7월 청계동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가 1950년 12월에 폐쇄되었다. 창설 당시 명칭은 두섭(道習)이었으며, 관할 구역은 장연 · 문화군 전역과 은율 · 승화 · 해주군 일부 지역으로 공소는 13개소. 〔교 세〕 1898년 489명, 1916년 1,243명, 1919년 385명, 1923년 530명, 1924년 1,756명, 1937년 1,886명, 1944년 1,000여 명. 〔역대 신부〕 초대 파이야스(C. Pailhasse, 河敬朝) 가밀로(1898. 7~1901.2), 2대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 루도비(1901.5~1902.5), 3대 김문옥(金紋玉) 요셉(1902. 5~1911.6), 4대 김성학(金聖學) 알렉시오(1911.6~1916.6), 5대 김명제(金命濟) 베드로(1916.6~1935. 1), 6대 이기준(李起俊) 토마(1935. 1~1937. 5), 7대 이선용(李善用) 바오로(1937.5~1938. 5), 8대 심재덕(沈載德) 마르코(1938. 5~1941.6) , 9대 박우철(朴遇哲) 바오로(1941.6~1942. 1), 10대 강주희(姜周熙) 방그라시오(1942. 1~1950. 12) .
〔전사 및 공소 시대〕 장연군에 속한 서해 바다의 여러 도서와 해안 지방은 19세기 중엽부터 조선 신자들이 중국을 통해 해로로 입국하는 선교사들을 영입하고, 중국 선박들과 연락을 취하던 주요 거점으로 등장하였다. 1856년 조선교구 4대 교구장인 베르뇌(Bemeux, 張敬一)주교가 푸르티에(Pouthie, 申) 신부와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를 대동하고 해로로 입국할 때도 장연 앞바다에서 조선 배로 바꾸어 타고 남하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그리고 1880년 뮈텔(Mutel, 閔德孝) 신부는 리우빌(Liouville, 柳達榮) 신부와 함께 만주 요동 지방의 차꾸(岔溝)에서 청국 배를 타고 2차에 걸친 시도 끝에 11월 11일 태탄(苔灘)에 상륙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들이 밤중에 배에서 내려 장연 교우들의 안내로 인도된 곳은 태탄 장거리에서 멀지 않은 배마당 점촌이었다. 위험한 때에 한 곳에 같이 있지 말라는 부감목 블랑(Blanc, 白圭三) 신부의 말에 따라 입국 20여 일 후 리우빌 신부는 배마당에서 북쪽 20~30리 지점에 위치한 속칭 '극낙이' 로 불리는 목감면 극락리 교우촌으로 거처를 옮겼다. 리우빌 신부는 그곳을 공소로 정한 후 3개월 동안 머물며 복사 최시몬에게서 우리말과 글을 배우고 장연, 은율, 풍천, 안악 네 고을을 전교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886년 한불우호통상조약의 체결 전후 시기에 장연 지방은 푸아넬(Poisnel, 朴道行) 신부와 쿠데르(Conderc, 具) 신부 등이 평안도와 강원도를 겸임하면서 전교하였다. 1890년 대부터는 수안 덕골에 정착한 로(J. Rault, 盧若望) 신부와르 장드르 신부가 황해 · 평안도를 관할하였고, 1896년 황해도와 평안도의 분리로 황해도 담임 신부로 임명되어 신천군 청계동에 정착한 빌렘(J. Wilhelm, 洪錫九) 신부가 장연 지방을 관할하였다. 1897년까지 장연 지방에는 장연군 낙도면 도습동에 위치한 두섭 공소가 유일한 공소였는데, 이 곳은 속칭 두섭이로 불리는 산골 동네로 인근에는 극락리, 장방동, 왕락리 같은 교우촌들이 있었다. 두섭 공소는 신자 백 요셉의 전교 활동으로 1893년에는 12명의 세례자가 배출되었으며, 해마다 빠짐없이 상당 수의 영세자가 배출되었는데, 1895~1896년 간에는 예비 신자 15명, 세례 신자 79명의 큰 공소로 발전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병인박해 때 순교한 베르뇌 주교가 황해도에서 전교하던 때, 두섭 동네도 방문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에 이 곳에 천주교인들이 살았다는 것이 된다.
〔본당 승격 및 발전〕 1898년 7월 두섭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파이야스 신부가 부임하였다. 두섭에 본당이 설정된 후 장연 읍내에도 천주교로의 개종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1899년 장연 읍내에는 예비 신자가 100여 명에 달하여 머지않아 세례자도 크게 증가될 추세에 있었다. 이에 파이야스 신부는 장연읍내에 성당 외에 사제관 등 여러 채의 부속 건물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1900년 9월 19일 성당 및 사제관 준공 봉헌식과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1901년 2월 장연 본당은 파이야스 신부가 건강상의 이유로 전임되어, 3개월 동안 공석 상태를 맞게 되었다. 2대 주임 르 장드르 신부가 부임하였으나, 장연 본당은 주임 신부가 없었던 3개월간의 공백기에 신자수가 대폭 감소하였다. 뿐만 아니라 르 장드르 신부는 부임 후 전교회장과 복사도 없이 성무를 집행해야만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르 장드르 신부는 관할 구역 가운데 은율읍이야말로 선교사가 정착할 적격지라고 생각하여, 1902년 5월 설립된 은율 본당 주임으로 전임되었다. 3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문옥 신부는 부임 후 자신이 주재하고 있었던 송화 산골몰 공소의 24칸 짜리 강당을 철거한 후, 그 자재로 성당을 신축하기 시작하여 1911년 5월 (또는 6월)경 완공하였다. 교육을 통한 복음 전파와 애국 계몽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김문옥 신부는 1907년 교회 부설 사립 경애학교를 설립 · 개교하였다. 1911년 3월에 이르러 학생 수는 남녀 학생 각각 30명으로 모두 60명으로 증가하였다. 김문옥 신부는 관할 공소에도 학교를 설립하도록 적극 후원하여 낙도면 두섭 공소의 정심학교, 장연면 장방동의 장흥학교, 문화면 아현의 월산학교, 송화면 쇠골 금동의 봉양학교, 송화의 명신학교, 풍천의 인성학교 등을 개교하였다. 1911년 1월 대구교구의 설정으로 경상남도 울주군 출신인 김문옥 신부는 대구교구의 김천 본당으로 전임되었고, 평안남도 은산 출신으로 김천 본당에서 전교하던 김성학 신부가 서울교구 소속이 되어 장연 본당 4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은율 본당과 해주 본당이 주임 신부의 전출로 공석이 되자 각각 1914년 6월과 1926년 5월까지 장연 본당에서 관할하였다. 5대 주임 김명제 신부는 부임 후 29년 동안 장연에서 본당 사목과 아울러 황해도 천주교회를 감독하였는데, 이 시기 장연 본당은 비약적으로 발전되었으며 마치 교구 본부와 같은 기능을 발휘하였다. 1926~1929년 사이에 장연군 용연면의 길동리, 신오리 신계동, 석교리 삼석동 공소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경애학교의 여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 소속 수녀들을 초청하였으며, 그 후 인원이 증원되면서 경애학교 여학생 외에 경애 유치원 원아 교육도 실시하였다. 1922년 교실난을 해결하기 위해 남학교를 신축함과 함께 수녀원 건물도 새로 지었으며, 1935년경에는 현대식 교사를 신축하였다. 또한 1916년 말경에 빈민 구제 사업을 목적으로 조직된 긍련회, 1921년 교회 학교 교사와 전교회장 양성을 목적으로 결성된 인재양성학회, 1928년 8월 25일 본당의 기혼 여자 신자 60명이 참석한 가운데 발족한 성부 안나회, 1928년 10월 6일 본당의 제반 사업이 원활히 추진되도록 후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창립한 상조회,1920년대 초에 결성된 가톨릭 남자 청년회, 1930년에 발족한 가톨릭 여자 청년회 등 황해도 천주교회에서 가장 많은 신심 단체들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1934년 5월 31일 황해도에서 최초의 성체 거동 행사를 거행하였다.
〔본당의 시련 및 폐쇄〕 1942년 1월 10대 강주희 신부가 부임한 후 1945년 8 · 15 해방까지의 3년간 장연 본당은, 일제 패망 직전에 일본군이 경애보통학교 교사를 빌려 몇 달 동안 주둔한 일이 있었을 뿐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유지되었다. 하지만 해방 후 장연 본당은 근 40년 동안 장연 지방의 명문 사학으로 많은 인재를 양성한 경애학교가 인민학교로 국유화되고 과수원 등 수만 평의교회 토지가 무상 몰수당하는 등 피해를 입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교육 사업이 불가능해지고 전교 사업 또한 위축되자 강주희 신부는 우선 본당 수녀들을 평복(한복)으로 갈아입게 하여 해주를 통해 월남하게 하였다. 1948년 북한 공산 정권에 의해 교회에 대한 음성적인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하자 장연 본당도 정치보위부의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한 후 장연 본당은 성당이 인민군의 방화로 완전 전소되고, 강주희신부 가족이 학살당하는 등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후 1 · 4 후퇴 때까지 장연 본당은 유지되었으나, 12월 8일 강주희 신부가 정세의 약화와 교우들의 권유로 피난길에 올라 장연을 떠나게 되어 장연 본당은 침묵의 본당이 되었다. (→ 황해도 감목대리구 ; 침묵의 교회)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가톨릭출판사, 1984/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황해도 천주교회사》,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84. 〔白秉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