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세례파

再洗禮派

〔라〕Anabaptistae · 〔영〕Anabap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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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세례파에서 세례를 베푸는 모습.

재세례파에서 세례를 베푸는 모습.

루터 (M. Luther, 1483~1546)나 칼뱅(J. Calvin, 1509~1564) 특히 츠빙글리(H. Zwingli, 1484~1531)의 개혁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와 사회를 보다 급진적이고 내적으로 쇄신하고자 시작한 운동.
〔명 칭〕 재세례파의 경우 기원도 다양하고 그들이 구성하는 단체도 다양하다. 따라서 그들의 운동에 대한 정의도 아주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급진적 개혁파' 나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좌경파' , 또 다른 이들은 '비전통주의파' 또는 '이교파'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렇게 정의가 다양한 것은 그들을 특징지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재세례' 이기 때문에 '재세례과' 란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 명칭의 어원은 그리스어이며 재세례(再洗禮, Rebaptizer)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재세례파 자신들은 이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초기에 재세례파에 속했던 이들은 세례를 두 번 받았는데, 당시의 법률에 따르면 재세례는 사형에 해당되는 범죄였다. 하지만 그들은 세례를 두 번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받은 유아 세례를 신성 모독적인 것으로 보고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와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성인 세례를 받는 것만이 유일하고 타당한 세례라고 주장하였다.
〔종류 및 주장〕 재세례파 운동의 발생은 루터의 '신앙에 의한 구원론' 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취리히(Zürich)에서 시작된 '츠빙글리의 개혁' 에서 시작되어 독일 여러 지방의 개혁 열성파 사람들과 연계를 맺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츠빙글리의 견해를 따르는 이들은 선과 악에 대한 자각이 생기기 전인 유아들은 죄로 인한 형벌을 받지 않으며, 그런 자각이 생긴 이후에 자유 의지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또 구원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국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대부분의 재세례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로운 전쟁을 행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였으며, 시민 선서를 하는 것도 거부했다.
스위스 형제단 : 여러 재세례파 중 최초의 단체는 스위스의 취리히 지역과 독일 남부 지방에서 생겨난 '스위스 형제단' (Swiss Brethren)이다. 1525년경 츠빙글리와 시의회는 취리히 시와 주변 지방에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이에 착수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독립 교회의 생성이 아니라 교회와 사회의 근본적인 구조변경이었다. 하지만 개혁의 착수 과정에서 각 개별 교회가 사목자의 선정부터 십일조나 파스카 목요일 만찬 거행 문제 등을 자발적으로 결정하면서 츠빙글리에 반기를들었다. 또한 츠빙글리가 행정관들에게 아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교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신속하게 진행하는 데 주저하는 태도를 보인다며 반발하였다. 그로 인해 그레벨(Conrad Grebel)과 만츠(Felix Mantz) 등의 지휘하에 세속 권력과 전통 교회로부터 분리된, 비폭력을 주장하며 재세례를 거행하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최초의 성인 세례가 1525년 초에 취리히 외곽의 촐리촌에서 거행되었다. 이후 대중 운동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들을 '스위스 형제단' 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교리는 <슐라이트하임 신조>(Schleitheim Confession, 1527)로 제시되었다. 제세례파들의 비밀 집단 형태나 비폭력성으로 보아 대중과의 마찰이 없어야 하지만 그들은 많은 탄압을 받았다. 초기에 열성파들이 소요를 일으켰고, 유아 세례를 부정하고 성인 세례를 거행하자 스위스 신학자들의 비난을 받았으며 시의회는 복종을 강요하였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자 그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추방당하였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박해는 재세례파 운동을 스위스 전역과 독일 남부 지방 등으로 분산시키는 결과만 초래하였다. 만츠가 1527년 1월에 처형당하였고, 그 외 다른 사람들도 처형됨으로써 1530년경 취리히에서 재세례파는 거의 사라지고 다른 지방에서 발전하였다.
후터 형제단 : 이 재세례파는 후터(Jakob Hutter)를 지도자로 하였기에 '후터파' (Hutterite) 또는 '후터 형제단'(Hutterian Brethren)이라 불린다. 독일 남동 지방에서 박해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하자 후터는 모라비아(Moravia) 지방으로 피신을 한 뒤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농업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1535년 페르디난도 공작의 재세례파 추방령에 의해 공동체가 해산되고, 후터는 티롤(Tyrol)에서 붙잡혀 처형되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시 모라비아에 돌아오게 되고 그들의 노동에 대한 열성을 동정하는 지방 귀족들의 호의로 자급 자족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아남았다. 헝가리와 우크라이나로 피난한 후터 형제단은 1870년대 미국의 사우스다코타로 이주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반전론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다시 캐나다로 이주했다. 전쟁이 끝난 뒤 다수가 미국으로 돌아갔고 현재는 미국과 캐나다 서부 지역에 주로 남아 있으며, 그 수는 2만 명 정도이다.
후터 형제단의 특징은 예루살렘의 원시 교회를 본떠재산의 완전한 공동 소유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가진 것을 나누는 차원을 넘어서 재산의 공유뿐만 아니라 생산물도 공유하였다. 특히 매일의 생활, 예를 들어 저녁 식사를 같이 먹는 일 등도 함께하였으며 자녀의 교육도 공유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선택된 사람들로서 세상과의 완전한 분리를 추구하였다. 아직도 그들은60~150명 단위로 마을을 이루어 집단 농장(Bruderhof)을 경영하며, 바깥 사회와 절연한 채 정치에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14세까지, 또는 주나 지방의 법정최소 나이까지 마을 내에서 교육을 받는다.
멜키올파와 뮌스터 사건 : 네덜란드와 독일 북부 지방의 재세례파로 호프만(Melchior Hofmann)의 선교를 통해 만들어 졌다. 일명 멜키올파(Melchiorites)라고 부르기도 한다. 호프만은 처음에는 루터파의 선교사였으나 종말론과 성찬례에 대한 이해 차이로 1529년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서 재세례파의 선교사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종말론과 단성설, 즉 성자인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몸을 통과한 것뿐이라는 주장 등의 과장된 가르침으로 스트라스부르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독일 북부 지방에 있는 엠덴(Emden), 뮌스터(Münster) ,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선교를 하여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다. 하지만 1531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Amsterdam)의 박해로 스트라스부르에 다시 와서 선교하다가 투옥되었고, 10년의 감옥 생활 후에 사망하였다. 호프만은 네덜란드 재세례파의 대부로 불렸으며, 모든 폭력을 거부하고 성덕과 절제된 생활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멜키올파를 평화적인 재세례파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과장된 종말론과 심판에 대한 위협,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이 뮌스터 왕국 사건에 참가함으로 인해 뮌스터학살에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암스테르담의 박해가 일어나자 호프만은 성인 세례를 중단하고, 설교도 당분간 중단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보다 급진적인 세력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마티스(JanMachis)는 재세례를 거행하고 열두 명을 파견하여 설교와 재세례를 주도록 하였다. 이들 급진적인 사람들로 인해 뮌스터 왕국 사건이 발생하였다. 원래 뭔스터에서는 로트만(Bernard Rothmann)이 시의회와 함께 루터 개혁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1533년에 이들 지도자들이 멜키올파에 의해서 재세례를 받고 이들에 가담하여 선교를 하자 도시는 혼란에 빠졌다. 마티스가 재세례파의 지도자가 되어 반대자들을 모두 살해하고 도시를 장악하자, 제후는 도시를 포위하였다. 재세례과는 도시를 방어하였지만 1534년 마티스는 사망하고, 재봉사였던 레이덴의 얀 뵈켈손(Jan Bockelson Leiden)이 계승하여 군사적 대결에 일시 성공하였다. 그러자 1534년 5월, 뵈켈손은 자신을 뮌스터의 왕일 뿐 아니라 전세계의 왕이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 등 다른 지역의 재세례파들에게도 뮌스터에 와서 무장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하자고 요청하였다. 이 도시는 전쟁 목적의 생산이 우선시되었고, 일부다처제를 실시하였으며, 공산주의적 신정 국가를 세우려는 지도자의 폭정이 1년 4개월 동안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도시는 기아에 허덕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탈자가 나타났다. 결국 그들에 의해 성문이 열려 제후의 군대가 도시를 재점령하였다. 지도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고 처형되었다. 결국 하느님의 왕국을 세상에 건설하려던 희망은 무산되었고 뮌스터 왕국의 폭력과 소문은 재세례파의 전체적인 명성에 큰 피해를 입혔다.
기타 재세례파 : 뮌스터 사건은 폭력을 거부하는 형제단이라는 초기의 명성에 충실했던 재세례파에게도 영향이 컸다. 이때 비폭력을 지향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그 지도자는 가톨릭 교회의 사제였던 시몬스(Menno Simons)였다. 그가 제세례파의 창시자는 아니었지만, 이후에 생겨난 재세례파는 그의 이름을 따 '메노파' (Mennonites)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는 독일 북부 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필립스(Dirk Philips)와 손을 잡고 재세례파 신앙의 쇄신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의 주된 활동은 저술을 통해 이루어졌다. 1539년에 저술된 《그리스도 교리의 기초》라는 책을 통해 회개와 신앙 · 세례 · 만찬식 · 선교, 선교자의 가르침 등이 신앙의 지침으로 규정되었다. 그의 주된 거처는 홀스타인(Holstein)이었으나 광범위한 여행을 통하여 재세례파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재세례파들 사이의 강경과 온건, 두 주장 사이에서 메노는 중간 입장에 있으면서 평화와 일치를 강조했다. 박해를 피해 다녔던 메노는 1561년 65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네덜란드와 독일 북부의 재세례파를 뭉치게 하였고, 뮌스터 사건을 일으킨 재세례파와 그렇지 않은 재세례파의 차이를 분명히 하였다. 또한 신학적인 학설을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재세례파로서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도록 하였다. 따라서 '메노파' 라고 불리어진 사람들은 제국의 법으로 처형되는 폭력적인 재세례파와 구분되는 이름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이 명칭은 17세기에 '후터 형제단' 이외의 모든 재세례파를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1811년부터는 박해와 사회와 분리된 그들의 공동체 삶 때문에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는 지방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사람이 살지 않고 버려진 땅에 가서 개간하여 자신들만의 삶을 살았지만, 한편으로 그 지방의 발전에는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신학적 주장〕 신앙 생활 : 재세례파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예루살렘 초대 공동체를 재건하려는 것이며, 이 공동체에는 주님을 밀접히 따르고 새로운 삶을 살려는 선택된 이들만이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여자들은 신앙인으로 세례를 받고 선교해야 한다. 또 공동체든 개인이든 성서 말씀에 따른 삶을 살아야 하며, 신약성서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자신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고 믿는다. 성찬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은 거부하고, 단지 기념적인 성찬례는 인정한다. 또한 자신들이 참여하고 있는 성인(聖人)들의 공동체는 추방이라는 엄격한 방법으로 보존되어야 하며, 이 공동체가 바로 적법한 교회라고 하였다.
그들은 선교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활발한 사도적 활동을 하였다. 동시에 이 활동이곧 닥쳐올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표시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계약에 참여한 자만이 심판의 자비를 기대할 수 있다. 그들은 사유 재산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으며 자발적인 사랑으로 형제와 모든 것을 나누어야 한다고 하였다. 만일 공동체의 재산이 요구된다면 필요한 만큼만 허용되었고, 재산을 축적해서는 안 되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 자체로 정부의 권위가 필요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국가 권력에 대한 복종은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군 복무나 충성 서약, 극형 등을 거부하였으며 산상 수훈의 내용을 따랐다. 따라서 재세례파의 신앙을 갖게 되면 정부의 어떤 임무도 거부하였다. 만약 그 임무가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서 유익하고 평화롭게 수행되는 것일지라도 거부하였다. 따라서 재세례파는 박해의 고통을 잘 감수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이 고통의 감내가 선택된 자들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세례 : 재세례파의 신학적 주장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세례에 있다. 먼저 유아 세례의 유효성을 부정하였다. 그들은 유아 세례 때의 유아는 믿음을 가질 능력이 없고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는 상태이기에, 그들에 대한 세례는 필요없다고 여겼다. 원죄의 사함을 받아야 구원될 수 있고 '물로 씻음' 의 외적 표시로 유아도 원죄의 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성사적 세례를 부정함으로써 당시 사회의 근간을 부정하였다. 따라서 세례는 물로 씻는 예식이 아니라 내적 신앙으로 이루어지며 성인(成人)이 공동체 앞에서 신앙을 고백함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교회관 : 재세례파의 독특한 주장은 교회관에도 있다. 즉 신약의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소수의 공동체이다. 시민 사회에 의존한 대중의 교회와는 구분되며, 따라서 공적 교회나 국가의 권위도 부정하며 국가에 연관되는 것도 거부하였다. 그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아주 엄격한 규칙을 적용하였고, 공동체의 죄인은 추방하였다. 제도적인 교회를 부정하면서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믿는 전세계의 신자 공동체를 교회로 규정하였다. 또한 이 교회는 선택된 사람들의 교회라고 주장함으로써 규칙의 적용에 따라서 재세례파의 이름도 나누어졌다. 이런 교회관으로 인해 가톨릭의 사제나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의 역할을 거부하고, 하느님만이 믿는 자들에게 직접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루터의 '모든 신자의 보편 사제직' 개념과는 다른 것이었다. 믿는 이는 누구나 설교할 수 있고, 선교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 동시에 성서에 대한 시각도 어떤 중간 해석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배우지 못한 사람도 박사들의 도움 없이 성서를 통해서 직접 진리를 가질 수 있다고 하였으며, 성서는 신약성서를 중시하였다. 하지만 성서의 말씀과 성령의 작용을 보는 관점은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었다. 즉 신비주의자들은 성서의 말씀보다 개인에게 영향을 주는 성령의 작용을 더 강조하였으며, '스위스 형제단' 과 같은 경우는 성서 말씀의 문자 자체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간주하였다.
국가 : 정치적 권위는 공동체에 필요하지 않으나 악을 징계하고 선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정치적인 힘은 그 자체가 해야할 일을 하는 것이나 재세례파의 신앙에 반대되지 않는 부분, 즉 세금을 내는 등에는 협조하지만 그 외 정치적인 임무 수행이나 전쟁 참여, 군대의 징집은 거부하며 시민 법정에도 출두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동시에 재세례파의 분파에 따라 다르지만 종말론적인 주장도 적지 않아, 일반 사회와는 동떨어진 삶을 추구했기 때문에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현 황〕 재세례파는 현재까지 메노파와 후터파 등이 남아 있으며, 퀘이커교(Quakers)도 재세례파의 가르침을 많이 따른 분파에 속한다. 메노파는 독일과 동부 유럽, 러시아 등에 산재해 있다가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남북 아메리카로 이주해 교회를 형성하였다. 특히 미국에는 메노파의 대학들이 있으며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고, 연합회를 형성하여 재세례파의 다른 교회(Old order Amish, Hutterian Brethren, Quaker)들도 연합회 안에 포함시키고 있다. (→ 종교 개혁 ; 천년 왕국설 ; 츠빙글리 ; 퀘이커교)
※ 참고문헌  M. Liehard, Les anabaptistes, Histoire du Christianisme, vol. 8, ed., Desclée, 1992/ E. Iserloh · H. Jeolin, Riforma e controriforma,Storia della Chiesa, vol. 6, ed., Jaca book, 1975/ K. Bihlmeyer· H.Tuechle, Storia della Chiesa, vol. 3, ed., Morcelliana, 1979/ U. Gastaldi,Storia dell'Anabatismo dalle origine a Minster, Torino, 1965/ N. Blough,Christologie anabaptist, Genève, 1984. 〔具本植〕