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마지막 날에 최후 심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심을 의미하는 용어.
〔용어와 의미〕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뜻하는 전문용어인 라틴어 '파루시아' (parusia)는 그리스어 '파로우시아 (παρουσια)를 음역한 말이다. 이 그리스어는 동사'파레이미' (πάρειμι)에서 유래한 것으로 '현존' . '있음' · '임재' (臨齋) 등의 의미(요한 11, 28 ; 1고린 16, 17 ;2고린 10, 10)를 지니거나 '오심' . '도래' · '도착' (유딧10, 18 ; 1마카 12, 42 ; 2마카 3, 9 ; 8, 12 ; 마태 26, 50 ; 루가 13, 1 ; 사도 10, 21 ; 17, 6 : 필립 1, 26 ; 2고린 7. 6-7 ; 2데살 2. 9 ; 2베드 1, 16)을 의미한다. 본래는 왕이나 특정인물이 도시나 기타 지역을 공식적으로 방문할 때, 혹은인간을 돕기 위한 신의 등장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왕의 방문을 의미하는 말이었기에 항상 웅장하고 현란한 표징들과 함께 묘사되고, 매우 각별한 준비가 요청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외에도 재림을 의미하는 단어들이 더 있다. '에피파네이아 (Επιφάνεια : 2데살 2, 8 ; 1디모 6, 14 ; 2디모 4, 1.8 ; 디도 2. 13)는 '나타남' 이라는 의미로 주님의 미래-종말론적 출현을 의미할 때 사용되던 용어였고, '아포칼립시스' (αποκάλυψη : 2데살 1, 7 ; 1베드 1, 7. 13 ; 4,13)는 주로 '계시' 혹은 '묵시' 로 번역되는 말이지만 마지막 때에 모든 것을 '열어 보인다' 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호 에르코메노스' (ό ερχομενος : 마태 11, 3 21, 9 ;히브 10, 37)는 '오시고 계신' 혹은 '오신 존재' 를 의미하는 단어로서 역시 재림을 표현한다. '에르코마이'(ἔρχομαι : 마태 24, 30 ; 마르 14, 62 : 루가 21, 27 ; 요한14, 3 ; 2요한 1, 7 ; 유다 1, 14 ; 묵시 1, 7 ; 22, 7. 12. 20)는 주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가다' , '오다' 의 의미를 지닌 재림과 관련된 단어였다. '파네로오' (φανερόω : 요한 21, 1 ; 골로 3, 4 ; 1요한 3, 5) 역시 '보이다' , '나타나다' 란 의미로 재림을 뜻했으며, '호라오' (ὁράω : 히브 9, 28)도 '나타나심' 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주님의 날' (Ημέρα Κυρίου)은 역사 안에 개입하여 들어오는 하느님의 장엄한 개입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표현으로서, 하느님이 승리하는 역사적인 '그날' 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언급하는 말은 이외에도 '마라나 타' (Μαραναθα : 1고린 16, 22)와 "오소서, 주 예수님" (Έλα, Κύριε Ιησού : 묵시 22, 20) 등의 전례 기도가 있고, 사람의 아들〔人子〕의 도래에 대한 단편적 언급들이 있다(마르 13, 26 ; 14, 62 ; 루가 18, 8). 이상의 재림과 관련된 용어들을 볼 때, 성서는 '재림' 즉 두 번째 오심' 을 의미하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는다(히브 9, 28은 예외). 오히려 '임재' , '도착' , '나타남' ,'열어 보임' 등의 표현을 빌려 재림의 의미를 대신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재림 이해〕 구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이중내림' (二重來臨), 즉 '초림' (初臨)과 '재림' 을 분명히 구별하지 않지만, 하느님의 오심을 언급하는 구절이 여러 번 등장한다.
구약이 언급하고 있는 하느님의 오심은 무엇보다도'역사 내적인 사건' 이다. 동시에 메시아적 오심과 관련된 '종말론적 사건' 이다. 역사 내적인 사건이란 이스라엘과 대치한 적들에 대한 승리를 의미하기 때문인데(이사 19, 1 ; 30, 27 ; 하바 3, 3 이하), 주님이 오시는 '야훼의 날' 악인들은 자신들의 죄로 처벌될 것이고, 반대로 주님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구원될 것이다. 따라서 죄인들에게 이날은 두려움의 날이고(아모 5, 18-20 ; 스바1, 15-18 ; 2, 2 ; 2사무 24, 15 이하 ; 예레 23, 19 ; 23, 30 이하 말라 3, 5), 선인들에게는 구원과 해방의 날이 된다(출애 3, 8 ; 시편 80, 2). 이러한 맥락에서 구약의 하느님 백성은 희망을 가지고 '야훼의 날' 을 기다렸는데, 이 평화의 실현이 다니엘서에 이르러서는 "마지막 때" 오실 종말론적 메시아와 관련되어 있다. 묵시 문학적 사고에 의하면 심판의 날에 하느님을 대신하여 오실 분이 계신데, 그분이 바로 '사람의 아들' 이다. '사람의 아들의 오심' 을 언급한 다니엘서 7장은 공관 복음에서 언급하는 사람의 아들 개념과 직접적인 병행을 이루고 있다. 신약성서는 재림이라는 개념을 통해 예수가 '사람의 아들' 로서 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과 이제 그가 다시 오실 때에는 더욱 강화된 힘을 가지고 오실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신약성서의 재림 이해〕 재림은 신약성서 전반에 아주 명확히 제시되는 사건으로, 각 구절의 내용들은 재림이 초대 교회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음을 명확히 알려 주고 있다. 재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부분들이 예수가 직접 한 말인지, 아니면 초대 교회 공동체가 만든 말인지를 구별하기 어렵지만 신약성서 전반에 등장하는 재림 개념을 개괄적으로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공관 복음 : 공관 복음서의 재림(마태 24-25장 ; 마르13장 ; 루가 21장)은 예수에게 '사람의 아들' 이라는 개념을 통해 구원자-심판자로서의 모습을 적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다른 종말론적 기록(특히 다니 7, 13)의 특성들과도 일맥 상통한다.
공관 복음은 사람의 아들이 재림할 때 있을 여러 현상들을 공통적으로 소개한다. 사람의 아들은 하늘의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을 갖추고 오며(마태 24, 30 : 26,64 ; 마르 13, 26 ; 14, 62 ; 루가 21, 27), 재림이 있기 전에는 여러 가지 우주적 징조가 나타난다. 천체의 움직임이 질서를 잃고, 우주적 전복이 일어나게 되며(마태 24,27. 29 ; 마르 13, 24-25 ; 루가 17, 24 21, 25-27), 이후 사람의 아들은 하늘의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을 심판할 것이다(마태 25, 31-33).
공관 복음은 재림이 곧 '당도' (當到, imminent arriva)할 것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그 임박한 재림이 언제 이루어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공개된 개념으로 남겨져 있다. 더욱이 이에 대하여는 사람의 아들 자신도 알지 못하고, 오직 아버지만이 알고 계신다(마태 24, 36 ; 마르 13,32). 그래서 예수께서는 언제, 어디서든 깨어 있을 것을 권고한다(마태 25, 1-13 '열 처녀의 비유' ; 25, 14-30 달란트의 비유' : 루가 19, 12-27 돈 관리에 대한 비유' ) . 즉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바로 임박했음을 선포하는 한편, 그것이 언제 이루어질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다. 이를 통해 생활의 회개와 실천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로써 일상 사건들 안에 구원론적이고 종말론적인 의미를 동시에 부여하고 있다.
① 마르코 복음 : 신약성서에서 사람의 아들의 재림을 가장 집중적으로 묘사하는 대표적인 본문은 마르코 복음13장이다. 이 본문은 여러 전승이 결합되어 형성된 것으로서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반영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서기 70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 사건을 가장 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즉 이 부분은 성전 파괴를 사람의 아들이 오는 징표로 이해했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관점(마르 13, 4)이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는 전쟁, 지진,기근,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의 황폐화(마르 13, 14)가 재림의 징조로 표명되고 있다. 복음사가에 의하면 재림은 매우 임박한 사건으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루어 질 사건이었다(마르 13, 28-31). 그러나 동시에 그 이전에 이루어져야 할 사건을 소개하고 있는데, 만민을 위한 복음 선포가 그것이다(마르 13, 10). 이는 재림 지연의 문제를 '선교' 라는 주제로 해석하고, 그 긴박성을 해소하려던 마르코적 신학 작업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② 마태오 복음 : 마르코 복음보다 후대에 쓰여진 마태오 복음은 70년의 성전 파괴 사건 이후에도 발생하지 않았던 재림에 대하여 해명해야 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 24-25장은 '열 처녀 이야기' (마태 24, 29-25, 46)를 재림 사건에 비유하고, 재림의 지연 문제를(마태 24, 48 ;25, 5. 19) 늘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는 사목적 경고를 통해 완화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만 언급하는 '최후 심판'(마태 25, 31-46)은 이 심판이 백성 전체를 대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정의 구현 여부가 심판의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종말 개념을 보다 현재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③ 루가 복음과 사도 행전 : 루가는 "하늘로 올라가신 저 예수는, 그분이 하늘로 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 (사도 1, 11)이라고 승천과 내림의 동일성을 강조함으로써 재림을 구세사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해석하였다. 즉 세상 종말에 이루어질 사건은 파괴와 소멸로 인한 다른 세상의 도래가 아니라 일종의 '복원' (復原,επαναφέρω)으로서의 사건이라는 것이다(사도 3, 21). 이러한 차원에서 종말 사건은 현 세상의 파괴로 이루어지는 역사의 단절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완성이며 창조 사건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루가의 종말론은 '세상의 종말론적 완성' 이라는 입장에서 재림을 이해한다. 따라서 루가 복음의 '오늘' 은종말 사건이 이루어지는 현재적 구원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루가 4, 21 ; 19, 9 ; 23, 43).
바오로 서간 : 바오로의 서간에서 예수의 재림은 심판관으로 오는 사람의 아들의 재림이 아니라 구원하는 아드님으로서의 재림이다. "닥쳐올 진노로부터 건져 주시는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1데살 1, 10) 것이며, 이를 통해 의인들은 영광 중에 "그분과 더불어”(골로 3, 4),"그리스도 안에" (2고린 5, 17) 있게 되는 것이다.바오로에게 있어서 예수의 부활은 이미 '다가오는 세상'(★) 안으로 들어간 하나의 종말 사건이기에, 부활한 예수가 이 세상에 다시 오는 재림 역시 종말론적 표상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활 이후 하느님 통치의 성취에 대한 기대는 그리스도의 오심, 즉 재림에 대한 희망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바오로에게 종말론적 사건들은 현실과 분리된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 속에 전개되기 시작한 사건들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믿는 이들은 이미 현재의 악한 세대로부터 구원을 받았고(갈라 1, 4 ; 골로 1, 13) 이미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 있다(골로 1, 13). 그리고 이미 새 생명을 경험했지만(2고린 2, 16), 또한 영원한 생명의 상속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갈라 6, 8).바오로 서간에서 재림은 공관 복음의 개념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선상에서, 매우 발전된 개념으로 등장한다. 신약성서에서 가장 먼저 쓰여졌다고 여겨지는 데살로니카1서는 재림에 대한 개념을 자주 언급하는데(1데살 2, 19; 3, 13 ; 4, 13-5, 10 ; 5, 23), 특별히 재림은 그들의 시대에 곧 이루어질 사건으로 표현되고 있다(1데살 4, 15.17 ; 1고린 15, 51 참조). 이 사건은 살아 있는 그들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들까지도 경험하게 될 사건으로묘사되어 있다(1고린 15, 52 마태 24, 30-31 참조).
바오로는 죽음을 마지막에 정복해야 할 적으로 묘사하고 있고(1고린 15, 23-28), 그리스도의 재림 시 부활로서 죽음이 정복된다고 하였다(1고린 15, 50-55). 반면 재림의 임박성이 다소 감소된 것으로 언급되기도 하며(2데살 2장),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인간의 육신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1고린 15장 ; 2고린 5장). 한편 바오로는 재림 때까지 자신이 살기 힘들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나는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σύν Χριστό)있기를 원한다" 고 표현함으로써(필립 1, 23) 그가 지닌 재림에 대한 기본 사상을 여전히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필레몬서, 에페소서에서는 재림에 대한 언급이 명확히 제시되어 있지 않다.
요한계 문헌 : 재림을 표현하는 용어인 "파루시아"가 요한계 문헌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 생애 말기에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와서 여러분을 내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여러분도 있게 하겠습니다"라고 한 언급을 통해, 요한 복음사가 역시 주님의 재림(요한 14, 3 : 1요한 2, 18)과 부활 · 심판(요한 5,28-29 ; 6, 39-40)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요한의 종말론적 희망은 이미 부활했고(요한 11, 25-26 ; 1요한 3, 14) 심판도 받은(요한 3, 19 ; 5, 24) 신자들에게 부여된 영원한 생명(요한 3, 15 ; 6, 54 ; 1요한 5, 11-13)에 바탕을 둔다. 그래서 불트만(R. Bultmann, 1884~1976)은 요한 복음의 특징으로 현재적 종말론' 을 들고 있다. 즉 주님이 오시는 그날은 매일의 삶 속에 있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개인의 신앙적 결단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불트만의 이러한 해석은 현재적인 측면만을 너무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를 남겼다. 그러나 요한 복음이 현재적 의미의 종말론을 강조하였다고 해도, 미래에 있을 사건으로서의 종말론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요한 5, 28-29 ; 6, 39 ; 참조 : 6, 44.54). 이러한 종말론의 양면성은 요한 복음 5장 16-30절에 잘 언급되어 있다. 전반부(19-25절)는 실현된 종말론을 강조하고, 후반부(26-30절)는 마지막 날에 있을 종말론에 치중하여 보도하고 있다.
묵시록에도 "파루시아"란 단어는 등장하지 않지만, 책전체는 재림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다(특히 묵시 1장 ;19, 11 이하 ; 22장). 네로 황제 시대(54~68),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81~96)의 박해 상황을 소재로 삼는 이 책은 "보라, 내가 곧 오겠다" (묵시 22, 7)는 재림의 약속과 거듭되는 재림의 호소를 통해 신자들이 당면한 위기 상황과 이제 곧 실현될 재림에 대한 희망을 절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묵시록에 언급된 재림은 보편주의적 전망을 포함하고 있는데, 만민 모두에게 해당되는 공통적 구원을 열망하고 있기 때문이다(묵시 5, 9 ; 7, 9 ; 10, 11 ; 11, 9; 13, 7 ; 14, 6 ; 17, 15). 그러나 이러한 만민 구원을 위한 재림은 묵시록 저자의 시대에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는데, 장차 죽임을 당할 사람들의 수가 차지않았기 때문이다(묵시 6, 10-11). 이러한 이해는 재림 지연의 문제를 그리스도인들이 받아야 할 고난의 문제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 안에서 환시와 함께 묘사된 메시아적 고난은(묵시 14, 14-20 : 19, 11-16) 초대 교회가 가지고 있던 종말론 개념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요한 묵시록의 독특한 종말론적 주제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천년 왕국설' 이다. 이에 따르면 순교자들에게만 유보된 첫 번째 부활이 있고(묵시 20, 4), 이 부활 이후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묵시록은 이러한 첫째 부활과 천년 왕국이라는 개념을 통해 박해받는 공동체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신학적 기능을 수행했다.
그 외의 신약성서 : 야고보서는 재림을 책의 중심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임박한 재림에 대한 확신을 강하게 피력하고 있고(5, 7-9), 재림에 대한 간접적인 관련 구절을 갖고 있다(1, 12 ; 2, 12). 베드로 1서의 경우, "파루시아"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지만, 재림에 대한 기대 속에 쓰여진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재림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그래서 메시아적 환난은 이미 와 있고(4, 7. 13. 17 : 5, 8. 10), 그리스도는 이미 오셨지만 그분은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분이다(1, 20). 신약성서 중 가장 후대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베드로 2서에서 재림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주님의 참을성' (3, 9)으로 이해된다.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 그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질 것이요, 원소들은 불에 타 없어질 것"(3,10)이라는 개념은 스토아 학파의 개념과 유사한 것으로 모든 것의 파멸을 표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재림에 대한 언급이 전무한 책은 아주 소량의 분량으로 되어 있는 요한의 두 번째 · 세 번째편지와 필레몬서뿐이다.
〔교회의 가르침〕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에 대한 질문은 초기 교회 당시만이 아니라 현재도 계속 제기되고 있다. 특히 세기가 바뀔 때마다 사이비 종교들이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다가왔다고 선전함으로써 그 시기에 대한 관심을 부각시키고 있다. 물론 이러한 모습들은 현실 생활에 지친 이들을 유혹하는 혹세 무민의 한 단편이지만, 이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확고하다. 교회는 성서에 언급된 내용에 근거하여 최후 심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고 그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최후 심판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아버지만이 그 시간과 날짜를 알고 계시며, 그분만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결정하신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 전체에 대한 당신의 결정적인 말씀을 선포하실 것이다. 우리는 창조 업적의 궁극적 의미와 구원 경륜 전체를 이해하게 될 것이며, 모든 것을 그 궁극적 목적으로 이끄시는 당신 섭리의 놀라운 길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최후 심판은 사람들이 저지른 모든 불의에 대하여 하느님의 정의가 승리한다는 사실을 드러낼 것이며, 당신의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40항). 재림의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성부의 권능으로 결정된다고 밝히고 있지만, 교회는 "승천 이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은 임박해 있다" 고 가르치고 있다. 그 이유는 재림이란 "이 종말론적 사건과 그에 앞서 닥칠 마지막 시련은 비록 '유보' 되어 있기는 해도 언제라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 (673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재림은 "믿지 않는(로마 11, 20)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의 완고함 때문에, '온 이스라엘 백성' 이 예수님을 인정할 때까지 보류되어 있다" (674항)라고 하였다. 이러한 가르침은 마르코 복음이 지닌 '선교에 대한 신자들의 노력' 을 재확인한 것이다.
"재림은 신자들을 악에서 구해 주실 것"(283항)이라고 가르치는 교회는 교회 내에서 거행되는 전례와 재림을 연결하고 있다. "교회는 매년 대림 시기 전례를 거행하면서 실제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며, 구세주의 첫번째 오심에 대한 오랜 준비에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재림에 대한 열렬한 소망을 새롭게"(524항) 해야 한다고 밝힌다. 즉 전례력의 대림은 예수의 첫 번째 탄생만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오심, 곧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미사 중에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마지막 때' , 곧 성령 강림으로 시작되었고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구원의 때에 바치는 기도"(271항)라고 하면서, 이 기도는 "주님의 재림을 열렬히 갈망하고 있다"(2772항)라고 가르친다.
이상의 내용을 짧게 간추린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구약과 신약성서의 각 부분들은 사람의 아들의 오심에 대하여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 둘째, 그것이 언제일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 세대 안에 올 것이라고 된 말도 있었지만 역사적으로는 실현되지 않았다. 셋째, 재림이 현실화되지 않는다 해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는 재림의 희망과 믿음 안에서 매 순간 결정되는 실제적 사건으로서의 현재이다. 즉 예수의 재림이 지금까지 역사적사건으로는 '아직'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았으나, 현실적 · 종말론적 차원에서 본다면 재림의 의의는 현재, 지금, 여기의 삶 안에 '이미'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 ; 예수 그리스도 ; 종말론 ; 천년 왕국설)
※ 참고문헌 J.T. Carroll, The Return of Jesus in Early Christianity,Peabody, Massachusetts, 2000/ A. Opeke, παρουσια, 《TDNT》 Ⅴ, pp.858~871/ C. Pozo, Teologia dell'aldilà, Cinisello Balsamo, 5th ed.,1990/ W. Radl, παρουσα, 《EWNT》 Ⅲ, pp. 102~105/ J. Ratzinger,Eschatologie. Tod und ewiges Leben, Regensburg, 19771 C.Rowland,《ABD》 Ⅴ, pp. 166~170/ 백운철 , 《그리스도의 내림>, 《가톨릭 신학과 사상》 28,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9, pp. 7~36. 〔金愧倫〕
재림
再臨
〔라〕parusia · 〔영〕parousia, second coming
글자 크기
10권

최후 심판을 위해 재림한 예수 그리스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