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

財物

Ⅰ. 윤리 신학에서의 재물 · Ⅱ. 사회학에서의 재물 · 〔라〕divitiae · 〔영〕ri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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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은 자신만을 위해서 소유해서는 안 된다(<수전노의 죽음> 히에로니무스 보스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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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은 자신만을 위해서 소유해서는 안 된다(<수전노의 죽음> 히에로니무스 보스 작).

일반적으로 만질 수 있는 유형의 재화 또는 가시적인 물건, 곧 음식, 의복, 집, 소모품, 귀중품, 문화재, 자동차, 토지, 공업과 수공예 생산품, 그 밖에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일체의 물건들. 이외에 비물질적 재물도 포함된다. 예를 들면 사랑, 정의, 평화, 자유, 건강이나 문화, 전달 매체, 과학과 기술 등이다. 그리고 인간 관계, 연대, 자아 인식, 생명에 대한 희망, 건강, 기쁨 등을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재물을 소유한 정도에 따라 부(富)의 척도가 정해지기도 한다.
Ⅰ. 윤리 신학에서의 재물
성서의 시작에서는 영적 재물과 물적 재물을 구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으로 악(惡)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는 창조물(모든 재화)과 창조주 사이에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인간에게도 그러한 일치가 존재하였다. 실제로 인간은 창조되었을 때 하느님과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지닌 창조주의 모습이 죄로 인하여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있던 인간은 동시에 창조된 재물의 관리와 완성의 의무를 지닌 재화의 수취인이자 위탁받은 자였다. 그러므로 윤리적 의미에서 재물의 활용과 사업은 하느님의 창조 목적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성서에서의 의미〕 구약성서 : 구약의 율법 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개인들의 현세 재물은 하느님의 축복과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한 상으로 여겨진 반면 가난은 율법을 어긴 자들에 대한 응징, 곧 벌이라고 보았다.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 그리고 다른 예언서들은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실제로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매우 높은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손으로 직접 확인하고 만져보고자 하였다.
그런데 욥의 이야기는 재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 곧 의인들도 시련을 당하기 위하여 재물을 잃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재물은 더 이상 하느님 율법에 대한 충실의 자동적 대가가 아닌 것이 되었다. 시편과 다른 지혜서들(잠언 19, 1-22 ; 28, 6 ; 집회 4, 13 ; 9, 15)은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모두 야훼의 것. 이 땅과 그 위에 사는 것이 모두 야훼의 것" (시편 24, 1 ; 50편)이라는 원리를 밝힘으로써 지상 재물의 보편적 목적을 강조하였다.
집회서(31장)는 재산의 위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이사야 예언자는 "집을 연달아 차지하고 땅을 차례로 사들이는 자들" (5, 8-10)을 경고하고 있으며, 잠언은 오늘날 중산층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의 칭찬을 노래하였다.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 ···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잠언 30, 8-9).
전체적으로 볼 때 구약성서는 우주의 지배자요 주님인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재물을 공유하도록 명하셨다는 점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재화에 대한 절대적 지배자가 아니라 관리자로서 자기 재화에 대한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은 구약의 율법 안에서 모든 재물들을 사랑과 자비의 봉사에 사용하도록 명하셨다는 점이다(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De adorat. in spiritu et veritate VIIIPG 68,p. 564). .
신약성서 : 신약성서는 지상의 재화를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본다. 지상의 가치는 하느님과 이웃 사랑, 하느님 나라의 가치 앞에서 자리를 양보한다. 그러나 지상의 가치들을 배타적으로 부인하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의 대헌장인 "행복 선언" (마태 5, 3-12)은 마음의 가난을 찬양하지만, 그것이 물질적 빈곤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재물은 부정적 도덕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루가 18, 25). 그렇다고 해서 재물 자체가 나쁘고 악하다는 것은 아니다. 신약성서에서 재물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데 극복할 수 없는 위험과 장애를 조성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웃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재물의 배타적 · 우상적 · 절대적 소유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또한 신약성서에서 재물은 많은 재산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소유한 재물과 소유하기를 열망하는 재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재물은 종종 하느님의 말씀을 억누르거나(마태 13, 22), 하느님께 대한 관심을 버리고 하느님께 신뢰하는 의지를 포기하게 한다(루가 12, 15-21. 22-24).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가는 것을 방해하고(마태 19, 23-24),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게 한다(루가 16, 19-31 ; 루가 11, 38-42 참조).
예수는 재물(늘 나쁜 것)과 가난(늘 좋은 것)을 극단적으로 대치시켜 재물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오히려 재물과 하느님 사이의 복음적 대안을 촉구하며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라고 가르쳤다.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면 재물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선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또한 재물은 인간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예수는 공중의 새들과 들꽃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자신도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한다(마태 6, 25-34).
그리고 예수는 사랑을 지상 최대의 계명으로 제정함으로써 인간의 궁극적 운명이 사랑에 의하여 결정되게 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은 사랑에 종속되어 있고 사랑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의 연대에서 드러나는 행동 규범인 사랑이 복음의 토대가 된다 (요한 그리소스토모, De perfecta caritate 1-2 : PG 50, pp. 279~281). 이렇게 볼 때 사랑은 인간 삶의 기준이자 척도이며 아울러 재물의 목적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웃들의 필요를 위하여 우리가 가진 재화를 어떻게 썼는가에 따라서도 심판받게 될 것이다.
〔교부들의 가르침〕 교부들은 인간이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점에 대해 완전히 일치된 주장을 하며,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즉 바실리오(329~379)는 "인간은 공동체를 통해서만 삶을 지속하고 개선해 갈 수 있다" (Regulae fusius tractatae Ⅲ, 1 : PG 31,p.916f)라고 하였으며, 락탄시오(250?~321?)는 "인간의 고유한 본성에 속하는 이 보완성은 창조주께서 태초부터 사람 안에 심어준 법이다" 라고 하였다(Divinarum Instit. VI. De vero cultu 10-11 : PL 6, pp. 667~671). 또한 바실리오는 인간을 다른 유기체와 분리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는 몸의 유기체에 비유하였으며, 니사의 그레고리오(330~395)는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인간은 자신의 자유 의지를 통하여 모든 사물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함으로써 하느님의 모습을 구현하는 주체가 된다" (In verba ; Faciamus hominem, Or I ; PG 44,p. 273)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은 지상의 모든 재화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며 (아우구스티노, De Civ. Dei XIX. 15 ; PL 41,p. 643 ; 《CCL》 48, p.682) 그 지배권은 그것을 보존할 의무와 책임도 포함한다. 또한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회적 존재이기에 주어진 재물을 독점해서는 안 되며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여야 한다(아우구스티노, De bono coniugali Dei XII, 21 참조) .
바실리오를 비롯하여 락탄시오, 아우구스티노(354~430), 교황 레오 1세(440~461, 체사리오(?542)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부들은 모든 재물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정당한 목적에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재화의 보편적 목적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바실리오는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사람은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므로 출생의 순간에 모든 사람은 동등하다. 사람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난다. 그러므로 재물은 인간 본연의 구성 요소가 아니다. 재물은 단지 이용하고 봉사하기 위하여 주어진 우연적인 것에 불과하다" (Hom.in Lc. Destruam horrea mea, 2 ; PG 31,p.264f).
교부들은 재물의 범위에 있어서 물질적 재물뿐 아니라 인간의 목적을 향한 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회적 성질의 모든 것 또한 재물의 범위에 포함시켰다. 또한 교부들은 재물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지만 실제로 일상 생활에 필요한 것은 소규모의 사유 재산으로도 충분하다고 강조하였다(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 Paed. Ⅱ, 3 ; PG 8,p. 433 ; 《SCh》 70,pp.82~84). 즉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재물은 있어야 하지만 극히 제한된 정도에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교부들은 재물 그 자체는 아무런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로지 인간을 위한 봉사에 사용되었을 때 그 본연의 가치를 지닌다고 하였다. 교부들은 이에 대한 행동의 최상 규범이 바로 사랑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랑이 재물 사용의 길잡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아우구스티노, De gen. ad littt. LiberImperf.Ⅰ, 3 : PL 34,p. 221).
〔재물에 대한 올바른 소유〕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재물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재물에 대한 소유권은 정당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명하신 재물의 고유한 목적을 손상시킴으로써 이를 남용할 권리는 없다. 즉 재물의 공동 분배 내지는 재물의 공동 소유를 무시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독점권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재물에 대한 인간의 소유권은 곧 재물의 공유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를 역행할 때에는 스스로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가 되고 결국 재물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노예 상태로 변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물에 대한 주체로서 인간이 수행해야 하는 올바른 기능은 관리의 기능, 보존의 기능이다. 왜냐하면 재물에 대한 진정한 소유는 어떠한 형태로든 절대적 지배권을 의미하지 않으며, 인간의 재물에 대한 지배는 창조주인 하느님의 보편적 지배 앞에서 그리고 만물의 주인인 하느님이 우리에게 명한 계명 앞에서 제한된 것으로 머물기 때문이다.
복음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소유한 재물을 창조된 목적에 따라 올바르고 정당하게 사용했는지에 대해 셈을 바치고 이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마태 25, 31-46). 또한 사도 바오로는 우리의 노동으로 획득한 재물은 두 가지 목적 곧 자기 생계 유지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에페 4, 28)고 하였다. 따라서 비록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얻어진 재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해서는 안 되며, 이웃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이웃 사랑을 통해 정의와 공동선을 실천하여야 한다.
〔재물에 대한 새로운 개념〕 현대인에게 있어서 재물이란 만질 수 있는 유형의 재화 또는 가시적인 물건, 곧 음식, 의복, 집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소모품, 귀중품, 문화재, 자동차, 토지, 공업과 수공예 생산품, 그 밖에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일체의 물건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8~ )의 회칙 <사회적 관심> (Sollicitudo Rei Socialis, 1987. 12. 30)에 따르면 현세의 재물은 앞서 언급한 물질적 재물 외에도 소위 비물질적 재물도 포함한다고 가르치고 있다(33항). 예를 들면 사랑, 정의, 평화, 자유, 건강이나 문화 · 전달 매체 · 과학과 기술 등이다. 이 외에도 인간 관계, 연대, 자아 인식, 생명에 대한 희망, 건강, 기쁨 등을 들 수 있다.
전체적으로 재물을 분류해서 종합 ·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상의 재물과 영적(천국) 재물, 일시적 재물과 영원한 재물, 자연적 재물과 인위적 재물, 물질적 재물과 비물질적 재물, 이 외에도 개인, 가족, 집단의 재물과 특정 사회 계층에만 속하는 재물, 사회에 예속된 재물, 공동체와 국가와 전 인류에 속하는 재물, 모든 사람에게 속하는 동시에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재물(예 : 자연에 속한 공기, 물, 태양, 달, 바람 등)도 있다. 이 밖에도 재물의 용도에 따라 필수품과 사치품, 이용 가능하거나 이용 불가능한 것, 자기 소유와 타인의 소유 등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다.
새로운 재화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백 주년> (Centesimus Annus, 1991. 5. 1)에서 재산과 재화의 보편적 목적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 시대에는 땅보다 덜 중요하지 않은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 다른 종류의 소유 재산이 있다. 이 소유 재산은 지식, 기술적 숙련, 모든 과학의 소유이다. 자연적 재원의 소유보다는 이러한 재산에 산업화된 나라들의 부가 그 기반을 두고 있다" (32항). 다시 말하면 재산은 지식의 증가, 과학과 기술의 개발, 철학의 발달 그리고 때로는 굳어진 사고의 틀을 깨고 계속해서 새로운 재화를 일으키고 산출하려는 욕구를 지닌 새로운 사고와 삶의 방식들이다.
삶의 새로운 방식들의 결과인 현대의 물질적 재화의 대표적이고 중요한 예로 '쓰레기 재화' 를 들 수 있다. 한때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생태계의 측면에서 볼 때 오늘날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의 사업거리로 부각되고 있다. 사실 일부는 이미 현실화되었고, 앞으로도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간에게 항상 새로운 재화를 감지하게 하고 발굴하게 한다. 예를 들면 라디오와 텔레비전, 전자 기술(계산기, 컴퓨터, 전자 두뇌) 등이다. 또한 우주정복 시대의 문턱에 와있는 인간은 우주 재화라고 부를 수 있는 재화를 조율하고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예견하기 시작하였다.
비물질적 재화 :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다양한 방법으로 타인과 이웃에 봉사하게 하는 사랑, 거기에서부터 뿜어 나오는 아름다움, 기쁨, 건강, 생명, 진리, 자유, 정의, 평화에 관하여 생각해보자(《가톨릭 교회 교리서》 1642항, 2288항, 2304항, 2333항 이하) . 이러한 재화는 과학이나 기술을 뛰어넘어 우리 삶에 참다운 의미를 줄 수 있는 요소들이다. 이러한 재화들은 형체도 없고 만져서도 알 수 없기에 우리의 잣대로는 잴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비물질적 재화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큰 중요성을 지닌다. 우리는 이러한 비물질적 재화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때로는 이러한 재화들을 다른 재화들보다 더 희망하거나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따라서 이러한 비물질적 재화들이야말로 인간 삶의 질에 더욱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러한 비물질적 재화는 인간에 의하여 생산된 재화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인생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것으로 물질적 재화를 주고도 살 수 없는 참으로 값진 것들이다. 이러한 비물질적 재화가 부족할 때 인간의 삶은 매우 허전하고 빈곤할 수밖에 없으며, 삶 자체가 허무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반대로 인간의 삶이 이러한 비물질적 재화들로 가득 채워질 때 그 삶은 풍요롭고 기쁨이 넘치게 된다(<사회적 관심> 28항)
오늘날 우리 각자의 개인 생활과 사회 · 정치 · 경제 생활의 한 부분으로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정보' 또한 새로운 비물질 재화에 포함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각자의 개인 생활 차원에서도 자기 고유의 인격 실현에 필요 불가결한 최대한의 가능한 정보가 요청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보는 하나의 진정하고 고유한 산업으로서 경제적 · 정치적 세력의 목적과 수단과 원인이 되었고, 이를 통하여 자본이 움직인다.
〔정의의 관점에서 본 재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빈곤과 궁핍 중에 살고 있을 때 사치와 향락을 누리며 살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교황 비오 12세, 1947년 9월 7일의 연설, Utz-Groner 315항).
가톨릭 교회의 많은 교부들을 비롯해서 윤리 신학자들은 자선과 증여는 총체적으로 공동선을 지향하는 선행으로 정의의 의무라고 주장해 왔다. 왜냐하면 자연법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을 돌보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라는 의무를 지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웃에게 하는 희사는 불쾌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모든 재물에 대한 공유화를 보여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의 재물을 도둑질한다거나 갈취하는 행위는 타인을 파괴하는 행위로서 그러한 방법으로 재물을 취득하고 남용한다면 이는 하느님의 정의에 역행하는 것이다.
정의를 경제적 재화의 향유에만 제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정의는 모든 필요한 곳에 재화를 활용하고, 우선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보건과 교육을 위하여 투신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물은 모든 유형의 빈곤에서 인간을 보살피기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정의는 평화를 가져온다"( 32, 17). 정의와 평화, 이 두 가지는 모두 필요 불가결한 것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아울러 정의가 없는 곳에는 사랑도 없다. 정의는 인간 사회를 다스리는 의무들을 통하여 명백히 드러난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했다. "정의가 결핍이 아닌 미덕이 되기 위하여 정의의 일에서 그리스도인을 인도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 없는 사업은 비록 그것이 유익하고 선하게 보일지라도 사실상 유해한 것이다. 사랑으로 인도된 정의의 사업은 비록 그것이 때로는 변변치 못하게 보일지라도, 결국은 인간에게 유익한 일을 한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행하라"(nEp. Joad Parthos VII ; PL 35, p. 2033). 그러므로 정의는 우리가 수동적으로 받는 선물이 아니다. 정의는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며,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적극적인 덕목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창조하신 재화에 대한 소유를 허락함과 동시에 당신의 창조 사업을 계속하고 완성하라는 의무도 주셨다. 이러한 맥락에서 재화는-그것이 어떤 재화인가에 관계없이ㅡ다른 기능을 위한 수단 내지 도구로 인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재화는 결코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그 자체 역시 목적이 아니다. 따라서 재화는 궁극 목적을 위한 하나의 도구, 곧 다른 재화의 추구, 생산, 취득 그리고 삶의 조건을 마련하는 도구일 뿐이다. 또한 재화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의 도구일 뿐이다(<사회적 관심> 29항).
복음은 인간에 대한 창조 계획을 완성하기 위하여 재화를 공유하라고 권장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구원 또한 재화의 공유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서 인생의 목적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계시를 통하여 인간은 하느님의 법에 예속된 존재라는 것과 자기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심판 앞에서 자기 처신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
다. 그러므로 재화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은 절대적 통치의 의미가 아니며, 오히려 재화를 관리하고 재화를 통해서 봉사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 참고문헌  Johannes Paulus Ⅱ, Sollicitudo Rei Socialis, Vatican, 1987(성염 역, <사회적 관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8)/ Johannes Paulus II, Centesimus Anmus, Vatican, 1991(김춘호 역, <백 주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1)/ Libreria Editrice Vatican, Catechisme L'Eglise Catholique, 1992(가톨릭대학교 교리사목연구소 역,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 〔李昌永〕

Ⅱ. 사회학에서의 재물
〔교회의 입장〕 인간과 재물의 관계는 근대 사회에 들어오면서 새롭게 다루어진 주제이다. 왜냐하면 산업 혁명으로 인한 전통 사회의 붕괴는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기존의 인간과 재물의 관계나 가난과 풍요에 대한 조건들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재물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이중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 이유는 성서의 내용 때문이다. 낙타와 바늘 구멍의 비유로 설명되는 재물에 대한 부정적인 가르침 (마태 19, 24)과 가장 보잘것없는 이웃에게 베푼 것이 바로 주님께 베푼 것이라는 긍정적인 가르침(마태 25, 40)을 읽을 때마다 재물에 대한 확실한 가르침을 교회가 갖고 있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물의 근거에 대한 가르침은 십계명에 분명하게 선포되어 있다. 즉 다르게 해석할 수 없는 일관된 가르침이 제7 계명과 제10 계명에 명시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성서와 교부 : 구약의 여러 곳에서 가족 부양을 위해 열심히 토지를 경작할 것을 권고하는 구절을 볼 수 있으며, 신약에서도 포도원 일꾼에 대한 비유나 이윤을 늘리는 달란트의 비유 등을 쉽게 읽을 수 있다. 이러한 가르침에서 잊어서 안 되는 원칙은 가난한 이웃을 돕고 그들을 위해 재물을 나누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같은 원칙을 따르기 위해서는 재물의 개인적 처분권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처럼 성서는 신약 · 구약을 막론하고 재물의 원천과 증식, 그리고 소유를 전제로 한다. 즉 제7 계명은 '도둑질하지 못한다' 이며 이 계명은 달리 해석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금지령이다. 그리고 제10 계명은 남의 재물을 부당하게 탐하는 것을 분명하게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재산은 도덕적으로 보호되어야 하며 이를 위반하는 행위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구약에서 50년마다 맞는 희년에 정당하게 매입 · 소유한 토지까지도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라는 가르침 (레위 25, 8-34)은 토지가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이지 재물의 사적 소유를 부인하거나 그러한 제도를 폐지하려는 가르침은 아니다. 그러나 사유 재산권이 절대적이며 무제한적이라는 주장과 교회의 가르침을 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개인이 자기의 재산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사용하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는 절대적 사유 재산권에 대해 성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창세기의 창조 설화에 의하면 인간은 하느님 모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세상을 다스리게 되어 있지만, 어디까지나 세상은 하느님의 것이고 인간은 '가꾸고 돌봄' 만을 위임받았을 뿐이다.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 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위 25, 23)라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하느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다"(《신학 대전》 Ⅰ-Ⅱ, 66, 1, 1)라고 토마스 아퀴나스(1224/1225~1274)는 요약하면서 피조물 전체가 하느님께 예속되어 있음을 설명하였다. 즉 인간은 본래의 소유권자가 아니며 단지 자기에게 맡겨진 재물을 한시적으로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 같은 교회의 가르침이 제대로 알려지고 실천되었다면 그릇된 주장이나 끔찍한 결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해와 인식 부족으로 인해 사유 재산권이 신성 불가침의 권리라는 주장과 아울러 자연 환경 파괴가 서슴없이 저질러지고 있다.
내용과 근거 : 오늘날 교회는 근대 시민법에 의해 무조건적 권리로 수용되고 있는 사유 재산권의 잘못을 바로잡고 재물에 대한 소유권이 기본적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라는 전통적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다. 즉 재물의 소유는 만물의 주인인 하느님의 권한일 뿐 인간은 인격의 발전, 공동체의 필요, 하느님의 창조 계획에 참여하기 위해 현세적 삶에서 재물의 관리와 사용을 위탁받았을 뿐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이러한 가르침은 거듭 강조되고 있다.
소유권이란 사물에 대한 배타적 통제권으로 소유주만이 그 물건을 사용하거나 처분할 자격을 가진다. 그러나 공동선 등 상위의 규범이 요구한다면 소유권의 행사는 제한될 수 있다. 소유권의 대상은 물질적 재화만이 아니라 지적 창조물도 포함된다. 노예가 소유권의 대상이 되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그 같은 잘못은 곧 시정되었다. 왜냐하면 소유권의 대상은 사물일 뿐이며, 인격의 주체인 인간이 사물이 아닌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소유와 재산에 대한 성서의 평가는 구약과 신약에 따라 차이가 있다. 구약은 재물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신약은 현세적 재물이 갖는 모순과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즉 재물의 오 · 남용을 경계하고 있다. 상반되는 것 같은 이러한 관점은 인격의 완성을 위해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할 상호 보완적 과정일 뿐이다. 재물이 위험스럽고 복음적 삶이 재물을 거부 · 희생하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진리는 '숨쉰다' 는 행동이 숨을 들이마시는 행동만으로, 또는 숨을 내쉬는 행동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호 교차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이치와 비슷하다. 즉 재물 자체가 악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쉽게 역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재물은 오직 인간이 하느님의 선물로 인정하고 관리할 때 그 참 가치가 드러난다.
모든 현세적 재물의 가치는 그 물건 안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물건을 사용할 때 비로소 나타난다. 비윤리적 목적에 사용할 때 그 물건의 가치는 부정적 가치가 되며, 윤리적 목적에 사용할 때 긍정적 가치가 드러난다. 즉 재물의 가치는 중립적일 뿐이며 사용하는 인간의 윤리성 여부가 선악을 결정한다.
소유와 사용 : 재물에 대한 교회의 이해와 입장은 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교부들도 여기에 근거를 두고 가르쳤다. 이를 요약하면 첫째, 재물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닫게 만들고, 욕심과 이기심을 조장하며, 하느님과의 화해를 어렵게 하기에 성서는 항상 재물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둘째, 재물은 흔히 다른 사람을 억압하거나 착취하는 것과 연관되어진다. 구약은 가난한 사람에게 이자를 받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투자하기 위해 돈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당장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소비하기 때문이다. 즉 고대와 중세의 이자는 곧 고리 대금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그리스도교의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은 자기 재물을 이웃과 나눔을 뜻한다. 특히 가난한 이웃을 도와야 하는 의무를 뜻한다. 교부들도 남의 것을 부당하게 빼앗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자선이라는 사랑의 의무에 대한 윤리 신학적 가르침이 여기에서 발전한다.
넷째, 중세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 전통에 토대를 두면서 교회의 영향을 받아들여 소유권 이론을 발전시켰다. 즉 소유권은 개인에게, 사용권은 공동선이 증진되는 방향으로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는 재물을 소비하거나 사용하는 권리와 구입하거나 처분하는 권리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사회적 의무를 구체화시킨 나눔의 원리가 바탕이 되는 권리가 사용권이다. 반면 사용권이 효율적이려면 재물의 효과적 관리 운영이 필수적인데, 이것이 바탕이 된 권리가 처분권이다. 처분권이 거부될 때 일할 의욕은 상실되고, 게으름과 불화와 무질서는 재산 관리와 증식을 불가능하게 한다. 즉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현세적 재물이 인류를 위해 있다는 창세기의 가르침도 실효성을 잃는 것이다. 다섯째,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데는 소유의 포기와 자발적 가난이 특별히 강조된다. 즉 여러 수도 단체들의 "수도 규칙서"는 가난의 자발성을 강조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사회주의적 사회 개혁은 처음부터 논의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지상 재물의 사용에 대한 가르침이 필요하게 된 것은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 때문일 뿐 사유 재산권을 과소평가하거나 사유 재산권의 자연 법적 근거를 반대하는 논거로 이용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재물에 대한 올바른 이해〕 목적 : 교회는 재물의 사용권 남용 · 이기주의 · 탐욕 · 고리 대금의 잘못을 경고하고 있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재물에 대한 인간 권리나 사유 재산권의 질서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재물의 소유자가 지켜야 할 다음과 같은 규범을 정하는 원칙에 대한 것이다. 첫째, 세상 재물은 인류 전체를 위해서 있다. 하느님은 특정인을 위해서 그만을 위한 소유물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창조하셨다고 교회는 확신한다(창세 1, 28). 둘째,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여러 차례 라디오 담화를 통해 사회주의의 사유 재산에 대한 비판과 오류를 전통적인 교회 원리에 입각하여 지적하였다(노동 헌장 반포 50주년 기념 담화문, 1941.6.1). 셋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상의 내용이 담긴 원칙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정리 · 발표하였다(사목 69항).
이념적 연상 : 사람들은 흔히 이기주의나 물질주의에 대한 복음의 단죄, 이웃 사랑과 정의에 대한 복음의 요구를 사회주의적 이념과 연결지으려 한다. 심지어 '초기 교회 공동체의 공산주의' 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초대 교회 공동체가 모든 것을 공유하였던 것처럼 주장한다. 그리고 이때에 단골로 인용되는 구절이 유명한 사도 행전의 구절이다(2, 44-45 ; 4, 32-37). 그러나 이 구절이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아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있던 초기 교회 공동체가 토지를 공동 구입하고 집단 경작하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이 구절들은 초기 공동체의 신자들이 예수가 요구한대로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었음을 뜻할 뿐이다. 오히려 사도 행전에는 교우들이 '개인 집' 에서 모였다는 구절이 나오는데(2, 46 : 12, 12), 그 가옥의 소유자가 집을 팔아 공동체에 넘기지 않았고 개인의 소유로 갖고 있었음이 입증된다. 따라서 성서의 한 · 두 구절을 단편적으로 인용하여 특정한 사상이나 이념 체계의 근거로 삼으려는 시도는 잘못이며, 사유 재산 철폐만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정치적 왜곡은 논리적 비약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가난을 사는 것은 복음과 결부된 생활 양식이며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이 정의를 기본 전제로 하듯이 사유 재산 제도 자체를 부인하는 가르침은 아니다. 분명 초기 교회에서는 가난한 이웃을 돕는 운동이 널리 전개되었고, 조직적 구호 활동도 이루어졌다. 이는 자기 재물을 희사하는 사람이 있었음을 입증하며 이웃 사랑이 활발하게 실천되었고 사유 재산권이 공인되었으며 이를 문제시하지 않았다는 확증일 뿐이다. 야고보 사도가 재물만 모으는 이기적 부자들에게 경고한 말들(야고 5, 3-6) 안에서도 사유 재산을 보는 교회의 일관된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가난과 풍요 :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자유롭게 될 수 있는 조건으로 우리에게 가난의 결단을 요구할 뿐이다(마태 6, 24). 따라서 계급 투쟁의 실행 교본으로 복음을 이용하려는 노력은 성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소치이며 억지일 뿐이다. 그리스도는 부유한 사람들과도 거침없이 사귀었고 하느님 나라에 초대하였다. 세리였던 마태오도 사도로 선택하였다. 예수에게 재물보다 우선적인 것은 재물을 정직하고 자비롭게 나누는 것이다. 구약에는 부귀가 하느님의 축복이며 가난은 게으름이나 향락의 결과로 하느님을 무시한 행동에 대한 벌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사회 경제적 질서가 자리잡고, 부유한 자들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면서 이기주의자, 부당한 권력자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부자와 하느님을 모르는 자" · "가난한 자와 신심 깊은 자"를 동일시하는 경향까지 생겨났다.
구약의 율법을 완성시키고 있는 그리스도의 설교와 모범은 신약을 통해 기준이 되었다. 그 내용은 재물을 상대화하는 가르침이며, 재물의 상대적 가치만을 인정하는 것이다(마태 6, 33 : 루가 12, 31). 즉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인간이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장애물인지에 대한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행복 선언"(루가 6, 20-26)에서 잘 드러나고 있듯이 가난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의 구원을 용이하게 만든다. 그리스도가 요구한 가난의 상태는 인간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모두 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유의 포기로 얻게 되는 자유로움을 하느님 나라 건설에 선용하라는 가르침일 뿐이다. 한편 그리스도는 제7 계명으로 사유 재산 제도를 보호하면서도 부자가 현세적 재물에 마음을 빼앗길 위험이 확실히 있으므로 부귀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명백하게 경고하고 있다(마태 19, 24).
공동선 원칙 : 교황 레오 13세(1878~1903) 이후의 교황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용권과 처분권' 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지상 재화의 공동 이익을 위한 원칙을 '공동 소유' 나 '사회화' 와는 구별하고 있다. 동시에 교회의 이러한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여 사유 재산권 제도를 일종의 필요악으로 간주하고 절대적 사유 재산 제도를 주장하는 것 역시 비판하고 있다(〈새로운 사태> 6항) .
교회는 지상 재화가 공동을 위해 존재한다는 원칙과 기초 아래 일관되게 개인의 소유권은 이 기본 원칙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노동하는 인간> 14항). 즉 재물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개인주의나 이기주의는 배격되어야 하며 항상 이웃을 고려하여야 한다. 그 구체적 실천 내용은 상황과 가능성에 따라 달라지며, 사회적 여건에 따라 다양하기 마련이다. 극한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공동 소유라고 할 수 있다. 즉 극단적 경우에는 필요한 것을 소유주의 동의나 허락 없이도 임의로 취할 수 있다는 윤리 신학적 원리가 있다.
〔권리와 제도〕 사회적 역할 : 재물은 노동의 대가이며, 따라서 노동의 동기와 자극이 된다. 노동과 재산의 상관관계를 강조하는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은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노동하는 인간> 14항).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노동 의욕을 북돋기 위해 업적급 임금 제도를 도입하고 있음을 볼 때, 노동과 소유의 상관성은 기본 원리임을 확인할 수 있다. 개발도상 국가의 가난을 해결하는 방법은 단지 원조와 분배 구조의 개선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보다 발전된 생산 능력을 촉진하여 생산 구조를 확대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0
재물의 사유 제도는 그리스도교적 인간관과 그 사회적 역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공동 소유는 장기적으로 볼 때 게으름과 노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즉 공동 소유 제도 아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떠맡기고, 오직 노동의 결과에만 참여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새로운 사태> 11항).
인간은 공동 재산을 다룰 때보다 사유 재산을 다룰 때, 보다 신중하고 관리 유지에 더욱 노력을 기울인다. 동시에 사유 재산 제도는 권한과 책임의 문제를 분명히 하므로 불확실하거나 무모한 계획에 자기 재산을 맡기지는 않는다. 반면 불특정 다수가 모든 것을 결정하면서도 개인으로는 아무도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집단 경제 체제하에서는 분쟁이나 불화가 쉽게 일어난다. 사유 재산에 대한 권리가 일차적으로 개인에게 있고 소유권에는 사회적 책임이 뒤따른다는 원리는 서로 모순되는 가르침은 아니다. 나누거나 도와 준다고 하는 것은 사유 재산을 전제로 하기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다면 이웃과 무엇을 나누고 도와 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소유권의 이중적 의미에 대해서 교회는 일관되게 가르치고 있다(〈사십 주년> 19항).
사회 정의 원칙 : 재산의 사회적 책임은 막중하기 때문에 절대적 권리로 아무런 제한이나 구속이 없는 것이 아니다(<민족들의 발전> 23항, 26항). 나아가 재산이 소비재인가 내구재인가에 따라서도 나눔의 구체적 형태는 달라진다(〈어머니와 교사> 120항, 154항).
재물의 사적 소유와 공적 사용이 제대로 실천되고 있는지의 기준이 바로 정의의 원칙이다. 따라서 정의로운 분배는 사유 재산의 사회적 의무 중 특별히 강조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정당한 노력과 그 결과인 혜택이 노력하는 당사자에게 돌아가는지, 특정 계층에게 집중되고 있는지의 기준은 정의로운 분배이기 때문이다. 재물의 공정한 분배와 소유권의 확산은 계층 간의 갈등을 해소하며 나아가서 무산 계급의 형성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다. 이 같은 노동자의 재산 취득의 길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다(〈새로운 사태> 9항 : <사십 주년> 29항).
공권력의 책임 : 국가는 첫째, 법질서를 유지하여 국민의 재산권을 보호하고 직 · 간접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어야 한다. 둘째, 소유자가 모든 재산권의 사회적 책임을 져버리지 않고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재산 소유자의 책임을 환기시켜야 한다. 교회는 재산권에 대한 이러한 국가의 이중적 권한에 대해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사십 주년> 21항).
교회는 기득권자의 권리를 대변하며 절대적 사유 재산권을 옹호한다는 비판을 자주 듣고 있는데 이러한 비난은 교회의 가르침, 즉 지상의 재물이 공동을 위해 존재하고 따라서 모든 재산권과 그 질서는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는 가르침의 핵심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소리이다. 교회는 항상 소유권과 사용권을 구별하여 가르치고 있으며 공동선에 배치되는 재물의 부당한 사용에 대해서는 언제나 제한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사십 주년> 46항 ; <어머니와 교사> 118항 ; <민족들의 발전> 24항 ; <노동하는 인간> 14항). (⇦ 부 ; → 가난 ; 가톨릭 사회 교리 ; 돈 ; 빈곤 ; 재산)
※ 참고문헌  N. Monzel, Die Katholische Kirche in der Sozialgeschichte, Miinchen, 1980/ R. Schnackenburg, Christliche Existenz. nach dem Neuen Testament, München, 1967/ Peter Ulrich, Transformation der ökonomischen Vernunft, Stuttgart, 1987. 〔金魚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