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요셉. 회장. 그의 이름은 장낙소(張樂韶)로도 나온다.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군 양감면 요당리) 태생(또는 수원 담안 태생)으로 1826년(또는 1827)에 세례를 받고 거의 모든 집안 식구를 개종시켰다. 그는 학식이 있고 슬기롭고 보기 드문 신심을 가진 신자였기 때문에 모방(Maubant, 羅) 신부가 입국하자마자 서둘러 회장에 임명하였다. 그는 열심히 계명을 지키며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 또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산골 이곳저곳으로 여러 차례 옮겨다니며 살다가 1843년부터 제천 배론에 정착하게 되었다. 배론에 자리를 잡은 지 12년이 되는 1855년에 메스트르(Maiste,李) 신부가 그곳에서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하자 그는 3칸짜리 초가 살림집을 교사(校舍)로 제공하였다. 또한 신학교 설립 후에는 학생들에게 한문을 지도하기도 하였으며 신학교의 경리와 주위에 있는 공소 회장의 역할도 함께 맡아 보았다. 여러 가지 직책을 누구보다도 뛰어난 열성과 인내를 가지고 열심히 잘 수행하였기 때문에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신부로부터 자신의 오른팔이라는 말을 자주 듣곤 하였다. 비록 곤궁에 가까운 처지에 이르러서도 자기 봉사에 대한 보수를 결코 받으려 하지않았고 여가를 이용하여 자기와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손수 일을 하였다.
병인박해가 발생하여 1866년 3월 2일 배론 신학교에서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Petinicolas, 朴) 신부가 서울 포교들에게 체포될 때 그도 함께 붙잡혔다. 이때 푸르티에 신부가 포졸들에게 약간의 돈을 주며 그를 놓아 주라고 하여 즉시 풀려났다. 그러나 집을 떠나지 않고 있다가 이튿날 선교사들이 떠날 때 소를 타고 그들을 따라갔다. 5리를 갔을 때 푸르티에 신부는 그가 보이자 포졸들을 꾸짖었다. 이에 포졸들이 그에게 돌아가라고 강요하자 울면서 복종하였다. 포졸들이 모두 약탈해 갔기 때문에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집에서 닷새 동안을 머문 뒤 배론에서 30리 떨어진 노럴골(또는 너레골) 마을의 어떤 교우 집으로 식량을 얻으러 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제천 읍내로 끌려갔다. 그는 3월 16일 관장 앞에 불려가 심문을 받을 때 자신의 신앙을 당당히 고백하고 바로 자기가 선교사들의 집 주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3월 23일 두 차례 신문을 받은 뒤 삼남매 자식들에게 항상 순교하여 예수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고 밝힌 자신의 소원대로 3월 24일 군문 효수(軍門梟首)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그 전날 군문 효수형을 받은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 위앵(Huin, 闕) · 오메트르(Aumaîte, 吳) 신부, 황석두(黃錫斗, 루가)와 함께 수영(水營)이 있는 보령 갈매못(일명 고마 수영)으로 압송되어 5월 14일 6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다블뤼 주교, 위엥 · 오메트르 신부의 시신과 함께 형장의 모래밭에 매장되었다가 뒤에 그곳에서 10리 떨어진 곳으로 이장되었으며 다시 남포 서들골로 옮겨 매장되었다. 그 후 1882년 3월 블랑(Blanc, 白圭三) 주교의 지시로 발굴되어 11월에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보내졌으며 1894년 5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용산 신학교에 안치되었다. 1900년 9월에 종현 성당으로 옮겨졌으며 1967년 10월 절두산 순교 기념관과 성당이 완공되면서 절두산 지하 성당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배론 성 요셉 신학교 ; 병인박해)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하, pp. 413, 432~435/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치명일기》/《捕盜廳謄錄》 중,보경 문화사, 1985, pp. 621 ~622. 〔徐鍾泰〕
장주기 (1803~1866)
張周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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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프르티에 신부를 울며 쫓아가는 장주기 요셉(탁희성 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