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온 (1906~?)

張貞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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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 세례명은 마리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초대 수련장.
〔생 애〕 1906년 10월 25일 경기도 인천 화천동에서 인천 해관(海關)의 관리를 지낸 장기빈(張箕彬, 레오)과 황 루치아의 3남 4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장정온은 초등학교, 중학교 및 고등학교 과정 을 숙명학원(淑明學院)에서 이수한 뒤, 1922년 5월 언니 장정혜(張貞慧, 구네군다)와, 오빠 장면(張勉, 요한)의 처조카 김교임(金敎任, 막달레나)과 함께 메리놀 수녀회(Maryknoll Sisters)에 동양인 최초로 입회하였다. 장정온은 시애틀과 워싱턴의 수녀회 분원에서 수도 생활 입문과 영어를 배우는 한편 '어린이 집' 을 운영하고 있던 수녀들을 도와 어린이들을 돌보았다. 1922년 8월에는 뉴욕에 있는 메리놀 수녀회 모원에서 '앙네다' 라는 수도명을 받아 착복식을 하였고 1925년 4월 30일 첫 서원을 하였다.
장정온 수녀는 서원 후 첫 소임으로 김교임 수녀 등 5명과 함께 귀국하여 1925년 10월 평북 의주(義州) 본당에서 선교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메리놀 수녀회 수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통역자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한편 1922년 11월 포교성성으로부터 평안도 지방의 포교권을 위임 받아 활동하고 있던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문화와 생활 관습의 차이, 언어 소통의 불편함 등으로 인하여 사목 활동에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모리스(J. Morris, 睦怡世) 신부는 방인(邦人) 수녀회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 양성을 영유(永柔)읍에 있던 메리놀 수녀회 한국 지부에 위촉하였다. 1931년 7월 16일 수녀회 창립을 위촉받은 3명의 메리놀 수녀회 회원들은 영유를 떠나 평양으로 왔으며 곧 평양 관후리(館後里) 성당 근처인 상수구리(上水口里) 257번지의 기와집 두채를 매입하였다. 또한 같은 해 장정온 수녀는 새로 창립될 방인 수녀회의 교육 담당자로 선발되어 일본 성심학원에 입학하였다. 마침내 1932년 6월 27일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가 설립되었고 1935년 학업을 마친장 수녀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의 지도 수녀로 부임하였다. 1938년 6월 16명의 수련자가 탄생하자 7월 장정온 수녀는 초대 수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수도자의 모범이신 예수>(Jesus the Model for Religious), , <서원 문답>(The Catechism of the Vow) 등을 번역하여 수련자들에게 가르쳤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평양교구 내 모든 메리놀회 신부와 수녀들이 일시에 감금되자 같은 달 13일 평양교구 3대 지목구장이었던 오세아(O'Shea, 吳) 주교는 장정온 수녀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장정온 수녀는 전쟁 중의 물질적 궁핍 속에서도 영적 도서의 지속적인 번역을 통해 영적인 풍요로움을 더하고자 노력하였고 분원에 파견된 수녀들의 영신 생활과 전교 활동을 돕기 위하여 월간지 형태의 회지《수르숨 코르다》(Sursum Corda)를 월 2회 발행하여 배부하였다.
1945년 해방을 맞았으나 장정온 수녀는 북한의 공산주의 정책으로 인하여 신변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메리놀 수녀회에서는 병중(病中)에 있는 장 수녀가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올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949년 5월부터 북한의 교회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되면서 많은 신부와 신자들이 체포되고 교회가 폐쇄되기 시작하자 메리놀 수녀회의 총장 수녀는 장정온 수녀에게 귀원을 명하였다.
장정온 수녀는 북한 당국의 서포 본원 건물을 양도하라는 명령에 따라 1950년 5월 14일 수녀원을 해산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수녀원 해산 후 자신은 선교리 친척집으로 갔다. 그러나 장정온 수녀는 북한의 총선거 제안에 대해 장면이 반박 성명을 낸 후부터 끈질긴 감시와 추적을 받고 있었으므로 친척집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1950년 5월 23일 장기려(張起呂) 박사의 도움으로 인민종합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나 6월 16일 장기려 박사가 군의관으로 징집되자 퇴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사정을 알게 된 진남포(鎮南浦) 본당의 조문국(趙文國, 바오로) 신부는 6월 19일 장 수녀를 진남포로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6월 24일 조문국 신부도 인민군에 의해 기습적으로 납치 · 연행되었으며 이에 장 수녀는 일단 평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평양에도 있을 곳이 마땅치 않게 되자 7월 6일 강성효(康聖孝, 베드로) · 변대옥(邊大玉, 헬레나) 수녀와 함께 용궁리 회장 집으로 피신하였다가 7월 24일에는 다시 송림리(松林里) 공소(영유 본당 관할)로 피신하였다. 장정온 수녀의 건강이 약간 회복되었을 무렵 공소 회장이 와서 북한 당국이 장면 박사와 대결시키는 선전 도구로 삼기 위하여 장정온 수녀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에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중 10월 4일 저녁에 인민군 장교 2명과 사복을 한 사람이 찾아와 평양 내무상의 특명이라며 장정온 수녀를 끌고 갔으며 이후 수녀들이 장정온 수녀의 행방을 알아보았으나 끝내 알 수가 없었다. (→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장면 ; 장발)
※ 참고문헌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50년사》, 1983/《교회와 역사》 313호(2001 6). 〔金善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