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선교 구역 장충동에 건립된 천주교 성당.
1988년 10월 9일에 설립되었으며, 신자는 1991년 3월 말까지 1,258명이었으며 현재 3,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2003년 현재까지 상주하는 신부는 없다.
〔설립 및 활동〕 북한 지역의 천주교 활동은 한국 전쟁과 이후 북한 정권의 억압적인 종교 정책으로 인해 극심한 쇠퇴기를 겪었다. 조선 불교도 연맹(1945년 12월 창립)이나 조선 기독교도 연맹(1946년 11월 창립) 등의 여느종교 단체와는 달리, 천주교 단체인 조선 천주교인 협회(1998년 '조선 카톨릭 협회' 로 변경)가 1988년 6월에 결성되었다는 점은 해방 이후 북한 지역의 천주교 상황이 얼마나 미미하였는지를 잘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다. 이에한국 천주교회는 1984년 설립 200주년을 맞아 남북한의 천주교 교류에 대해서 고민하였고, '북한 선교 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회 설립 2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1982년 12월에 북한 선교부(현 민족 화해 위원회)를 설립하였다. 1984년 3월에 캐나다 국적을 가진 고종옥(高宗玉, 마태오) 신부가 한국인으로서는 휴전 이후 최초로 북한을 방문함으로써 남북한 천주교회의 교류 가능성을 기대하게 하였다. 1985년 9월에는 원주교구장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주교가 북한을 방문하여 평양의 고려 호텔에서 한국의 순교 성인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어 1987년 6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 협력에 관한 비동맹 국가 각료 회의' 에 바티칸 대표단의 일원으로 파견된 장익(張益, 십자가의 요한) 신부는 조선 기독교도 연맹(1998년 '조선 그리스도교연맹' 으로 개칭)의 도움으로 북한의 천주교 신자들을 만났다. 이와 같은 한국 천주교회의 접촉 시도를 북한에서도 호응하여 1987년 10월에 성당 건립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북한 정부로부터 성당 터와 건축 자재를 공급 받아이듬해 3월에 착공하였다. 성당 건평은 500평으로, 총공사비는 30만 원(당시 환율로 약 미화 15만 달러로 추정됨)이었는데 이 가운데 약 20만 원은 신자들이 부담하였고,나머지 10만 원은 북한 정부가 보조하였다. 성당 건축을위해 약 800명의 북한 신자들이 헌금하였고, 신자들 스스로가 일과 후에 공사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성당 건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1988년 6월 30일 조선 천주교인협회가 설립되었다. 성당 건립을 준비한 지 1년 만인1988년 10월 9일 장충 성당을 완공하고, 10월 2일에첫 기도회를 가졌다. 같은 해 10월 30일에는 교황청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장익 정의철(鄭義哲, 다마소) 신부가 최초의 미사를 봉헌하고, 교황청에서 가져온성작을 기증하였다. 이후 장충성당에서는 외국이나 남한에서 이곳을 방문하는 사제가 있을 경우 미사가 봉헌되며, 그 이외의 주일에는 신도회장이 주도하여 공소 예절을 진행하고 있다.
1989년 2월에는 북한을 찾은 천주교 방문단이 평양의신자들과 함께 남북 천주교 합동 미사를 거행하였고, 6월에는 천주교 정의 구현 사제단이 장충 성당과 남한의임진각에서 동시에 통일 염원 미사를 가졌으며, 8월에는 문규현(文奎鉉, 바오로) 신부가 미사를 봉헌하였다. 후 1989년에 김광남(金光男,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는 서울에서 가지고 간 여러 가지 성물들을 전달하였으며, 1991년에 고종옥 신부는 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였다. 성당 건립 당시부터 신앙 공동체를 이끌어 오던 박경수(바오로)가 1990년 세상을 떠난 후, 그 후임으로 차성근(율리오)이 공소 예절을 주관하고, 외부에서 사제가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할 때에는 이를 보좌하였다. 1991년에는 조선 천주교인 협회 중앙위원회 명의로 《카톨릭 기도서》, 《천주교를 알자》, 《신앙 생활의걸음》 등을 발간하였다.
한국 천주교회와 장충 성당의 인적 교류는 1995년에 북한이 대홍수를 겪고 남한과 국제 사회에 식량 지원을 호소하며 개방적인 자세를 취한 이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95년 10월에는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고 있던서울대교구장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의 사목 방문을 성사시킬 목적으로 발족되었던 서울대교구 민족화해 위원회가 발족 당시에 위원장을 맡고 있던 최창무(崔昌武, 안드레아) 주교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미국 뉴욕에서 조선 천주교인 협회 대표단과 첫 만남을 가졌다. 그 이후 1996년 4월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평화 통일 기원 미사' 가 남한의 명동본당과 장충 성당에서 봉헌되었고, 1998년 4월 부활절에는 '남북의 화해와 이산 가족 재회를 기원하는 미사'가 명동 본당과 장충 성당, 미국 뉴저지 주의 오렌지 한인 본당에서 함께 봉헌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 최창무 주교 등 사제와 평신도 7명이 방북하였는데, 이것은 남북 분단 이후 최초의 사목적 방문이었고, 남북한이 두 번째로 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동시에 봉헌하는 것이었다. 뒤이어 8월에는 천주교 정의 구현 사제단 일행 9명이 '평양 장충 성당 축성 10주년 미사' 를 집전하기 위해 방북하였고, 11월에는 한국 종교인 평화 회의(KCRP)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였다. 1999년 12월 서울대교구 민족 화해 위원회 등에서 파견된 방북단은 장충 성당에서대림 제2 주일 교중 미사를 봉헌하였고, 한국 종교인 평화 회의는 전년도에 이어 재차 방문하여 미사를 갖는 한편 겨울 의복을 기증하였다.
장충 성당은 현재도 성당에 상주하는 성직자가 없고,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평양교구장 서리정진석(鄭鎭奭, 니콜라오) 대주교와의 관계도 미묘한 상태이기 때문에 장충 성당과 그 신앙 공동체는 임의적인시설과 단체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 양에 장충 성당이 설립된 것은 북한 정부가 천주교회와의 연결 통로를 갖고자 하는 종교 정책상의 변화를 반영한 것임에는 분명하다. (→ 침묵의 교회)
※ 참고문헌 《화해와 나눔》 남궁경, 《북한의 종교 정책과 장충 성당의 건립》, 가톨릭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01. 〔張兢善〕
장충 성당
長忠聖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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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 성당 전경(왼쪽)과 2층에서 내려다본 성당 내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