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 문창리 소재. 1899년 5월 재령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가 1950년 10월 폐쇄되었다. 주보는 바다의 별. 관할 지역은 재령군, 봉산군 전역과 신천읍, 서흥읍, 평산군 일부 지역. 〔교 세〕 1899년 100여 명, 1916년 989명, 1921년 600여 명, 1937년 370여 명, 1944년 800여 명. 〔역대 신부〕 초대 르 각(Le Gac, 郭元良) 가롤로(1899.5~1905.8), 2대 멜리장(P. Mélizan, 梅履霜) 베드로(1905. 8~1921.5), 3대 신성우(申聖雨) 마르코(1921.5~1930. 6), 4대 방유룡(方有龍) 레오(1933. 2~1936. 5), 5대 박정열(朴貞烈) 바오로(1936. 5~1942. 12), 6대 김경민(金景旻) 루도비코(1943. 1~1946.5), 7대 양덕환(梁德煥)안드레아(1946.5~1950. 10) .
1890년대 재령 지방에서는 이미 천주교로의 개종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 천주교에 대한 편견들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1895년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의 포교를 담당하고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르 장드르(LeGendre, 崔昌根) 신부는 황해도 중앙 평야 지대에 포교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하여 재령읍에 공소를 설정하였다. 재령 지역의 신자수는 1896년부터 마렴(麻簾, 매화동)본당 초대 주임 빌렘(Wilhelm, 洪錫九) 신부의 선교 활동에 의해 점차 증가하였으며, 1898년 12월 빌렘 신부가 재령 공소에서 1개월 가량 체류하면서 사목한 시기 동안에는 예비자의 수가 400명에 달했다.
재령 공소는 1899년 5월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초대주임으로 르 각 신부가 부임하였다. 르 각 신부는 1899년 8월 모성학교(慕聖學校)의 모체가 되는 성당 부설 초등학교를 개교하였고, 선교 정책의 일환으로 곳곳에 공소를 설립하였다. 검수 지역에 본당이 1901년 5월에 신설되자 재령 본당 관할 공소의 절반이 검수 본당으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사핵사(査覈使) 이응익(李應翼)이 천주교 신자와 관민 사이에 일어난 충돌 사태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1903년 황해도로 파견되면서부터 지역 내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수 많은 냉담자가 생겨났다. 이렇게 천주교의 교세가 약화되는 와중에 2대 주임으로 부임한 멜리장 신부는 부임 직후 절(寺)로 사용하던 집을 매입하여 그 내부를 성당으로 개조하였으며, 교육 사업을 통해 교세의 침체를 타개하고자 성당에서 운영하는 무인가 학교를 정규 학교로 발전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곧 1909년 초 40여 명을 모아 야학을 시작하였으며 8월부터는 초등학교 수업을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추진해 온 학교 인가도 받았고 교명은 모성학교로 정하였다. 그러나 학교 운영 자금의 부족과 학생들의 관립 학교 입 · 전학으로 인하여 학교는 점차 학생수가 줄어 1918년 자진 폐교하였다. 이후 멜리장 신부는 성당 경내에 뽕나무와 사과나무를 심고 학교로 쓰던 건물에 양잠 시설을 설치하여 남은 학생들에게 양잠 기술을 가르쳤다. 3대 주임 신성우 신부는 1921년에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당 내 별채에 유치원의 성격을 지닌 동명학원(東明學院)을 개설하였고, 1923년 2월에는 성당 종을 설치하였다. 동명학원은 1927년 3월 졸업식을 마친 뒤 폐원되었고 이후 야학을 개설하여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본당의 부녀자들을 모아글을 가르쳤다. 한편 신 신부의 재임기에는 청년회와 소녀회와 같은 단체들이 태동하였고, 한시적이었지만 프로테스탄트에 밀려 침체된 교세가 다소 회복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신성우 신부가 1930년 6월 신천(信川) 본당으로 전임된 이후 재령 본당은 신부가 부임하지 않아 신천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가 1933년 2월 4대 주임 방유룡 신부가 부임하여 다시 본당의 기능을 회복하게 되었다. 방 신부는 유교적 폐습으로 생긴 성당 내부의 남 · 녀 좌석 사이의 칸막이를 제거하였고, 성당 좌우 양쪽을 증축하였으며 본당 청년들과 합심하여 생동감 넘치는 '젊은 교회' 로 만드는 데 사목의 역점을 두었다. 이러한 방 신부의 노력으로 1935년에는 증축한 성당이 협소할 정도로 신자들이 증가하였다. 5대 주임 박정열 신부는 의료 사업을 통한 전교에 역점을 두었는데, 신자인 이윤재(李潤載, 요한)가 경영하던 삼성의원(三省醫院)을 인수하여 설비를 갖추고 1940년 9월에 성심의원(聖心醫院)으로 개원하여 그 운영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위임하였다. 박 신부는 의료 사업 이외에도 가정 형편이 힘들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중등강의록》(中等講義錄)으로 중학 과정을 가르치는 사설 학교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박 신부는 1942년 12월에 공소를 순방하던 중 걸린 감기가 악화되어 선종하였고 이어 6대 주임 김경민 신부가 부임하였다. 헌납이라는 미명아래 모든 것이 징발되던 일제 말기에 김 신부는 신자들과 힘을 모아 성당의 종을 지켰다. 재령 본당은 해방이된 후 38선 이북에 위치하였지만, 양덕환 신부가 1946년 5월에 7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전까지는 본당 운영에 큰 어려움이 없었고, 양 신부도 성심의원에 출근하여 병원 일을 살피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 전쟁이 일어나고 1950년 10월 양 신부가 납치되어 행방 불명이 되자 본당은 침묵의 교회가 되고 말았다. (→ 침묵의 교회)
※ 참고문헌 黃海道天主教會史刊行事業會, 韓國敎會史研究所編, 《黃海道天主教會史》, 1984. 〔편찬실〕
재령 본당
載寧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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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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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들 사이로 멀리 보이는 기와집이 재령 본당이다(1901. 9월경, 왼쪽). 본당 사제관(1899. 5~ 1901까지 사용)앞에서 신자들과 함께 서 있는 르각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